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 째로 쓴 수필을 올립니다.
마흔 즈음에
친구에게 메일이 왔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가장 친한 친구이다.
이민을 간 후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Air Mail이라고 부르는, 편지지 없이 푸른색의 봉투 안쪽에 쓰는 편지였다. 물론 편지지에 쓰고 봉투에 담아 보낼 수도 있었지만 Air Mail이 훨씬 저렴했다.
10년 정도 편지를 주고받았을까? 인터넷이 발달한 후 우린 전자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편지를 보내기가 훨씬 편해졌음에도 메일을 보내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줄어든 건 횟수 뿐 만이 아니었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도 줄어들었고, 편지를 받았을 때의 설렘도 줄어들었고, 글씨 있는 부분까지 찢어질까봐 봉투를 조심스레 뜯는 애틋함도 줄어들었다. 전자 메일은 보내자마자 갔고, 받자마자 보였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했다. 얘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메일을 열었는데 음악이 흐른다. 그 당시 유행하던 뮤직 메일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손 편지처럼 메일로 마음을 담아서 보내던 시절이라 메일을 보낼 때 편지지 모양의 바탕을 고를 수도, 혹은 메일을 열면 음악이 흘러나오게 하는 기능도 있었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아르페지오 위에 쓸쓸한 트럼펫 선율이 흐른다. 그리고 전주 후에 나오는 구슬픈 목소리.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메일의 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다. 글자는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고 음악만, 그리고 가사만 귀에 들어왔다. 쉬는 시간에, 공강 시간에, 점심 시간에 같은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하루 종일 듣다보니 어느새 멜로디가 익혀졌다.
그 날은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체육과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 소주를 마시고, 호프집에 가서 생맥주를 마시다가 마음들이 동해 노래방으로 향했다. 모두들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데 나는 하나도 신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했지만 낮에 들었던 노래의 선율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체육과 막내가 즐거운 분위기를 깨뜨려가며 축 처지는 노래를 부르기엔 눈치가 보였다.
5분인가 남았을 때 노래를 선곡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더 이상 부를 노래들이 떨어졌는지 애꿎은 맥주 캔만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담으며 누군가 마지막 곡을 누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좀 지나서 이미 흥이 깨졌기에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하루 종일 들었던 곡이었음에도 막상 부르려고 하니 어색했지만 모니터의 가사를 음미하며 한 소절, 한 소절 불러 내려갔다.
그런데 돌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아. 이제 무슨 주책이람.
"이 노래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요."
아쉬워하는 척 하며 얼른 정지 버튼을 눌렀고, 우린 그렇게 노래방에서 나와 헤어졌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와서는 옷도 안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밤중에 시끄럽다고 하는 아내의 잔소리는 귓등으로 듣고 '서른 즈음에'를 인터넷으로 찾아서 틀었다. 하루 종일 부르고 싶었던 마음을 이제서야 보상받듯이 부르고 또 부른다. 눈물이 흘러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창피하지 않다. 한, 두 방울의 눈물은 봇물 터지듯 흘러 내렸고, 내 노래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스물아홉, 12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마흔이 되었다.
서른 살 앓이를 하도 혹독하게 치른 탓에 마흔이 가까워졌을 땐 걱정이 되었다. 또 그렇게 우울해지거나 슬퍼질 까봐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흔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서른아홉과 마흔이 앞 숫자만 다를 뿐 뭐가 다르겠냐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모였다. 나이들을 먹으니 이젠 자주 모이지도 못하는 죽마고우들이다. 각자 직업들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들도 다르니 막상 모이면 공통 화제 거리가 별로 없다.
매일 같이 이불 덮고 자는 부부가 가장 할 얘기가 많다는 사람도 있고,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업무 얘기나 다른 사람 뒷담화 하느라 할 얘기가 많다는 사람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친한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이면 하고 싶은 얘기가 가장 많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들은 오랜만에 모일수록 역설적이게도 할 얘기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일단 취하고 보자며 술들을 들이켜게 되고, 술이 어느 정도 취하면 그때서야 본분을 잃고 말문이 트인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떤 위치냐는 건 우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학교 선생이든, 장사꾼이든, 사장님이든, 백수 한량이든 똑같이 이 새끼이고, 저 새끼이다.
참치회를 몇 번이나 리필 해 가면서 한참이나 떠들고 얘기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 일어날 때가 되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시던 이, 삼십대와 달리 마흔이 되어 달라진 점 중의 하나는 다음날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친구 하나가 다른 친구에게 묻는다.
