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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살전 5:16-18)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리 길은 알아도, 사람 마음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자주 만나,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지라,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알 것이라고 여겼는데, 전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예 상대방의 마음을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이해할 때도 있습니다. 오해로 인하여,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여,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고생하거나,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범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특별히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복을 내려주시기를 소망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행복하게 삽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기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마지 못해, 죽지 못해 살아갑니다. 빨리 죽어야지.”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기뻐할 일들보다는 감당하기 힘든 벅찬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생활 형편과 아픔과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항상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사는 사람,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기쁨으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충성하고 봉사하는 그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가 그 기쁨을 계속하여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똑같은 일을 해도,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그 일을 한다면, 더욱더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쁘고 항상 웃는 얼굴로 산다면, 천국과 같은 밝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웃음은 보약보다 좋다. 웃음은 면역기능을 높여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웃으면, 웃지 않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유없이 웃어라. 활짝 웃어라. 소리내서 웃어라. 웃을 이유를 만들어서 웃으라.”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쁘게, 웃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웃음이 많은 세상입니까? 아니면, 눈물이 많은 세상입니까?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은 세상입니다. 밝게 웃을 일보다는 혼자 눈물 흘릴 때가 많은 그런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개그맨들의 연기를 보면서라도, 잠시 웃어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지만, 그들의 억지스러운 말과 행동에 웃음조차도 나오지 않고,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찾아오는 허전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갈 때에,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간절한데, 우리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우리 삶에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부감, 분노, 원한, 스트레스, 비교 의식, 열등의식, 좌절, 낙담, 외로움”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에 기쁨을 빼앗기지 말고, 항상 웃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는 웃음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종교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 심각한 마음으로 도를 명상하고 앉아 있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기쁨이나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좌부자 틀고 명상한다고, 거기에 무슨 기쁨이나 웃음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 종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는 슬픔이나 눈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웃음의 종교입니다.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그가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님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의 삶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요, 주님께서 그의 오른쪽에 계시니, 그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기뻐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어디에서든지, 항상 기뻐할 때, 우리의 삶은 활기가 넘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주님 안에 있을 때 찾아오는 축복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쉽게 변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기쁨을 삼는 사람들은 있을 때는 기뻐하고, 없을 때는 슬퍼합니다. 누릴 때는 기뻐하고, 떨어지면 슬퍼합니다. 형통하면 기뻐하고, 잘 안되면 슬퍼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요, 안개와 바람 같은 것도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에, “평안”을 “기쁨”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기쁨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실 때, 그의 삶 속에 웃음을 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는 심령 속 깊은 곳에, 기쁨을 누리며, 얼굴에는 웃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 17: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번영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17절)라고 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사람의 생각대로 행하였습니다.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바라고 바랬던 아들을 낳았지만, 그 집에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멀리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을 따라,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삭”이라는 말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리의 생각대로 행하게 될 때, 잘 되는 것처럼 쉽게, 빨리,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거기에서는 참된 기쁨과 웃음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잠시 잠간의 기쁨이 있겠지만, 그 기쁨은 안개처럼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 참된 기쁨이 있고, 영원히 웃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죄는 무거운 짐과도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죄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 베드로는 술 취했다고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라고 선포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성경 개역개정판에는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그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데, 이전에 사용하던 개역판에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고 되어 있어, “죄 사함을 받으면, 유쾌하게 되는구나. 죄 사함을 받으면, 즐겁고 상쾌하게 되는구나. 죄사함을 받으면, 기쁘구나.”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아, 무거운 짐을 내려 놓게 되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아,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주님 안에 있음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답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주님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끼뻐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0, 16)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알기에, 주님 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셋째, 순종함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었을 때, 그들은 행복했습니까? 그들에게 기쁨과 웃음 대신, 두려움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왔을 때, 그들은 숨어 버렸습니다.
잠언 28:1절을 보면,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라고 했습니다.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치는 악인의 삶 속에 어찌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참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기쁨을 원하십니까? 행복한 삶을 원하십니까? 이미, 죄 사함의 기쁨을 받았으니, 주님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그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 33:29)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렸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그때까지 누려왔던 모든 기쁨을 놓치고 말았던 것처럼, 불순종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과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주님 안에서, 주님께 순종함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감사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그는 성도들에게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죄 사함의 기쁨이 있고, 그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고,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뜨거웠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주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주님을 생각만 해도, 그냥 즐겁고 기쁨이 넘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힘든 세상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얼굴을 펴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죄사함의 기쁨을 안고, 주님 안에서, 주님께 순종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우리를 품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힘든 세상 살아갈 때에, 오직 주님 곁에서, 주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더욱더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