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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거전쟁과 병자호란의 예를 비교하여 조선은 고려때보다 군사력이 후퇴하고 그 이유를 조선정부가 고려시절보다 국가예산이 궁핍해서 군사력유지능력이 떨어졌다라고 평가하면서 조선정부와 성리학적 사고에 빠진 위정자들이 부국강병을 소홀히 한 결과로 조선은 고려때보다 모든 면에서 퇴보했다라는 식의 부정적 평가를 합니다.
하지만 고려시대라고 해서 군사력과 국력전반이 막강했다라는 시각이 과연 합당할지가 의문입니다.
고거전쟁의 경우에 조선시대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당시의 고려 군사력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몇가지 부분으로 의문점을 제기한다면
1. 진짜 고려군 동원 병력수가 30만이 타당할까? 그리고 타당하다고 할 경우 여타 후방지역에서도 별도의 군사력이 풍족했는가? 아니면 억지로 긁어모은 상황일까?
우선 고려군 병력 30만 동원에 대해서 이말이 과연 사실인지부터 매우 의심스럽게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고려인구가 얼마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장담할수 없스나 조선시대보다는 적을것이 분명하고 조선전기(임진왜란전)에 이미 인구가 천만명을 넘었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시 고려인구는 대략 500~600만정도로 보는 것이 무난할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정도 인구가 30만 병력동원이 가능할지? 동원병력이 이러하고 여타 병력수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더 많아야 하는데 고려의 총 병력수는 얼마일지? 이에따라 전방에 동원된 30만 말고도 상대적으로 후방지역(평양이남)과 개성주변을 방어하는 군사력은 얼마나 존재했슬까? 아마도 전방에 동원된 30만 병력말고도 다른곳에 병력이 주둔한다면 여진족을 경계하면 함경도지역이 될것이 확실합니다. 문제는 거란과 전쟁을 치루는 전방지역과 여진족을 경계하는 함경도지역을 제외한 여타 남쪽 후방지역에는 어느정도 군사력이 존재했슬지? 그냥 인정자원 긁어모아 30만을 만들다 보니 여타 남쪽 후방지역의 군사력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했는지?
이점에 대해서도 30만 동원이 타당하다면 현실적으로 고려인구규모를 감안할적에 그럴가능성이 크다라고 평가할수밖에 없습니다.
2. 병력수가 30만이 타당할 경우 강조의 대패이후 잔여병력의 행보와 관련해서 고려군측의 대응입니다.
뭐 어느기록에 강조의 대패시 3만명이 전사했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전히 나머지 90퍼센트의 병력이 온존해야 하고 이들이 통주성등 강동6주 주요성으로 다시 집결해서 재정비상태로 있었다면 거란군이 남하자체를 쉽게하기가 어려워야 정상입니다.
비록 무로대에서 거란군의 절반(확실치는 않지만)을 후미의 안전을 위해서 남겨놓았다라고 하지만 이 병력들도 나머지 90퍼센트의 고려군에 의해서 위협을 당하기 쉽상인데 어떻게 거란 성종이 쉽사리 개경 남하를 생각할수 있슬까요?
거기다가 고려의 군사력이 풍부해서 전방 동원30만말고도 별도로 후방지역에도 적잖은 군사력이 존재했다면 개경남하는 더더욱 어려웠겠죠.
그리고 나머지 90퍼센트의 잔여 고려병력이 재정비가 되었다면 여기서도 의문이 가는 사항으로 그 중 일부는 최소 5만내지 많으면 10만정도까지는 남하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야 하고 또 무로대에 주둔한 후미를 지키는 목적의 거란군과도 상당히 대규모의 전투가 많이 벌어졌서야 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거란황제가 안심하고 개경으로 들어올 상황이 아니겠죠.
아무튼 고려를 상당한 군사강국으로 평가해서 전방동원30만외에도 최소10~20만이상의 대병력이 개경주위를 비롯한 후방에 존재했다라고 한다면 거란황제가 함부로 남하하는 결정을 하지 못했슬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직 많은 고려병력이 전방에서 거란군의 후미를 압박할정도의 수준이었다면 양규장군의 거란퇴각시 요격상황도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기록상으로는 양규 김숙흥장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거란본대를 요격한것으로 나오는데 만일 여전히 고려의 대군이 전방에서 거란군을 요격할 상황이라면 양규 김숙흥장군이 고작 소수병력 수백 ~천수백 이정도로 후미공격을 했슬까요?
최소한 양규장군은 수만명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거란군 후미를 공격했서야 합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도저히 그런 사실이 찾아보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30만명 전방동원병력수는 말이 안되거나 설령 맞다고 해도 후방에서 탈탈 긁어모은 상당수의 오합지졸병사들이 매우 많아서 강조의 대패시 엄청난 비율로 고려군이 궤멸 와해되고 많아야 수만이하수준에서 강동6주등지로 재집결 정비되지만 그나마도 무로대에 후미를 지키는 거란군과의 교전에서 상당수병력이 소진되어서 강조장군의 거란군 요격시에 많은 병력동원은 불가능했다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것입니다. 그리하여 제 생각에는 강조가 30만을 이끌고 갔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많아야 대략 10만명정도 이하로 추측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3. 현종의 피난과정과 관련한 지방호족들의 행보에 대한 비판문제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시의 지방호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그 무력수준도 막강했다라고 하면서 조선초기 사병혁파를 군사력 저하로 직결시켜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한번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막강한 지방호족들의 사병들이 건재했다면 왜 조선시대 임진왜란당시의 지역의병활동이 없었는가입니다.
