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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171)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150) - 디모데후서 강론(3)
디모데후서 강론(3) - 2장 11~26절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하는 신뢰할 만한 세 가지 말씀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을 만한 말씀 세 가지를 알려주면서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므로 이 말씀들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①우리가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사는 것이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산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의 삶에 대한 말씀이지 확인이 안 되는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검증되어야 한다.
②우리가 참고 견디면 주와 함께 통치하게 된다는 것이 검증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주님께 끌려 다니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주와 함께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상황을 주와 함께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팩트 체크가 되어야 한다. 환경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다스리며 사는 삶이다.
③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들을 부인하시게 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느냐 아니면 외면하시느냐, 우리가 주님을 시인하는가 아니면 부인하는가 하는 것도 현실이다. 주님이 실제로 내 인생의 주인이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주도적인 삶을 개척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 주님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가 중요하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주님께서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에게 돌아오라고 하신 것도 그들이 실제로는 주님이 나의 주인님 이라는 것을 부인한 것이며 이용 대상인 수호신을 믿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계속 우리와 함께 사시지 않는 것으로 입증된다.
이 세 가지 항목은 항상 현실에서 그대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흐지부지 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것을 test하고 prove하라고 하신 것은 팩트 체크를 하라는 것이다. 종교는 팩트 체크를 안 하는 것이 종교다. 팩트 체크 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종교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팩트 체크는 표적으로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살아가는 과정이며 그것은 신념이나 종교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진리의 삶이다. 진리의 삶은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을 위해 안에서는 구제와 양육을, 밖에서는 전도와 활용을 하는 삶이다. 그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하나씩 맺혀져가는 것으로 팩트 체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다툼은 서로가 남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형제들이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고 말다툼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주님 앞에서 증언하라고(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전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다. 말다툼의 본질은 서로가 타자라는 것이다. 남이니까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말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다툼이 있다는 것은 서로가 남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진리가 전개된 상황에서는 말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비진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으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훈계하고 설득하라는 것이며, 안 될 것 같으면 피하라는 것이다. 말다툼이 생겨서 타자 인식이 퍼지면 서로 상대방을 이기려는 현장이 되고 서로 믿음직스러워하는 신실함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정확히 분별하며 논쟁이 벌어질 거 같으면 차라리 피하라는 것이다. 논쟁 자체가 위험한 함정이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부활과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부활은 무엇이 다른가?
사도 바울은 경건치 못한 말들과 공허한 말들을 피하라고 하면서 영지주의의 유혹을 경계하고 있다. 이들은 진리에서 벗어난 자들인데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아니고 왜곡된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인간의 정신문명의 한 흐름인데 그 실체는 인간의 초월성이다. 인간의 초월성을 추구하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고의 흐름이다. 오늘날의 뉴에이지가 그 흐름에서 나온 것이며 당시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있었다. (완성된 존재, 부처, 신선)
이 영지주의적 흐름이 에클레시아 안에 들어와 형제자매를 흔들게 된다. 오늘날의 신비주의적 기독교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신과의 합의 등의 영성 운동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흐름을 형성하는 한 종파이다.(ex.지방 교회)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영을 쫓는 자와 영지주의의 신적인 존재와 무엇이 다른가?
영을 쫓는 자는 내 안에 두 법이 있다는 것이다. 내 육신에는 다른 법(싸르크스)이 있어서 우리가 육신을 벗지 않는 이상 우리 안에서 우리를 흔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우리 몸 안의 싸르크스가 계속 우리를 흔들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을 한 것이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땅에서의 부활의 실체다.
영지주의는 영, 정신은 고귀하고 순결해서 신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으나 육체는 악하고 추하고 더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육체와 분리시키면 정신이 신적인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본질적인 사고이며 망상이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 성령으로 거듭난 바람 같은 자는 육신이 가진 한계를 떠안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한 것이다. 내 지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흔든다는 한계 속에서 뚜벅뚜벅 가는 것이다. 이것은 팩트 체크가 되는 것으로 망상이 아니다.
