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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배달국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북두칠성
신시나라2 - '마고삼신시대'의 대를 이은 '황궁黃穹시대'가 있었다
글. 고담 중평 세계무속신문 주간
역사천문학회 부회장 소설가
직녀성시대를 역사시대로 시작한 최초의 문명인 마고
상고시대에 누군가 12궁도宮圖를 그렸다. 원을 30도씩 열둘로 나누어 12궁을 만들고, 12궁 하나하나 마다 시계방향 즉 순방향順方向으로 자(子 쥐)·축(丑 소)·인(寅 호랑이)·묘(卯 토끼)·진(辰 용)·사(巳 뱀)·오(午 말)·미(未 양)·신(申 원숭이)·유(酉 닭)·술(戌 개)·해(亥 돼지)의 12진辰을 앉혔다.
그리고 12진 하나 하나마다 2000년씩 배치하였다. 이를 궁宮이라고 하고, 궁마다 이름을 붙였다. 축에는 쌍여雙女를, 자에는 사자獅子를, 해에는 거해거해巨蟹를, 술에는 음양陰陽(부부)을, 유에는 금우金牛를, 신에는 백양白羊을, 미에는 쌍어雙魚를, 오에는 보병寶甁을, 사에는 마갈磨蝎을, 진에는 인마人馬를, 묘에는 전갈全 을, 인에는 천칭天秤을 배치한 것이다. 이리하여 12궁도에는 모두 24000년이 2000년을 한 단위로 하여 표시되어 있다.
12궁도에는 인류 시원始原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2궁도의 역사는 쌍여궁에 해당한다. 상여궁시대는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시대로, 이때 비로소 천문을 보기 시작했고, 우주의 이치를 찾고자 하였다. 인간이 왕래를 트고, 시장이 서고, 신시神市시대라는 신정체제神政體制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숭상하는 삼신신앙이 태동한 시대였다.
이 시대를 이끌어나간 분이 마고麻姑다. 마고에서 동이東夷가 나온다. 동이는 동쪽에 나오는 춘분의 기氣라는 뜻이다. 이夷는 태현경太玄經에서 춘분의 기로 풀이되고 있다. 이는 주역에서는 몽蒙괘와 대장大壯괘로 풀이된다.
중국에서는 천산天山에 마고사당을 지어 놓고 금모낭낭金母娘娘이라고 부른다. 역의 몽괘에 나오는 금부金夫는 금모낭낭의 남편이 된다. 즉 마고의 남편이 되는 것이다.
마고가 사는 곳이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는 후손들 중에서 세 처녀를 뽑아 멀리 시집보냈다. 삼신이 시집가서 청착한 곳이 영주이다. 삼신은 그들이 시집가서 정착하는 곳에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세 마리의 오리'를 앉힌 솟대를 세웠다.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에 앉은 '오리 세 마리'를 보고서 그 마을사람들이 마고삼신의 후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엔 직녀성이 밤의 세계를 관장하며 북극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직녀성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움직임을 통제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문명인이 태어났음을 역경易經의 지화명이괘地火明夷卦가 밝혀 주고 있다. 명이明夷란 동이족의 문명이 밝아지는 것을 말한다. 괘에서는 대난大難을 깨뜨리는 것, 즉 몽蒙을 명이라고 하였다. 명이를 형상화 한 것이 삼국시대 때, 흙으로 오리를 빚어 만든 오리등잔이다. 칠월칠석 날을 직녀성에게 제물을 바치고 칠석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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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의 오리시대를 지나서 세 발 달린 까마귀시대로
영해박씨의 문중비서인 <부도지>에 보면, 이 시대에 인구가 불어난다. 궁희와 소희의 뒤를 이어서 네 천인과 네 천녀가 태어난 것이다.
직녀성의 시대가 끝나고 천추성이 지구 중력의 회전축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후천시대가 왔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인데, 12궁도의 12지 중에서 자(쥐)에 배속된 사자궁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를 주도하여 이끌어간 분이 황궁黃穹이다. 황궁시대는 삼족오시대였다. 밤을 대표하는 직녀성시대, 즉 마고삼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오리의 시대가 끝나고, 낮을 관장하는 까마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왕궁시대에 천추성시대를 시작하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까마귀 삼족오를 보면, 마고삼신을 상징하는 오리와 황궁을 상징하는 까마귀가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까마귀의 발이 셋인 것은 이 까마귀가 삼신인 오리에게서 태어난 새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리 다음으로 세상에 나온 새가 발이 셋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라는 뜻이다. 까마귀의 몸이 까만 것은 아직도 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도지에 보면 황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황궁씨가 천부天符를 신표로 나누어주고 … 제족諸族이 나누어 살 것을 명했다. 이에 청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마고성의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황궁시대에 황궁의 주도로 직녀성의 마고성에 살던 모든 종족이 마고성의 동서남북 네 문을 통하여 뿔뿔이 흩어져 지구로 우주이민을 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고성이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오염이 심각해지자 청정을 회복하면 다시 돌아올 것(解惑復本)을 기약하고 지구로 떠난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다. 천부를 받들어 지키며 선천을 계승하였다. 성 안의 사방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피리)을 쌓아 놓고 소리를 만드니, 첫째는 황궁씨요, 둘째는 백소씨요, 셋째는 청궁씨요, 넷째는 흑소씨였다."
마고성에 살던 사람들은 선천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마고시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황궁의 시대는 후천의 시대가 된다. 즉 황궁이 이끌고 온 우주이민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이끌어간 황궁을 상징하는 것이 12궁도에 쌍여 다음에 나오는 사자이다. 그는 사자와 같은 기백으로 황궁시대를 주도해 나갔다. 이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에서 10000년 전이다. 그는 오로지 마고가 지시한 해혹복본解惑復本을 일념으로 살았다.
해혹복본은 마고성이 청정해지면 직녀성시대로 돌아가라는 마고의 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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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오시대의 의미
삼족오시대는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시대이고, 삼태극三太極의 시대이고, 음양조화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우주에서 황궁(黃穹, 黃宮)이라는 공간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황궁은 천지만물의 중심이다. 앞과 뒤의 가운데가 황궁이고, 상중하의 중간이 황궁이다. 우주에서 상원 중원 하원의 중심인 중원이 황궁이다. 소리에도 양의 소리와 음의 소리가 있고, 이들 소리 사이에 중간소리가 있다. 우주 만물에 중궁(中宮, 黃宮)이 있다는 인식은 상고시대 인간들의 사고에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직녀성이 음이라면 천추성은 양이다. 이 음과 양의 중간지대가 있다. 여기가 황이다. 이는 삼태극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흑이 직녀성이라면 적은 천추성이다.
