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의 물음 -
☆ 2013년 가해 12월15일 (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청주]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36, 1 - 6ㄴ. 10
† 제2독서 : 야고 5, 7 - 10
† 복음 : 마태 11, 2 - 11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
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오늘 전례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또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물어보실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야말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을 닦아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었던 요한 세례자처럼, 우리의 사랑으로 더욱
많은 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귀향을 예언하며, 하느님의 백성이 시온에
모여 슬픔과 탄식을 딛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환성을 터뜨리게 될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언젠가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 오늘의 묵상
요한 세례자가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미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요한 1,32-34 참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강력한 심판은 아직까지 없을뿐더러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한 세례자를 두고 가장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새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한 단계 뛰어넘은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
준수에 따라 상벌을 결정하는 심판의 방식이었지만, 신약은 그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정신, 곧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이들과도 함께 지내셨습니다. 신약의 새로움은,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제대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3주일(마태11,2-11)
정말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살고 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잘 준비된 마음 안에 주님을 낳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의 색깔은 장미색입니다. 오늘 불이 당겨진 대림초도 장미색입니다.
오늘의 이 색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회개의 삶에 충실하여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다짐하게 하는 날입니다. 결코 지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며 천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년의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로 바빌론
유배 때의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590년 유다인들은 오 천리나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고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희망을 잃고 살았습니다.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다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해
페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꽃을 피우고,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넣어주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립니다.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게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모든 소망을 다 이루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이러 저러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
이신지 아닌지 궁금하고 한편으로 의심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3,10). 하며 회개의 절박함을
선언했던 요한입니다. 메시아를“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3,12) 심판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병자들을 만나시며 먹고
마시고 하니까 그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기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서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11,5-6). 결국, 무슨 말씀이냐 하면 1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수백 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말씀이 그대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입니다.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 예고 소식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응답하고 그 무렵에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1,45). 성모님은 복되신 분입니다.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왜 복됩니까? 믿으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으셨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복되십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믿지
않고 의심하여 그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루카1,18-20.)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다가가다가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믿음이 그렇게 약하냐?”(마태14,29-3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했을
때 놀랍고 무서워 유령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루카 24,36-38)고 나무라셨습니다.
의심을 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굽어보입니다.
주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6,47)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의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대로 주어지고, 또 이루어 지지 않으면 투덜대기도 합니다. 사업이
잘 안 풀리고 …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응답이 없어서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으십시오.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자기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돌 틈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그것을 거두어 가서 기도해 준답니다.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틀에 갇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들어갑니다.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그냥
들어갑니다. 사람만 모자를 씁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실대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많지만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충만함은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지만 꽃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가지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주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모두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하느님의 삶으로 바뀌길 기대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 주 예수님을 내입에 맞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기대에 걸 맞는 삶으로 기뻐하고 영원히 남을 것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콜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어제는 오랜만에 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래는 모임이 있었지만,
갑작스런 기상 악화로 인해 모임 자체가 연기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저 혼자만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지요. 방 안 정리도
하고, 또 읽지 못했던 책도 읽고 있다가 문득 ‘텔레비전이나 한 번
볼까?’하면서 전원을 켰습니다. 그리고 저는 텔레비전 프로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을 재방송하는 것 같은데
너무나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서 ‘낄낄’
대며 정말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보다가 어렸을 때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렸을 때에
주말 밤에 하는 ‘주말의 영화’를 꼭 챙겨 보았으며, 명절 연휴 때에는
신문에 나와 있는 방송편성표를 오려서 붙이고는 어떤 프로를 볼
지를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모든 방송을 섭렵했었습니다.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은 마치 텔레비전 안으로 빠져 들어갈
것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라고 사람들이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이 말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없이는 무슨 재미로 살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신문에서 제일 먼저 보는 부분은 방송
편성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어제 텔레비전을 본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지요. 텔레비전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텔레비전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음을 이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종종 현실 탓을 하면서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직 자신이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될 때 실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면,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면서 계속해서 ‘나중’만을 외치고 있지요. 물질적인
욕심의 증가는 무한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이 더
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과연 물질적의 풍요를 내세울 수가 있을까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없이는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텔레비전 없이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영원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셨던 것을
그대로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게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기다리던 메시아시며,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제자들을 통해서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보고 들음으로써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에 온 힘을 다 집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행동에 집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어떨까요? 세상의 기준을 따르기 보다는 주님의
기준인 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의 커다란 행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게 있어 무엇을 가장 첫 자리에 두고 있었을까요? 자선주일인
오늘, 내 이웃에 대한 나의 사랑을 점검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고서 세상의 것들을 첫째 자리에 놓았던 내 자신을
반성하여 봅시다.
