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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문화의 일본진출, 그 허와 실
- 가수 SES 일본상륙 '성공예감'
....... 일본에서 이미 2천5백만엔(2억5천만원)의 파격적인 개런티를 받은 SES는 NHK와 니혼 TV 등 공중파 방송들이 고정출연을 요청해오는 관심을 보이고 있어 일본 팝계 주류권 진입에 청신호가 켜져 있다. SES의 일본 상륙은 다른 댄스 가수들에 비해 실제적인 성공 가능성이 상당해 가요계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중앙일보, 1998. 8. 31)
- 「우리 문화상품이 해외서 튀고 있다」 ‘끼’와 ‘흥’ 코리아 넘버원
......... 우리 대중문화상품이 아시아 지역을 강타하고 있다. 영화․방송․가요․뮤지컬 등 거의 전 장르의 우리 대중문화상품이 문화적․정서적 공감대가 강한 아시아 각지, 나아가 전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다..........(중앙일보 2000. 2. 10).
- <쉬리> 일본서 1백만명 돌파 기념파티
.......... 일본에서 상영 중인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3월 31일자로 관객 1백만명을 돌파했다. 이에 따라 이 영화의 일본 수입사인 시네카논은 7일 도쿄에서 강감독과 주연배우 최민식, 김윤진 등이 참석한 가운데 「쉬리 관객 1백만명 돌파기념 파티」를 열었다. 이날 파티에는 주제곡 <When I Dream>을 부른 영국 여가수 캐롤 키드가 참석, 직접 노래를 불러 흥행의 성공을 축하했다...........(중앙일보, 2000. 4. 8)
위 세 기사는 이제 한국 대중문화가 더 이상 변방의 한 모퉁이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대중문화 시장에서 주류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위 기사들에서 우리들은 자긍심 혹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자부심은 우리가 일본에게 갖고 있는 막연한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또한 한류 열풍을 서막을 알리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대중문화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과연 그런가? 이제 우리 대중문화는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류문화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리고 밀려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중문화와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위세를 갖게 되었는가? 또 그동안 미국이나 일본의 대중문화에게서 느끼는 위협적 영향력과 그에 압도당하는 우리를 지켜보며 느껴야 했던 모멸감을 되갚아 줄만큼 우리 대중문화가 성장하게 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확실히 우리 대중문화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다. 70년대 경제성장 시대에 태어나서, 80년대 풍요의 시대에 자라고, 90년대 이념의 옷을 벗고 다원화된 시대에 다양한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새로운 세대들은 대중문화를 보다 풍성하게 하였다. 우리 사회의 경제규모가 확대되는 만큼, 또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적 영역이 다원화되는 만큼 대중문화의 영역도 확장되고 그만큼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들이 자리잡았다.
특히 90년대 이후 세계는 ‘문화’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획기적인 문화발전이 이루어졌다. 혹자는 문화를 자본주의의 영생불멸을 위한 자본축적의 수단이라 폄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문화의 생산, 유통, 소비(수용)라는 문화 환경을 확장하고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도처에 문화가 넘쳐난다. 인류사에서 오늘날처럼 왕성하게 번창하는 ‘문화의 시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대중문화의 성공신화가 흔한 것은 우리의 문화산업이 바로 이러한 시대 조류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제 우리 대중문화는 국내 무대를 벗어나 해외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가깝게는 중국에서, 일본에서 멀리는 베트남까지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요즘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욘사마’열풍 등 일본 대중문화와의 상호 교류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1998년 단계적 문화개방이 시작된 이래 한일 양국은 여러 면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일본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일본 진출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은 방향으로 문화진출을 꾀할 수 있게 노력할 때다.
