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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0월5일(금)비
지즐지즐 비 오다. 홈통에서 울려나오는 호르륵 호르륵 소리. 비가 연주하는 음악이다. 落雨音樂낙우 음악. 소리와 소리 사이엔 항상 틈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앞 음과 뒤 음이 구별이 없어져 그냥 모노톤에 불과할 것인데. 음과 음 사이에 멈춤과 쉼이 있기에 멜로디로 들리게 된다. 운동과 정지, 소리와 정적, 드러남과 숨음, 강약고저의 반복과 순환이 미학적 경험을 만들어낸다. 똑 똑 똑 빗방울 소리. 후두둑 후두둑 차양을 때리는 소리. 추루루 추루루 배수구로 흘러드는 소리. 귀속에선 프라나prana 흐르는 소리. 그리고 우주가 굴러가는 소리, ॐ 옴Om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 진짜 큰소리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소리도 있으니. 구름 피어나는 소리, 찻잔에서 김 오르는 소리, 정다운 얼굴이 미소 짓는 소리, 향이 타오르는 소리. 묵죽화 속에 댓잎 소리, 마음속에 생각이 흘러가는 소리. 가을 비 오는 날에는 들리는 것이 있어 좋다.
2018년10월6일(토)흐림
새벽 한 밤중 빗소리 더 굵어져 아예 콸 콸 콸 퍼붓는다. 구름에 걸린 폭포수가 쏟아지나보다.
생각을 문자로 바꾸고, 아니면 문자를 매개로 하여 생각을 일으키고, 단어와 단어를 이어주면서, 문장과 문장을 구성하는 ‘영리한 놈’이 내 안에 있나, 밖에 있나? 그 놈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일관성 있고, 콱 잡아내어 ‘이것이다!’보여줄 수 있는 실체인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조종자’로서 그 놈은 마음의 심층에 깃들어 있는(아니 있다고 믿어지는) 경험의 주체인가? 아니면 말하기 쉽게 편의상 ‘나’, ‘자신’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불과한가? 나는 나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훨씬 편하다는 걸 안다. 너무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할 때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아지 못한다. 근접삼매에만 들어도 자아 실존감이라든지 시간의 경과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매우 환희로운 경험. 이런 걸로 봐서 ‘나’나 ‘자기’를 의식하며 내세우는 일이 그렇게 당연하거나 즐거운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러고 보면 ‘나’와 ‘자기’를 실재하듯이 여기는 것은 관념이나 습관 내지 고집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자아집착, 자기중심성, 자기애 강박증, 자의식 과잉...이런 정신병리학적 병명이 모두 한 곳을 가리킨다. ‘나’에서 벗어나라. ‘나’를 벗어서 ‘나-열림’으로 자유 하라. 깨달은 분들이 말씀하신다. 가장 큰 환상은 자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라고. 없는 자기를 붙들고 평생 자기를 위해 산다고 애쓰며 사는 사람아, 물속에 빠져 목마르다 하는구나.
의성에서 다나보살이 부친 복숭아 택배가 도착했다. 주문했던 분들께 연락하여 가져가게 하다.
