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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2;1-7, 21-31.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2024. 6. 2.
다윗은 삼하 22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은 삶을 통해서 드러난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이 체험한 내용을 22장 마지막 부분에서 2가지로 고백을 하는데,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자신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었다는 내용입니다.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결국에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 때문에 지금의 시대가 존재하고 그 위치와 자리를 은혜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모든 것이 은혜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고, 다스림과 은혜를 체험하면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3인칭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호칭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3절 나의 반석과 나의 요새와 나를 건지시는 분, 내가 피할 바위와 나의 방패와 나의 보호자인 나의 구원의 뿔과 나의 산성과 나의 피난처와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때를 따라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가오셨는지? 나에게 어떤 분이셨는가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22;30절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직접 호칭을 사용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까? 얼마나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며 살았습니까? 얼마나 인내를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까? 생애 가운데 체험했던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은혜를 통하여 얻은 것은 자신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것이 다윗에게 가장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의지 했습니다. 어려울 때에 안전한 보호자가 되어주시고, 어두울 때에 빛이 되어주시고, 약할 때에 힘이 되어주시고, 미래가 불확실할 때에 소망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는 2024년을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까?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다윗처럼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에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와 기대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이런 고백과 간증이 됩니까요?
1. 나의 하나님은 삶의 굴곡을 통해서 발견 되고 체험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평안할 때에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굴곡을 통해서 발견되게 체험이 됩니다. 가장 위험할 때와 가장 곤경에 처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감하면 삶의 굴곡에서 따뜻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편하게 살았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삶이었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다윗의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문제 가운데 해결을 받고 허물 가운데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일상적이고 잡다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일시적인 것들을 붙들고 않았습니다. 왜요? 이런 것들로 시야를 가리면 나의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의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두움의 굴곡이십니까? 가시는 길이 평탄치 않습니까?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by my God)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어두움의 굴곡을 뛰어 넘을 수 있고 가야할 길이 평탄치 않는 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나에게 의미가 있는 하나님, 그런 나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케 되시는 복된 2024년의 중반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동행이 되었을 때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간증이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어우러지고 함께 하려고 합니다. 사람만 그렇습니까?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락을 이루며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동행하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짝이라고 합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에게는 짝이라는 표현이 익숙합니다. 짝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짝과 함께 살아갑니다. 여러분, 돌싱이라는 표현이 무엇입니까요? 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 아닙니까? 너도나도 짝을 찾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찾은 짝과 함께 있으면 싸우고, 짝이 없으면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좋을 땐 짝이지만 싫으면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결혼을 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면 49가지가 나쁘데요. 그런데 좋은 것이 51가지가 되기 때문에 같이 산데요. 짝이 있으면 한 가지라도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요? 무엇보다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짝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생리학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입니다. 생활 패턴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데 왜 굳이 한 공간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까요? 생리학적으로 짝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데요.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이 아플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짝이 있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일과 관계도 이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평안하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생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짝 이상으로 동행을 하시고 짝이 요구하는 상대성이 아니라 짝인 나에게 무조건의 은혜로 축복을 합니다. 10여 년 전에 오스트리아 콘라트 로렌쯔라는 연구소의 클라우디아 와처 박사가 한 가지 사실을 발표 했습니다. 25마리의 회색 기러기로 심장박동을 조사했는데 수컷 중에 짝 있는 기러기와 혼자 있는 기러기를 조사 했습니다. 그런데 짝 있는 기러기의 혈압이 10퍼센트 낮았다고 합니다. 암컷 회색 기러기도 짝이 멀리 있을 때는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졌으나 짝이 근처로 가까이 오면 혈압이 안정을 찾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짝이 죽으면 심장 박동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무엇을 말씀하나요? 동행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관계가 수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나는 몇 살까지 살까? 미국의 스텐포드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루이스 터먼 박사가 어린이 1500명을 80년간 조사 했는데 장수하는 최고의 비결은 식습관과 운동량이 아니라, 짝이 있는 인간관계라고 했습니다. 성격과 같은 사회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스킨쉽이 무엇입니까? 임재와 함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짝을 이루며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나의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삶을 살아도 의미 있는 삶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불완전한 환경을 뛰어 넘고 성벽을 뛰어 넘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주어져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갖추어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하나님과 동행이 되면, 믿음과 신뢰로 기쁨과 감사할 수 있다면 이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주신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원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미국으로 여행을 가려할 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비행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정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면 오래간다고 합니다. 여행길이 아무리 멀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래 걸리는 일도 즐겁게 하면 지루하지 않고, 온갖 기대와 꿈이 가득하게 됩니다. 여러분, 성공이 무엇일까요? 매일의 관계와 매일의 삶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면 이것이 성공입니다. 누가 나와 함께 갈까? 누가 나와 함께 따뜻한 동행을 할까?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분인가? 인생 나그네 길을 누구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면서 누구와 동행을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동행하는 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습니까? 매일의 삶속에 따뜻하게 동행 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나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대하고, 기쁨을 기대하면서 서로 서로 섬기고 나누어주기로 결정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나의하나님과 한평생 인생의 여행길을 동행하는 것이 성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습니까? 동행이 필요하십니까? 비록 지금은 고단한 삶과 생활이라 할지라도, 나의 삶 속에서 내가 매일 만나고 동행하는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날마다 찬양하는 성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사무엘하 22장의 내용은 1-20절 까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다윗을 도와 주셨는지를 고백합니다. 21-31절까지는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확실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확증편향(confimation bias)이라 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나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정보나 근거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 것만 수용 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고백하는 내용이 확증편향입니까? 이스라엘이라는 구성원들끼리만 소통하려고하는 이념적 양극화 현상입니까? 이스라엘 전체의 사회 구성원을 파편화시키는 역작용입니까? 확증편향과 양극화 현상과 구성원을 파편화 시키는 역작용은 생각하고 사고하게 하는 독서가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편견과 아집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쪼개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프는 서적을 도끼라 하였고, 니체는 망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책은 성경말씀입니다. 사람의 관점을 넘어 사람이 인지할 수없는 하나님의 관점까지 보여 주면서, 고착된 우리의 사고를 깨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확증편향 된 사고를 깨 줍니까?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by my God)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그러니까? 참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회복입니다. 그러면 확증 편향이 아닌 다윗의 성벽을 뛰어 넘는 믿음은 무엇인가요?