사랑하는 사람을 종일 기다리는 마음은 애타고 힘들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는 마음은 두근거리고 기쁩니다. 희망도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탁현민).
평화신문의 자선주일 임선형씨 삽화입니다. 나의 자선을 생각해
봅시다.
말 잘 한다고 데려왔더니만....
어떤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많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봅니다.
명쾌한 강의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신부님께서 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기업가들의 모임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기업가들에게
이 세 가지를 꼭 실천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버십시오.”
이 말에 기업가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고 또 돈도 많이 벌게 되었음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둘째, 번 돈을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십시오.”
이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부님의 말씀에 깊은 공감을 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제 저축한 돈을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십시오.”
이 말에 곧바로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말 잘 한다고 해서 데려왔더니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에만 귀가 열려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듣기 싫은
말은 무조건 거부하고 반대하는 모습.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도 예수님 말씀이 듣기 싫어서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그때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자기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을 들으려고 했기에 벌어진 커다란 잘못입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
대해 우리들은 너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고,
지지하는 사람이 다르다고, 그 밖에도 많은 다름 때문에 서로 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무서운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무조건 맞을 수 있습니까?
다름도 인정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것. 이러한 사회가 될 때,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입니다.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나눌 수 있기에 행복한 우리입니다.'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복음묵상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오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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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이가 고통 중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 하고 있다.
이 말은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가진 것이 없는 이는 없다’는 말과
같다.
이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나눔이다.
누구도 이 대안에 대해 변명을 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가?
옷을 두 벌 가진 것이 죄를 뜻하지 않는다. 옷 한 벌 없어 힘들어
하고 있는 이를 모른 척 하고 있다는 것이 죄인 것이다.
사랑 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모든 이들의 삶의 이유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의미 깊은 글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사랑 받기 위해 창조되었다.
물건들은 쓰여지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이 세상이 혼돈 속에 있는 것은 물건이 사랑 받는 존재가 되고,
사람들이 쓰여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그 어떤 가름을 두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올바른 의미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힘은 나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주어진다.
자선이라는 거창한 말도 필요 없다.
당연한 것이니 당연한 삶이 되면 된다.
나눌 수 있다는 것. 정말 행복한 말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의 뜻: 변화의 힘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복음 : 마태오 11,2-11
< 하느님의 뜻: 변화의 힘 >
한석봉은 중국까지 이름을 떨쳤던 명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한석봉을 알아보고 글을 써 달라고 할 때 한석봉은 먹물을
백지에 뿌렸습니다. 사람들이 화도 내고 의아해 할 때 한석봉은 그
위해 그 먹물이 튄 자국을 획 안으로 넣어서 멋진 글을 완성합니다.
이렇게 중국에서도 유명한 명필이 되었습니다.
그런 한석봉이 있기까지 당신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한석봉의
어머니의 이야기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석봉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서예 능력이 있었으나 가난한
어머니는 한석봉에게 종이와 먹을 사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한석봉은 손가락에 물을 묻혀 바위나 항아리 위에 글쓰기 연습을
하였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어머니는 떡을 팔아 종이와 먹을
사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이 사다 준 종이와 먹이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한석봉을 나무랐습니다. 한석봉은
여전히 항아리 위에 물로 글을 썼는데 이는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였습니다. 한석봉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그것이
참다운 효도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일화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에 들어가
공부하며 3년이 지나자 스승조차 감탄해마지 않는 글 솜씨를 지니게
되자 의기양양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반가운 기색 하나 없이 불을
끄고 떡 썰기 시합과 글쓰기 시합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떡은
같은 두깨로 일정하게 잘려있었지만 한석봉의 글은 영 형편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절로 올라가 수련을 마치게 됩니다.
