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6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0주)
동이 틀 때까지
창32:22-31; 롬9:1-5; 마14:13-21
야곱은 집을 떠나온 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도망치듯 홀로 집을 나왔지만, 이제는 대가족과 엄청난 가축 떼를 이끌고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가는 길에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알아보고는 “이곳은 하나님의 진이구나!” 하면서, 그곳을 마하나임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야곱은 심부름꾼을 형 에서에게 먼저 보내어 자신이 돌아오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돌아온 심부름꾼은 그에게 형이 부하 400명과 함께 이리로 오고 있다고 전합니다.
야곱은 너무나 두렵고 걱정이 되어서 가족과 가축들을 두 패로 나누었습니다. 형이 와서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 패라도 살려야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형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오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마음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두려움이 터져 나왔습니다. 야곱의 두려움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비디오를 만들어 내며 그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그의 가족이 모두 처참히 몰살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다급해진 야곱은 하나님께 형의 손에서 건져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그는 형에게 줄 선물로 가축들을 골라내어 여러 떼로 나누었습니다. 여러 차례 선물을 나누어서 먼저 주면, 형의 분노도 서서히 누그러질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선물을 먼저 보내놓고, 자신과 가족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한밤중에 야곱은 갑자기 일어나서 식구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혼란하고 불안한 그의 마음 상태를 짐작해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도, 오늘 마하나임에서 만났던 하나님의 천사들도, 그의 불안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서 불안이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을 때, 야곱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위기 속에서 그는 직관적으로 바로 지금이 홀로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불안이 공포로 변해 자신을 잠식해 들어올 때, 거기에 함몰되지 않도록 야곱은 깨어있었습니다.
분리감은 우리가 외로울 뿐 아니라, 수치심 가득한 어리석은 존재이며, 겁 많고 사랑받을 수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믿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하나님과 떨어져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생각이 만들어내는 영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침묵의 영지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실, 침묵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침묵은 모든 정신 과정의 바탕이며, 심지어 혼란스러운 정신적 강박상태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침묵은 우리 온 존재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야곱은 불안하고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분심의 수다스런 말이 아닌, 침묵으로 풀어나가려고 홀로 어둠속에 머물렀습니다. 보이지 않던 마음속의 불안은 이윽고 형태를 지닌 모습으로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시작합니다. 야곱이 맞서 겨루고 있는 이는 형 에서에 대한 열등감, 질투심, 시기심이 가득했던 그의 과거였고, 두려움과 불안이 드리워진 현재의 그림자였으며, 원하는 대로 상황을 조종하고 통제하고 싶은 욕구였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자신의 그림자 속에 꽁꽁 숨겨놓았던 것들이 실체를 드러내자 야곱은 그 모든 것들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야곱은 치열하게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도덕적으로 온전하지 못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도 있었습니다. 그의 약점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야곱의 처절하고 치열한 씨름은 동이 틀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고 나옵니다. 잘 걸을 수도 없고, 서있기도 힘든 야곱은 날이 새어 떠나려는 그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매달립니다. 형의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모두 가로챘던 야곱은 여전히 축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그는 묻습니다. 야곱이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이름처럼 남을 속이고, 발꿈치를 잡던 자신의 추한 과거를 야곱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사람은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은 원래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다스리시길’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등감과 시기심 밑에는 자기혐오가 깔려 있습니다. 야곱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기혐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누려야 할 진정한 축복이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밖으로 향해있을 때에는 자기 안에 없는 것들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온갖 좋고 화려한 것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기를 하찮게 여깁니다. 침묵은 밖으로 향해있는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들여 내면을 주시하게 합니다. 침묵 속에서는 내면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 드러납니다. 침묵 속에서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쳐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상처 한가운데서 침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수용의 자리, 하나님과의 고요한 사랑의 사귐이 있는 자리, 모든 이를 향한 연민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방식입니다.
야곱은 동이 틀 때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이루고 지키기 위해 씨름을 했습니다. 끝까지 버티던 야곱은 결국 엉덩이뼈를 다쳤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토대가 무너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온몸에 있는 대로 들어가 있던 힘이 어쩔 수 없이 풀려버렸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야곱처럼 우리도 경직되어서 온몸에 있는 대로 힘을 주게 됩니다. 고통과 상처를 주는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몸에 들어간 힘을 빼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힘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힘을 빼야 비로소 진정한 치유와 변형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얻게 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살아있다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습니다. 엉덩이뼈가 어긋난 야곱은 다리를 절었습니다. 결핍을 채우려고 언제나 밖을 향해있었던 야곱의 시선은 이제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자신에게로 오롯이 향해 있습니다. 힘이 빠져 절뚝거리는 그의 모습이 아침햇살을 통해 찬란히 드러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야곱은 너무나 볼품없지만, 아침햇살을 머금은 그의 속사람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브니엘에서 있었던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다음날 용기 내어 형에게 참회하는 이스라엘로 그를 성장시켰습니다. 야곱은 고개를 들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고, 자신이 가로챈 복을 형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형에게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하다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거래하던 이전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는 여전히 두려움과 의심이 남아있었습니다. 하나님 경험을 했지만, 야곱은 여전히 자신의 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을 호위해주려는 형의 호의를 거절하고, 결국 형이 사는 세일 땅이 아닌 세겜에 정착했습니다. 야곱의 이런 인간적인 면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동이 트는 때보다는 어둔 밤일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너무나 평범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사실은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자기혐오가 일으키는 이런 저런 감정과 생각에 우리는 넘어지고 아파합니다. 무의식 속에서 이런 일들이 대부분 벌어지기에 우리는 왜 그런지도 모르고 상처받고 찜찜한 채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침묵은 우리가 산 위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아니라, 산 자체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자기의 삶을 통제할 수 있을 때만이 행복하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의 바탕이시기에 있는 그대로 우리가 귀하다는 것을 침묵은 고요히 알려줍니다. 이전에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침묵 속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이 됩니다. 침묵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빛나고 있는 광활함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침묵은 힘이자, 생명이고, 해방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동이 트기는 할까 생각하면서 어둠 속에 대부분 머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제법 그럴 듯하고, 멋있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겸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참된 지식과 감정입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이 겸손을 배움으로 자기혐오를 마주하게 됩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불완전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받아들이면서 삶의 깊이와 높이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습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침묵의 영지로 나아가길 갈망합니다. 우리의 침묵이 당신의 침묵에 가닿길 갈망합니다. 그곳에서 겸손히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정 알아가게 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