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흔이 훨씬 넘은 원경선 원장. (조세현 사진)
1.원경선이라는 각성한 농부, 그리고 풀무원 농장
티없이 맑은 가을볕이 하늘에서 바로 내리쏘고 있었다.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 앞 볕 좋은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이는 필시 그 노인이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돋보기 속의 눈과 손이 무언가에 깊이 열중해 있었다. ‘바느질’이었다.
천렵용 그물인가? 천만에. 나비채였다.
“농장에 나비가 너무 많아서 더러 잡아야겠어. 찢어진 델 대강 깁느라고….먼저 가서 점심 하고 계세요. 저도 뒤따라 갑니다.”
군더더기 없이 깡마른, 간딘스키의 조각 같은 몸이었다. 버려도 애저녁에 버렸어야 할 물건을 철사를 구부려 만든 수렵 시대의 연장 같은 바늘로 꿰매고 있는 노인의 좁은 등에 가을볕이 업혀 있었다. 잠깐 보고 돌아서 식당으로 가려는데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져서 조금 더 그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노인의 등에 업힌 것은 볕이 아니라 평화로움이었던 모양이다.
‘
밥이 생각이다
‘뷔페’였다. 고구마순 볶음, 오이나물, 솎음배추쌈, 무김치, 콩나물국,
밭에서 직행을 한 듯 흙 묻은 차림의 너댓이 식판에 음식을 덜어서는 자리에 가 앉았다. 어렴풋이 두엄 냄새인가가 스치는 듯도 했다. 그 사이 원경선의 아내
다들 조용히 밥을 비워갔다. 서울의 아파트촌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해서 퇴비 만드는 법을 고안했다는 사람만이 그 일의 고충을 다각도로 토로하느라고 식사가 지체되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새 말끔이 빈 식판을 부엌에다 옮겨놓고 자리를 뜨고 있었다. 한숨 돌리고 나면 다시 밭으로 나갈 사람들이었다.
나비채 수선을 끝낸
현미밥은 나이만큼 씹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일을 어째,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밥 한숟갈을 아흔번 가까이 씹어야 할 터였다. 세때를 그렇게 먹자면 이 노인이 식당을 떠나기는 어려울 것 아닌가? 그러나 웃으며 토를 달기를, 되도록 오래오래 씹어먹으라는 소리지 뭐, 그랬다.
어쨌건 그들 내외는 점심 벗들이 다 떠난 밥상에 남아 오래토록 밥을 먹었다. 오늘 밥은 좀 되다느니, 현미밥은 압력솥에서 꼭 45분 뜸을 들여야 맛나다는 걸 새로 온 부엌 식구가 잊은 모양이라느니, 조용조용 주거니받거니 하는 사이에도 입에 문 밥을 지루한 줄 모르고 소중하게 꼭꼭 씹었다.
그렇게 밥이, 고구마순이, 오이가, 솎음배추가… 살과 뼈와 피가, 그리고 생각과 마음이 될 것임을 명상하게 하는 식사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과장없이 경건한 체험이었다. 풀무원 농장, 더 실체적으로 원경선의 사상은 밥에서 나와 밥으로 실천되는 것임을 그 밥상이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난 우유 배달원
어려서부터 ‘믿었다.’ 그러나, “주일날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비가 와도 마당에 널어놓은 밀을 걷지 않고 비를 맞쳐서 아버지한테 혼이 났을 만큼” 잘못 믿었다. “행함에 대한 책임이 없는 믿음”은 허깨비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좀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18살에 뜻을 세우기를, 바울 같은 자급 전도하는 전도사가 되기로 했다. 그가 속한 교단은 퀘이커와 비슷한 평신도 독립 교회를 주장하는 브레들린이었으므로 목사가 없었다. 전도사가 되려면 신학교에 진학해야 했으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던 만큼 우선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야 했다. 검정 고시 공부를 했다. 고향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서울 살림을 시작한 뒤였다.
“새벽 우유 배달을 끝내고 배달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왔어. 늘 눈여겨 보았지. 차림도 그렇고 …그랬지만, 사람이 성실해 뵈고, 곧은 생활 자세, 신앙심 그런 거 때문에 내가 먼저 맘에 두었어. 그걸 알고 친정 어머니가 나섰지.”
서울 낙원동의 형제 교회에서 우유 배달원
돈에 매달려서
이 젊은 내외는 결혼한 이듬해인 1939년에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떠났다. 아내의 뛰어난 타자 솜씨를 밑천으로 삼아 작은 등사 인쇄소를 차렸다. 사업은 잘 되었다. 일이 빠르고 약속이 틀림없는 인쇄소로 소문이 났던 것이다.