직녀성과 천추성의 중간지대가 황이다. 황黃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을 때는 중심이 되지만, 순방향으로 회전을 시작하면 조화를 낳는다. 황이 회전함으로 해서 음양에 조화가 일어난다. 삼태극의 황이 음양이 조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삼족오는 우리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다. 오회분 4호묘와 각저총에 그려진 삼족오와 덕화리1호분에 그려진 삼족오는 우리 역사에 있었던 황궁시대를 의미한다.
이 시대는 아직도 직녀성의 영향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그래서 밤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까마귀를 택하게 된 것이고, 그의 발이 셋인 것은 아직도 오리 세 마리의 시대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을 숨긴 것이다.
'황궁시대'의 대를 이은 '한인桓因시대'가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한인'과 '항영'을 벽화로 그렸다.
유인시대의 의미
부도지 제 10장 서두에 '황궁씨의 장자 유인(有因)씨'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황궁씨가 장자 유인씨를 낳았다"는 의미와 "황궁씨가 유인씨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유인씨는 한인桓因씨를 낳는다. 그래서 유인씨는 황궁씨와 한인씨 사이에 다리를 이어 주는 분이 된다.
유인씨의 인因자를 보면, 인자는 '원인, 까닭, 유래, 근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자는 나라국 자 안에 큰대大자가 들어 있는 문자이다. 나라국자 안에 쓰였던 큰대자는 원래 어길위韋자로 쓰였던 문자였다. 어길위韋자는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9∼1993)의 해석에 따르면, 요즈음 말로 쿠데타를 의미한다.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면서 생겨난 문자이다. 이 문자는 '둘레, 둘러싸다, 사냥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因자에 들어 있는 큰대大자는 순임금으로 볼 수 있고, 위圍자는 순임금의 나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의미를 정리하면 인因자는 순임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나라가 된다. 이 나라가 위圍라는 문자를 탄생시켰다. 순임금은 인因자가 의미하는 고전적인 국가에 쿠데타를 일으켜 위圍자가 의미하는 새로운 시대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因자에서 제단과 제사의 의미를 도출
우리는 인因자와 위圍자에서 상고시대에 있었던 제사풍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나라국자는 제사를 지내는 방구단方丘壇을 의미한다. 단군조선시대에는 방구단을 쌓고, 이 위에 북진北辰(북극성)과 칠요七耀(북두칠성)를 표시하고, 전물奠物을 올려 제사지냈다. 이렇게 하여 국도國都를 정했는데, 이를 부도符都라고 하였다. 이 부도가 왕검성王儉城이다.
따라서 왕검성에서 부도를 도출해 내고, 부도에서 방구단을 도출해 내고, 방구단에서 인因자를 도출해 낼 수 있으므로, 결국 인因자와 왕검성이라는 문자가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속리산 에밀레 박물관에 있는 한인제단의 표석
한인천제의 시대는 태양의 시대
역易의 수뢰준水雷屯괘 초구효初九爻에서는 천부를 반한磐桓이라고 한다. 반한이란 고인돌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자이고, 한국桓國에 있는 고인돌, 즉 한국의 천부에 해당하는 돌이므로, 한국의 천부가 있는 곳이라면 부도가 되고, 그 곳이 부도라면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한磐桓은 고인돌, 즉 제단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桓因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선생은 한인천제가 나라를 세운 때를 지금으로부터 9199년 전으로 보는데, 나라의 역사는 3301년이고, 일곱 분의 천제가 다스리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파나류波奈留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국이라고 한다. 그 땅은 넓어 남북이 5만 리이고, 동서가 2만여 리이며,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나누어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구매여국, 사납아국, 선비국(혹은 치위국 또는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파나류산은 천산으로 볼 수 있는 산이다. 부도지에 "황궁씨가 천산주天山洲에 도착했다고 했으니, 여기를 말함인 듯 하다.
황궁씨의 시대는 삼족오시대이다. 이 시대를 12궁도에서 사자궁시대라고 하였다. 기간은 약 2000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2000년에서 10000년 사이가 된다.
이 시대에 그는 천부삼인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삼신사상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린 것이다. 황궁씨가 아들 유인씨에게 '천부삼인'을 전했다. 유인씨가 세상을 다스린 기간이 1천년이었다. 그러니까 사자궁 다음 시대인 거해궁巨蟹宮시대의 2000년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1천년이 유인씨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해'자의 의미
'해'는 의미로 볼 때 '게'로 읽어지지만, 음으로 읽으면 '해'로 읽어 진다. 따라서 거해궁시대는 태양의 시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이다. 부도지에 따르면, 이 시대에 유인씨는 "사람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끊어서 마찰을 일으켜 불을 일으켜 밝게 비춰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이 시대가 인류문명에서 불을 발견한 시대이다. 이 시대를 수인燧人씨의 시대라고도 한다. 백성이 불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수인이라고 하였다. <사물기원事物紀源>에 따르면, "수인씨가 칼을 만들었는데, 이 것이 칼의 기원이다."라고 하였다.
유인씨(수인씨)의 시대를 불을 이용하게 된 거해궁시대의 1천년으로 본다면, 칼을 발명한 거해궁시대 1천년으로 볼 수도 있다. 거해巨解라는 말이 칼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해蟹자에 칼도刀자가 들어가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칼을 발명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칼은 돌을 연마하여 만든 칼이었을 것이다. 이 칼을 가지고 쇠뿔을 떠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칼을 발명하기 전에는 칼 대신 무엇을 썼을까? 거대한 게를 잡아서 집게발을 띠어내어 칼로 쓰지 않았을까? 그래서 천문에서 칼을 쓰기 시작한 시대를 <거해>라는 말로 나타냈는지도 모른다. 거해궁巨蟹宮이라는 문자에서 해蟹자를 보면, '소의 뿔을 해체하는 벌레'라는 의미가 있다. 각角은 뿔이고, 도刀는 칼이고, 우牛는 소이다. 충 은 벌레이다. 벌레는 게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12궁도에서의 거해는 소를 잡기 위하여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게蟹 형상의 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헤라클레스가 괴물 뱀 히드라와 싸울 때, 헤라 여신이 히드라를 도우라고 괴물 게를 보낸다. 그러나 괴물 게는 헤라클레스의 발에 밟혀 죽는다. 헤라 여신은 괴물 게를 불쌍히 여겨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게자리는 황도 12궁 가운데에서 네 번째 별자리로 그리스 시대에는 하지夏至(6월 21일경)에 태양이 이 별자리를 지나갔다. 하지는 천구 위에서 태양이 가장 북쪽에 머무르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태양의 북회귀선北回歸線(태양이 천구 위에서 최북단에 머무르는 적위赤位로 +23½˚)이 쌍둥이자리로 옮겨갔고, 태양은 해마다 7월 하순과 8월 초순에 이 별자리를 지나간다. (쉽게 찾는 우리 별자리 이태형) 신화시대에 게는 태양이 지나가는 황도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거대한 가위를 가지고 태양의 불수레가 황도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는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탄 불 수레가 미친 듯이 다가왔을 때 그냥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신화) 이 시대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태양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나고 나서 아들 한인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산으로 들어가 계불을 전수專修하며 나오지 않았다. 계불은 계곡에서 몸을 씻고 부정을 물리치는 푸닥거리이다. 그가 한 일은 전적으로 이를 닦는 일이었으니, 그가 제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계불의 계자도 게蟹자와 음이 닮았으므로 어느 면에서 유사성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게가 가지고 있는 '가위다리'는 침입하는 악귀를 자른다는 벽사 邪의 의미가 있으므로 부작符作으로서의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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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와 족보기록에 나타나는 한인천제시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촌 통구평야 중앙부에 있는 고구려 고분 오회분 4호묘에는 한인천제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벽화가 있다. 널방 천장부 고임 안쪽 왼편 모서리에 그려진 벽화가 그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왼쪽에 달을 이고 있는 인신사족人身蛇足의 여인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 해를 이고 있는 인신사족人身蛇足의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들 남녀는 튼튼한 꼬리를 기운차게 치며 하늘로 날아 오르고 있다. 이들이 입은 옷은 날개 형상의 신의神衣라고 하는 옷이다. 이들 남녀는 태양신과 달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해와 달의 신이 아니라 해와 달의 신으로 신격화되어 벽화그림으로 모셔진 한인천제桓因天帝와 그의 부인 항영姮英이다. 복희伏羲와 여왜女 로 알려진 중국측의 벽화그림과는 전혀 형상과 의미가 다르다. 진주소씨晉州蘇氏 족보서문인 부소보서扶蘇譜序에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천제가 나온다. 진주소씨가 한인천제를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소보서는 이를 한국사桓國史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애석하게도 한국사는 실전失傳하여 전하지 않는다.