3-1. 하나님의 법과 도리를 소중히 여기는 믿음이었습니다.(22-25절). 여호와께서는 내 의와 내 깨끗한 대로 갚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의와 다윗의 깨끗한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정하시고 명령하신 규례를 버리지 않고 순종하려 했습니다. 유혹이 다가오고 위협이 있을 때에 그 자리를 피하고 도망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의는 전혀 깨끗하고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롬3;10절. 하나님 앞에서 전혀 깨끗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에게도 허물이 있고 불의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법도를 항상 앞에 두고 규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규례와 법도와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순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책망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다시는 동일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를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피하여 도망했습니다. 여러분, 이기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 자리를 피하고 그 환경을 뿌리치고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태도와 자세 때문에 큰 복을 받았습니다. 40년을 통치했습니다. 내어 쫓긴 3번의 광야 생활에서 되돌아 왔습니다. 수많은 시와 찬양을 남겼습니다. 결국에는 사랑하는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으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3-2. 자비와 사랑의 믿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성벽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판단하시되 잘못된 것은 바르게 하시고 잘한 일은 보상과 상급으로 갚으십니다. 26-27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상과 보상해 주시는 사람은, 날카롭고 세밀하게 판단하여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마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다윗은 히브리어로 타밍 이었습니다. 마음이 고결하고 순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악의가 없고, 불순한 의도가 없고 미움도 오해와 욕심도 없이 순수했습니다. 거룩함을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경건함을 지키고 겸손하려는 것 때문에 오히려 억압받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곤고함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항상 자비로운 사랑과 순수한 인격과 행함과 거룩함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왜요? 믿음 때문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자비와 사랑의 믿음이었습니다.
3-3. 절대 의지하는 믿음입니다(29-31절). 다윗은 하나님을 절대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어두움을 밝히시는 다윗의 등불이 되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등불로 믿고 의지했습니다. 캄캄함과 어두움 속에서 등불과 빛이 없으면 함정에 빠지고 수렁에 빠져서 패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등불 되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길을 인도하시는 등불이었습니다. 보호하시는 등불이었습니다. 방향을 알게 하시고 장애물을 헤치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등불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는 위험에서 빛으로 분별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by my God)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면 적진으로라도 뛰어들고 적의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는 믿음은 생명과 생사를 담보하고 맡기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방패가 되었습니다.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진에 뛰어들고 성벽을 뛰어넘어 전진하고 적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상급과 갚아주시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와 말씀을 절대 신뢰하고 믿고 전진하시는 그래서 늘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3-4. 늘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무엇을 찬양했습니까요? 구원의 내용 때문에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6절. 음부의 줄이 나를 누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다윗에게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음부의 줄이 다윗을 끌어 당겼습니다. 사망의 올무가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요? 얼마나 패닉이 될까요?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소백과 간구를 했습니다.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by my God)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온 성벽과 음부의 줄이 끌어 당시는 성벽과 사망의 올무가 도착한 성벽을 뛰어 넘겠다는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찬양을 했습니다. 성벽으로부터 탈출하고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고 구원하신 나의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드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의 피난처가 되신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찬송 중에. 기도 중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부르짖었습니다. 7절.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18절.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또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데, 악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20절.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 하셨도다. 넓은 곳이 무엇입니까? 크게 형통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크게 형통할 수 있도록 넓은 세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118;5절.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다윗이 스스로 갈수 없는 넓은 곳과 광활한 곳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설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참으로 나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나를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넓은 곳과 광활한 곳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 가지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태인의 교육은 하지 마라가 아니라 사브라처럼 참고 인내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이 사브라 교육이 오늘날 유대인이 넓은 곳과 광활한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0.2%이고, 미국 인구의 2%밖에 안 되지만, 하버드대 등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20% 이상이 유대인입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30% 이상을 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가 익히 들어 본 수많은 내로라 하는 기업들을 비롯하여 미국의 정치와 언론과 영화와 금융과 산업과 학문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사브라 라는 호칭은 의지 강화 교육의 지혜입니다. 자녀에게 '사브라'라고 부를 때마다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심어줍니다.
내 인생은 선인장과 같았고 나는 사막에서 뿌리를 내리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땡볕이 쬐는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았다. 아침에 맺히는 이슬방울 몇 방울 빨아들이며 기어코 살아남았다. 그러니 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냐? 너'라는 열매를 맺기까지 나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었다. 너는 사브라, 선인장 열매이다. 그러므로 너도 끝까지 살아 남거라. 그리하여 또 다른 열매를 맺어라. 그 열매가 맺어지거든 그를 '사브라 라고 불러 주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신 모든 분들을 넓은 곳과 광활한 곳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by my God)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그러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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