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이게 뭔지 아세요? 구들장이에요”
그만 그만한 크기의 납작한 돌판 여남은 개가 아파트 벽에 기대어 놓인 것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 웬 구들장이? 다가선 내게 20대의 환한 아가씨가 온돌의 이런저런 좋음을 늘어놓았다.
“구들장은 아가씨보다 어르신이 더 잘 알 텐데”
경비 아저씨의 참견에 웃음으로 답을 건네고 집으로 오면서 구들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아가씨에게 자꾸만 정감이 갔다.
구들장 열기로 데워진 온돌방에서 잠자 본지도 오래되었다.
농경 정서 속에서 자란 내게는 구들장으로 된 온돌방은 어머니의 품이었다.
친구들과 노느라 시간도 잊고 있다가 산그늘이 마을을 덮기 시작하면 시장 끼와 함께 추위도 찾아왔다. 단걸음에 안방으로 달려오면 깔린 이불 밑에는 가족 사랑이 버무려진 먹을거리가 온돌의 온기에 데워진 채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의료시설이 미비하던 시절에 어른들이 일에 지쳐 몸살로 열이 나고 한기가 들면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도록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따끈한 꿀물 한 그릇 쭈룩 마신 후 이불을 덮고 온 몸을 작신거리게 지지면서 한겻 푹 자고 나면 뼈마디가 쑤시고 삭신이 욱신거려 끙끙대던 아픔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이 구들장으로 사용했던 화강암 속의 운모성분이 열을 받아 생육광선(生育光線)인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잠잘 때는 머리를 윗목에 발은 아랫목에 두도록 타이르시던 어른들의 말씀이 잔소리가 아닌 ‘두한족열(頭寒足熱)'의 생활 치료법이었음이 너무 신비롭다.
구들장으로 온돌을 시공하는 과정은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체험하는 현장이었다.
고래를 덮은 구들장에 부토를 하면 그 위에 중벌, 마감 바르기를 하고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적당히 건조된 바닥을 사발이나 병으로 갈기를 마치고 초배지와 장판지를 차례로 발라 말린 후 콩댐을 했다.
그렇다고 방이 당장 따뜻한 것이 아니다.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열기가 부넘기로 해서 여러 개의 고래를 지나 개자리를 거쳐 구새(굴뚝)로 빠져나가면서 구들장을 데웠다.
구들장은 자연과 인체와 삶을 조화시킨 한국인의 지혜와 멋이 그대로 배었다. 주변에 지천인 둥글넓적한 돌을 주어다가 두꺼우면 아궁이, 얇은 것은 굴뚝 가까운 곳에 놓은 것이 정이나 끌 흔적 하나 없다.
새침의 재료도 작은 돌멩이와 점토일 뿐이다. 아궁이에 검불을 태우면 열기는 고래보다 깊은 개자리의 찬 기운을 만나 잠시 감돈다. 이 때 그을음은 떨어지고 가벼워진 연기는 연도로 해서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공해와는 거리가 먼 완전 연소법이다.
구들장은 평범 속에서 선택됨을 자랑하며 우쭐대거나 자기 공적에 대한 불평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을음과 덧칠로 제 본래의 모습마저 잃으면서도 자기를 달구어 남을 품는 것이 구들장이다.
이런 구들장도 따뜻하고 미학적인 추억만을 들춰내지는 않는다.
초목을 땔감으로 하는 온돌은 삼림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붉은 산’(김동인. 1932. 삼천리에 발표)에서 삵은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동포의 암종이었던 그에게도 조국의 상징으로 헐벗은 붉은 산을 떠올린 것을 보면 왜인들의 남벌과 우리의 화목 채취로 조국의 산야는 민둥산으로 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구들장이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을 안아야 하고 시커먼 그을음으로 제 본래의 모습은 바뀌어야 한다. 그러고서야 차갑고 쓸모없던 돌이 따뜻한 구들장으로 변한다. 열이 없는 구들장은 오히려 더 차갑거나 눅눅하고 쾨쾨하다. 심지어 쥐가 고래에 구멍을 뚫어 뒤에 불을 때면 그곳으로 연기가 세어 나와 큰 변을 당하기도 한다.
무연탄이 대중 연료로 각광받던 시절에는 구들장 틈새로 유독 가스가 새어 나와 얼마나 많은 생목숨이 죽었던가.
나는 지금까지 옹졸하고 융통성 없고 치사하고 좀스럽고 답답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살았다.
주차를 할 때도 전진 후진을 몇 번이라도 하면서 자로 잰 듯 제 주차 위치가 아니면 직성이 풀리지 않고 약속한 장소를 정확히 모를 때는 사전 답사를 해서라도 교통 혼잡과 거리를 계산하는 버릇이니 그럴 만도 하다.
카드도 지갑도 두고 외출한 일이 있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받은 거스름돈이 차비는 되리라 생각했는데 딱 100원이 모자랐다. 30리도 더 되는 길을 걸어온 나를 보고 아내는 한심한 듯 혀를 찼다.
기사 아저씨께 사정 얘기를 하거나 택시를 타고 오던지 아니면 주변 누구라도 붙잡고 사정얘기를 하면 100원은 누구나 준다고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그런 사정을 말했으면 모른 체 했겠냐고 구박이 대단했다.
그렇구나. 나는 60년을 넘게 살면서 내 모습은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은 고집을 부렸구나. 비록 해로움은 주지 않았는지 몰라도 따뜻함이 주는 이로움도 못주고 살았다.
인구 집중 현상이 두드러진 지금의 도시 주거는 구들장을 이용한 온돌 난방이 귀하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편리와 실용을 앞세워 수천에 이어온 우리 것들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렸다.
인류 발상지로부터 한반도까지 도달하는 혹한지역 통과의 유동과정에서 얼어 죽지 않고 생존하여 민족을 형성할 수 있었던 독창적이며 독자적인 주거 난방의 핵심인 구들장도 예외는 아니다.
포실한 흙의 촉감이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가지 전해져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일치감이 느껴지는 온돌방의 정감이 지금은 추억이 되었다.
아랫목과 윗목이 있어서 사람마다 앉는 자리가 달랐고 비록 그 자리의 주인이 비워 있어도 거기에 타인이 함부로 앉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온돌 문화에서 남을 배려한 포근하고 훈훈한 삶과 예의와 도량을 익히며 살아왔다.
초저녁에는 오들오들 떨다가도 새벽녘에는 이불마저 차내고 네 활개 펴고 잘 정도로 시간이 흐를수록 따뜻함을 더해주는 것이 구들장 온기다. 처음 만나면 싸움이라도 한 듯 시큰둥하다가 사귈수록 네 것 내 것이 없어지고 이웃도 사촌이 되는 우리네 성정이 어찌 그리 구들장을 닮았을까?
아가씨가 가리킨 구들장이 사라져 가는 것들이 발산하는 한없이 넓고 부드러운 세월의 향기로 무뎌진 내 감정을 간질이고 있었다.
군불 땐 연기가 굴뚝 주변을 가물거리다가 창공으로 퍼져나가고 방문을 열면 열기와 함께 메주 뜨는 곰삭은 냄새가 확 코를 찔러 잠시 고개를 돌렸던 구들장으로 훈훈해진 그 온돌방이 눈에 선하다.
첫댓글 구들장 읽고 또 읽습니다.감기에 걸려 연신 콧물 흘리고 있으니 ~님에 구들장 반갑기만 합니다. 아랫목에 한숨 자고 나면 다 나을 것 같은디~ 지 꿈은 산골에 흙집 짓고 솔가지로 군불 지피며 사는 것이랍니다. 허나 꿈은 꿈으로 끝나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