昔有赤帝諱復解號曰祝融爲桓國之帝開於己卯於風州倍谷 석유적제휘부해호왈축융위한국지제개어기묘어풍주배곡 (옛날에 휘는 부해요 호는 축융인 적제가 한국의 제가 되어 기묘년에 풍주 배곡에서 개국했다.)
그는 오이烏夷의 여자 항영을 후后로 삼고 아홉 아들을 낳아 구주九州에 봉했다.
우리는 진주소씨의 족보서문인 부소보서를 통하여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이 실재했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있었다는 것이 절대로 신화가 아닌 것이다.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선생은 한인천제가 지금으로부터 9199년 전에 한국을 개국하였다고 주석하였다.
한인천제는 풍주에서 개국함으로써 풍이風夷의 시조가 되고, 배곡倍谷에서 개국하여 배달나라倍達那羅라는 나라 이름이 생기게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최초의 조상인 마고가 <마고지나>라는 나라를 세워 <마고지나>라는 나라 이름을 문명사에 남긴 이래 두 번째로 한인천제가 한국을 세워 <배달나라>를 나라 이름으로 남긴 것이다.
그를 적제赤帝라고 하였는데, 적제는 '남방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후에 남방을 다스려 적제로 추앙 받게 된 신농神農의 조상이 된다. 또한 그를 축융祝融이라고 하였으니, 축융은 '불을 다스리는 신'을 일컬음이라, 인류 최초로 불을 쓰기 시작한 유인씨 즉 수인씨의 대를 잇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복희의 후예가 풍산風山에 살며 풍風씨 성을 가졌다고 하였다. 이는 복희가 한인천제의 후예인 풍이족의 출신이라고 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한인천제와 항영 벽화그림을 모방한 복희여왜교미도
중국측에 한인천제와 항영 벽화그림을 모방한 신강성토노번新疆省吐魯番에서 출토한 복희여왜도가 있다. 이 그림은 한인향영도보다 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그들이 쓰고 있는 관과 복식 등이 문명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신의와는 무관하다. 복희여왜도에 나타나는 복희는 한웅천왕의 6대손인 다의발多儀發한웅천왕이다. 그는 신시시대에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의 후손이다. 한인천제와 같은 종족인 풍이風夷 출신으로 그를 부해復解라고도 하였다.
'한인시대'를 이은 '한웅시대'가 있었다
'한웅시대'는 '천부사상天符思想'이 꽃을 핀 시대
한웅천왕 '천부'로 사유의 기틀을 세우다
한인천제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한웅천왕시대가 왔다.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한웅천왕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므로 12궁도로 보면 금우궁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 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황소가 12궁도에서 금우金牛로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우궁시대에 출현한 걸출한 인물인 한웅천왕은 이름을 배달거발이라고 하였다. '배달거발'은 '배다른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마 배다른 사람들 가운데에서 발이 큰 사람을 뽑아서 천왕을 세우고 한웅천왕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웅桓雄'의 웅雄자는 웅熊자로 통하는 문자이다.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문자이다. '해와 칠성을 숭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인천제에게서 물려받은 한웅의 한桓자는 나무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나타낸 문자이다.
우리말로 '크다, 하나'라는 의미를 가진 문자이지만 중국 한자로는 '빛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문자에 "태양을 숭상한다"는 뜻이 있으므로 한인천제시대와 한웅천왕시대는 공히 태양을 숭상하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桓자에 웅雄자가 붙음으로써 태양을 숭상하는 이외에도 북두칠성을 함께 숭상했다는 의미가 도출되어 이 시대에는 태양과 칠성을 함께 숭상했던 시대로 보게 된다.
한인천제의 시대를 해를 숭배했던 시대, 한웅천왕의 시대를 해와 칠성을 숭상했던 시대이므로 이 시대에 칠성숭배가 보편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웅천왕은 천부의 이치를 깊이 상고하여 '사유思惟의 틀'을 세우고, 천부에서 철학과 종교와 학문과 사회제도를 찾아내었다. 그가 믿기 힘든 일을 한 것이다.
남해 낭하리 암각서, 한웅천왕때 바위에 새긴 녹도문자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한웅천왕시대에 천부경을 기록하여 전하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쓰기 시작한 시대가 한웅천왕시대이다.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우리나라의 문자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암각문자가 있다고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이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렸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최초의 문자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웅천왕시대엔 한인천제 때 완성한 천부경天符經이 구전되고 있었다. 한웅천왕은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鹿圖문자로 기록하라고 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후대에 와서 신라 말에 최치원이 묘향산에서 바위에 새긴 천부경을 발견하여 한자로 번역하니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천부경이다.
천부경은 우주가 생성하고 운행하는 이치를 최초로 문자화 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사유의 주체성은 천부경에서 나온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에서 셋이 갈라져 나온다는 뜻이다. 일이 하나님이라면 삼은 삼신이다. 우주의 단면을 자르면 삼태극이 되는 것도 일석삼극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천문에서 하나의 하늘을 삼원으로 나누게 되는 것도 이 원리에서 비롯한 것이다. 천부경의 중심사상은 천지인天地人사상이다.
