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와이프랑 딸래미랑 춘천에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가
시간이 꽤 늦었지만 내친김에 그 곳, 화천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제대할때 그 방향으론 정말 오줌도 싸기 싫었던 그 곳.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져 갔지만
생각만 15년을 하다가 결국 가 보았습니다.
102보를 지나 전역교육차 들렀던 쌍용회관을 지나
춘천댐을 지나 여단 본부 앞을 지나니 그 때부터
정말 그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야릇한 느낌이 듭니다.
가는 길 내내 내가 정말 그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 속 같은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구불텅 길을 돌아 가는데
군 시절 선임하사가 유명을 달리한 길이라는 생각을 하니 숙연해 집니다.
(저 제대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 사고사... 참 보고 싶네요)
새로 생긴 것같이 기억엔 없는 터널을 지납니다.
옛날에는 2포 지나기 전에 휴게소가 있는 꽤 높은 고개를 넘었던 것 같은데...
2포, 2전차 앞을 지나니 옛날 102보에서 두 밤 자고 군용버스에 실려
한 놈씩 두 놈씩 자대에 떨구어지면서 동기들과 이별하던 89년 여름이 생각납니다.
저는 자대동기 4명과 파포리 7사 교육대 (유격장)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신풍리 본포대로 내려 왔지요...
순간 멀쩡히 휴가증을 가지고 있어도 상병때까지는 괜히 주눅들던
신포리 헌병대 앞을 지납니다.
화천읍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고개을 넘을 때
박격포판 등에 메고 고갯길을 걸어 넘던
27사 보병들의 지치고 검게 탄 얼굴들이 생각납니다.
저 멀리 화천읍의 불빛이 보이는 순간,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마치 고향의 불빛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붕어섬을 지나 읍내 입구에 도착하니
왼편으로 김화방면의 새 길이 뚫렸더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 길은 읍내를 통하지 않고
사방거리(마현리) 쪽 5번도로를 탈 수 있는 우회도로 였습니다.
읍내 입구에서 신호에 걸려 서 있는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오른편으로 강 건너 혹한기 야종을 뛰던 훈련장을 바라보며...
읍내는 "산천어 축제" 로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더군요..
외출 나왔던 장병들이 다 복귀하고 지금은 어디 여관이나 술집에 틀어박혀 있는지
거리엔 7사단 헌병들이 교통정리하고 있는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사실 놀랄만큼은 변하지 않았더군요
한 두번 길을 헛갈려 헤멘 것 빼고는 옛 기억 그대로 였습니다.
읍내를 벗어나 검문소를 지나 부대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정말 기분이 묘해지고 들뜬 기분에 말이 많아 졌습니다.
뒷자리 와이프는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한 듯 웃고만 있고
옆자리 딸래미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만 따라 부르고 있더군요...
보급대 앞을 지나 저 멀리 신풍교회가 보이는 듯 했지만
아직은 차마 눈길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지금 바로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 하나 하나를
차례로 차근차근 다 눈에 담아 가고 싶었습니다.
BOQ 들어가는 입구의 버스 정류장, 7사 항공대 입구
7사 공병대대, 27사 포병연대...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자동차는 점점 더 빨리 속도를 높여 갑니다.
드! 디! 어!
1557부대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본부포대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은 알파로 바뀌었나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켠 다음 차 창문을 내렸습니다.
이미 굳게 닫혀진 부대 정문 앞엔 차량 정지등만 깜박이고 있었고
위병소에는 아마도 근무자가 5배 이상 증폭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다 보고 있었겠죠...
와이프는 내려서 올라가 보라고 성화였지만...
바보처럼 그럴 수 가 없었습니다
야간엔 암구호 모르면 총 맞을 수 있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마치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가까이에서 만난 수줍음을
남들에게 들킬까봐 꽁무니를 내빼고 마는
꼬마처럼 그렇게 서둘러 부대 앞을 떠났습니다.
지금 사진이라고 한 장 찍어 올걸 하는 후회가 막급이지만
플래시를 터뜨려 추운데 눈만 내놓고 근무 서고 있을
불쌍한 군발이 가슴 놀라게 하거나 쓸데 없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게 황망히 차를 돌렸습니다.
15년을 벼르고 별른 부대 방문(?)은 그렇게 단 10초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부대 정문 아치에는 섭섭하게도(!!)
제가 만들어 올린 아치 대신 새로운 아치가 걸려 있더군요
바뀌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것이지만
괜시리 섭섭했습니다.
그 때 제가 식기 세척용 스펀지에 페인트를 뭍혀 찍어 만든 아치의 문구는
당시 여단 표어였던 "이겨놓고 싸운다" 였습니다.
CP쪽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보이는 문구는...