2.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진출 현황
1) 영화, 드라마
사실 한국영화의 일본진출은 <쉬리>의 대성공 외에는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쉬리> 단 한편의 성공이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 내에서는 영화의 해외 수출에 대한 자신감과 가능성을 믿게 되었고, 일본의 프로덕션은 한국 영화가 또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쉬리>는 2000년 1월 22일, 도쿄 시부야의 판테온 극장 등 도쿄의 13개 극장을 포함, 일본 전국 83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상영 초기에 <엔드 오브 데이스>, <블레어워치 프로젝트> 등 헐리우드 영화와 흥행 성적 1위를 다투었지만 예상을 뛰어 넘는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연일 전회 매진되더니 4월 초, 일본 전국 1백14개 극장에서 상영되며 마침내 4월 7일 도쿄에서 관객 100만명 돌파 기념 파티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쉬리>붐은 한국영상물의 일본진출에 더할 나위 없는 호재가 되었다. <쉬리> 이후 일본 프로덕션들은 한국영화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국 내에서 공동제작 파트너를 물색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과거에는 대부분 일본의 소규모 프로덕션이 기획을 의뢰해 온 정도였지만 <쉬리> 이후로 일본의 메이저급 영화사들이 한국 측 공동제작 파트너를 물색하거나 직접 투자를 의뢰하고 나설 정도로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쉬리>를 제작한 「강제규 필름」은 물론 다른 영화 제작사의 영화제작 현장에 일본의 언론방송이 취재를 오는가 하면 완성된 필름의 수입을 타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쉬리>의 성공은 한국영화의 일본 진출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여파를 타고 ㈜좋은영화는 지난해 국내에서 2백6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김상진 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이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인 쇼치쿠(松竹)영화사의 배급망을 통해 연내에 일본에서 상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에 1백여개의 극장 체인망을 갖고 있는 쇼치쿠 영화사를 통해 국내 영화가 일본에 소개되기는 <주유소 습격사건>이 처음이다.
이같은 <쉬리>의 영향력은 단지 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와 비슷한 영상물인 TV 드라마 분야에서도 한일 양국은 서로의 시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가 바로 사상최초의 한일공동제작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인데 일본TBS와 한국MBC프로덕션은 2002년 방송할 '프렌드'(가칭)를 공동제작하기로 했다고 제작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영화나 TV드라마 등 영상제작물의 경제적 부가가치가 점차 확대되는 현 상황에서 한일 양국의 영상제작물은 양국에 새로운 문화상품으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질 것이 분명하므로 양국 문화산업가들의 집중적인 관심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점에서 양국의 영상제작물 교류사업은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2) 대중음악
여러 대중문화 중 가장 활발하게 일본 진출을 이룬 것이 바로 대중음악이다. 한일 양국은 오래전부터 대중음악의 상호 교류를 줄기차게 추진해왔으며 공식적인 문화개방이 있기 전부터 대중음악은 공식, 비공식적으로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본시장에 진출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한국의 대중가수로는 이성애,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를 꼽을 수 있다. 최근에는 보아가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상위권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중이다. 이성애는 70년대 일본에 진출하여 한국에서 보다도 더 인기를 누렸다. 8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가수 조용필 역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중요한 프로그램인 NHK의 ‘연말 가요청백전’에 출연했을 만큼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계은숙과 김연자는 주 활동무대를 일본으로 아예 옮긴 경우로 한국 가요보다는 `일본 전통가요 가수'로서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 즉 한국에서 온 일본 전통가요 가수로 성공한 경우이다.
90년대 들어서는 팝 계열의 가수들도 일본진출을 시도하였는데 그중 강수지와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담다디’라는 발랄한 노래로 주목받았던 이상은은 선배가수들과는 달리 신선한 팝 음악으로 일본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강수지 역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댄스그룹을 중심으로 일본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의 유명한 댄스그룹은 대부분 일본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SES는 1998년 7월 28일 도쿄 록본기에 위치한 대형 디스코텍 벨파레에서 <아임 유어 걸>, <오 마이 러브>를 선보였다. SES는 98년 일본 무대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싱글앨범 6장, 정규앨범 1장을 발표했으며 일본 내 대규모 투어와 그동안 발표했던 앨범 타이틀곡 10곡을 모아 일본어 베스트 앨범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SES 외에 ‘스카이’의 최진영도 춤과 노래를 동시에 소화한다는 장점을 앞세워 일본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또 대중가수들 뿐만 아니라 음악전문 케이블 TV인 m.net(CH27)가 국내 방송사 최초로 해외에서 방송사업권을 얻어 독자적인 방송채널을 운영한다. m.net는 금년 3월 28일 “최근 일본 우정성의 신규채널 프로그램 공급업자 허가를 취득, 디지털 위성방송 스카이 퍼펙 TV에 한국 대중음악(K-Pop)을 방영하는 유료채널인 ‘m.net Japan’을 신설하고 6월부터 방송을 내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m.net Japan'에서는 일본어로 진행될 신규 제작 프로그램과 현재 m.net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버라이어티쇼 ‘리듬천국’을 비롯, ‘가요베스트27’ ‘가요발전소2000’ ‘핫라인 스쿨’ 등의 프로를 일본어 자막을 삽입해 24시간 방송한다. 특히 m.net는 ‘m.net Japan'에서 대규모 콘서트 및 이벤트도 열며 한국 가수들의 일본 진출에 방송국 차원의 공식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 가수들의 일본진출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3.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진출, 그 허와 실
한국과 일본의 대중문화는 1998년 문화개방에 다른 공식 문화교류가 있기 전부터 물밑 교류를 진행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문화교류가 시작되면서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시장 진출은 더욱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개중에는 물론 <쉬리>처럼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일본 대중문화에 비해 우리 대중문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또한 언론방송의 연예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진출 소식과 성공담 등은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그간의 걱정이 괜한 근심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 같아 더 이상 일본문화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을 우스꽝스러운 일로 만들고 있다.
