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지상명령
마가복음 16:15-18
옥한흠 목사님이 적극 추천한 "새들백교회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목회자 부분 베스트셀러가 된 유명한 책인데,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그 교회의 모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계명(the Great Commandment)과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대한 위대한 헌신(a Great Commitment)이 위대한 교회(a Great Church)를 만든다."
언젠가 울산시민교회에 갔을 때 현관에 금빛 글씨로 새들백교회의 모토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계명"은 마태복음 22:37-40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위대한 명령"은 흔히 지상명령으로 불리는 마태복음 28:18-20절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예수님의 대위임령, 혹은 지상명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이곳 한 곳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도행전 1:8절에도 나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단지 명령만 나오지만 이곳에는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순종해야할 사항이 나옵니다. 바로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 더 잘 나타납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여러분 이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나가라"는 명령이 있기 전에 "유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유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나가라는 명령에 효과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하라는 명령에 먼저 순종하고 그 다음에 나가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순서를 지킬 때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사도 바울처럼 사역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이처럼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의존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도시들이 진동하고 나라들이 진동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1000배는 더 중요합니다. 그마만큼 효과가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받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또 하나의 지상명령인 마가복음 16:15-18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저는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재조명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우리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단면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지상명령의 제1면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가 "사도시대 이후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복음전도자"라고 평가한 까를로스 아나콘디아의 최신간 "영광스런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분부하셨던 대 선교 명령의 말씀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①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
②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
③ 새 방언을 말하는 것.
④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자가 낫게 되는 것(마가복음 16:15-18).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이 네 가지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즉, 복음이 전해지고, 귀신이 떠나가고,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며, 병자들은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매일 밤 집회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하고 또, 치유를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까를로스 아나콘디아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저의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째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것은 순서 상으로만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라인하르트 본케 목사님은 "교회는 생명 구조선이지 유람선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지 않는 교회는 그 자체가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복음 전파자의 직분을 재확인할 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다음 몇 가지 사항에 주의해야 합니다.
(1) 우리는 다른 복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지난 4월 27일 세간의 관심을 끈 김수환 추기경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 특강이 있었습니다. 이번 특강은 김용옥 교수의 초대로 이뤄졌는데 그 동안 김용옥 교수의 기독교 폄하 발언에 비춰 '좋은 뜻이 없는 자리'로 많은 우려가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왔다" 할 정도로 그의 참석에 많은 반대가 있었음을 직접 시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개인적으로 최근의 TV 프로그램이 너무나 오락적이고 상업적인데 비해 도올 강좌는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에서 이번 초대에 응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반 기독교적인 도올의 프로를 보고 좋은 프로그램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도 이런 것쯤은 인사치레라고 좋게 보아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특강이 끝나갈 무렵에 발생했습니다.
도올이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다"라고 말하자 김 추기경은 "불교를 믿던지, 아니면 타종교를 믿던지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되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한국 카톨릭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런 말을 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라고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저는 이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카톨릭 교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저들 무책임한 이리들에게 영혼들을 맡겨둘 수는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할 뿐 아니라 저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 가득차 있는 카톨릭 교회를 대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는 아르헨티나에 있는 미래의 비전이라는 교회입니다. 그 나라는 국민의 90% 이상이 카톨릭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신 유명한 오마르 카브레라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은 카톨릭교인들을 전도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그의 말이 이해가 갑니다.
(2) 나가기 싫어도 나가고 전하기 싫어도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일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여러분 중에 직장에 정말 일하러 나가고 싶어서 매일 출근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밥하고 설거지하고 싶어서 그 일을 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학생들은 학교에 나가고 싶어서 학교에 나갑니까? 아닙니다.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전파는 더욱 그러합니다. 전도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러 나가기 싫어도 전도하고 전도하기 싫어도 전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3) 우리는 성경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을 교회까지는 데리고 나왔으나 천국에는 인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의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눅 11:32)
여기 "요나의 전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요나의 전도란 한 마디로 회개를 촉구하는 전도를 말합니다. 회개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 못지 않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려면 믿음만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강조하는 요나의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어떤 사람들은 회개를 강조하면 복음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인 누가복음 24:45-4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전할 뿐 아니라 반드시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쳤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회개를 촉구해야 하며 우리들 자신도 회개해야 합니다.
(4) 우리는 불신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영혼 구원을 위해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때부터 나름대로 전도를 해왔습니다. 주일학교 때는 한 동네 아이들을 전부 전도해서 몇 차례 연거푸 전도왕 상을 받았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도 급우들에게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군 생활을 할 때는 200명 이상에게 결신기도를 따라하게 했으며, 보초를 서는 시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열매가 별로 없었습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름대로 계속 전도를 했는데 왜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최근 나온 에드 실보소 목사님의 "기도 전도"라는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드 실보소는 그 책에서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합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먼저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과 화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중요하다.
