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주색에 빠져 정사 외면, 신하들에 피살-
-김양상/왕의 무능함에 반기, 병사 일으켜 제거-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한때 전성기를 누렸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탄탄한 왕실의 초석 을 마련했다. 재위 2년(682)에는 국학을 설립해 충·효로 무장된 신 하들을 양성했다. 정치·군사 면의 제도적 정비도 꾀했다. 재위 5년 (685)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고 9서당의 군대를 마련했다. 또 녹읍을 혁파해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효소 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대의 안정된 정치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 다.
그러나 신라도 후기로 들면서는 쇠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극 심한 왕위쟁탈전이 개시된 것이었다. 경덕왕대 녹읍의 부활로 귀족 세력의 각축이 표면화됐다. 그것은 혜공왕대에 시작된 귀족들의 싸 움에서 비롯했다. 혜공왕은 나이 8세로 즉위했으므로 그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괴이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 났다.
어느 마을에서 다리가 다섯 달린 송아지를 낳았는가 하면 강주(현재 의 진주) 관청의 동쪽 땅이 꺼져 연못이 됐는데 그 크기가 가로 7 척, 세로 13척이나 됐다. 또 유성이 왕궁 동쪽에 떨어졌는데 그 머리 는 항아리만하고 꼬리는 3척가량이나 됐다. 호랑이가 궁궐 안으로 뛰어들어오기도 했다.
어린 왕은 두려움에 떨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어찌 이러한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속으로는 그것이 왕태후가 정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말 을 할 수 없었다. 왕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울부짖듯이 말했다. “왜 아무 말들이 없으시오. 그러면 일관(日官)이 말을 해보십시오. 그대 는 음양오행과 하늘의 이치에 밝은 사람이니 지금 같은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말해보시오.” 일관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가끔씩 일어 나는 현상입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다만 전하께서 는 크게 사면령(赦免令)을 내리시어 천기를 바로잡기 바라옵니다.”
그날로 혜공왕은 죄질이 무거운 사형수 이외에 가벼운 죄수들을 모 두 풀어주는 대사면령을 반포했다. 사면은 왕이 하늘에 잘못을 비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농경국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을 확 보하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변괴는 그치지 않았다. 황룡사 남쪽에서 지진이 일어나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았으며 왕궁에 있는 샘이 말라 물을 마 실 수 없었다. 이러한 자연재해는 왕이 천명에 따르지 않고 음양오 행을 거슬렀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른바 하늘의 꾸짖음이었 던 것이다. 이를 천견(天譴)이라 했다.
특히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에는 참새가 무수히 몰려들었다. 대공은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가로 그의 휘하에는 많은 사병이 있었다. 아 는 사람은 이들 참새가 출세를 노린 자들이라 생각했다. 또 〈안국 병법(安國兵法)〉에는 이러한 변괴가 있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혜공왕 4년(768) 7월 대공은 대렴이란 자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 휘하의 사병들을 모아 왕궁을 포위하고 왕을 위협했다. 이 여파로 전국에 있는 96명의 귀족들이 패를 나누어 싸 우는 난국이 벌어졌다. 그러한 사태가 무려 33일이나 계속됐다. 왕과 태후는 당황했으나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려 왕당군(王黨軍)을 모집 한 뒤에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을 미리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표훈대사였다. 표훈 은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스님이었 다. 경덕왕은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비를 폐하고 만월 부인을 후비로 맞이했다. 어느날 경덕왕은 대사를 불러 말했다. “내 가 복이 없어 아들이 없으니 대사가 옥황상제에게 부탁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 표훈은 명령을 받고 하늘에 올라가 상제께 이 사 실을 고하고 내려와 왕을 알현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은 될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합니다.” 왕은 난감해하며 다시 말 했다.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될 수 있게 해주시오.” 표훈은 다시 올 라가 상제께 간청했다. 그러자 상제가 말했다. “간청하니 할 수 없 지만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그래도 좋다고 했다. 이에 아들을 얻었다. 그가 혜공왕이었다. 〈삼국유사〉에 있는 이야기다.
대공의 난을 겪고 난 후 태후와 왕은 정국을 일신하려 했다. 그리하 여 국정의 책임자를 갈아치웠다. 신유를 상대등(현재의 국회의장에 해당)에 임명했으며 김은거를 시중(현재의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잠시 왕은 점차 여색에 빠지기 시작했다. 정 사는 외면한 채 놀고 마시는 데 세월을 보냈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반란도 끊이지 않았다. 혜공왕 6년(770)에는 대아찬(신라 17관등 중 5위) 김융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 하위에 있던 관직자까 지도 왕을 우습게 본 것이다. 이를 막지 못한 것이 시중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은거를 퇴출하고 정문(正門)을 새로이 시중에 임명했다. 혜공왕 10년(774)에는 김양상(金良相)을 상대등에 임명하 고 이듬해에는 김순이 시중직에 올랐다.
그러자 김은거와 정문이 반발했다. 이들은 둘 다 시중직에 있던 자 들이었다. 자신의 무능은 깨닫지 못하고 신하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혜공왕의 행태가 한심했다. 국정의 총책임자를 제 마음대로 갈아치 우는 태도도 못마땅했다. 그들은 드디어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김양 상이 가까스로 이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역시 믿을 만한 사람은 김 양상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는 도탄에 빠졌고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다.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혜공왕 13년(777) 김양상은 왕을 알현했 다. “전하! 오늘은 제가 목숨을 걸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정사가 매우 혼미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 께서는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계십니다. 하루 빨리 덕을 닦고 떨쳐 일어나시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시옵소서.” 그러 나 혜공왕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던 것이다. 겨우 취한 조치가 김주원을 새로 시중에 임명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김지정이 반기를 들었다. 왕은 이제 허수아비 나 다름없었다. 무리를 모아 궁궐을 포위하고 왕족들을 범했다. 왕의 목숨도 이제는 풍전등화 같았다. 그러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김 경신과 더불어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거병했다. 그들은 군대 를 이끌고 김지정을 공격해 그를 살해했다. 기세가 오른 그의 군대 는 이제 저 무능한 왕을 갈아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혜공왕 은 병사들에게 피살됐다. 그 뒤를 이어 김양상이 왕위에 즉위했다. 그가 곧 선덕왕(780~785)이었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10세손이었다. 17대 내물왕은 아들이 넷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는 3대 이상을 가지 못했다. 장자였던 눌지왕이 뒤를 이었고 자비왕·소지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22대에는 내물왕의 막내 아들 계열에서 왕이 나왔다. 지증왕이 그였다. 이후 그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해왔다. 그러다 이때에 와서 내물왕의 직계 가 다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혜공왕과 김양상. 그들은 왕과 신하의 관계였다. 그러나 신하들도 왕 이 무능하면 그 곁을 떠나는 것이다. 언제까지 권위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그에 걸맞은 통치력과 지도력을 갖춰야 하는 것 이다. 그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인물은 떠나고 민심은 가 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