한석봉을 당대 가장 유명한 명필이 되게 한 것은 바로 어머니의
희생이었습니다. 그 희생 안에는 ‘뜻’이 존재합니다. 전에 자신의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려던 어머니가 성을 짓는데 기둥으로 들어간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그 아들은 힘들 때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뜻’을 되새기며 노력하였기에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가
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도 한석봉의 어머니도 그 희생을 받지
않으려는 한석봉을 나무라고 그 희생에 감사하면 당신의 ‘뜻’을 따라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따르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희생했는지 성찬례 때 우리는 매번 그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그분의 ‘뜻’이 우리 양식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얼마나 크든지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 말뜻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부러워하던 한 애벌레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뭇잎을 먹으며 가끔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들을 부러워할
뿐 자신 안에 나비가 들어있다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애벌레는 커다란 기둥을 봅니다. 자신과 같은 애벌레들이 구름
위까지 서로를 밟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나비처럼 날지는
못하더라도 하늘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쯤 올라가다가 자신이 밟은 한 여자 애벌레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둘은 내려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남자 애벌레는
기둥의 꼭대기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여자 애벌레를 떠나 빠르게
올라갑니다. 여자 애벌레는 슬픔에 빠져 길을 걷다가 나무 위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애벌레를 봅니다. 누에고치가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애벌레가 아무리 훌륭하고 크고 대단하여 기둥 끝까지 기어 올라
가더라도 가장 약한 나비의 삶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애벌레는 스스로 누에고치가 되어 나비가 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누에로 만들어 죽일 수 있을 만큼 자신 안에 나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인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늑대를 부모로 믿는 아이들이 사람을 부모로 둔 아이들과 같은 삶을
절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나보다 윗 단계의 누군가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현 상태를 초월합니다. 만약 늑대를 부모로 믿는
아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모가 늑대라고 믿는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누에고치가 되는 과정입니다. 마차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사람의 지위에서 하느님의 지위로 높일 수 있음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저와 함께 공부했던 한 신부가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백사를 잡으러 산으로 다니다가 백사를 잡지는 못했고 그냥 뱀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흰 페인트 통에 넣어 빨래
줄에 널어놓았다고 합니다.
뱀에 흰 페인트를 칠하면 백사가 될까요? 백사는 일반적으로 산삼을
먹고 사는 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백사가 발견된 곳에는
산삼 밭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산삼에 있는 성분이 뱀의 색소를 눈만
빼 놓고 다 빠져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뱀은 큰 값어치가 없지만 백사는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존재의 변화는 무언가를 받아들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받아들임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어두운 색소들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사들만 있는 곳에 어떻게 값어치도 없는 뱀을 함께
넣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보석들만 넣는 상자에 어떻게 돌덩이를
넣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존재의 변화를 겪지
않고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완전해지더라도 절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느님이 된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요한 10,35)
우리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주는
아무 보잘 것 없는 작은 돌멩이 부스러기가 진주조개 안으로 들어가서
그 진주조개의 희생을 입고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진주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희생과 뜻
안에서 아무 보잘 것 없는 존재였지만 귀한 진주와 같은 존재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그러나 계속됩니다. 성당에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시고 사제가 되기를 원하셔서 오랜 갈등 끝에 사제의 길로
들어섰고 유학을 가기를 원치 않을 때는 유학을 보내셨으며 지금은
본당이 좋지만 또 다른 부임지로 옮기라고 하십니다.
작은 모래알은 진주조개 안으로 들어갈 때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나의 자유를 죽이지 않으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남만
가지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할 수 있으나 만약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소명을 완수할 때야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항상 성체와 함께 그분의 뜻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분의 뜻 안에서 살 때야만 내 자신이 변화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서울]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란 점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란 점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어떤 인물일까 생각해 보셨나요?
연예인? 미모? 돈? 재주? 명예? 아니면 북한 독재자? 뭐 그런 걸까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편안함을 주는? 필요한? 그런 사람이겠지요.
내게 싸움 걸지 않고 경쟁 않고 얕보지 않고 괴롭히지 않는 사람이겠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란 점을 포인트로 보신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마태오 11,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2013년 가해 12월15일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더 만들어 냅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고, 자선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정했습니다. 오늘 미사를 함께 하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에게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나눌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면 그것은 썩지 않는 보화가 되어 하늘에
쌓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나무가 스스로 잎을 떨구듯이 우리가 베풀고
나누는 것은 천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로 나갔느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갔느냐? 그런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 너희는 왜 나갔느냐? 예언자를
보려고 갔느냐?”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세상이라는 광야로 오신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화려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십니다. “가서 요한에게 전하여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게 되고, 귀머거리는 듣는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은 그들에게 선포된 좋은 소식을
듣는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10년 전에 있던
본당의 한 교우 분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따님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따님이 나이가 들어 취직을 해야
하는데 받아 주는 곳도 없고, 한곳에 오래 있을 수 없는 따님이 걱정이
되신다며 제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제 그곳을
떠났으니 그런 문제는 그쪽 본당 신부님께 의논하세요.’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부끄러웠습니다.