천지인사상은 후대에 와서 인내천人乃天사상을 낳는다. 단군조선을 삼조선으로 나누게 되는 것도 그 이치가 일석삼극에서 나온 것이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단군왕검시대에 와서 발전하여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의 원리를 낳는다.
운삼사성환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원형이정의 원리에서 춘하추동 사계가 나온다. 이는 운삼사성환의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한웅천왕은 이 외에도 천부경을 풀어서 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지어 백성을 가르쳤다. 단군조선시대에도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쳤다.(단군세기 11대 도해단군) 주역의 천풍구天風 괘에는 다음과 같은 효사가 있다.
象曰 天下有風 以施命誥四方 상왈 천하유풍고 이시명고사방 상에 이르기를, 세상에 풍이風夷 출신의 구가 있어, 삼일신고를 사방에 가르치도록 명한다고 하였다.
구자는 여女자와 후后자가 결합하여 만든 문자인데, 한웅천왕시대에 있었던 당시의 여자 제후를 이르는 말인 듯 하다. 풍이족에 여자제후가 있는데 그가 한웅천왕의 명을 받들어 사방에 삼일신고를 펼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삼일신고는 총 366자로 만들어진 경전인데, 제 1장이 허공虛空의 장이고, 제 2장이 일신一神의 장이고, 제 3장은 천궁天宮의 장이고, 제 4장은 세계世界의 장이고, 제 5장은 인물人物의 장이다.
삼일신고는 천부경을 풀어 쓴 것이라고 하였다. 한웅천왕은 천문의 이치에서 한역 8괘를 만들었다. 이를 가르치기 위하여 윷을 만들어 보급하였다. 후대에 와서 천부경 81자에서 태현경 81괘가 나오고, 노자 도덕경 81장이 나왔다. 태현경과 도덕경의 근원이 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천부경이 유교와 도교의 정수를 뽑아서 누군가 만든 것이라는 헛소리를 한다.
한웅천왕이 태백진교를 선포하고 시행하다
한웅천왕은 마고가 정착하여 삼신을 세상에 알린 태백산에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와서(삼성기전 하편) 배달나라를 세웠다. 태백진교太白眞敎를 선포하고 이를 국가의 이념으로 하였다.
마고시대에 삼신사상이 나온 이래 이를 발전시킨 것이 태백진교이다. 태백진교는 천부경을 기초로 한다. 태백진교는 우리 민족이 지상에서 최초로 갖게 된 종교의 이름으로써 삼신종교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두 번째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의 일이다. 불교가 2500년 전, 기독교가 2000년 전에 세상에 나온 것과 비교하면 태백진교의 출현시기는 불교의 2배가 넘고, 기독교의 거의 세 배가 된다.
태백진교는 천부天符에 근원을 두고, 지구가 자전自轉하는 이치에 합치하도록 하고, 또 사람이 하는 일을 이에 맞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정치를 함發政은 화백和白에 우선하는 것이 없고, 덕을 다스림治德에 있어 화禍를 꾸짖는 것보다 착한 것은 없다.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해나가는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였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발정은 화백으로 한다고 했으니, 100% 찬성을 도출하는 회의제도를 채용하겠다는 말이고, 치덕은 책화로 한다고 했으니, 법률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자연재해에 대하여 무과실책임을 묻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화백은 타살굿을 할 때 소의 머리에 정釘을 박을 무당을 뽑는 회의라고 볼 수 있는데, 각성바지 대표자 6명이 모여서 만장일치로 이 일을 할 무당을 뽑는다. 이 무당을 화백회의에서 뽑은 무당이라고 하여 백정이라고 하였다. 백정은 소를 잡아 칠성에서 오는 천기를 제단에 좌정하는 일을 하였다. 천기를 좌정하는 바위를 고인돌 즉 반磐이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 처음 이 일을 한 분이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역易의 수뢰준水雷屯괘에 반한磐桓이라는 효사가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를 처음 세울 때 경주에서 여섯 촌장이 모여 박혁거세를 이사금으로 뽑았다. 이때 회의를 주도한 사람이 단군조선 때 전국에 세운 12 소도 중의 하나를 관리하던 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여섯 촌장을 북두칠성의 여섯 별인 건建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뽑은 박혁거세는 북두칠성의 첫 별에 해당하는 천추성이었다.
신시는 세금을 받지 않는 시장과 세금을 받는 시장의 두 종류의 시장을 운영하는 곳이다. 신시를 운영하는 가장 큰 목적은 동이에 속한 여러 종족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종족을 다스린다는 큰 목적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하늘에 천시원天市垣 신시원神市垣이 있는데 이는 하늘의 시장을 말한다. 하늘에 두 시장이 있으니 자미원紫微垣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신시는 이를 본받은 것이다.
책화는 자연재해에 대하여 임금이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가령 산천이 가물어 타 들어갈 때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로 시달리게 될 때 그 책임을 임금이 진다는 것이다. 또한 나라의 인사人事제도를 만들어 시행하였는데, 그 모델을 북두칠성에서 따오고, 이를 천부의 인사라고 하였다. 이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道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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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시대의 태백진교. 우리민족종교를 | 천부경은 우리민족의 사유체계를 집약하여 |
천문학이 꽃을 피웠던 한웅천왕시대
마고삼신시대에서 직녀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천문학은 황궁시대에 와서 삼신을 의미하는 칠성과 해와 달에 관심을 갖는 천문학으로 발전하고, 한인시대에는 태양에 관심을 두는 천문학으로 발전하였다. 한웅시대로 와서는 태양에 대한 관심이 북두칠성으로 발전하였다. 천부경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천부경에서 우주의 이치를 체계화하였다. 이 시대에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우주원리가 발견된다. 일석삼극의 원리는 우리가 한족漢族의 사유체계와 어떻게 다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었다.
'한웅시대'를 이은 '복희시대'가 있었다.
황제의 후손이 풍이風夷출신의 복희를 문화의 조상으로 숭배하다.
복희는 한웅천왕의 후손
복희伏羲는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6세 손이다. 그는 신시배달나라 5세 천왕인 태우의太虞儀 한웅 89년 무오년(桓紀 475년경)에 태우의 한웅천왕의 열두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여왜국女 國의 임금인 여왜와 혼인하여 동이문화東夷文化의 한 분파를 이루었다.
동이문화의 한 분파를 한족문화漢族文化라고 한다. 그가 한족문화의 시조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우리 동이문화가 한족문화에서 나왔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통치이념인 공자유교를 잘못 받아들인 사람들의 말이다.
화서華胥가 뇌택雷澤에서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 성기成紀에서 복희를 낳았다.