만일 지방호족들이 사병을 보유한 상태에서 조선시대같은 입장이었다면 호족들은 사병을 가지고 의병활동을 했슬 것입니다.
그리고 피난온 왕을 보호하면서 거란군과 교전을 벌였슬 것입니다.
하지만 호족들은 되려 현종을 겁박하면서 왕을 잡아다가 거란군에 넘길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었죠. 물론 확실히 그랬다라기 보다는 그럴 소지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추론을 할수 있는데 강력한 호족들의 사병들 병력을 전반동원30만에 포함시켜서 전시에 호족들 보유사병을 국가에서 징발했다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 사병을 징발한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피난온 왕을 잡아다가 적군에 바치려고 할 생각을 하는 호족들도 존재했다라고 전개를 할수도 있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호족들의 사병을 징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사병이라는 존재가 특별히 국가에다가 호족자신들의 병력보유상황과 사병들 인적상황을 공개등록해 놓고 사병관리를 하는 것이 아닌이상 국가에서는 사병징발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셜령 사병들 전투력이 강하고 국가에서 파악을 해서 징발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들중 제대로 막강한 전력을 발휘하여 임시적으로나마 하급 지휘관(초급장교/부사관)급으로 활용할 병력이 얼마나 될지고 따저보아야 합니다.
그저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일반 농민들에게 무기를 들게 하고 적당한 훈련이나 시키는 정도 수준의 사병이라면 그다지 높은 전투력을 기대할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호족자신의 호위목적으로 집중된 군사훈련을 받는 자원이 아니고서는. 이성계의 가별초 집단처럼.
그 다음에 진짜 간과하면 안되는 당시 호족들의 행보에 대한 윤리적 평가입니다.
병자호란당시 정부위정자도 무능했지만 지방의 향반유림들도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찌들고 문약한 작자들로 폄하를 하는데 그렇다면 고거전쟁 당시의 지방 호족들은 피난온 왕을 박대하고 심지어 잡아다가 적국에 바치는 행동을 생각할 정도로 이적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도덕적 비판이 없는지?
도덕적 측면이라면 만일 보유한 사병이 있다면 당연히 의병활동을 하면서 피난온 왕을 보호하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당시 호족들은 그런 성향을 보이지 않았죠. 기록이 부족해서가 문제인데 물론 일부 소수 그런 호족들도 존재가능성이 있지만.
중앙관료이던 지방양반호족들이던 간에 고거전쟁시에도 상당수 관료가 도망가고 호족들이 피난온 왕을 박대하고 심지어 잡아다 적에게 바칠생각이나 하는등 도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병자호란당시 양반관료들과 비교해볼적에 하나도 나은점이 없습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왜 병자호란당시의 조선시대 관료양반만을 무능했다라는 비판에만 집중하는지?
아무튼 고거전쟁관련에서 향후 이런방향으로 연구와 시각이 필요하다라고 봅니다.
단순히 비교해서 고거전쟁당시 고려정부가 병자호란당시 조선정부보다 유능하고 실력이 높았다라는 식으로 평가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첫댓글 1. 고려가 30만명의 병력을 보유했다는 사료 기록의 신비성이 의심된다는건 당시 고려의 인구 통계 자료같은 충분한 객관적 사료 검증으로 결론내야 될 문제라 고려 인구에 대한 주관적인 선입견에 의존하는 추론으로 재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려 인구에 대한 확실한 통계 자료가 없어가지고 고려 인구에 대한 추측도 자의성에 가깝지만 그리고 고려는 국제 교역이 활발한 국가라 외국인들이 이주해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기 떄문에 고려의 순수 인구만으로 30만에 이르는 병력 구성이 어렵다면 체류 외국인들을 동원해서 30만의 구성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거란군이 개경 점령하고서도 고려측 협상대표 하공진과의 회담에서 현종이 피란 간 지역이 몇 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하공진의 발언에 거란측이 주눅 들어서 남하를 포기하고 철수까지 고려한 정황을 보면 당시 거란도 개경 이남의 병력수에 대한 과대적 선입견으로 생각하여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지요 몇 만리나 떨어져 있다는 하공진의 말을 거란측의 객관적인 입장에선 하공진이 말한 남쪽 몇 만리는 수많은 거대 병력을 의미할수한것으로 보여질수밖에 없었기에
그래서 거란측이 퇴각할수밖에 없던 것이지요
2. 고려군은 보병 중심의 군대로 수성전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성을 우회하여 대로로 통해 남하하는 거란군의 개경 진격을
막기가 어려운 상황이지요 거란군의 개경 진격을 막을려면 고려군도 거란군에 필적하는 기병 전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나 당시 고려군은 거란군에 비해 기병 전력이 열세라 거란군의 신속한 우회 진격을 막을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거란군은 군수품을 수송하는 치중대도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하여 전쟁 치르는 상황이라 현지 조달중심의
군대는 장기전을 치르기가 불가능할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철수하라는 하공진의 요구에 순순히 응한게 아닙니까?
현종이 몇 만리 떨어진 곳에 피란 갔다는 하공진의 말에 단기전을 치루어야 하는 거란 입장에서는
재앙수준일수밖에 없지요 거란이 생각할때 하공진이 말한 남쪽 몇 만리는 고려의 수많은
남쪽 병력을 의미하는 거라 장기전의 가져올수 있는 위험 요소들일수밖에 없고 게다가 북쪽의 잔존 병력까지 종합하면 남북 양쪽에서 동시 상대해야 하기 떄문에 개경의 거란군이 그 상황에 놓이면 고립무원으로 협공당하는 치명적인 상황에 놓일수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