첫째 이유는 싸웠기 때문에 화평을 구해야 한다. 종종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에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식의 전도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죄인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불신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다. 이런 우리의 호전적인 태도는 공생애 시절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워지던 예수님과 반대되는 것이다."
에드 실보소 목사님은 자기가 불신자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 10장을 자기 이웃들에게 적용하면서부터 자신이 얼마나 호전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평소 이웃에게 그들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이웃의 죄를 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미혼모에 대해 언짢은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딸들에게 좋은 예가 되지 않으니 이 여인이 이러저러하게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시끄럽게 싸우는 부부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우울증에 시달려 정원 관리를 하지 않은 이웃 집 때문에 자신의 집 값까지 떨어지게 생겼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마약 중독된 청소년이 마을에 얼마나 해로운 존재인가를 하나님께 말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에드야, 나는 네가 이들에게 전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구나." 놀란 그가 물었습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이세요?"
주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와 내가 가까운 사이인 것을 이들이 알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상처받을 때 나도 상처를 입는단다. 나는 이들에게 다가가며 은혜를 끊임없이 베푼단다. 나는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태양을 비추는 하나님이다. 나는 이들을 사랑한단다. 하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이들을 꺼리지. 너는 이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기보다는 이들을 벌하는 검사의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증인의 역할을 하지."
그리고 주님이 그를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에드야, 네가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들을 네게 맡길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에드 실보소는 그의 책에서 또 이런 말을 썼습니다. "전도할 때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하는 것이다. 이 태도는 잘못일 뿐 아니라 불신자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불신자와 우리의 사이를 더 멀게 만든다. 게다가 이것은 불신자들과 예수님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예수님은 항상 죄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을 보이셨다. 삭개오나 간음하다 걸린 여인처럼 큰 죄를 지은 죄인일수록 예수님은 진심으로 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은 불신자라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는 에드 실보소의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름대로 복음을 전해 왔지만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릭 조이너는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순수한 진리는 언제나 끄는 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에드 실보소의 말대로 "사랑 없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심한 냄새가 나는 입으로 키스를 하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분노나 미움을 마음에 품고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부정적인 접근은 하나님이 세상을 정죄하지 않고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는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른 하나님의 사신이 되려면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불신자에 대한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사랑 충만을 받고 사랑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러면 보다 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지상명령의 제2면은 "귀신을 내어 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그러므로 내가 가서"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권세가 교회에 즉 믿는 자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권세자입니다. 이 권세는 영혼구원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지상명령에는 권세의 사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이 주신 권세를 사용하여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들을 내어쫓아야 합니다. 권세를 사용하여 귀신을 대적할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귀신을 대적해야 합니다.
(1) 불신의 귀신을 묶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장차 위대한 전도자가 될 바울에게 영혼 구원에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5-18)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영혼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먼저 눈이 뜨여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그렇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이 말은 불신자들의 눈이 감겨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불신자들의 눈은 감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불신자들의 눈을 가리는 세력은 "이 세상 신"이라 불리우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더러운 귀신들입니다. 그러므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려면 이러한 귀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므로 그들의 활동을 중단시키고 불신자들의 눈이 뜨여지도록 해야 합니다.
지난 번 세계적인 복음전도자인 까를로스 아나콘디아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저는 그가 "사탄아 내 말 잘 들어!"하면서 불신의 귀신들을 강력하게 꾸짖고 결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또 저는 최근에 김경수 목사님으로부터 한 주간 내내 신자들의 남편들에게 역사하는 불신의 귀신을 꾸짖고 공격했는데, 그 결과 윤미자 집사님 남편이 지난 주 교회에 나왔고 다른 남편들에게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신의 귀신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가 불신의 귀신들을 공격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한 번 두 번 해보고 '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아마 나에게는 이 진리가 역사하지 않나 봐' 이렇게 생각하고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투경기를 할 때 한 번 두 번 때려보고 어 안 넘어지네 하고 공격을 그만 둔다면 절대로 상대 선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쓰러질 때까지 계속 공격해야 합니다. 전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길 때까지 계속 공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의 귀신을 공격할 때도 귀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놓을 때까지 계속 기도와 명령으로 공격해야 합니다. 남편이나 가족들이 믿지 않아 고민하는 분들은 이 말을 귀담아들으시고 꼭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악한 영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2)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것은 예수님의 주된 업무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면 외형적으로 보면 무당 푸닥거리하는 것 같고 점잖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와 교회들이 이런 일을 기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와 믿는 자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귀신을 내쫓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어떤 사람들이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조롱했습니다. 귀신도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마치 깡패들의 세계에서 보스가 꼬봉 보고 "야! 너 나와. 형님이 좀 들어가야 하겠다"라고 말하면 그 기세에 눌려 자리를 비킬 수밖에 없는 것처럼 힘이 센 귀신이 약한 귀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고승이나 무당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좋아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반면에 예수 이름으로 하는 축사는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이와 같이 축사의 결과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축사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단의 나라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사역입니다. 귀신의 영토였던 그 사람의 영혼을 되찾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축사 사역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연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1-22장)
어떤 사람의 영혼은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어서 축사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도무지 그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축사가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축사사역은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서처럼 필수적인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축사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축사 사역을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자신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귀신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믿지만 자신이 예수이름으로 귀신에게 명령하면 귀신이 나갈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는 귀신을 쫓을 수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능히 군대귀신이라도 내쫓을 수 있습니다.