<하도게명징河圖稽命徵>
<화서>는 화서족의 처녀라는 뜻이다. <대인>은 발이 큰 사람으로 한웅천왕의 집안 사람 을 의미한다. 한웅천왕을 <커발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대인은 동이의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관자管子는 발인發人을 동이라고 하였다. <성기>는 지금의 천수天水 성기현成紀縣이다. 지금 천수에는 복희 사당이 있고, 그와 관련되는 유적들이 있다.
<화서>는 <뇌택>에서 임신하여 <성기>에서 <복희>를 낳았다. <성기>는 지금의 천수 성기현이다. <뇌택>은 못의 이름이다. 여기는 후대에 태어난 순舜임금이 고기잡이하던 곳으 로 전해오는데 현재 제음濟陰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복희의 도읍은 진(陳, 지금의 회양淮陽)이고, 재위는 115년이었고, 15세를 전 했다. 그는 진륜陳侖을 다스렸는데, 진륜은 구이산仇夷山리고, 사방이 끊어져 고립되어 있다. 진륜은 태호복희가 다스린 곳이고 태어난 곳이다. 위 기록을 근거로 하여 복희의 출생에 세 가지 설이 생겼다.
첫째 설은 뇌택이고, 둘째 설 은 성기이고, 셋째 설은 구이산이다.
복희는 처음에 감숙甘肅에서 살다가 섬서陝西의 황토 고원에서 살았다. <삼황본기三皇本紀 >에 따르면 복희는 진에 도읍하고, 동쪽을 태산으로 봉했으며, 재위한지 11년만에 죽었다. 전설에 따르면 남부南部에 장사지냈다.
<삼황의 으뜸 태호복희> 1998. 2. 중국하남미술출판사 발행
이 기록을 보면 복희가 왕이 되어 진을 다스렸고, 그의 후대로 15세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복희씨 여왜씨는 성이 풍風이다. 풍은 벌레에서 나온다. 큰 벌레는 뱀이 된다. 충 은 곧 뱀이다. 용 역시 뱀에서 나온다는데 따른다. 복희씨와 여왜씨는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으로 엉켜 있다. 복희와 여왜는 해와 달을 들고 있다.
<복희문화 '시론 복희씨문화'> 王彦俊 작 1994. 5.
복희와 여왜가 풍씨라는 것은 이들이 풍씨의 조상이자 한국제桓國帝인 한인천제의 후예임 을 말한다. 고구려시대엔 한인천제와 그의 부인 항영을 인두사족人頭蛇足의 형상으로 왕의 무덤인 오회분 4호묘에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은 복희와 여왜교미도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인과 항영도>는 한인과 항영이 풍씨의 조상으로서 '일월을 숭상하겠다는 의도'로 그린 <일월마지그림>이지만, <복 희와 여왜 교미도>는 '복희와 여왜 사이에서 후손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 어 그린 '조상숭배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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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궁에 모신 복희신상 | 중국천수에 있는 복희사당 태호궁 |
복희, '일석삼극'에서 '일석이극'을 도출하여 <복희문화>를 이룩
후대에 와서 고시와 복희와 신농의 대를 거쳐서 황제, 신농유망, 치우천왕이 아우른 탁록의 결전에서 황제에 의하여 치우천왕의 청구국이 멸망하고 황제가 중원을 차지하면서 신농과 치우로 이어지는 동이족은 사실상 괴멸하고 황제로 이어지는 동이족만이 세력을 넓혀 갈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황제지손黃帝之孫이라고 하였고 황제지손을 한 대 이후에 한족漢族 이라고 불렀다.
복희가 분명히 동이계열임에도 불구하고 한족의 조상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은 복희가 이룩한 <복희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족은 동이가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가면서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던 복희의 유적을 활용하여 한족문화를 열었다.
동이는 천부天符에 근거를 두고 우주의 이치를 3이라는 수로 한정하였다.
이 원리를 일석 삼극一析三極이라고 하였다. 이 원리에서 삼신사상이 나오고, 삼태극이 나오고, 음양조화가 나왔다고 파악하였다. 1은 모든 구체球體의 지름이다. 3은 모든 구체의 지름으로 원주율 을 나누어 나오는 수이다. 1이 3으로 나뉘는 것이 일석삼극이다. 일석삼극은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이다.
복희는 일석삼극의 원리에서 1을 빼고 일석이극一析二極의 원리를 도출하였다. 구체의 반 지름을 반으로 나눈 것이다. 그래서 兩儀와 음양陰陽을 도출하였고, 반지름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 사상四象을 도출하고, 반의반지름을 반으로 나누어서 팔괘八卦를 도출하였다. 이 두 원리는 일석삼극이 조화의 원리인데 반하여 일석이극이 갈등의 원리라는 차이가 있 다. 그 이유는 동이의 3에는 조화가 있지만 한족의 2에는 조화가 없기 때문이다.
'복희시대'를 이은 '신농시대'가 있었다.
신농은 '동이'의 조상으로 태어나서 '화하'의 조상으로 숭배받아
동이東夷의 기원을 밝힐 열쇠를 쥐고 있는 풍이風夷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는 풍이 출신이다. 후대에 와서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의 후예인 복희 또한 풍이 출신이다. 복희는 한웅천왕의 6세손인 다의발한웅이라고 한다. 이들이 모두 풍이 출신이므로 결국 한웅천왕과 복희는 한인천제의 후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한웅천왕시대에엔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가 있었다. 고시 아음으로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은 다의발한웅인 복희였다.
복희의 후대에 농사의 신으로 불리는 신농神農이 태어났다. 고시, 복희, 신농이 모두 농사와 관련이 있는 분들이므로, 가업을 세습으로 이어나갔던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농사를 관장했던 같은 집안 출신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고시와 복희와 신농은 모두 농사로 얽혀 있다. 따라서 이들을 고시의 후예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한웅천왕시대의 농관이었던 고시라는 이름이 단군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시례高矢禮로 그대로 쓰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고시 집안이 맡았던 역할이 오랜 동안 세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계에 있는 염제신농사당
또한 이들이 적제赤帝라는 신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이 같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한인천제는 풍이 출신으로서 적제赤帝 부해復解(扶蘇譜序에서 인용)로 불렸다.
복희 또한 부해復解로 불려지고, 신농을 염제炎帝라고 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한 집이 대대로 불을 관장해 온 집안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신농이 복희와 같은 집안인 풍이 출신임을 밝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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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계에 있는 염제 신농릉 | 보계에 있는 '염제대전' |
신농 그는 누구인가
중국사람들은 신농과 그의 8세손 유망楡罔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염제 신농炎帝 神農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신농이라고 할 때는 시조 신농을 의미할 때가 많다. 유망의 의미로 불릴 때는 치우천왕과 황제와 탁록을 놓고 한판 싸움을 벌일 때일 뿐이다.