이 영지주의는 금욕주의적 흐름으로 나타나서 악하고 더럽고 발광하는 육체를 짓밟아 버려야 순결하고 고귀한 우리 정신이 고양된다는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육체는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는 흐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불교의 무아행, 파괴승)
그러므로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육체에서 분리된 존재로서 영과 정신이 초월적인 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영지주의가 주장하는 부활이다. 성경에서의 부활은 이 땅에서의 부활이며 싸르크스가 살아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의 부활이다. 완전한 부활은 주님이 오시면서 육신을 벗고 영적인 몸을 입게 될 때 이루어진다. 이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영지주의는 한쪽의 극단적인 오류이며, 반대쪽에 있는 극단적인 오류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샛길을 낸 것이 인간답게 살자고 휴머니스트를 주장하는 진보 기독교이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의 부활이 팩트 체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팩트 체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터에 새겨진 두 가지 말씀
하나님의 터는 든든히 서 있고 새겨진 말씀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터는 개인과 공동체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각자 마음에 새겨져 있고 그런 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개인이나 클레로스에 그 말씀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새겨져 있는 말씀이란 첫째,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이다. 이것도 팩트 체크가 되어야 한다. 존재의 이유가 바뀌는 것으로 팩트 체크가 될 수 있다. 나를 보호하고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을 위해 존재하는 삶으로 바뀐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말씀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 의미는 시대마다 문화마다 다르게 이해가 될 수 있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타자를 남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의 생명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타자 됨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하고 간구하면 타자 됨에서 떠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것이다.
청결하게 자기를 지킨 그릇이 귀하게 쓰인다
사도 바울은 큰 집안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과 나무 그릇과 질그릇이 있어 귀한 일에 쓰이기도 하고 천한 일에 쓰이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열의 대비가 아니라 그 사람의 객관적인 상황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다. 즉 다양성의 표현이다. 각 분야에서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이 섞여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면 모두가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쓰 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정결하게 자기를 지킨 그릇이 귀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열이란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말씀을 경쟁을 부추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다 남이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욕망을 피하고 다툼을 피하라
욕망(에피듀미아)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지향하느냐의 문제이다. 젊은이의 욕망은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욕망을 피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 확산을 지향하는 욕망(마크로뒤미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사도 바울도 주와 함께 있고 싶은 에피듀미아가 있다고 했고, 예수님도 유월절 저녁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에피듀미아를 에피듀미오 했다.)
그리고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이를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
주님의 종은 누구와도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온화하고 친절하며 잘 가르치며 잘 참으며 반대편에 서서 맞서는 자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으로 훈계해야 하는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리를 향해 돌아서게 하시고 마귀의 올무로부터 깨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혀 그의 뜻을 따르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은 진주 일거 같으면 참으면서 계속 훈계하는 것이고 충돌이 일어날 것 같으면 일단 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충돌할 가능성은 없다. 원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짓은 원수의 모습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원수로서 인지되지 않고 그 사람이 좋은 진주냐 아니면 지금 피해야 할 존재냐로 분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클레로스가 기반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클레로노모스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남인 세상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도 그 사람이 회개해서 다시 하나가 되겠다고 할 때 용서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용당하고 죽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과 마귀의 올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두 단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극적인 전환이며, 정상적인 인간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으로의 전환이며, 불의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세상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의 전환이다. 중간 상태는 없다. 깨어나면 마귀에서 벗어난 상태이고, 마귀에서 벗어나면 깨어난 상태이다.
깨어나면 하나님께 생포된 자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래서 좋은 진주일 것 같으면 모든 것을 참으며 노력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일단 피하는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상대가 남으로 보인다는 것이며 최악의 상황이다.
인간을 유혹하는 바벨탑의 세 종류와 하나 됨이라는 성경의 구원의 약속
①할례나 세례나 교회 등록을 통해 신의 가호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는 종교적인 방법이다.
②내가 신적인 존재가 되자, 그것이 나를 보호하고 세우는 길이다, 라는 것이 신비주의적, 철학적, 사상적인 접근이다.
③인간적인 삶을 살자는 휴머니즘적인 유혹이 있다.
십자가의 부활이 성경에 약속된 구원의 현실태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부터 독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 멋대로 상상을 하게 된다. 예수 천당 불신지옥은 조로아스터교적인 상상이다. 하나님 믿고 대박 맞자는 것은 샤마니즘적 해석이다. 인간답게 살자.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상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자는 겻은 인본주의적 유혹에 빠진 오독이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도 하나 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하나 됨이 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됨에 대한 말씀이다. 타락은 타자 됨이며 그것의 회복이 구원의 약속 즉 다시 하나 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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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기도는 정진호 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