(3) 지역 귀신의 머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오마르 카브레라 목사님입니다. 제가 오마르 카브레라 목사님에 대해 처음으로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수년 전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예배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였습니다. 그대 조용기 목사님은 남미에 오마르 카브레라라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가 기도하자 귀가 없는 어린아이가 그 자리에서 귀가 생겨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소개했습니다. 그후 저는 피터 와그너 박사의 책에서 그분에 대한 소식을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의 책에 보면 오마르 카브레라 목사님에 관해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오마르 카브레라는 어느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미리 그 도시의 호텔 방을 하나 잡아놓고 두문불출하고 들어가서 금식하며 깊이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도시를 다스리는 정사와 권세의 정체를 파악하고 기도로써 그 세력을 묶어버립니다. 그 후에 그는 집회 장소에 나타나 복음을 전하는데 그렇게 하면 그가 설교도 하기 전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자들이 낫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강단 앞으로 몰려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다른 사람의 설교나 책을 통해 오마르 카브레라 목사님에 관해서 가끔씩 들었으나 그분의 설교나 글을 직접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피터 와그너와 바블로 데이로스가 공저한 "아르헨티나의 폭발적인 부흥운동"이라는 책이 나왔고 그 책에서 비로소 오마르 카브레라의 글을 직접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오마르 카브레라의 글이 10여장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 일부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복음 전파와 영적 전투.
나는 성령께서 구원의 메시지 선포에 수반되는 큰 기적들과 치유의 역사로 온 도시들과 사람들을 방문하고 계신다고 확신하였다. 1970년대 나의 사역 기간에 마치 내 눈앞에서 베일이 걷히는 것 같았다. 나는 교회의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무리들이 복음에 응답한다면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영적 전투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에 실제적으로 어떤 크리스천 지도자도 영적 전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는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 체험을 통하여 중보기도가 우리 사역에 지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는 것임을 발견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영적인 세계에서 내가 사역할 수 있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오직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 썩지 않을 씨앗이 궁핍한 자들의 심령에 효과적으로 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전투기도의 의미를 상세하게 고려하는 것, 즉 정사와 권세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데에는 나에게 배정된 것 이상의 공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개인적 체험으로 볼 때 영적 전투는 근본적이다... 원수와 능동적인 교전이 없는 전도는 한쪽 노만 저으며 배를 운행하려는 것과 같다.
나의 경우를 볼 때 금식과 기도를 한 후에 영적인 어두움으로 사람들과 도시들을 장악하고 있던 악령들을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관심으로 특징을 이룬 지역들이 갑자기 개방되고 불신의 세력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는 성령에 이끌려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심령에 영접하는 무리들을 보았을 때 계속 놀라고 경이감으로 충만하였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로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방법은 동일하였고 결과도 동일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원수의 영토를 침투할 수 있음을 알았다. 복음에 완전히 닫혀 있고 무관심했던 많은 곳들이 즉각 옥토와 같이 열렸다. 복음의 전파는 종교적 전통 세력을 파괴했고, 무관심은 허물어졌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자랑하던 자들도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한 도시를 지배하는 어두운 세력의 정체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이 항상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술과 주술 종교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회에 참석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사탄 숭배의 본거지들은 그 도시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로 소멸되었다. 더욱이 주술종교의 지도자들 중 대다수가 자살하거나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 교회의 주보 제 1면에 보면 "우리 교회는?"이라는 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몇 달 전에 바뀌었습니다. 그곳에 보면 제일 처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 우리 교회는 영적 전쟁을 통해 울산의 정사와 권세를 무너뜨리고 울산을 예수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교회입니다."
일전에 까를로스 아나콘디아의 집회에서 하나님께 선지자로 기름 부음을 받은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예언하기를 하나님이 저를 영적 전쟁하는 자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가 얼마 전에 이상한 꿈을 한 가지 꾸었습니다.