그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농사의 신, 약의 신, 차의 신등으로 불리는 시조 신농을 의미한다. 이렇게 신농은 시조 신농과 그의 8세손 유망으로 혼동되어 불린다.
신농은 쇠머리의 형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신농이 소를 몰아 농사를 지었음을 나타낸다. 그 이전까지 소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소였을 가능성이 많다. 야생의 소를 길들여 농사를 짓도록 한 사람이 신농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농의 머리를 소의 형상으로 만들어 신격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농은 몽산곡蒙山谷에서 태어나 구룡천九龍川에서 목욕하고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는 강수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이 강姜씨가 되었다. 강씨의 마을은 지금 중국 보계寶鷄 남쪽 교외의 강성보姜城堡 일대가 된다.
보계는 신농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보계와 강씨의 족보를 연구하는 연구가들에 따르면, 신농의 후예로 8대의 수령이 대를 이었다고 밝혔다. (寶鷄文史資料 제11집 44 ∼ 45쪽) 근거는 <자치통감외기自治通鑒外紀>에 있다. 이를 차례대로 쓰면 다음과 같다.
제1세 염제신농 재위 120년 혹 140년
제2세 괴제 재위 60년 혹 80년
제3대 제승 재위 6년 혹 60년
제4대 제명 재위 49년 혹
제5대 제직 재위 45년
제6대 제리 재위 48년
제7대 제애 재위 43년(소전)
제8대 제유망 재위 55년
<외기>에 근거하면 신농에서 시작하여 유망까지 8세 사이에 해당하는 426년 동안이 신농의 나라가 존속한 기간이다. <초학기 구 初學記 九>는 제왕세기설帝王世紀說에서 인용하여 신농에서 유망까지 무릇 8세까지 모두 530년이라고 하였다.
신농의 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제2세 임괴로부터 유망 사이이다. 중국고금성씨사전中國古今姓氏辭典에 따르면, "신농은 강수에 살았다. 이로써 성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염제는 강수에서 낳았다. 이로써 씨칭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신농이 강수에 살면서 이로써 성이 생겼다
그 후로 제濟, 보甫, 신申, 여呂, 기紀, 허許, 향向, 예芮,씨가 생겼다. 그는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열두 아들이 오午씨, 병丙씨, 적赤씨, 신信씨, 정井씨, 기箕씨, 감甘씨가 되었다.
우리 무가에서 불려지는 신농은 이상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조상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신농은 우리의 조상이다.
'신농시대'를 이은 '삼조시대'가 있었다.
삼조三祖는 '치우蚩尤', '楡罔유망', '황제黃帝'
삼조의 개념
현재 중국에서는 치우, 유망, 황제 세 분을 '중국의 세 조상'이라고 부른다. 중국에 이들 세 분의 조상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 달리 '炎黃蚩염황치' 삼조라고도 한다. '염炎'자는 염제 신농 즉 유망을 일컫는 말이고, '황黃'자는 황제를 일컫는 말이고, '치蚩'자는 치우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인들이 '염황치 삼조'를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공식화 한 때는 1993년 10월이다. 중공탁록현위부서기中共 鹿縣委副書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집행회장 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 執行會長, 중화염황문화연구회이사中華炎黃文化硏究會理事라는 긴 직책을 가진 임창화任昌和라는 사람이 1993년에 위 세 분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서 그 해 10월에 제 1차로 <염황치 삼조문화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중화염황문화연구회, 중국선진사학회中國先秦 史學會, 대만중화논리교육학회 등에 제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어서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토론회>를 개최하면서, 1995년 9월부터 '삼조문화'가 전국에 소개되고, 중화민족문명의 근원적인 명제로서 널리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한 국내외적 으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 후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연구자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중화민족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저작물의 생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중국인의 '염황치 삼조'를 그대로 따라 쓰기로 하였다. '염황치'가 우리의 조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중국인과 같은 의미로 쓴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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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덩 탁록에 있는 중화삼조당. | 중국한족의 시조로 추앙받아온 황제의 능 |
삼조문화의 의미
1993년 이후에 들어와서 중국인들은 하북성 탁록현에 있는 탁록을 중화문명이 시작된 곳이 라고 하여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중화문화를 시작한 사람은 황제뿐이라 고 생각하여 염제와 치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염제와 치우는 탁록에서 황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염제는 황제에게 항복했고, 치우는 탁록의 기주에서 전사했다.
원래 염제와 황제는 배다른 형제 사이였다.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전은 시조 신농 의 가계로 보면 제 7대 제애帝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황제 자체가 동이東夷 출신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치우는 한웅천왕의 직계 후손이다.
소전은 한웅천왕 때 농관을 지낸 고시高矢 계열이다. 따라서 소전의 후손인 유망과 황제 가 한웅천왕의 방계후손이므로 치우 유망 황제가 모두 한웅천왕의 후손이 된다고 하겠다.
현재 중국에서는 황제는 행정, 유망은 기술, 치우는 군사를 시작한 분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들 행정, 기술, 군사를 일컬어 '삼조문화'라고 한다.
'삼조문화'는 다음 세 가지로 의미를 요약한다.
1. 중화민족의 문명을 시작한 시조는 세사람이다. 염제와 황제 두분만 아니라 치우를 포함한 세 분이 있다.
2. 중화민족의 문명을 창시한 분은 염제 황제 치우로, 이들 삼조가 자신들이 살았던 곳에 대 표적인 마을과 마을연맹공동체를 만들었다.
3. 염제, 황제, 치우 삼조가 처음으로 중화문명을 만들었다. 이들의 발자취가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남아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사건이 탁록에서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조를 버린 우리의 현실
중국이 5000년 동안 황제 한 분만을 자기의 조상(黃帝之孫)이라고 주장해 오다가 갑자기 유망과 치우 두 분을 추가하여 자기들의 조상(炎黃之孫)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저의는 무엇일까?
그 첫째 이유는 중국이 황제만을 붙들고 있으면 중국의 역사를 5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 라가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한족문화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동이문화가 있었다. 동이문화는 마고문화에서 시작이 되는데, 마고문화는 대체로 14000년 전에서 12000년 전에 발해만과 산동반도 사이에 있는 묘도군도廟島群島가 그 발상지로 보인다. 황제만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할 때, 동이문 화로 접근해 갈 수 있는 탈출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동이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동이출 신인 유망과 치우를 황제 쪽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군왕검 한 분을 놓고 민족종교진영과 기독교진영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말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 진영은 단군은 실재하지 않았으며 단군에 대한 기록은 신화라는 것, 단군은 특정한 민족종교 의 우상숭배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민족진영은 목 메인 소리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진영이든 민족종교진영이든 우리 역사에 무지하므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간 혈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은 역사를 추적해 올라가면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신농의 후예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농은 성이 姜씨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의 성씨 도한 강씨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단군왕검에 대하여 따로 다루게 될 때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더 들어가지 않기로 한다.
