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깊어가는 가을, 방울 소리 예쁘게 피어난 꽃
[2010. 9. 20]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쪼로롱 방울꽃이 혼자 폈어요.
산새들 몰래몰래 꺾어갈래도
쪼로롱 소리날까 그냥 둡니다.
생각나시나요? 아이들이 부르던 이 동요 말입니다. 방울꽃이 예뻐서 산새들 몰래 꺾어가려다 방울 소리 날까봐 그냥 둔다는 예쁜 노래입니다. 2절에서는 이 방울꽃이 드디어 소리를 와장창 쏟아낼 듯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지지요. 2절도 함께 불러드리겠습니다.
산바람 지나가다 건드리면은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지겠다.
산노루 울음소리 메아리치면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지겠다.
이리 예쁜 노랫말을 지으신 분은 동시작가 임교순 선생님입니다. 이 노랫말에 이수인 선생님이 곡을 붙여 1950년대에 발표한 이 노래의 제목은 ‘방울꽃’입니다. ‘쪼로롱’ 하는 예쁜 방울 소리를 낼까봐 꺾어가고 싶었지만 산새들에게 들킬까봐 참아야 했다는 방울꽃이 바로 위 사진의 꽃입니다. 깊은 산 속에 홀로 피었다가 바람이 건드리거나 노루 울음소리 메아리치면 따라서 ‘쪼로롱’ 하고 맑은 방울 소리를 쏟아낼 듯한 꽃입니다.
가을 바람 불어오면 피어나는 우리 토종 식물 방울꽃(Strobilanthes oliganthus)은 제주도의 한라산 지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서 습기가 있는 그늘에서 자라는 풀로, 우리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옛 사무실에서 겨울정원(Winter garden) 쪽으로 오르는 좁다란 길섶에 심어져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층층나무를 비롯한 몇 그루의 큰 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그늘이 드리우는 곳이지요.
방울꽃은 30센티미터에서 60센티미터까지 자라는데 대개의 초본식물들이 그렇듯이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게 되는 평범한 풀입니다. 그러나 9월 들어 자줏빛의 꽃이 피어날 때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닌 까닭이기도 하지만, 길이 3센티미터의 통 모양으로 피어난 꽃 모양이 남다르기 때문이지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짧은 수명의 꽃이지만, 가을 햇살을 받고 반짝 피어난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종 모양으로 피어나는 꽃이 방울꽃만 있는 건 아니지요. 무엇보다 초롱꽃(Campanula punctata)을 비롯한 초롱꽃과에 속하는 대부분의 식물의 꽃이 종 모양의 꽃입니다. 하지만, 초롱꽃을 보며 종 소리를 떠올린 적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꽃이 피어나는 방향 탓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거개의 초롱꽃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피어나는데, 이 방울꽃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입을 활짝 벌리거든요. 그게 마치 옛날 두부장사가 짤랑거리던 종을 떠올리게 하지 않나 싶은 거죠.
게다가 방울꽃을 보게 되면, 어린 시절에 부르던 동요 ‘방울꽃’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방울꽃은 노랫말처럼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금세라도 청아한 종 소리를 낼 듯한 생김새로 피어납니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맑은 종소리입니다. 수목원의 방울꽃들도 그렇게 금세라도 쪼로롱 소리를 낼 듯 고개를 쳐들고 지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붙들었습니다. 꼭 그런 건 아닌데, 우리 방울꽃들은 홀로 피어있기 보다 두 송이가 사이좋게 붙어서 피어난 게 더 많았습니다.
방울꽃 꽃송이의 끝 부분은 다섯 개로 부드럽게 갈라졌는데, 그게 여느 꽃송이처럼 규칙적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나눠졌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을 더해줍니다. 꽃송이 안에 돋아난 하얀 꽃술들도 굳이 유난스럽지 않게 쪼로롱 편안한 종소리를 울릴 듯합니다. 오래도록 우리 마을 주위를 돌며 짤랑 소리를 들려주던 두부 장사 아저씨의 편안한 종소리가 이 방울꽃 송이를 바라보며 연상하게 됩니다. 영락없는 우리네 토종 식물입니다.
방울꽃은 그다지 쓰임새가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봐도 고작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의 사료로 쓴다는 이야기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쓰임새가 적어 천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는 이 꽃을 놓고 지어진 동요 ‘방울꽃’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건 그래서입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 꽃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그 꽃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으셨기에 그런 아름다운 노래를 지을 수 있었겠지요.