꿈에 울산 선 바위 상류를 보았는데 그렇게 경치가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하기를 여기가 "울산의 입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물 속을 들여다보니 큰 바위인데 하늘을 향해 주먹을 움켜쥔 커다란 돌의 형상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틈 사이와 주먹 둘레에 꼼장어들이 칭칭 감겨 있었습니다.
그후 손을 씻기 위해 좀더 위의 물로 나아갔는데, 저희 할머니가 쑥이나 냉이 같은 나물을 캐려고 저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자연스럽게 나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풀 한 포기 없이 황무지와 같이 황량했습니다. 단지 누군가가 심어 놓은 듯한 시금치 포기가 마치 논두렁에 콩을 심어 놓은 듯 뛰엄뛰엄 자라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그것을 나물 캐듯 캐면서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남이 심어 놓은 것을 캐도 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꿈의 의미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고 있는 물 속에 있는 바위 손은 정사와 권세가 울산 시민들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뱀을 닮은 꼼장어들은 이 정사와 권세들의 지배아래 있는 악한 영들과 귀신들입니다. 그리고 들에 쑥이나 냉이 같은 나물이 하나도 없고 누가 심어 놓은 시금치 몇 포기 밖에 없었던 것은 울산이 악한 정사와 권세에 의해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타 도시처럼 자연스럽게 종교를 선택하면서 기독교인이 되는 그런 일은 거의 없고 전도해야만 사람들이 한 둘씩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울산의 영적인 분위기와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울산의 실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사와 권세와 악한 영들을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래리 리 박사의 선례를 따라 우리는 울산의 동서남북을 향해 "동쪽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들을 놓을지어다! 서쪽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들을 놓을지어다! 남쪽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들을 놓을지어다! 북쪽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들을 놓을지어다!"라고 강력하게 명령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울산의 영적 분위기가 바뀌고 승리할 때까지 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울산 시민들을 우상숭배와 불신으로부터 돌아서게 해야 합니다.
3. 지상명령의 제3면은 "새 방언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방주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우리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되는 박순옥 성도님이 참석했다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밤에는 까를로스 아나콘디아의 비디오를 보고 기도하다가 이미진 성도님이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중에는 은금자 집사님이 "부활의 영광"이라는 저의 설교 테이프를 듣다가 방언을 받았고 오진혜 집사님은 구역예배를 드리다가 방언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방언을 합니다. 그러면 방언은 무엇일까요? 방언은 성령세례의 가장 대표적인 표적입니다. 오순절날 120문도가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방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간주해도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방언에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지식적인 사람일수록 더합니다. 제가 볼 때에 이것이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의 약점입니다. 육체보다 정신적인 세계가 더 우월합니다. 그래서 육체노동을 하는 소위 노가다나 근로자들보다 정신노동을 하는 변호사, 의사, 대학교수들의 수입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정신이 인간의 최고 분야가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 위에 영이 있습니다. 그리고 육보다 정신이 우월하듯이 정신 보다 영이 훨씬 더 우월합니다. 그러므로 조금 더 배웠다고 하는 정신적인 능력으로 영의 세계를 판단하려는 것 자체가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고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얼마 전 목요 기도회 때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따라 성도님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조명 즉 빛을 비춰주심이 필요하다.
첫째,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는데 그 성경을 이해하는데 성령의 조명이 절대 필요하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눈멀어 있다. 일 예로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눈멀어 있었다.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자신을 보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하다.
셋째,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기도할 제목에 대한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하다."
진실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방언 기도입니다. 방언은 지성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의 무지를 뛰어넘어 꼭 필요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이처럼 방언은 마음이 아닌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영은 인간의 마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방언기도에 대해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비밀입니까?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비밀입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을 그 사람의 영은 압니다. 저는 인간의 영은 자신의 상태와 마땅히 빌 바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방언기도의 효과에 대해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말한 것입니다. 방언 기도는 이와 같이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멸시하거나 방언 말하기를 금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할 수 있는 한 방언으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한 말씀드립니다.
