함석헌은 하얀 도포자락과 흰수염으로 한국 현대사에 남아 있다. 평북 사투리의 강강한 목소리로 남아 있다. 흑백 사진 속 그는 서재에 앉아 있거나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시위 대열 맨 앞에 서 있다. 식민지 체제와 독재 체제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외친 기독교 사회운동가. <성서조선>, <사상계>, <씨알의 소리> 등에 수많은 글을 발표한 문필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생명의 깊이를 뚫어 보았던 선지자. 하지만 <성서조선>을 창간할 무렵 함석헌은 스물일곱 살 청년이었다. <성서조선> 창간호에 수록된 그의 글에서 청년 함석헌의 고뇌를 읽어낼 수 있다.
청년 시절 함석헌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던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구글에서 청년 함석헌의 사진을 찾아본다. 짙은 눈썹에 눈매가 시원하다. 삿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그러면서도 어딘가 결기가 느껴지는 얼굴이다. 함석헌은 1919년 평양고보 시절 만세운동에 가담한 것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2년을 방황하다 오산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간다. 당시 오산의 설립자였던 남강 이승훈은 옥고를 치르고 있었고 다석 류영모가 교장으로 와 있었다. 1923년 스물세 살의 나이에 도쿄로 유학, 1928년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이 시기 같은 학교에 다니던 김교신의 권유로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의를 들으면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성서조선연구회를 조직하게 된다. 당시 일본과 조선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한 시대를 휩쓸고 있었고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청년 함석헌의 내면에도 갈등을 일으켰던 것 같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글이 <성서조선> 창간호에 실린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글이다.
이 글의 대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생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면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데 있다. 죄에 빠진 인생들이 생명을 구하지만 그것은 참생명이 아니라 맹목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참생명은 어디 있는가? 이 글에서 함석헌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이것이 '명백한 진리', '감사한 복음'이라고 말한다.
글은 여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 대목에서 청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가르침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사람이 조선에 몇이나 있는가? 이 물음에서 성서는 이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한 종교의 가르침을 넘어 지금 여기 조선의 절실한 문제가 된다.
세계의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적어도 조선에 있어서 능히 이 말을 가지고 가장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가장 진정에의 권면으로 줄 사람이 누군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로 양식을 삼아가며 북만北滿으로 들어가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이 말로써 전송을 할 이가 몇인가? 벗은 허리를 꼬부리고 모욕을 옷 삼아가며 현해탄을 건너가는 자매를 보고 이 말로써 진정의 위로를 드릴 이가 과연 몇인가?
'먼저 그 의를 구하라', <성서조선> 1927. 7, 54-55.
이 물음은 청년 함석헌의 신앙이 그 당시 조선의 현실에 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20년대 말 조선의 현실문제 앞에서 성서의 가르침은 복음일 수 있었을까? 지금 굶어죽어 가는 조선인들에게 있어, 부모가 살던 땅에서 쫓겨나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먼저 의를 구하라는 말을 진리로 믿고 전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인식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소설을 보더라도 조선인 대다수가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었는데, 함석헌과 동년배였던 소설가 최서해가 그려놓은 세계상이 바로 그것이다. 최서해는 자신의 간도 빈궁 경험을 바탕으로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그려 조선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이런 현실을 설명해주는 동시에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념이 되고 있었다. 최서해의 <탈출기>는 간도로 이주한 한 가족이 마주한 절대적 빈곤을 매우 핍진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화자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살 길을 찾지 못하자 노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혁명에 투신하게 된다. 최서해 소설의 주인공들은 절망적인 현실을 벗어날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세상을 저주하면서 살인, 방화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작품이 마무리된다. 이런 조선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청년 함석헌에게 이 물음은 실존적 고민이 되고 있었다.
만일 내가 내 판단대로 내 생각대로 내 동포애대로 했더라면 나의 현대인적 판단적 관찰로써 세운 인생관 역사관으로 했더라면 벌써 복음을 버리고 합리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위의 글, 55-56.
그러나 청년 함석헌은 합리주의자의 길로, 사회주의자의 길로 갈 수 없었다. 귀에 들려오는 현실문제의 소리가 매우 컸고 고통하는 동포들을 향한 사랑이 뜨거웠지만 그 길로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 부드럽고 약하지만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영생을 위하여'라는 소리였다. 이 글은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시대의 중심으로 뛰어들 것인가, '영생을 위하여' '그 의를' 구할 것인가라는 실존적 물음 앞에서 후자를 따르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먼저 그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말씀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근역槿域의 자녀들아. 오늘날 우리는 불행에 우는 자다. 환난의 물결은 우리 머리 위를 넘고 비탄의 부르짖음은 우리 입에 가득하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저주하고 싶고 온갖 것을 파괴하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그로 인하여 살 길은 아니 온다. 구원은 오직 의의 신으로부터 온다.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장막이 우리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니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고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이 계셔 우리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우리 눈에서 다 씻으시며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계 21:3-4)
흰옷 입은 근역의 자녀들아. 그 의를 구하여라. 네 입은 옷은 정의의 흰빛이 아니냐. 네 맘도 그같이 희기를!
위의 글, 59.
글이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청년 함석헌의 고뇌가 마무리되었을 리는 없다. 그가 마주한 물음이 실존적 물음이었기에 이런 물음은 대개 삶 전체를 통해 온몸으로 답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영생을 위하여' 살고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따랐지만 그것이 현실문제를 신앙으로 초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이 그의 삶 전체를 방향지웠을 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함석헌의 길은 그의 스승 류영모의 길과 달랐다. 다석 류영모가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도 고요와 은둔의 영성을 놓치지 않은 것과는 달리 함석헌은 시대의 격랑에 몸을 던졌고 그로 인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성서조선> 창간호는 한국 현대사의 한가운데를 살아간 한 선지자의 청년시절의 고뇌를, 그 꿈틀대며 막 솟아나던 용기와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