방울꽃이 쓰임새보다는 예쁜 꽃 때문에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식물이라면, 황칠나무(Dendropanax morbiferus)는 쓰임새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식물입니다. 이름 그대로 황칠나무는 황금 색의 칠을 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인 식물입니다. 황칠나무의 줄기 껍질에 상처를 내서 수액을 받아낸 뒤, 그 수액을 정제하면, 귀한 염료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황칠나무의 수액의 염료로 내는 빛깔이 워낙 화려해 고려시대 때에는 아예 ‘금칠’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 수액은 멀리 몽골에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황칠의 전통은 이어졌습니다만, 요즘에는 우리의 토종 나무인 황칠나무가 희귀한 나무가 된 까닭에 황칠을 이용하지는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 전통 황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늘어났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황칠나무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황칠나무를 이야기할 때에 반드시 이야기하는 시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황칠’이라는 시입니다.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잔 넘칠 정도. 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 잘 익은 치자 물감 어찌 이와 견주리오”라는 시입니다. 옛날의 칠 가운데에는 옻칠이 민간에서 널리 쓰였지만, 황칠은 그보다 훨씬 고급이었습니다. ‘옻칠이 천년이면 황칠은 만년’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겠지요. 그래서 황칠은 대부분 고급 공예품을 칠하는 데에 썼습니다. 칠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 그 칠이 만년을 간다고 했던 것입니다. 황칠을 이용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었는데, 지난 2007년에 경주 계림 북편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에서 바로 이 황칠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방울꽃 사진 아래로 이어진 세 장의 사진은 황칠나무의 꽃과 어린 열매의 사진입니다. 바로 위의 사진은 아직 입을 열지 않은 황칠나무의 꽃송이입니다. 입을 열기 직전이어서, 가만히 바라보면 꽃잎의 꼼지락거림이 보이실 수도 있습니다. 입을 열면 다섯 장의 황록색 꽃잎이 다섯 개의 수술과 함께 앙증맞게 벌어집니다. 꽃송이 하나가 겨우 5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되지만 여러 송이가 함께 모여 피어나기 때문에 화려하게 보입니다.
그 위 두 장의 사진은 꽃봉오리와 어린 열매가 함께 보이는 사진입니다. 끝 부분에 작은 돌기가 나있고, 작은 도토리처럼 생긴 것이 모여있는 것이 어린 열매이고, 뒤쪽으로 조금 작고 부드럽게 생긴 것이 꽃봉오리입니다. 황칠나무는 꽃과 열매도 나쁘지 않지만, 저는 싱그러운 잎이 더 좋습니다. 잘 자라면 15미터 정도 자라는 황칠나무의 푸른 잎은 상록이지만, 그리 두껍지 않고 부드럽습니다. 햇살 좋을 때에는 햇살이 비칠 정도로 얄팍하지요. 그 상큼한 빛깔의 단정한 잎이 좋습니다.
지난 주에 저는 작업실을 옮겼습니다. 주로 책으로 된 세간이 많아 이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잘 옮겼습니다. 평수는 세 평이나 줄어든 작은 방이지만, 창밖으로 멀리 성주산의 낮은 능선이 내다보여 좋습니다. 게다가 지난 3년 동안 이용하던 작업실이 북서향이어서 겨울이면 손이 곱을 정도로 추웠는데, 새 작업실은 남향이어서 햇살까지 따뜻합니다. 새 작업실에서 더 좋은 콘텐츠 작업 이룰 수 있도록 더 애쓰겠습니다.
벌과 나비도 모두 떠난 가을입니다. 바람 찬 이 계절에 꽃을 피우는 식물도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 우리 토종 식물인 팔손이가 있습니다. 벌과 나비가 없는 이 때에 팔손이의 꽃가루받이는 파리가 맡아서 해 준답니다.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이지 싶습니다. 팔손이 이야기는 지난 주의 신문 칼럼(신문 칼럼 다시 보기)에 짤막하게 썼습니다.
이제 가을 깊어졌습니다. 길가에 코스모스도 아침 저녁의 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쓰러진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건강 조심하시면서 이 가을 더 풍요롭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첫댓글 쪼로롱 방울소리 쏟아지면 행구가 주머니에 가득채워 주워가지요.
예쁜글이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되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방울꽃, 황칠나무, 코스모스까지 잘 보고 갑니다.
방울꽃은 남쪽에서 자라는 거라 저도 아직 못 봤어요. 황칠나무는 보길도에서 봤고요.
보길도에서 밭에서 묘목가꾸는 할머니께 무슨나무인지 여쭈어 봤더니 황칠나무라고 하시더군요. 약용으로 재배한다고 하더군요. 염료로 사용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이 잘 되더군요.
이름 그대로 황칠을 만드는 데 썼다는데 요즘은 수요가 줄어서 잘 키우지 않는다고 해요. 그런데 보길도에 가니 커다란 나무가 있더라구요.
방울꽃? 아무리 바라보아도 방울처럼 안 생겼는데 왜 방울꽃일까요~?
활짝 핀 걸 정면에서 보면 그렇게도 보이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