신앙은 여일했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더 가까이 다가앉고자 하는 소망으로 신약의 복음서들을 처음 씌였던 당시의 언어, 희랍어로 읽기 위해
북경 살림 6년 만에 해방을 맞아 그 이듬해 아이 둘을 데리고 귀국했다. 원경선의 구십 평생에서 그때부터 육이오 때까지가 돈이란 것을 꽤 풍요롭게 벌어보았던 때이다. 귀국하자 곧 일제 대신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해 토목 청부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경에서 닦은 영어가 이 거래에 도움이 되었다.
돈이 벌리니까 더 벌어 보려고 미군들한테 “요리 먹이고 기생 채워주고” 했다. 비록 짧았으나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역사’하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업은 육이오 전쟁으로 끝났다.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살아남았다. 뒤이어 큰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어째서 ‘껍데기, 쭉쟁이’뿐일까?
“못되게 해서 이룬 거니까 다 망가졌다. 어느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이웃에게 전도하고, 먼 이웃에게 전도했다. 성심을 다해 거듭거듭 권면하여 마침내 교회에 나오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고는, 일요일 하루 착실히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다들 “껍데기, 쭉쟁이”들임을 확인했다. 교회 문턱을 넘어 나가자마자 ‘말씀’을 배반하고 불의와 손잡고 적당히들 살았다. 먹고 살자면 그렇게 밖에 달리 길이 없는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함께 먹고, 함께 믿으려고
경기도 소사, 오늘날의 부천에 땅부터 구했다. 개간 안 된 허허벌판의 만평쯤이었다. 이웃이 불행하면, 너, 나 모두 함께 불행해질 수 밖에 없고, 함께 일하며 먹고 살지 않고서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 수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독히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사를 11살부터 시작했다. 농사는 못난 사람이 하는 거라고 한다.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간디도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훔친 음식을 먹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농사를 선택했다.”
농장의 이름은, 녹슬고 쓸모없는 인간을 풀무질로 달구고 담근질해 쓸모있는 인간을 만드는 터전이 되자 해서 풀무원이라고 붙였다. 충남 홍성에 풀무 농업학교(오늘날의 풀무 환경 농업 전문학교)가 먼저 생겨 있었으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함께 먹고 일하는 풀무원 식구들에는 원경선의 어머니, 그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청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부터 그는 ‘원장님’으로 불렸다, 풀무원 원장 원경선.
꿈꾸는 풀무원
풀무원의 문은 늘 열려 있었다. 아니, 문이 없다는 편이 옳았다.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였다. 이른바 사회 부적응자, 인생 낙오자들, 구체적으로는 삼시세때를 해결하는 일이 다급한 사람들이 주로 풀무원을 찾아 들어왔다.
풀무원 식구가 되기로 한 사람들은 인생이 쓰디쓴 점으로만 치면 동병상련할 수 있는 이들이었으나, 삶의 궤적이 제각각이었으므로 풀무원 농장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농회의 책 한권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많을 때는 6,7십명에 이르는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었던 풀무원 농장도 시절에 맞게, 그리고 현실이 절실해서 다수확을 제일의 과제로 삼고 있었다. 농약, 화학 비료, 제초제를 멀리할 아무런 이유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한밤에 만난 고다니 준이치
유기농은 그저 ‘약’으로부터 땅과 작물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 만물을 낱낱이 분해하여 이해하려 한 환원주의의 반대편에서 자연을 거대한 유기적 체계로 파악한 데에서 출발한 농사법이다. 흙 속에 살아 숨쉬는 박테리아와, 태양으로부터 먼 길을 달려온 햇빛, 그리고 어둠, 바람, 비가 서로 무관할 수 없다는 정신 위에 유기농은 서 있다 하겠다.
자멸의 길이라는 경고
민첩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답게
“일본은 패전 후 그저 식량 증산을 위해 무분별하게 농약을 치고 화학 비료를 사용해 왔습니다. 비록 생산량 증가에는 성공했지만, 이러한 농법은 결국 모두가 자멸하는 길일 뿐입니다. 그러니, 한국의 여러분들은 제발 우리의 전철을 밟지 말아주십시오.”