돈 던컬리 목사님은 "방언은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어떤 영적 거물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6:17절의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새 방언을 말하며"라는 말씀을 근거로 "예수께서도 모든 성도에게 나타날 표적으로서 방언을 언급하셨다"고 썼습니다. 참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은사이며, 여러분도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구하면 당장 받게 된다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편, 고린도전서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방언과는 달리 사도행전 2장에 120문도들이 했던 방언은 실제 이 세상에 있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자기 지방 언어로 그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대인방언'이라 하는데 이 대인방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보다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신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인방언을 하는 사람은 만나보기 힘듭니다. 책에서나 한 번씩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대인방언이 실제 있기는 있는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인방언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런 일은 사도행전 2장에서 최초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단 한번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알반 부틀러'(Alban Butler)의 "교부들, 순교자들, 그리고 성자들"이란 책에서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도미니칸 설교자 '빈센트 훠러'(Vincent Ferrer)는 1400년 초엽에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약간 배운 것을 제외하면 자기의 모국어인 발렌시어(Valencian) 외에는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희랍인들, 독일인들, 사르데스인들(Sardes), 헝가리인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보다 최근에도 일어났습니다. 1985년 피터 와그너는 '제임스'(James)와 '제이미 토마스'(Jaime Thomas)라는 이름의 한 주목할 만한 젊은 선교사 부부와 만났습니다. 그들은 결혼하고 몇 년 뒤에 곧 '마라나타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아르헨티나로 갔습니다. '제임스'와 '제이미'는 모두 켄터키에서 자라는 동안에 스페인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습니다. '제임스'는 고등학교 때 스페인어과에 등록을 했으나 너무나 못해서 자신의 성적 평점이 낮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등록을 취소했었습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에 도착해서 대학 근처에 한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통역자를 세워 사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역을 축복하셔서 작은 교회가 곧 설립되었습니다. 그 무렵 '제임스'는 푸에르토리코의 오순절 복음 전도자인 '벤 소토'(Ben Soto)를 주일 저녁 예배의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약 150명이 저녁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정열적인 설교가인 '소토'는 스페인어로 뜨겁게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말을 멈추었습니다. 갑작스런 침묵에 회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회중들은 설교자에게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그는 영어로 "제임스와 제이미!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스페인어에 대한 은사를 주시려 한다고 내게 말씀하셨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임스와 제이미를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그들에게 안수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제임스! 당신이 집회를 인도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한 후에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임스'는 어리둥절하며 당황했습니다. '제임스'는 '벤 소토'가 안수 기도하는 동안에 아무런 특별한 변화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통역자를 즉시 불렀습니다. 그러나 '소토'는 '제임스'가 혼자서 스페인어로 설교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제임스'는 마지못해 영어로 적어 놓은 광고 사항들을 들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앙‥‥에스타‥‥스마나‥‥바모스‥‥아‥‥"
이어 아르헨티나 억양의 유창한 스페인어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본국인처럼 스페인어를 구사했고, 철자와 억양 표시까지 정확하게 글을 썼습니다. 그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근 그들을 과테말라로 부르셨을 때, '제임스'는 즉각 과테말라 억양으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외에도 혼두라스, 베네수엘라, 그리고 멕시코 방언들을 구사했습니다.
한편 '벤 소토'가 오기 전에 '제이미'는 남편보다도 더 스페인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어 낯선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두려워서 대답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토'가 기도를 해준 후 어떤 사람들이 그녀에게 스페인어로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고 유창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본토 발음을 주시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미국식 발음이기는 해도 스페인어를 꽤나 잘한다고 합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30년 넘게 선교사로서 사역하고 있는 '스텔라 보스워스'(Stella Bosworth)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에델 라스'(Ethel Raath)는 남아프리카인으로 몇 마디의 줄루어 밖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1935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줄루 지방의 트랜스케이 지역 공무원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 줄루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예배와 성경 공부를 시작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라스'부인은 하나님께서 줄루에서 사역하도록 자신을 부르신다는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줄루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줄루의 그리스도인들을 모이게 하여, 그녀의 머리에 줄루 성경책을 얹고 줄루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무릎 꿇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후 라스 부인이 무릎을 세워 일어서는 순간부터 줄루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으며, 또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수석 통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임스 토마스처럼 라스부인에게도 정확한 줄루어 발음을 주셔서 사람들은 그녀를 '백색의 줄루인'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하이티에서 웨슬리언 선교사로 은퇴한 '노만 보너'(Norman Bonner)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후에 줄루인들을 위해서도 사역했습니다. 그는 하이티에 선교사로 첫 부임하면서 크리올어 공부는 일부러 미루고 불란서어를 계속해서 공부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크리올어로 설교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하나님께 그것을 위해 특별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크리올어로 유창하게 설교할 수 있었고, 또 순회 복음 전도자를 위해 통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복음 전도자는 그에게 "당신의 크리올어 실력은 백만 불 짜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짐바브웨에서 비행선교회(M.A.F) 일원으로 사역하는 '존'(Jon)과 '체 차드'(Cher, Cadd)는 한 짐바브웨인 통역자가 비도마(Vidoma) 언어를 은사로 받게 된 일도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책 "모덜론족의 선교 수기"에서 '부르스 올슨'(Bruce O1son)은 어떻게 한 콜롬비아의 복음전도자가 자신의 언어와는 상당히 다른 유꼬(YuKo)족 언어를 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간증들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창세기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당시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바벨탑을 건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중단시키기 위해 특별한 일을 행하셨는데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그들의 여러 가지의 다른 언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새 언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즉시 새로운 언어를 자기의 모국어처럼 구사하고 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서도 언어를 주실 수 있다고 한다면 선교적 목적을 위해서 왜 새 언어를 주실 수 없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주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교적 목적을 위해 대인방언이 처음으로 주어진 것은 오순절 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였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15개국 이상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일들이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앞으로 이런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성령의 역사를 이른 비 성령과 늦은 비 성령으로 구분합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요엘의 예언에 함축되어 있는데, 비록 오순절 날 베드로가 지적한대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요엘은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줄 것이라고 했지만 오순절 날은 15개국의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요엘이 예언한 대로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른 비 성령이 부어지던 오순절날 있었던 사건이 더 많은 나라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무리가 없고 매우 자연스러운 예측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적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대인 방언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4. 지상명령의 제4면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라!"는 것입니다.