2018년10월7일(일)맑음
좋은 날 하루가 바람에 날려갔다. 날려갔다고? 무엇을 아쉬워하기에 날아갔다고 말하는가? 시간이란 지나가는 것이고, 그 시간이란 단위 가운데 하루라는 것은 당연히 포함되는데.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시간은 흐르는 것이라 잡아둘 수 없다. 지금 시작된 것은 이미 끝난 것과 같고, 현재 살아있는 것은 벌써 죽은 것과 같다. 조만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멀겋게 살아있으면서 죽음의 냄새를 피울 필요는 없지. 살아있을 때 확실히 살고, 죽을 때는 확실히 죽자. 문장을 이어갈 때는 확실히 이어가고 끝날 때는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자. 허둥지둥 시들시들 지지부진 희미하게 사는 게 문제다. 반쯤 자는 듯 반쯤 깬 듯, 반쯤 살고 반쯤 죽은 듯, 그렇게 사는 것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가기로 작정했다면 길 끝까지 가야한다. 그 끝에 절벽이 있더라도 허공을 밟고서라도 앞으로 가야한다. 꽃잎처럼 떨어진들 아쉬워할 일 있으랴. 그게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것이다. 티베트불교에는 허공을 밟고 가는 수행자들이 있다. 空行母공행모들이 그분들이다. 다키니dakini 혹은 칸돌마khandrolma라고 한다. 그들은 에너지로 이뤄진 眞空妙有진공묘유의 몸이다. 삼계육도 어디든지 춤추며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한다. 그들이 향유하는 세계를 만달라mandala라 한다. 같은 세상에 산다고 똑 같은 경험을 하고 사는 게 아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다르게 경험한다. 그러기에 업에 따라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지금 여기 범부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가 중첩되어있다. 양자장이론에서는 관측자의 관측행위와 관측대상을 둘로 나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 육도윤회가 지금 여기에 중첩되어 확률적으로 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옥중생 같은 마음을 쓰고 살면 그 즉시 지옥을 경험하게 되고, 천상사람 같은 마음을 쓰고 살면 천상계를 경험한다. 지옥의 시간과 천상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가도 그 사람의 업에 따라 달라진다. 하루가 날아갔나? 라는 질문을 돌이키면 말이 사라진다. 말은 침묵 속으로 소멸한다. 침묵이 깊어진다. 거기엔 정적과 안온함이 있고, 환희와 광휘가 나타난다. 시간과 존재가 사라진다. 그곳이 천상이다. 지금 여기 살아서 천상을 경험한다.
2018년10월8일(월)맑음
오후에 고려병원 가서 초암보살 주선으로 독감예방주사 맞다. 저녁 강의하다. 날씨가 점차 흐려진다. 흐린 날씨를 옛 시인들 은 幽玄유현과 隱微은미의 맛이 있다면서 은은하게 느꼈다. 구름이나 안개 낀 풍경을 煙霞연하, 雲霓운예라 표현하며 자연을 음미하고 감상했다. 날이 흐려지든 맑아지든 풍광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이다. 우울한 심경에 빠진 사람이 구름과 안개가 낀 풍경을 대하면 갑갑하고 무거운 심정이 될 것이다. 더구나 폐쇄공포증이나 공황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환경이 그에게 호의적으로 경험되는지, 적대적으로 경험되는지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경험될 것이다. 말없는 제3자로서 자연이 사람에게 다가와 의미를 띤 대상으로 경험된다. 사람이 자연에 다가가기도 하지만, 자연이 스스로 사람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 점 티끌도 없는 맑은 샘물에 가을 잎 하나 떨어진다. 가을 편지가 날아온다. 보낸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다. 하늘이 땅에게 보내는 인사이며, 여름이 가을에게 보내는 소식이다. 가을선물을 잘 받으라는 다정한 편지와 함께 지난여름이 소포를 보내왔다. 소포꾸러미를 풀어보니, 쨘~
萬里無雲秋空潔, 만리무운추공결
太古風光初生月. 태고풍광초생월
맑아라, 가을 하늘이여
구름 한 점 없어
태고의 풍광
초승달 떴네.
2018년10월9일(화)흐림
초하루 독경법회 하다. 식이요법 끝내고 오늘부터 식사 시작하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서 별을 보라. 별이 쏟아져 눈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에 별, 물위에 비친 별, 눈 속에 든 별. 별 보는 별. 星星星 惺惺惺
안다 모른다, 잘났다 못났다, 그렇다 아니다, 이익이다 아니다, 유리하다 불리하다, 친하다 아니다 는 쪼개진 별이다. 쪼개진 별이라고 빛나지 않은 것 아니다. 다만 빛이 조금 흐려진 것일 뿐. 흐려진 별이기에 반짝이지 못하니 아름답지도 않다. 그렇다고 못난 건 아니다. 다만 주목받지 못하고 잊힐 뿐이다. 잊힐 만 한 건 잊어버리는 게 좋다.
