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파노라마 #13]
구약성경의 생활 원리 1 – 출애굽기,민수기 : 영적인 출생과 불신앙의 징벌
출애굽기
출애굽기는 히브리 민족의 두 가지 구출, 곧 애굽으로부터의 육신적 구출과 애굽과 시내산에서의 영적인 구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는 350만에 달하는 유대 민족이 바로(Pharaoh)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적인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부분에 더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베푸신 가장 강력한 이적의 하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바로를 강요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도록 하신 것인가? “네”라는 대답은 정확한 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환경(주로 ‘재앙’이라고 한다)을 주셨을 때, 자발적으로 결정한 사람이 바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영적으로 구출하신 것이 더 큰 이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구원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그들이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상기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오신 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출애굽기 19장에서 민수기 10장에 이르기까지 총 59장에 걸쳐 가르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출 19:5,6).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그들의 육적 출생은 그들의 영적 출생의 서곡(序曲)이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상류층 인사이며 종교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라고 말씀하면서 가르치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성인이 된 사람이 다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게 가능하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가지 다른 출생, 곧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육적 출생과 오직 초자연적으로만 발생하는 영적 출생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신은 육적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가? 우리가 부모님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람이 위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애굽에 있던 유대인들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죄로 가득한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를 때에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민수기
민수기는 광야의 두 세대에 대해 기술한다. 이전 세대는 불신앙의 완고한 마음을 품어 광야에서 유랑하다 죽었으며(히 3:7-12), 그 다음 세대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며 살다가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당도했다(민 14:31).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의 구세대들(당시 20세 이상)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계속 진군하여 가나안 땅을 달라고 믿음으로 구할 것인가?’
결국 그들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여 구세대와 신세대 모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던 구세대들은 40년 동안 하루 평균 82번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롬 6:23)을 신세대들에게 효율적으로 가르치셨다.
왜 40년이었을까?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탐지하였는데, 하나님께서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광야를 유랑하게 하셨기 때문이다(민 14:32-35).
하나님은 모든 시대에 자기 백성들을 향해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키워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구약의 압권은 단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이와 유사한 절정을 이루는 부분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대목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인 베드로를 매우 칭찬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에 대한 믿음을 조건으로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민수기는 사랑이 충만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믿지 않는 자녀들을 징벌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민수기의 가장 큰 원칙이다. 그러나 핵심은 징벌 그 자체가 아니라 징벌을 통한 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듯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기를 바라신다. 일단 하나님의 ‘가족훈련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책임지신다. 우리 모두 믿음의 학위를 취득하고(이생에서 하지 못한다면 내세에서는 분명히) 이 학교를 졸업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징계가 하나님의 싫어하심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뜻한다(히 12:1-12).
이스라엘의 어린 세대들은 부모들과 함께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지만 약속의 땅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처럼 부모들의 불신앙이 자녀들의 운명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린 세대 중에서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동시에 두 세대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셨다.
그들은 40년 동안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모세는 광야 여정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생존자들에게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29:5,6)라고 말했다. 그들 중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타는 듯 뜨거운 광야에서 40년 동안 신을 신발과 입을 옷을 구할 데가 있었을까? 모세는 그들의 옷이 낡지 않았고 신발도 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우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마음을 쓰시는 사랑의 아버지이다.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하실 때라도 결국에는 지극한 사랑을 확신시켜주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공급하심과 임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이라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겠는가? 당신이 출애굽과 홍해의 이적과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에서 나온 물, 2년에 걸친 시내산의 계시를 경험해왔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당신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불신앙으로 광야를 유랑하다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스라엘의 구세대처럼 선택하겠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늘 아버지를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의 구세대 중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취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