특히 <쉬리>의 성공신화는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영화 안팎 모두에서 ‘헐리우드 드림’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주변에서 머뭇거리지만 가슴 가득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감독 강제규, 밀려오는 미국 직배 영화와 이어질 일본 영화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영화의 입지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는 영화시장(더욱이 스크린 쿼터 조정과 배우들의 항의시위는 더욱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었다), 이때 무명의 잔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하듯 강제규는 훗날 한국영화의 자존심이라고 불릴 한편의 시나리오를 들고 와 한국영화의 모든 고민을 일거에 씻어버린다. 그것도 가장 헐리우드식 영화로 국내를 평정한 이 영화는 이제 전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숙적 일본영화와의 한판 승부를 위해 도쿄원정길을 떠났다. 마침내 한일축구전 승리에서나 맛보던 통쾌한 승리의 감격을 조국에 전하니 그동안 전국민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일본문화 전면개방에 대한 우려가 기우였다는 자부심이 이 땅에 가득 찼다.
과연 그럴까? 일본에서의 한류열풍은 이렇게 긍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일까.
한국의 대중문화 중 일본 진출 경력이 가장 화려한 것은 사실 영화보다는 대중음악 쪽이다. 일제 치하에서부터 한국의 대중가수들은 끊임없이 일본 땅을 밟으며 성공신화를 남겼다. 그러나 조금만 세심하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한국 대중가요의 일본진출이란 사실은 한국 대중가요의, 즉 노래 그 자체의 일본 진출이라기 보다는 한국 대중가수의 일본진출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임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일본 진출 성공 신화의 대표적 사례인 이성애,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일본에서 ‘일본 전통가요 가수’로서 확실한 자리를 굳힌 사람들이다. 즉 한국에서 온 외국인 일본 전통가요 가수로 성공한 경우이다.
일본의 음반시장은 크게 엔카를 비롯한 일본의 전통가요를 일컫는 ‘방악’(邦樂)과 외국의 팝 음악을 가리키는 ‘양악’(洋樂)으로 나뉘는데 이성애, 계은숙, 김연자의 경우는 일본의 전통 엔카로 분류돼 방악에 속한다. 한국가수이긴 하지만 아주 전통적인 일본의 트로트를 부르기 때문에 `초(超)트로트' 가수라고 불리운다. 조용필의 경우도 큰 범주에서는 이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조용필의 일본진출은 다분히 일본 문화산업의 정치경제적 계산이 깔린 것이었다. 조용필이 일본에 진출하던 80년대 중후반, 당시 일본 대중음악계는 아시아 시장에서의 일본 대중음악 확장을 위해 한국, 일본, 대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3명의 가수를 아시아를 대표하는 대중가수로 선정하는 쇼 비즈니스를 전개하였다. 이 비즈니스는 일본과 대만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대만과 홍콩 등 동남아 국가에서 일본 팝은 미국 팝에 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대중가요로서 위상을 굳건히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본문화 개방저지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일본 국내의 대중가요 시장을 한국과 대만, 동남아 시장의 공식적 대중문화 영역으로 확장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대만과 홍콩 등 동남아 시장에서는 성공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실패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일본에 진출한 강수지와 이상은의 경우는 또다른 차원에서 전개된다. 강수지의 경우는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듯 그녀의 여린 소녀적 외모가 일본인들의 미적 감수성에 잘 맞아 대중가수로서 진출했다기 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진출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이상은은 비록 상업적인 면에서는 선배 가수들보다 못하지만 다른 면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다른 가수들은 일본시장에 맞춰 노래와 분위기를 바꿨지만, 이상은은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활동하고 있으며 이런 독창성을 가장 큰 강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상은의 노래는 외국 음악으로 분류되어 양악 계열에 속하며 음반도 팝 음반으로 분류된다. 일본의 ‘양악’, 즉 팝 시장은 넓은 의미에서 아시아권의 다른 나라 가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선배 일본진출 가수들과는 완전히 다른 범주로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일본에 진출하는 댄스 그룹들의 경우는 이상은과 또 다른 경우이다. 이들은 ‘방악’ 계열은 아니지만 일본음악과의 차별성은 커녕 일본음악화되고 있다. 일본의 댄스그룹들과 비슷하여 일본 음악과 구별되는 외국인으로써의 독창성을 갖추지 못해 외국의 팝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며 일본의 수많은 댄스그룹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는 상태이다.