강병균이 불교닷컴 칼럼에서 달라이라마 존자가 수미산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발언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봐라, 내가 맞잖아.’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그래도 좋다. 현대 천문학의 정보에 의하면 우주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다는 설은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도의 고대신화에서 유래한 것이 불경 속에 들어있었을 뿐인데, 경전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사실로 믿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칼라마 경에 그와 비슷한 취지로 말씀하신 게 있다. 그런데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이뤄진 4주세계와 3천대천세계를 인도신화로 보면서 재미있고 유익한 생각이라고 감상하면 된다. 그게 진짜니 가짜니 따지는데 목맬 필요는 없다. 수미산이 있든지 없든지 무슨 상관인가.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이미 수미산만한 허물이 된다고 선사가 눈을 부라린다. 수미산!
2018년10월10일(수)흐림
문대통령이 바티칸으로 교황을 찾아뵈러 가서 평양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남북평화정책을 굳혀주는 외교적 성과이다. 대통령은 교황의 권위를 입고 자기의 입지를 다져서 좋고, 교황은 평양을 방문하여 카톨릭의 영광을 드러내서 좋고, 김정은은 북한의 국제적 위신을 높여서 좋다. 성사가 되면 일석삼조의 효과가 난다. 그런데 불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대한민국에서 불교의 위상은 급락했다는 것과 사회의 주류에서 밀렸다는 것을 반증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아예 불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불자의 영향력이 미미해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불자의 영향력은 여론주도 세력에 한참 밀려나서 겨우 뒤따라갈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길게 보면 1954년 이승만 유시로 촉발된 불교정화이래 벌어진 일이 누적된 결과이면서, 가까이는 1994년 잘못된 불교개혁이래 벌어진 결과이다. 그러고도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전망은 없다. 한국불교의 앞날은 흐리다.
저녁에 붓다의 심리학을 강의하다.
2018년10월11일(목)맑음
용주사로 가서 종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다. 아침 6:40에 출발하여 10:40분경에 용주사에 도착하다. 영일스님(실상스님 상좌) 만나 차를 나누다. 객실에서 금계(동화사 선원 한주), 홍법(현재 대곡사 적조암 거주), 성산스님(서울 상계동 일심선원장)과 인사하다. 선거 마치고 무문스님(원로선원 상주) 찾아뵙고 차를 나누다. 스님은 월출산 도갑사 비문 썼던 일을 이야기 해주시다. 비문을 쓰려고 연구 조사하는 과정에서 선종의 역사에 왜곡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신다. 보통 알려지기로는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선종의 법맥이 5조 홍인대사, 6조혜능대사로 이어졌다고 알고 있다. 이는 보림전이라는 선종역사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런데 보림전이라는 책은 하택신회가 7조를 자처하고 싶은 열망에서 자기 스승인 혜능을 현창하면서 6조로 등극시킬 의도로 저술된 것이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육조단경은 6조 혜능대사의 직설이 아니라 거의 하택신회선사의 찬술이라고 밝혀졌다. 보림전에는 신회선사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어 6조혜능-남악혜양-마조도일 & 석두희천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린다. 이에 일찍이 의혹을 품었던 胡適호적(중국 학자) 박사와 민영규 교수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무상정중 선사(소위 김화상, 신라 왕자)-남악혜양-마조도일 로 선종 법맥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말 9산선문의 개창자들은 거의 마조문하에서 법을 잇는다. 오후3시에 용주사를 출발하여 수원버스터미널에서 한 시간을 기다린 후 버스를 타고 오후 8:00시에 진주로 돌아오다. 긴 하루였다.
2018년10월12일(금)맑음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이라도 될 수 있지만
지금 여기 당신과 함께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나는 모든 곳에 없기도 하고 모든 곳에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여기 당신과 함께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나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지만
지금 여기 당신과 함께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속한 사람이 아니지만 지금 여기 당신에게 의미 있는 한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합니다.
