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sus discípulos: «Vosotros sois la sal de la tierra. Mas si la sal se desvirtúa, ¿con qué se la salará? Ya no sirve para nada más que para ser tirada afuera y pisoteada por los hombres. Vosotros sois la luz del mundo. No puede ocultarse una ciudad situada en la cima de un monte. Ni tampoco se enciende una lámpara y la ponen debajo del celemín, sino sobre el candelero, para que alumbre a todos los que están en la casa. Brille así vuestra luz delante de los hombres, para que vean vuestras buenas obras y glorifiquen a vuestro Padre que está en los cielos».
«Vosotros sois la luz del mundo»
Rev. D. Josep FONT i Gallart
(Tremp, Lleid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hace una gran llamada a ser testimonios de Cristo. Y nos invita a serlo de dos maneras, aparentemente, contradictorias: como la sal y como la luz.
La sal no se ve, pero se nota; se hace gustar, paladear. Hay muchas personas que “no se dejan ver”, porque son como “hormiguitas” que no paran de trabajar y de hacer el bien. A su lado se puede paladear la paz, la serenidad, la alegría. Tienen —como está de moda decir hoy— “buenas radiaciones”.
La luz no se puede esconder. Hay personas que “se las ve de lejos”: Teresa de Calcuta, el Papa, el Párroco de un pueblo. Ocupan puestos importantes por su liderazgo natural o por su ministerio concreto. Están “encima del candelero”. Como dice el Evangelio de hoy, «en la cima de un monte» o en «el candelero» (cf. Mt 5,14.15).
Todos estamos llamados a ser sal y luz. Jesús mismo fue “sal” durante treinta años de vida oculta en Nazaret. Dicen que san Luis Gonzaga, mientras jugaba, al preguntarle qué haría si supiera que al cabo de pocos momentos habría de morir, contestó: «Continuaría jugando». Continuaría haciendo la vida normal de cada día, haciendo la vida agradable a los compañeros de juego.
A veces estamos llamados a ser luz. Lo somos de una manera clara cuando profesamos nuestra fe en momentos difíciles. Los mártires son grandes lumbreras. Y hoy, según en qué ambiente, el solo hecho de ir a misa ya es motivo de burlas. Ir a misa ya es ser “luz”. Y la luz siempre se ve; aunque sea muy pequeña. Una lucecita puede cambiar una noche.
Pidamos los unos por los otros al Señor para que sepamos ser siempre sal. Y sepamos ser luz cuando sea necesario serlo. Que nuestro obrar de cada día sea de tal manera que viendo nuestras buenas obras la gente glorifique al Padre del cielo (cf. Mt 5,16).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씀은,
넓은 뜻으로 생각해서 “소금이 고유한 특성을 잃으면”,
또는 “소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미료입니다.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떤 불행과 고통 때문에 좌절해서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 세상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만 판치는 삭막한 지옥이 되는 것을 막고,
모두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사는 천국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2)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입니다.
신앙인은 악에 맞서 싸우면서 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타락과 부정부패를 막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가는 넓은 길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거부하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또 혼자서만 죄 안 짓고, 혼자서만 착하게 살다가,
혼자서만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3) 잘 녹는 것도 소금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만일에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소금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예수님 없이는 세상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소금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신앙인은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 역할을 할 때,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세상의 빛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뜻합니다.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감추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라는 명령이 됩니다.
신앙인은 그 피난처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피난처’를 ‘안식처’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등불이 되어라. 그래서 모든 사람을 비추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로서 사는 것은 곧
신앙인답게 사는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착하게 사는 것을 포함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게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신앙인다운 삶’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성모님과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성인 성녀들의 삶과 죽음은,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모범을 본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목표로 삼아서 살아야 하는지를
그분들에게서 배워야 하고, 그분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빛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세속적으로 출세해서 물질적인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송영진 모세 신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빛과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
이 둘은 살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들을 대변해 주는 표징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적절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어떤 제도나 이념, 권력과 폭력이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설령 그런 것들이 사람들을 통제와 규율 속에서 획일화하고,
왜곡된 가치 질서에 잠시 물들게 할 수는 있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 없이 세상의 변화를 만날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고 명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며,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신앙인의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적인 자아를 꿈꿉니다.
현실에서 성공이 재산과 권력에 달려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행복과 평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도 성경은 한결같은 원칙을 고수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이사야 예언자가 여전히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진리입니다.
2017,2,5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 응한 사람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용기 있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세상을 살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 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꿈꾸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날마다 반성하는 삶”, “용기있는 삶”, “무언가 남는”, 즉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이들의 대답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값싸고 흔한 것이지만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수물이 바로 소금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물도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소금이 없으면 모두 다 외면해 버립니다.
세상에서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빛이 있어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싱겁게 된다면 무엇으로 소금을 짜게 만들겠습니까? 다시는 아무 것에도 쓸모없기에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힙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도시는 숨겨져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됫박 밑에 놓지 않고 받침대 위에 놓습니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칩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어, 그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십시오.” (마태 5,13-16)
복된 선언에 이어 ‘좋은 행실’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다. 16절은 좋은 행실에 대해 상세히 다루어질 마태오 5,17-48의 제목 같다. 오늘의 단락은 심판 위협으로 끝나는 짧은 부정적인 말 뒤에 공동체의 선교에 대한 긴 긍정적인 말이 뒤따른다. 원래 독립적이던 두 상징어를 마태오가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 같다. 마르코와 루카에서 소금과 빛은 아주 다른 맥락에서 나타난다(소금 : 마르 9,50; 루카 8,16 / 빛 : 마르 4,21; 루카 8,16; 11,33).