"그래서 너 아까 회사에서 뭐가 힘들다고 했지?"
그러자 그 친구가 말한다.
"나? 회사는 무슨 회사? 우리가 오늘 뭐 우리 얘기 한 거나 있냐?"
듣고 보니 그랬다.
아저씨들 다섯이서 참치횟집 방에 앉아 빈 소주병들을 2열종대로 사열시키며 네 시간 가까이 떠들었지만 정작 우리 얘기를 한 건 거의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학교에서 애들이 말 안 들어 힘들다는 얘기 해봐야 그래도 방학과 정년이 있으니 배부른 소리 한다는 핀잔이나 들을 것이고, 직장 생활 힘들다는 친구에겐 대기업이 다 그렇지 않으냐고 일축할 것이고, 장사가 안 된다고 죽는 소리하는 친구에겐 요즘 경기가 그런데 어쩌겠냐는 뻔한 얘기들만 하니 정작 마음속 얘기들은 하지도 못하고 일어나게 될 참이었다.
시간이 늦어서 2차도 못가고, 그렇다고 그냥 일어서는 게 억울해서 조금만 더 앉아있자고 하며 그럼 무슨 얘기들을 했나 떠올려보니 반은 부모님들 얘기고, 반은 자식들 얘기였다.
우리가 마흔이 되었으니 우리의 부모님들은 일흔 줄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 친구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돌아가셨고,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심장에 스탠트를 넣으셨고, 또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암이 발병하였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부모님들인데 이제 하나, 둘씩 돌아가시고, 병에 걸리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함께 슬퍼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어릴 때 속을 많이 썩였으니 이제라도 잘하자는 얘기, 누구 부모님이 돌아가시든 이유 불문하고 전부 같이 관을 들자는 얘기들을 하며 이제는 나의 부모님이 아플 차례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술기운이 달아났다.
우린 아들, 딸들이 다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아이들 얘기, 특히 교육 얘기에도 열을 올렸다.
누구는 사립 초등학교에 보냈네, 누구는 영어 유치원에 보냈네, 학원을 보내야 하네, 말아야 하네 하며 나름의 교육관들을 피력했다. 자식들 교육열 높은 한국 아빠들 앞에서 교육을 전공했다는 것은 그 어떤 감투도 되지 못했다.
교육 얘기 뿐 아니라 아이의 성격, 식성, 운동신경, 하다못해 아들 포경 수술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시키면 언제가 좋을까 하고 열을 올리긴 했어도 정작 우리의 혈압과 혈당 수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뚱뚱한 친구에겐 살 좀 빼라고 하고, 혈압이 있는 친구에겐 혈압약 먹으라고 한마디 할 뿐 우리의 건강은 우리 아들들의 포경 수술보다도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서른 즈음과는 달리 마흔 즈음에는 그런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다른 종류의 서글픔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친구들과의 카톡 방에 짧은 글을 쓴다. 한, 두 줄 쓰니 미친놈이라고, 나이 처먹더니 주책이라고, 오글거린다고 하더니만 몇 줄 더 쓰자 차 안에서 잠들었는지 말들이 없다.
친구들을 만나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가 나이를 먹었듯이 너희들도
나이를 먹었구나.
세상 사는 서로의 이야기는 짧게 끝난다.
다들 살아가는 게 버겁고 힘든 얘기뿐인데
들어봐야 뭐하겠는가.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우리 얘기는 없어졌다.
부모님이 건강하신지,
아이들이 잘 크는지…
우리들의 인생에서 이제
주인공이 바뀌었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서 음악에 매달렸고…
나이 마흔에
이제 인생을 조금은 깨닫게 된다.
나의 아버지도 이렇게 살아오셨구나.
첫댓글 적어도 수십 개는 외우고 있던 전화번호를 단축번호가 생기면서 다 잃어버렸죠.
문명의 발달이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많이 남아요...
맞습니다. 때로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넘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감성적인 면에서는요..
주선생님은 참 감성이 깊으시네요..
오랜만에 서른 즈음과 마흔 즈음을 돌아봅니다..
다 비슷한 길을 가고 있네요..
저의 글쓰기는 감성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흔 즈음에 난 뭐하고 있었지 가물가물합니다
그래서 저도 나중에 잊을까 하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벌써 5년 전이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40대 중반 밖에 안됐는데 저기에 나왔던 친구들 중 한명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었다가 살아났고, 다른 친구 한명은 현재 뇌농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를 좀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추억은 ~
참 좋은 친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