단군왕검의 조상이 되는 신농을 중국이 자기의 조상으로 편입시켰다는 것은 중국이 동이라 는 정체성 고백이 되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그들이 지녀 온 화하족華夏族 즉 한족漢族이 동이의 한 분파라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치우
한웅천왕의 지계후손인 치우는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무속에서 치우는 도깨비대왕으로 전해 온다. 천문에는 치우기蚩尤旗라는 혜성이 있다. 부적 오방부五方符에는 구이군九夷軍의 신명을 부르는 주문이 있다. 구이는 구려九黎를 의 미한다. 치우를 구려의 족장이라고 한다. 황제가 동이로서 동이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는 황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헌구야 잘 듣거라. 해의 아들이라고 함은 짐 한 사람 뿐이다." (삼한관경본기) 그는 황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즉각 토벌에 나섰다. 탁록에서 치우는 황제와 싸웠다. 그리고 탁록의 기주에서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동이와 화하가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삼조시대'를 이은 '홍제 전욱 소호의 시대'가 있었다.
유망의 아들 「희화羲和」와 황제의 딸 「항아嫦娥」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1917-1993)가 작성한 삼황오제시대三皇五帝時代의 계보를 보 면, 신농神農의 8세 손인 유망楡罔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다.
첫 아들은 희화羲和 주씨로 <태양의 신>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태양을 관측하는 직 책을 가졌음으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둘째 아들은 금정金正 해該씨로 김金씨의 조상이 되는 분이다. 셋째 아들은 희熙씨로 물고기문양을 사용하는 집안의 선조가 된다. 넷째 아들은 수 脩씨로 사냥하여 고기를 가공하는 집안의 선조가 된다. 넷째는 유일한 따님으로 누조 祖로 알려진 분이다. 뉘조를 <양잠의 신>이라고 하였다. 누조는 황제黃帝에게 시집가서 항아嫦娥와 소호김천少 金天(재위 BC2474-BC2468)을 낳았다. 항아는 <달의 신>으로 알려진 분이다. 그가 달을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벼슬이름이었다.
희화의 아들 「전욱고양 頊高陽」과 황제의 아들 「소호김천少 金天」
유망의 큰아들 희화주씨와 항아가 혼인하여 전욱고양 頊高陽을 낳았다. 삼조시대가 지나 간 다음에 전욱고양과 소호김천은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전욱고양은 유망집 안의 맹주였고, 소호김천은 황제 집안의 맹주였다. 황제는 희화로 하여금 해를 점치게 하고 항아로 하여금 달을 점치게 하였다. 그 기록이 < 여씨춘추 물궁편>에 보인다.
黃帝使 羲和占日 尙儀(嫦娥)占月 황제사 희화점일 상의점월
희화는 황제의 사위였고, 항아는 황제의 딸이었으므로, 희화가 항아와 함께 해와 달을 점쳤 다면 희화가 황제의 집안으로 장가가서 처가살이를 할 때였다. 황제는 희화 부부에게 일관 日官을 명하여 해와 달을 관측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화가 처가살이를 면하고 본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장자인 전욱고양을 낳아서 조상의 신상神像으로 모시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 낼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전욱고양 頊高陽이라고 하였다. 그가 일관으로 있으면서 지어 준 이 름이었을 것이다. 전욱고양은 하夏나라의 시조가 된다. 중국인 역사학자인 <룩콴텐>의 세계 표는 전욱고양과 곤을 거쳐서 우임금에 이르는 하나라의 세계표를 작성하였다. 전욱고양은 훨씬 후대에 와서는 고구려를 세운 고씨高氏의 조상이 된다.
그러나 제주도에 전해 오는 영주신화瀛洲神話인 삼성혈신화三姓穴神話에 보면 고씨가 전욱 고양이 세상이 태어나는 기원전 2400년대 보다 무려 1만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난다.
고씨의 조상인 고지나高之(乙)那가 양지(을)나 부지(을)나와 함께 영주(제주도)의 삼성혈에서 세상 에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씨의 조상을 소호김천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소호김천이 세상에 태 어나기 전에 이미 유망의 아들로 <김정金正 해該>가 태어난 것을 모르는 것이다. 김정은 소호김천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다.
김정은 소호김천의 어머니 누조와 남매 사이이다. 우리 나라 김씨들이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된 데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영향이 크다.
그가 삼 국사기에서 「신라인이 소호씨 후손이기 때문에 김씨라고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호김천 이후에 한무제漢武帝(BC156-BC150) 때 와서 한무제에게 정벌 당한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일제日 에게 김金씨를 사성賜姓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성씨로서 김씨가 탄 생한다. 김해김씨가 생겨나는(AD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 건국) 것은 한무제 사후 192년이 나 지나서 있게 되는 훨씬 후대의 일이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김씨 시조들은 중시조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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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의 장인 단국 배달나라의 홍제
소호김천이 BC 2474년에 제위에서 물러나고 BC2467년에 전욱고양이 그 뒤를 잇는다.
이 때 단군왕검의 처조부가 되는 천일태제天一泰帝(신시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가 제위 에 오른다.
그 해가 BC2457년, 나라 이름은 한국의 뒤를 이은 <배달나라>였다. 이 나라를 달리 <단국檀國>이라고도 하였다. 이 나라를 <이고선의 조선기>에서는 <단국 배달나라> 라고 하고, 한단고기의 삼성기전하편에서는 <신시 배달나라>라고 하였다.
기묘 52년(BC2406년)에 유교有嬌씨가 빈객으로 와서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았다. 유교씨는 소로김천과 항아 사이에서 태어난 교극嬌極이다.
유교有嬌의 교嬌는 모계혈족으 로부터 받은 족칭族稱에서 나온 것이다. 할머니 누조 祖의 뒤를 잇고 이어서 항아嫦娥의 뒤를 이은 모계혈족의 교嬌라는 뜻이다. 교喬자 앞에 여女자를 썼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교극에게서 제곡고신帝 高辛이 태어난다. 제곡고신이 BC2420년에 전욱고양의 뒤를 이제 제위에 오른다.
홍제는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제곡고신의 폭정을 이기지 못한 소풍蘇豊이 홍제 8년에 귀 순해 왔을 때 그를 받아들여 불함산弗咸山 북쪽의 숙신肅愼 땅에 살게 하였다. (蘇氏上上系) 단군왕검의 장인이 되는 단국의 2대 홍제 때인 기사 8년(BC2390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 綏芬河 동쪽으로 쳐들어온다.(이고선의 조선기) 이때 의려장이 되어 수분하 동쪽에서 제곡고 신의 군대를 퇴치하였다.