미국 수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의 슬로건은 "성공의 비결은 필요를 발견해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입니다.
이 말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진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유야말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건강 유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일의 관심사입니다. 이 사실은 의사들이 올리는 년간 수입 총액에 의해 증명됩니다. 수입이 가장 좋은 전문 직종의 명단을 보면 거기에는 의사, 심리 치료사, 치과의사가 자동적으로 포함됩니다.
최근 미국의 갤럽연구소와 다른 나라에 있는 연관 기관들이 함께 실시한 설문 조사의 통계치도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인간 제일의 관심사를 조사한 결과 '건강'이 제1위였으며, 그 뒤를 바짝 쫓아서 '가족'이 2위였습니다. 이처럼 건강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매우 절실한 필요입니다.
예수님은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8-9)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면 이 필요를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어느 가정에나 치료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저도 그런 필요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일 예로, 어제 김혜화 집사님이 찾아왔을 때, 사모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림이가 귀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이 고막 안에 물이 많이 차서 고막이 터지기 직전이며 많이 아팠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던 중, 지난 목요일 저녁에 의사 선생님이 "고막 안의 물이 잘 마르지 않아 2주정도 치료해본 후에 한 달을 쉬었다가 기계로 인위적으로 고막을 뚫어서 물을 뽑아내고 다시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막을 뚫고 물을 뽑아낼 때 통증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신유의 필요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딸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는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 집사님이 보는 앞에서 우림이의 귀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 나온 후 차안에서 사모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보고는 "이상하다! 이렇게 빨리 귀속이 깨끗해지나?"라고 놀라면서 "전에는 귀속이 많이 부어 고막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붓기가 빠지고 고막 안의 물도 많이 말랐다"며, "이런 상태라면 3일 동안 약을 먹어보고 화요일날 와서 계속 상태가 좋으면 치료를 끝내도 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는 자로서 우리는 마땅히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얹고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누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을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답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병자에게 손을 얹을 수 있는 자를 단순히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당신이 알아야 하는 신유에 관한 일곱 가지 원리"라는 책에서 "예수께서 대 사명을 주셨을 때 '그들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을 것이요, 그들은 나을 것이다'(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손을 얹을 수 있습니까? 모든 믿는 자들입니다. 모든 복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본문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의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를 행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병들었을 때 손을 얹어야 합니다. 믿는 어머니는 자녀들 위에 손을 얹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손을 얹을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소개해드리는 이유는, "평신도는 절대로 안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수는 기름부음을 받은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누구나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우리와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평신도는 일절 안수기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의 습관일 뿐입니다. 예수원에서는 형제들 상호간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다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신부만 합니다. 일반신자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순히 옳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시되 머리에는 손을 얹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픈 곳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고치실 것입니다.
(2) 왜 병든 자에게 손을 얹는 일이 필요한가?
우리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야 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접촉점을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명한 오랄 로버츠 목사님이 하나님께 접촉점에 대한 설명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접촉점은 네가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가운데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 역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들이 내 위에 놓여질 때 그 점이 바로 나의 접촉점입니다. 그 점이 내가 치료받았다고 믿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나는 치료받은 기분도 느끼지 못하고 치료받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겉모양이나 느낌으로 살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접촉점입니다. 접촉점이란 당신이 당신의 믿음을 풀어놓고 자신의 치료를 믿기 시작하는 기점을 말합니다."
이처럼 병자에게 손을 얹는 것은 나와 병든 자 모두에게 각자의 믿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접촉점이 됩니다. 그것은 믿음을 깨우고 믿음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치료의 능력이 환자에게 전이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손을 얹는 것은 당신의 믿음의 접촉점으로써 당신이 믿음을 역사하도록 풀어놓는 기점입니다. 나는 접촉점으로써 사람들에게 손을 얹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일으키는 또 다른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접촉과 전이의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치료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 영적 법칙에 순종하여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을 때 기름 부음 받은 손은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을 그 환자에게 전이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예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바로 그 예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예수님께 임해있던 치료의 능력이 그녀에게로 전이되었습니다. 그래서 혈루증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의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나갔으며 그 여인을 치료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고픈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고 말들을 합니다. 제 생각에 그런 때가 바로 치료의 능력이 그에게 임한 때이며, 전이가 일어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충동이 느껴질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담대히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치유를 보게 될 것입니다.