1998년 진출한 SES는 당시 ‘일본에는 드문 리듬 앤드 블루스 팝을 펼치는 한국가수 세자매’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SES는 국내에서는 비교적 강한 비트로 R&B 창법을 전개하는 뉴질스윙 풍 음악을 하였으나 일본에서 R&B같은 흑인음악보다는 유럽풍의 테크노팝이 강세라는 일본 상황을 감안해 R&B에 재즈와 펑키, 소울 음악을 가미한 새로운 창법을 구사한다. 그나마 일본에서 출시된 첫 싱글 ‘하나가 되는 세계’는 일본어로 불렀다.
또 SES는 노래의 편곡도 일본에서 하였으며 자마이카 스타일의 백댄서 4명과 함께 춘 춤 역시 아무로 나미에, 스피드등 일본 톱가수들의 안무를 전담해온 이즈미와 마다미가 지도한 춤으로써 철저히 일본화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SES는 일본 연예업계 순위 3-5위권 프로덕션으로 재력과 흥행술 면에서 메이저 프로덕션인 「스카이 프래닝」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이 프로덕션은 1997년 대만의 여배우이자 가수인 비비안 수를 음반판매량 2백만장의 스타로 만들어낸 전적이 있다. 소재가 빈곤해진 일본 팝 시장에 아시아 음악을 매력적인 대체물로 판단하고 매우 의욕적으로 SES 홍보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 우리는 일본에서의 SES 음악은 한국에서의 SES과는 뭔가 다르며 일본에서의 SES는 일본 음악을 하는 한국인 가수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한국 대중가수들이 일본 진출이라는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일본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본에서의 일회성 음반발매나 지방도시 라이브공연을 일본진출이라고 과장되게 선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단발성 화제이거나 국내 홍보를 위한 일본진출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일본에 진출에서 성공한 한국가수들 조차도 자신에게서 한국적 감수성을 말끔히 지우고 일본적 감수성으로 무장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한국에서 온 대중가수들은 일본노래를 잘 하는 외국인 가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꼴이 되고 만다.
그 어떤 외국인 가수도 한국에 들어와 한국적 노래를 가지고 승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가지고 한국에서 공연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이점이 바로 한국 대중음악의 일본진출과 일본 대중음악의 한국진출의 다른 면이다. 이는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자신들의 음악을 그대로 가지고 간 클론의 대만에서의 성공은 일본화하며 일본 진출을 시도하는 다른 한국 대중가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떳떳한 자기 음악으로 한국 진출을 모색하는 일본 대중음악과 일본화한 음악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대중음악. 그 차이는 무엇일까. 결국 이것이 양국 문화가 가지는 힘의 차이 아닐까?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에 건너간 한국영화는 <쉬리>로 대표되는데 <쉬리>의 경우 배경이 한국이고 출연배우가 한국인이라는 점 외에 나머지는 철저히 헐리우드식, 그러니까 미국 영화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 건너 온 일본 영화들은 <쉬리>처럼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철저히 일본적인 영화이다. 누가 보아도 일본적 감수성으로 잘 빚어진 일본문화의 표상이다. <하나비> <실락원>이 그렇고 <철도원> <러브레터> <샐 위 댄싱> 등은 일본이 아니면 만들어 질 수 없는 영화들이다.
<쉬리> 역시 가슴 저린 사랑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이지만 이런 사랑은 영화의 강렬한 다른 에피소드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관객에게 남겨진 강렬한 인상은 오래 오래 반추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한국에서 상영된 일본 영화들에게서 나타나는 사랑은 강렬하고 뜨거운 첫 인상으로는 <쉬리>의 사랑놀음에 비할 바가 못되나 관객의 가슴에 오래토록 잔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쉬리>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결국 흥행에서는 <쉬리>가 성공했으나 문화적 감수성의 전파력에서는 일본영화가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문화는 이데올로기의 생성과 전파라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래서 뛰어난 일본의 대중문화 전파가 무서운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는 자국의 문화적 감수성과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 진출하고 있는 우리 대중문화가 단발성 화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문화를 해외에 진출시킬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양적인 팽창만 생각했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진출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다. 양적인 팽창보다 질적인 팽창을 해야 할 때다. 일회성의 한류돌풍이 아닌 일본 사람들에게 한류가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