소금과 빛에 대한 오늘의 말씀을 예수가 직접 하셨다고 볼 수도 있다. 지혜문학적인 오늘 구절의 원래 의미를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산 위 도시’라는 단어의 출처와 원래 뜻도 알기 어렵다. 민족들의 순례를 나타내는 이사야서 2,2-5가 연상된다. ‘됫박’이 불 끄기 위한 도구였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그런 예가 유다교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 불을 끄기 위해 불을 켜는 것도, 불을 켜서 곧 숨긴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마태오는 “여러분”이란 말을 강조한다(마태 5,20; 10,30; 13,11; 16,18). 열두 제자나 사도, 복음 선포자뿐 아니라 박해받는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그저 미미한 존재일 텐데, 그런 사람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엄청난 말씀을 예수는 하신다.
▲ ‘산상 설교’(부분), 프라 안젤리코, 1437~1445년
소금이라는 유다적 상징어의 뜻에 대해 고대와 근대에 지혜, 선포, 희생 정신, 삶의 변화 등 여러 해설이 등장했다. “싱겁게”는 원전에 “어리석게”로 되어 있다. 가장 본문과 가까운 뜻은 소금의 필요성, 대체 불가한 특징을 가리키는 것 같다.
소금이 거름으로 버려지는 비유에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있다. 소금은 그 화학적 성질을 잃을 수 없으므로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그러나 소금이 변질되지 않으면 오늘의 비유가 아예 나올 수도 없다. 사해(死海) 물 1리터에 소금 103그램이 들어있었다 한다. 상인들은 파는 소금에 식용 소금 3분의 1과 다른 물질을 섞어 판 것 같다. 그래서 맛이 변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상상 가능하다.
소금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음식을 보호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존재한다. 음식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제자들은 세상에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려지고’(불 : 마태 3,12; 7,19 / 감옥 : 마태 5,25 / 지옥 : 마태 5,29) ‘짓밟힐’(이사 10,6; 63,3) 것이라는 두려운 경고다. 당시 소금이 아주 귀하고 비싸서 로마 군인들에게 월급으로 소금이 주어지기도 했다. 영어 단어 샐러리(salary)는 라틴어 소금(salalrum)에서 비롯되었다.
“빛”은 너무 넓은 비유이므로 그 맥락을 보아야만 해석할 수 있는 단어다. 이스라엘, 의로운 사람, 스승, 모세오경, 하느님의 종, 예루살렘을 가리킬 때 쓰이던 단어다. 루카 11,33 단락이 지하실이 있는 그리스 주택을 전제한다면, 마태오 복음서는 단칸방이 대세인 팔레스티나 농가를 배경으로 한다. 등불 하나로 온 집안이 환해지는 것이다.
세상의 빛인 예수 공동체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행실이 빛인 경우에만 그들은 빛이다. 그들의 행실이 소금일 경우에만 그들은 소금이다. 그러면 그들은 빛으로서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는 것이다. 온 세상을 향한 선교라는 마태오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16절은, 행실은 선교적 기능을 가진다는 마태오의 결론을 말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좋은 행실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비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가 빛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인류에게 버려지고 짓밟힐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심판 예고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를, 그 행실을 심판하실 것이다.
“좋은 행실”은 마르코 · 루카 · 마태오 중 오직 여기에만 나타나는 단어다.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첫째, 유다교적 맥락에서 선행과 자선을 가리킬 수 있다. 유다교의 선행과 자선은 모든 종교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둘째, 초대교회의 윤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마태오와 베드로 전서는(1베드 2,12) 박해받던 시절에 선교와 좋은 행실을 특히 강조한다.
“좋은 행실”은 앞에 나온 복된 선언과 곧 나올 대조명제(Antithese)에 의해 자세히 다루어진다. 마태오는 실천과 행동을 강조하는 신학자다. 인간의 내면을 바꾸면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마태오의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하느님의 영예와 연결시킨 오늘 구절은 신약성서에 흔하지 않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는 마태오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나타난다. 당시 유다교에서 흔히 쓰던 표현이다(마태 6,9-13).
오늘의 단락은 교회사에서 자주 오해되던 구절에 속한다. 첫째, ‘행업으로 구원 획득’이란 해설은 잘못된 해석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좋은 행실을 얕잡아보는 또 다른 편견 역시 잘못이다.
둘째, “여러분”을 교회 내 일부 계층을 가리키는 해설도 잘못된 해석이다. 루터는 설교직을 맡은 사람으로, 쯔빙글리는 사도들과 목회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성직자 · 목회자 · 수도자들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의 해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주의 종” 운운하며 목회자의 특권을 성도에게 세뇌시키는 해설은 성서 어느 구절과도 아무런 관계없다. “여러분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자매입니다”(마태 23,8). 교황이나 목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이나 하느님께 똑같이 소중하고 평등하다.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한 사람은 없다.
셋째, “여러분은 세상의 빛이다”를 이스라엘이라는 빛은 꺼지고 이제 새로운 빛이 나타난다는 식의 반(反)유다적 해석도 역시 잘못되었다.
마태오는 평서문과 명령문을 같이 사용한다. ‘여러분은 빛이다’와 ‘여러분은 빛이 되어야 한다’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말과 행동의 차이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 편차의 차이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지금 그리스도교는 우리 사회에 빛과 소금인가. 지금 종교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가. 그리스도교는 혹시 사회악은 아닌가. 교회는 겨우 이익집단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런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느껴야 한다. 그리스도교여, “남을 가르치면서 왜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못합니까?”(로마 3,21) 그리스도교는 아직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것 같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소브리노(Sobrino)로부터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