(3) 반드시 병자에게 손을 얹어야만 낫는가?
한 마디로 대답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통해 치료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의 것이며,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이사야 53:5, 마태복음 8:17, 베드로전서 2:24).
우리는 이미 나음을 입었으므로 우리의 몸이 약해지거나 병드는 것을 허락하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고통이나, 아픈 것이나, 질병은 모두 예수님이 담당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짊어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말씀에 마음을 합하고 "예수님이 스스로 우리의 약함을 감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손을 얹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의 무슨 나타남이 꼭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버지께 우리의 완전한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료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끝났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듯이 우리의 영으로 알게 되면 연약함과 질병은 우리의 몸으로부터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자가 이 진리를 이해하고 이런 믿음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 신자들의 치료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계시해 놓으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신유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유 사역자들입니다.
오랄 로버츠는 1년에 100만 명 이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T. L. 오스본의 집회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이 몰리고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구원받고 있습니다. 모리스 세룰로의 집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까를로스 아나콘디아 역시 한번 집회로 수만명씩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으며, 이미 한번 설교로 50만명을 회심시킨 바 있는 라인하르트 본케는 지난해 11월 7일에서 12일까지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열린 집회에서 6일 동안 무려 3백 4십만 명의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 TV프로그램인 "This is your day"에 초대된 손님인 로버트 미첼 목사는 미국의 유명한 치유 사역자인 베니 힌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은 당신을 초자연적인 기적과 치유를 위해 강력하게 사용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이 영혼 구원을 위한 사역으로 전환되도록 당신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제 당신을 통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이 당신을 일본에 데려가는 것을 봅니다. 5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당신을 통하여 구원받게 됩니다."
여러분, 이 예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런 엄청난 수확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바로 치유의 역사 때문입니다. 치유의 기적은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 전도의 수단입니다. 치유야말로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그물입니다.
그런데 21세기가 시작되기 전인 1999년 11월 30일, 척 피얼스, 더치 쉬츠, 신디 제이콥스 내외, 마이크 비클, 짐 골, 토미 테니, 바트 피얼스, 베스 알베스 등의 잘 알려진 예언자 그룹이 모여 기도할 때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치유 사역자들의 시대에 본 것보다 더 강력하고 중요한 새로운 기사와 표적운동들이 다가오고 있다. 이 운동의 열매 부분으로 전 세계 가운데 치유 센터가 지어질 것이고 이 센터는 병자를 위해 기도하며 축사하는 곳이 될 것이다(눅 10). 이 운동을 구별짓는 하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사역은 교회의 메마름을 깨뜨리고 장벽을 허물 것이고 그와 같은 거대한 열매로 인해 도시 전체가 예수님께로 돌아와 변화되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유명한 선지자 릭 조이너가 쓴 "빛과 어두움의 영적 전쟁"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을 때 주님께서 직접 그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제 곧 나의 교회에다 내세의 권능을 훨씬 더 많이 맡길 것이다... 모든 행해지는 일들은 나의 은혜에 의해 행해진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교회에게 나의 은혜와 나의 권능을 더욱 많이 베풀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교회가 어느 시대의 교회가 이룩한 것보다도 더욱 많은 것을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의 신자들은 내가 보여 주었던 모든 능력과, 그리고 또한 그것보다 더한 능력 안에서 걷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이전의 모든 사람들의 대표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의 교회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전에 결코 보여진 바 없는 방법으로, 나의 성품과 나의 방법들을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예언의 성취를 위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따라 신유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유의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5. 지상명령의 제5면은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양육'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산고를 치뤄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은 후 그냥 방치해두면 아기는 죽고 맙니다. 반드시 양육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새 신자들에게도 양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양육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입니다.
몇 주전에 저는 차를 고치기 위해 울산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하시는 카센타에 갔습니다. 가서 집사님과 일하는 아저씨에게 전도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매우 신기해하면서 마크 듀퐁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얻을 수 있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기회에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집사님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적 때문에 예수를 믿게된 사람들은 다 나중에 세상으로 돌아간다."
같은 날 저는 경주에 오신 선배 목사님을 뵈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에 돌아와서 사모에게 어디 전화온 데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처형에게서 온 전화 내용을 들려주었습니다.