홍제는 그 공을 치하하여 소성蘇城에 봉하고 하백河伯을 삼았다. (소씨상상계) 홍제가 풍에게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발견하는 기록이 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일찍이 사성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제곡고신 때에 와서 홍제가 다스리는 단국 배달나라를 침범하는 기록 이 나오므
고신의 영토와 단국 배달나라의 경계를 가르는 경계가 있 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북경의 북쪽을 횡으로 가로질러 가는 거대한 만리장성의 존재 가 이를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홍제는 <한단고기>에서 신시 배달나라의 17세 혁다세 한웅으로 기록한 분이다.
단군왕검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이다. 동이와 한족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가 단군왕검시대이기 때문이다.
'홍제 전욱 소호의 시대'를 이은 '단국왕검시대'가 있었다.
단군왕검의 중시조는 신농, 우리의 중시조는 단군왕검
신농은 유망가계의 시조
지금까지 12회에 걸쳐 단군왕검시대 이전의 시대를 개괄해 왔는데,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해 온 이유는 단군왕검시대가 이들 시대를 징검다리로 하여 도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시대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대제국이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우리와 한족의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족으로 불릴 수 있는 동이만이 산동반도 일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족으로부터 독립해 나간 것이 화하족으로 불리는 한족이었다. 단군왕검이 출현하는 시대 이전에 중원에는 큰 물줄기를 이루는 세 종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농을 조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신농으로부터 8대 유망까지 조상이 같았다. 유망대에 와서 황제와 갈라지고, 유망계열에서 4대를 내려와 배달나라의 태제泰帝가 나온다. 이렇게 세 종족이 중원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유망의 가계 (동국역대東國歷代, 홍사鴻史)
1.신농 2.제승 3.제임 4.제내 5.제백 6. 제즉7.제양 8.제유-① 제괴 ② 제망 ③ 제성 ④ 泰帝 ⑤ 洪帝 ⑥ 檀君王儉
황제의 가계 (황제에서부터는 駱賓基 1917-1993 의 금문)
1.신농 2.제승 3.제임4. 제내 5.제백 6.제즉. 7. 제양 8. 황제-① 소호 ② 교극 ③ 제곡 ④ 제지 ⑤ 제요 ⑥ 제순 ⑦ 禹王
전욱고양의 가계 (유망에서부터는 낙빈기의 금문)
1.신농 2.제승 3.제임4.제내 5.제백 6.제즉 7.제양 8.유망-①희화 ②제전욱 ③ 곤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누비혼인
유망가계의 제양과 황제가계의 제양은 우리 역사와 중국 역사에서 소전少典으로 나오는 분이다. 소전은 유망과 황제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르다. 유망가계의 제유帝楡는 유망이다. 유망과 황제는 아버지 제양 즉 소전에서 갈라져 나오고 이들은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중시조가 된다. 낙빈기에 따르면,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은 누비혼(Punalua)라는 양급제兩級制로 맺어진다. 두 집안이 이복형제간임에도 불구하고 모계사회의 특징인 공동남편과 공동부인의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 제도는 순임금까지 계속된다.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는 그의 이복형 유망의 딸 누조와 결혼한다. 이렇게 사위가 된 사람을 자子로 불렀고, 아들을 남男으로 불렀다. 백伯은 외삼촌으로서 조카딸 자매가 있는 씨족마을로 장가든 사람이다.이러한 혼인제도는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이 한 대를 건너뛰며 제위帝位를 물려받고 돌려주는 기이한 혈연제도를 유지한다.
유망의 딸 뉘조와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 사이에서 항아와 소호김천이 출생한다. 유망의 제위를 외손자 소호김천이 물려받는다. 따라서 제위의 대물림은 1대 유망, 2대 소호김천이 된다. 3대는 유망의 큰아들 희화와 황제의 딸 항아 사이에서 출생한 전욱고양(제위 47년)이 물려받는다. 4대 제위는 황제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제위 55년)이 물려받는다.
그러나 제곡고신 대에 와서 제곡고신은 5대 제위를 전욱고양의 양자인 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기와 측실 간적 사이에서 낳은 아들 지에게 물려주어 지가 5대 제위(제위 8년)를 잇는다.
이때 제위상속제도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곡고신의 정실인 중계의 아들 요堯가 이복형제인 지에게 제위를 도둑맞았으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찾아 6대 제요(제위 37년)가 된다. 이어서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죽이고 7대 제순(제위 9년)이 되었다. 다음에 쿠데타를 일으켜 순을 죽이고 8대제위를 이은 사람이 우(제위 8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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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집안에서 떨어져 나온 단군왕검의 가계
유망(제위 43년)은 아들 4명과 딸 1명을 두었다. 1자는 희화 주, 2자는 금정 해, 3자는 희, 4자는 유였다. 이들 4명중에서 한 분이 제괴帝魁일 것이다. 제괴를 중시조로 하여 단군왕검이 태어나는 다른 한 분파가 유망집안에서 나온다.제괴를 중시조로 하여 ② 제망 ③ 제성 ④ 태제泰帝 ⑤ 홍제洪帝 ⑥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대를 잇는다.
<이고선李固善>은 그가 쓴 <단서대강檀書大綱>의 <조선기朝鮮紀>에서 조선의 시조를 <단군세기檀君世紀>처럼 단군왕검에서 시작하지 않고 2대를 거슬러 올라가 태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보이는 대 가름이지만 설득력 있는 대 가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가 누비혼인이 성행했고, 누비혼인으로 출생한 외손자를 사위로 맞아들이던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단군왕검의 아버지 홍제는 그의 장인이 되고, 그의 할아버지 태제는 처 할아버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시대의 「왕검」과 「곤」과 「우」
단군왕검시대에 단군왕검(재위 93년, BC2333-BC2240)과 제순帝舜(재위 9년, BC2320-BC2312)과 우왕禹王(재위! 8년, BC2311-2304)과 곤 (우왕의 장인)은 이 시대를 이끌어간 삼두마차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기록에는 곤은 도산국塗山國의 주인이었다. 우가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순이 제위에 오르면서 곤에게 도산의 치산치수를 명하였다. 곤은 7년 동안 치수에 힘썼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순은 곤에게 책임을 물어 우에게 곤을 죽이라고 명했다. 한족의 역사는 산동반도에 있는 우산에서 우가 그를 처형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중원의 패권을 쥐고 있던 단군왕검이 홍제에게서 물려받은 배달나라라는 국호를 곤에게서 나온 문자인 조선으로 바꾸어 썼다는 점에서 사위인 우가 장인인 곤을 죽이게 하였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곤이 단군왕검과 동시대 사람이고 그가 당시에 국제무대의 중심에 있었던 도산의 맹주였다는 점에서 곤을각별하게 생각하여 도산으로 부루태자를 파견하여 그를 살릴 수 있는 외교적인 교섭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 기록된 도산회의塗山會議는 도산의 치수에 관한 회의와 각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는 이외에 곤을 살리는 회의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출처:인터넷과 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