"반드시 돌아오라"였죠... 지금 생각하면 유치의 극치였습니다만...^^
지금은 아마도 "정예쌍용포병육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를 돌려 읍내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고 어두워진 마당에 군 부대 앞을 얼쩡거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어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애써 미루기로 하고
읍내로 들어와 삼거리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거리는 화천의 악명높은 겨울을 대변하듯 눈과 녹지 않는 얼음덩이가 뒹굴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오바로크'치던 만물상화 "광명상회"는 "명성사"로 이름이 바뀌어 있더군요
가게의반은그나마 안경점으로 바뀌어 있었구요
정말 안경쓴 청년들이 많아져서 그런가요?
광명상회 류의 가게들이 몇 개 더 생겼는데 이름이 재미있더군요
"군인백화점"
와이프가 뒤집어졌습니다.
왼편으로 발길을 돌리니 "화천터미널"이 있었습니다.
수 많은 기쁨과 절망과 만남과 이별이 있었던 그곳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휴가증과 차표를 쥐고 차에 오르던 하늘을 날것 같은 기쁨과
복귀 날 을씨년스러움과 더불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던 절망과
면회 온 가족, 친구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던 그 곳엔
눈에 익은 디자인의 버스들이 아련함을 떠올리게 하는 행선지를 앞에 붙이고 서 있었습니다.
터미널 뒤로 돌아가 보니
아...!! 복귀할 때 한 두마리 씩 사 들고 들어가던 양념치킨집이 그대로 있더군요..
(그 때도 페리카나 였나?)
왼편 골목으로 들어서 보았습니다.
전설의 "까망다방" 자리엔 PC 방이 들어서 있고
버젓이 룸살롱이라 적힌 술집간판들이 들어선 터미널 뒷 골목 풍경은
기대와는 달리 낮설었습니다.
골목을 빠져나와보니 왼편에 화천서점이 있었습니다.
제대 3개월을 남겨두고 마지막 야종훈련이 끝나던 날
이등병 막내와 함께 건들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고(금지사항이죠??)
적재함 위에 앉아 찍은 사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진의 뒷배경이 바로 화천서점 간판이었습니다.
비록 모양은 바뀌었지만
딸래미를 안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자니 괜시리 한 구석에서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다시 삼거리 쪽으로 나오니
술취한 하사관 (지금의 부사관) 몇 명이 거리에 있는 풍경도 그대로 였습니다.
15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하지 않았지만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 꽤 많은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먹었습니다.
훈련나갔다가 잡은 뱀을 가끔 팔았던 약탕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꽤 놀랐고
터미널 위 당구장, 의원, 낮익은 구멍가게들...
이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정지해 버린
가상의 세계에 온 것 만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도 그대로였구요..ㅎㅎㅎ
차에 올라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절엔 춘천을 거쳐 화천으로 들어오는 5번도로가
그렇게 싫고 절망적이고 답답하고 괴로웠고
화천에서 춘천을 거쳐 서울로 나가는 5번도로는
그 반대의 기분이였던 것 같았습니다.
하긴 화천으로 들어오는 길이란 자대배치 할 때와
휴가복귀할 때 뿐이었을테니 당연 좋았을리 만무하고
그 반대의 경우란 휴가 나가거나 제대하는 길이었을테니까요...
그런데 그 날은 또 정 반대의 기분이 들더군요...
화천으로 향할때의 묘한 설레임과 흥분이 낮설었는데
화천땅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은 또 아쉬움과 아련함에 낮설어졌습니다.
다음에,
다음번에 꼭 다시 한 번 오리라,,,
다음 번에 올때는 뒤꽁무니를 빼고 마는 꼬마처럼 황망하게 다녀가지 않으리라...
수십번도 더 되뇌이면서
15년만의 화천땅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15년만의 화천 방문,
계획없이 갑자기 이루어진 터라 원인모를 아쉬움에 간절했습니다.
여러분도 시간 되시면 한 번씩 가보세요..
그 느낌, 냄새, 분위기,,,,
아주 묘합니다..ㅎㅎㅎ
첫댓글 와~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대단하시네요^^
나도 꼭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멀어시리 울산. 23년전의 기억을 되돌려 보고 싶습니다.
ㅎㅎ 새록새록... 마치 영상을 보는듯한 글이였습니다. 저희 알파포대가 본부였군요. 자주이용하던 명성사도 광명상회였구 ... 저도 가끔 일년에 한번정도 그곳을 지나며 한번씩 되뇌이곤 합니다. 담에 가시면 알파포대 방문해보세요. 반갑게 맞아주실껍니다. ㅎㅎ
와 이글 읽으니 과거 생각이 뭉실뭉실 나네요. 저는 81년도에 입대하여 근무했으니 32년되었습니다. 이제는 백발이 되어 중년이 되었지만 855대대를 어찌 잊으리 감개가 무량하군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