처형 부부는 울산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울산교회의 여 전도사님 한 분에게 어떤 성도가 우리 교회의 전도지를 갔다가 드렸답니다. 그 전도지를 보고 그 전도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래서 금니가 드러나지 예수님이 드러나느냐? 예수님을 전해야지 왜 금니를 전하느냐?... 말씀으로 전도를 해야지 왜 이런 방식으로 전도를 하느냐?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결국 다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너무 이런데 깊이 빠져드는 것 아니냐? 너무 이런데 깊이 빠져드는 것은 좋지 않다."
여러분은 이 전도사님의 지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지적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교적인 편견에서 나온 말로서 진리에서 벗어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 지적은 잘못된 것일까요?
먼저. "이래서 금니가 드러나지 예수님이 드러나느냐? 예수님을 전해야지 왜 금니를 전하느냐?" 라고 했는데, 우리가 금니를 전하기 위해서 전도지를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와 이적을 전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일 예로,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시 9:1)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시 26:6-7)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시 75:1)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시 96:3)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시 105:1-2)
예수님은 거라사인 광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 8:38-39)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전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말씀으로 전도를 해야지 왜 이런 방식으로 전도를 하느냐?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결국 다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경험한 것과 큰 차이가 납니다. 우리 교회에 그 전도지를 보고 교회에 나오게 된 이미진 성도님이 그 증거입니다. 이미진 성도님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지를 보고 우리 교회에 나와서 등록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모릅니다. 지난주에는 목요 기도회에도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물론 기적이나 체험을 통해 예수를 믿은 사람 가운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프로테즈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결코 높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예수님께 잘 정착하는 것처럼 가정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전도한 사람, 예를 들어 사영리로 전도한 사람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되돌아갑니까? 그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민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공정하거나 옳은 지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시간적으로 몇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단계는, 복음을 전하는 것(전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히 그럴 듯한 복음 제시가 아니라 표적을 통해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막 16:15-18).
제2단계는, 세례를 주는 것(성례)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마 28:19).
제3단계는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양육)입니다(마 28:19-20).
이렇게 놓고 볼 때 복음제시를 통해 예수를 믿었건 아니면 표적을 보거나 간증을 듣고 예수를 믿었건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둘 다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끝까지 신앙생활을 잘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바로 양육에 달려 있습니다. 단순히 복음제시를 통해 예수를 믿은 사람도 양육을 잘 하지 못하면 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이나 간증을 통해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도 양육을 잘하면 건실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너무 이런데 깊이 빠져드는 것 아니냐? 너무 이런데 깊이 빠져드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대목인데, 이런 주장들은 저의 마음을 슬프고 답답하게 만듭니다.
저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물론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말인 줄 압니다. 그러나 무엇이 신비주의입니까? 성경 말씀에는 무지하고 체험에만 관심을 갖고, 성령의 열매에는 관심이 없고 성령의 은사에만 치중하거나, 예수님을 증거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무언가 끊임없이 신비한 체험을 하기 원할 때 즉 체험 자체가 목표가 될 때 그것이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말씀을 잘 배우고 말씀에 견고하게 서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분별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지만 성령의 열매 맺기를 더 원합니다. 즉 주님을 닮는 것이 없으면 모든 은사와 기적은 무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기적을 보거나 신비한 체험을 하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주님을 증거하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기 원하고 하나님의 기적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자 이것이 과연 신비주의입니까? 만약 이것이 신비주의라면 저는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신비주의자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는 분들에게 정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알되 말씀을 너무 깊이 알면 안됩니까? 사랑을 하되 사랑을 너무 뜨겁게 하면 안됩니까? 기도를 하되 기도를 너무 간절히 하거나, 전도를 하되 전도를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왜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선 다른 말을 합니까?
만약 이런 일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모세와 엘리야도 잘못된 사람이요,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었고 많은 환상과 계시를 보았던 바울도 잘못된 사람이요, 요한계시록을 썼던 요한은 더 잘못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적은 무지와 편견, 그리고 기우에 불과합니다. 결코 옳은 지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일천척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천척 삼천척 사천척 계속해서 성령의 강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분들이 우려하는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신 지도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성취되지 못했을까요? 그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만 중시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새 방언을 말하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고치는 일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구절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부흥 운동가인 에드 실보소 목사님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최저 수준의 능력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복음화하는 능력이었음에 주목하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가장 작은 능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복음화 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과 권능을 받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복음을 전하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을 복음화 했던 것처럼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정도는 복음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권능의 최저선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권능은 이토록 큽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령의 권능을 놓쳐버리고 너무 지적으로, 그리고 종교의식으로 흘렀기 때문에 아직도 주님의 지상명령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우리의 지적 교만과 세속적인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어드리는 것은 힘으로도 안되며 능으로도 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됨을 고백하나이다. 우리에게 요엘이 예언한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빠른 속도로 주님의 지상 명령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우리는 다시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