만일 그 교우분이 사업에 성공했고 제게 커다란 선물을 하겠다고
했다면 그때도 제가 같은 대답을 했을까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그 교우에게 한번 찾아오시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께서 염려하셨던 사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저는 화려한 옷을 찾으려 했고,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 했으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대접을 받으려
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노력을 해서 얻은 재물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름휴가를 가는 대신에 농촌봉사활동을
가는 것도 즐거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겨울에 혼자 사시는 노인들을
위해서 장애인 복지 시설을 위해서 김장을 함께 하는 것도 힘들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보면 그렇게 바보처럼, 즐겁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힘든 일들을 찾아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보처럼
사는 것 같지만, 이런 분들이 주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고
있으며, 영원한 삶을 현명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탓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들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기쁨의 연속이었습니다.(마태 11, 2-11)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기쁨의 연속이었습니다.(마태 11, 2-11)
이번 주는 기쁨의 연속이었습니다. 월요일에 새벽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여서 기뻤고, 또 아침에 장례미사를 봉헌해서 기뻤고, 또 특히
눈이 아니고 비가 내려서 기뻤습니다.
화요일 수요일에는 판공을 잘 마쳐서 기뻤고, 목요일에는 눈이 제법
많이 내렸는데 눈 때문에 많은 묵상을 하고 하느님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또 처음에 자매님들과 눈 치우는 것을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형제님들이
오셔서 도로 끝까지 치울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눈을 치울 때 허리가
약한 자매님이 따뜻한 생강차를 건네주셔서 기뻤고,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저녁에 대림절 특강이 잘 끝나서 기뻤습니다. 또 몇 시간을 눈을 치웠는데,
다음 날 몸살 걸리지 않고 일정을 다 소화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또 금요일에 성심원에 가서 밤 열두시부터 새벽 3시 30분까지 미사 및
강의를 했는데 무사히 일정을 마쳐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일찍
일어나 인근 성당에 가서 입당미사 함께 봉헌하고, 또 어린이 미사 학생미사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기쁜 한 주간 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많이 피곤할 수
있었지만 지치지 않고 이 모든 일정을 다 마칠 수 있음이 또한 기쁨입니다.
오늘 대림 3주일을 맞아 제대위에는 장미색 초를 놓고, 사제도 장미색
제의를 입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주님의 탄생이 임박했기에 더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날을
기쁨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라고
기쁨에 넘치는 외침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우리도 기뻐해야 합니다. 연말이라 술 마실
기회가 많고, 친구들
만나는 시간이 많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탄생이 다가옴으로 기쁘고,
구역 반에서 함께 성탄을 준비하면서 기쁘고, 가족이 일 년 동안 하느님의
은총을 되돌아보며 그 은총을 나눔으로써 기뻐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때에 눈 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라고 메시아의 도래 시대에 대하여 예고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신의 도래로 인해서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 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라고 말하며 바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전해주십니다.
메시아는 이미 2천 년 전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인해서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고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그분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구원의 때요, 희망의 때가 될 것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감사드리며, 또 구역 반 공동체에서 함께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 자신 안에서 아기 예수님이 기쁘게 탄생하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이 한 주 여러분들의 마음에 주님으로 인해서 기쁨이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수도회] 시(詩) 같은 인생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사35,1-6ㄴ.10 야고5,7-10 마태11,2-11
시(詩) 같은 인생
시에 대한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얼마 전 시평이 곁들인
시집을 읽다가 대충 보고 서재에 꽂아 두었습니다.
너무 긴 시에다 복잡하고 알 수 없어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런 시들을 읽다보면 깜깜한 숲속을 헤매는 듯 답답하여 푸른 하늘을
보고 싶어 즉시 나오는 심정과 흡사합니다. 반면 파란 하늘같은 임의
얼굴이 보이고 은총의 햇살 받으며 성령의 바람 상쾌한 중에
탁 트인 숲길 같은 시를 대하면 온몸과 마음도 환희로 환해집니다.
성경 시편의 시들이 그러합니다.
임의 희망과 빛, 생명으로 가득한 시편들이고 오늘 이사야서도 그런
시의 전형입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힘이 되는지요.
생명과 빛,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시편입니다.
이런 시 같은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로는 좋은 땅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요셉수도원 터전을 마련해 주신 고(故) 최구 레지나 자매의
장부인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 요셉형제가 그러합니다.
어제 그분에 관한 글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대로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백범 선생은 박병래씨에게 자기도
타계할 때는 천주교에 귀의하겠다는 말을 누차 했고, 또 수녀들과도
그 얘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퇴원한지 얼마가 지나서 경교장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을 때 먼저 부른 사람이 박병래씨였다. 박 선생이 가서 진단을
하니 의식은 없지만 생명은 아직도 잔존해 있더라는 것이다. 박 선생은
성모병원 입원당시 백범선생이 하던 말이 생각이 나서 바로 세례를
주고 백범의 세례명을 ‘베드로’라고 지어 주었다.