나는 잡을 수 없고 보여줄 수도 없는 텅 빔이지만 지금 여기 당신을 위한 한 존재가 될 것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고독지옥을 방황하는 방랑자일 뿐이다.
인간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인간이 될 수 없다.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에 의미가 부여된다.
너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나는 너 없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너’가 ‘나’에게로 왔을 때 ‘나’는 너에게 의미 있는 ‘나’가 되었으며,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너’가 되었다. 너와 나가 만나기 전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었다. 만남이 있고 난 뒤에야 네가 있고 나가 있게 된다. 너와 나는 만남에서 생겨난다. 무릇 모든 만남이란 창조요, 경이요, 신비요, 선물이다. 그러나 어떤 만남은 불행이요 비극이며, 저주가 되기도 한다. 기쁨을 주는 만남은 귀하지만 고통스러운 만남은 비극적이다. 귀한 만남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헤어지게 된다. 죽음은 모든 만남을 흩어버린다. 만남에는 헤어짐이 뒤따른다. 인생만사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아이는 엄마의 환상 속에서 태어난다.
당신은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이었나, 아니었나?
당신은 환영받으면서 태어났는가, 아닌가?
당신의 탄생은 축복받은 탄생이었나, 아니었나?
아이는 엄마의 간절한 기다림과 가족들로부터 환영과 축복을 받으면서 태어나야한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이 가득한 가슴에서 태어나야 진실한 의미에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태어나도 태어난 게 아니라 내던져진 것이다.
소중한 아이야, 네가 태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해줄게. 이런 마음을 가진 엄마를 만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너만 아니면 저 사람과 진즉 헤어졌을 텐데,
지금은 아기를 가질 시기가 아닌데,
아이를 위해 나의 삶을 희생하고 싶지 않은데,
마지못해 억지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어쩔 수없이 임신하게 되었는데,
임신했으니까 차마 유산시킬 수 없어 너를 낳을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처음부터 비우호적인 환경에 던져진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Geworfenheit 被投性피투성-던져진 존재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2018년10월13일(토)맑음
대구 관오사에서 십지경 강의 모임 갖다. 참석자 12명. 오후 6시에 끝나고 차담하고 7시에 헤어지다. 반야라마 주지스님 청강하다. 용문스님 차타고 진주로 돌아오다. 용문스님 객실에 머물다.
2018년10월14일(일)맑음
아침 5시 30분 서진주 만남의 광장에 집결하여 버스 타고 제따와나 선원의 개원을 축하하러 가다. 용문스님과 나, 회원20명. 주말이라 차가 밀려 스케줄 보다 늦게 10:40분에 도착하다. 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원택스님의 축하 법문이 있고 불사 경과를 알려주는 동영상이 상영된다. 일묵스님이 제따와나 선원의 운영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50여명의 스님들이 참석했다. 식이 끝나고 <제따와나 선원> 제막식을 하다. 혜안스님과 인사 나누다. 점심 공양하고 수종사로 향하다. 두물머리 천하장관을 감상하고 500세 노인 은행나무를 바라보다. 차실에 둘러앉아 작설차를 나누고 하산하다. 여주 신륵사를 향하다. 어둑해진 도량을 빠른 걸음으로 내달아 나옹대사 부도를 세 바퀴 돌면서 참배하다. 이어서 극락보전을 참배하고 5층 전탑을 배알하다. 강변에 우뚝 선 강월헌과 삼층석탑을 눈에 담다. 아득히 흘러가는 남한강 아름다운 물줄기를 바라보며 바위에 둘러선 우리는 <회향게>를 합송하면서 보리심의 염원을 법계에 새긴다. 보리심으로 맺어진 우리들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납시다. 차를 남쪽으로 줄기차게 달려서 진주로 돌아오니 10:30pm. 용문스님은 남화사로 돌아가다. 씻고 쉬다.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