고다니가 부천에 와서 한 말은 이렇게 요약된다. 간곡한 당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유기농 ‘전도’에 나섰다
원경선의 그런 지칠 줄 모르는 권유로 자기 땅에서 유기농 실험을 해보기로 작정하는 농부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그리하여 한국 최초의 유기농 생산자 단체인 정농회가 1976년 1월에 부천 풀무원 농장에서 조촐하게 결성되었다. 그뒤로도
정농회를 만들고 석달 뒤인 1976년 4월에 풀무원 농장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옥정리, 그때까지만 해도 후미진 산골로 이사했다. 부천보다 더 넓은 만오천평이었다. 그리고
“제초제 대신에 내 손으로 김매고, 농약을 안 쓰니까 내 손으로 벌레 잡고, 화학 비료를 안 쓰니까 내 손으로 퇴비를 만들었다. 새벽에 농장에 나오면 어두워질 때까지 허리 한번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가난하고 일손까지 부족한 우리 농촌에서 결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하자고 했으므로 나부터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양주 땅의 혁명가
그러나 첫해는 참혹했다. 모진 병충해가 약 안 친 채소밭을 걸레로 만들고, 벼 이삭을 반 넘어 훑고 지나가 쭉쟁이만 남겨졌다. 그 이듬해도 그보다 덜했다 할 수 없었다. 서울 변두리의 살 만한 집이 몇백만원 하던 시절에 천만원어치쯤 손실을 보았다. 풀무원 농장의 형편이 그토록 딱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기농이 뭐 하자는 짓이냐고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정농회를 탈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래도
그 땅에서 거둔 벼의 겉껍질만 벗긴 현미와 채소를 먹고부터 풀무원 농장 식구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져 갔다. 원경선의 경우에 만성 영양 실조와 호되게 앓은 간디스토마의 후유증으로 어지럼증이 심했었는데, 그 기분 나쁜 증상이 점점 개선되어 마침내 사라졌다. 아이 낳고 잠깐 쉰 것말고는 “
‘평화’에 바친 몸
서울 강남의 부인들이 풀무원의 유기농 소식을 어떻게 들었던지 양주까지 승용차로 비포장 도로를 달려 채소를 사러 오는 일이 더러 생겼다. ‘유기농’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때여서 그저 ‘무공해’라고들 했다. 1979년부터는 좀 넉넉히 심은 덕에 농장 식구들이 먹고도 남아 조금씩 팔 수 있었다. 한국 땅의 유기농산물 보급은 후미진 곳에서 그렇게 작고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을 볕을 등에 업고
농장에서 따온 토마토 한쪽을 후식으로 먹으며 “모든 세포는 다른 세포를 위해서 일한다. 그러나 암세포는 자기만을 위해 먹고 자란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는 암적 존재다.” 그런 얘기를 했다. “일용할 양식”을 빼고 나머지를 나누면서 욕심을 버리면 전쟁은 없다고 열렬히 피력하기도 했다. 겨릅대처럼 말랐으나, 휘임없이 곧은 등뼈를 똑 바로 펴고 앉아 청년 같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유기농을 통한 ‘생명 존중’, ‘이웃 사랑’과 더불어 여생을 바쳐 ‘전도’하고 실천하기로 한 기독교의 ‘주기도문’에 근거한 평화주의적 사상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딱 십분만 눈 붙이고.” 했다. 점심 뒤의 낮잠 스케줄이 다가오자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로소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뭐 지금도 당신은 그런 큰 스케일 가지고 얘기하고 그러지. 나는 뭐 일만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니까, 만족하니까 감지덕지지. 하나 불평이 없었어.”
남편이 ‘십분’ 졸러 방으로 들어간 사이 그 아내가 한 말이다. 집 밖에 세워둔 장난감 같은 전기 스쿠터를 큰아들
“내 안식구의 100퍼센트 협조 속에 풀무원 농장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일에 반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십분’, 정확했다. 잘 잤다고 했다. 수면에조차 몰입이 자유자재한 것인지. 자고 깬 사람답지 않게 말짱했다. 농장에 포크레인을 쓸 일이 있어서 나가보겠다고 했다. 아흔이라도 농부는 농부니까. 그는 칠십이 넘어 포크레인 운전 면허를 땄다. 밭에 퇴비를 좀 더 손쉽게 나르기 위해서였다.
집밖에 세워둔 포크레인에 그가 올라탔다. 아내가 창밖으로 그 모습을 내다보았다. “옛날 사진 보면 미남잔데… 지 눈에 도깨빈가? 호호” 그러나 저러나 기워 둔 나비채는 가지고 탔을까? 포크레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등에 또 가을볕이 업혀 따라갔다.
(2003년에 썼다.)
출처 :생태농장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이내선아(1기) |
첫댓글 2013년 1월 8일 100세를 일기로 소천 하심
진한 '사람'으로 사셨군요.
향기로운 '사람'이셨던 어른,
존경합니다.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