그 사실은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백범과의 인연으로 박병래씨는
안미생 여사(김구선생의 자부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여사의
여식을 돌보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윤형중 신부의 글-
백범 김구 선생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주어 하느님께
인도한 ‘참 아름다운 사람’ 박병래 형제입니다. 평생 아름답고 고결한
시 같은 복음적 인생을 살았던 박병래 요셉 형제였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시 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겠는지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항구히 주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 같은 아름다운 인생에 항구한 기다림의 인내는 첫째 필수
요소입니다. 그대로 항구한 믿음의 표현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과 더불어 인생도 깊어져 갑니다.
바로 지금은 성탄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설레는 마음으로, 희망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의 권고가 적절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성탄)이 가까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참고 기다리는 농부는 그대로 수도승의 전형입니다. 전 노태우
대통령이 초대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이어령씨와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대통령이 나에게 ‘참용기’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참고 용서하며 기다리는 것’이 참 용기라는 대통령의 말이었다.
나는 평생을 ‘참용기’를 좌우명 삼아 살아왔다-는 이어령씨의
고백이었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시 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삽니다. 주님을 만납니다..
둘째, 늘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시 같은 아름다운 인생에 기쁨은 둘째 필수 요소입니다.
믿는 이들의 빛나는 표지가 바로 기쁨입니다.
우울의 어둠은 믿는 이들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쁨의 사람들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기쁨으로 피어난 얼굴은 그대로 꽃 같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 ‘기뻐하라’는 래타레 장미주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적절합니다. 그대로 햇빛은총 가득한, 성령 바람
시원히 통하는 아름다운 숲길 같은 시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정말 이런 우리를 구원하는 시가 좋은 시입니다.
진정 예언자는 신비가이자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기쁨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는 하느님 주시는 기쁨의 선물입니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게 기쁨의 비밀입니다.
주님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음 승리의 귀환 길 묘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 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시온이 상징하는바 바로 성전주일미사입니다.
주님 주신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주님을 만날 때 치유입니다.
시 같은 아름다운 인생에 치유는 셋째 필수요소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활짝 꽃처럼 피어나는 우리 존재들입니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치유 받아야 할 병자들입니다.
근원적 치유는 주님만이 가능합니다.
요한이 기다렸던 주님은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주
예수님이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의심을 품지 않고 주님을 믿을 때 그대로 미사를 통해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이사야의 예언이 복음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온전한 치유를 상징하는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복음의 결론 같은 말씀이 복음의 절정입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 치유되어 하늘나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가장
작은이들인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런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구원을 기쁨을, 치유를 실감하는 거룩한 미사축제입니다.
시 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1.항구히 주님을 참고 기다리십시오.
2.늘 기뻐하십시오.
3.주님을 만나 치유 받으십시오.
바로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비결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광주] 주님,저희를 구하러 오소서 /
글 : 강길웅 신부
2013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주님, 저희를 구하러 오소서>
떠돌이 나그네에게 정든 고향집보다 더 아늑하게 그리운 곳도 없습니다.
고생이 많고 시련이 크면 클수록 고향은 더 간절하게 그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처음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나그네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
년의 방랑생활을 했으며 바빌로니아에서 오십 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로마에 멸망한 뒤에는 장장 이천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떠돌이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고국에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의 염원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간절하고 더
애틋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 유배시의 이야기입니다. 기원 전 590년 경 에 유대인
들은 오 천리나 멀리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으며,이젠 다시 고국에 돌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할 대로 망했으며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약
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 폐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될 것이며 꽃과 열매가 풍성할 것이고 겁에 질리고 고통에 찌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게 조국에
돌아가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벙어리는 입을 열며,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어다니게 됩니다.
소경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벙어리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는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제일 큰 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시면 그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어봅니다. 요한은 그때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 한 데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정말
예수가 맞는지 어쩐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다.", 또는 "아니다."라 는 명쾌한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다만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스승
에게 전하도록 일러줍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뜨고 절름발이가 뛰어다니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는 아주 굉장한 사건들 이었
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사건들을 보여 주고 들려 주셨느냐. 그것은
이사야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예고한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현상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옛날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확신케 했던 것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은 이사야서 35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이시기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도 의심했으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하며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들 신앙의 모순입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시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이 직접 인간으로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은 마지막 날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기다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는 날은, 죄로
병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해방의 날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분이 간직
하고 있는 아름다운 꿈이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바로 그 소망과
꿈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불구자들입니다.
돈만 알고 세속에만 깊이 빠졌던 병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떠돌이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제멋대로 헤맸던 방랑자
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립시다. 고향 같은 하느님
을 애타게 찾아 기다립시다.
- 광주대교구 소록도 성당 강 길웅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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