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생략, 구체적인 명칭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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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다섯 구간을 다녀온 지 거의 2년이 지났을 무렵 구독하는 주간지 <시사인>에 반가운 소식이 실렸다. 2012년 5월 25일 둘레길 전 구간, 3개도, 5개 시/군을 연결한 274킬로미터가 드디어 열렸다는 소식이었다.
주간지를 보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벌써 학기말로 치닫고 있었기에 더더욱 조바심이 났다. 부랴부랴 학기를 마치고 드디어 6월의 마지막 주,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를 가지고 가야만 했다.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아내가 몸이 안 좋다는 바람에 하시라도 되돌아올 수 있도록 차를 가져 가기로 했다. 휴게소마다 들러 아내의 상황을 확인하다가 어느 정도 안심할 정도가 되어 함양을 향해 속력을 내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내가 차를 가져가는 이유는 또 하나 더 있다. 맡길 곳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달려서 함양에 도착하니 거의 2년 전 봤던 익숙한 읍내가 나를 반긴다. 함양엔 숙박업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강 쪽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2010년 내가 중도에 포기했던 5구간(동강-수철) 초입인 방곡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수철로 넘어가려고 한다. 잠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지갑을 뒤졌고 지갑 구석에서 2년 가까이 처박혀 있던 꾸겨진 쪽지가 나왔다.
나는 지난 여행 때 했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전화를 하자 2년 전 황당해서 걷고 있던 나를 정류장까지 태워주었던 민박집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내가 오늘 그 집에서 잘 수 있냐고 묻자 쾌히 승낙을 하였다. 나는 오늘 그 민박집에서 자고 차를 맡겨둔 채 둘레길을 가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함양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고 있는데 다시 민박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로 내게 식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혼자 주무셔야 한다고 한다. 남들과 같이 자게 될까봐 민박을 회피했던 나는 오히려 더 좋았다. 그리고 함양에서 간단한 아침거리를 사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목소리가 왠지 이상하고 불안했다. 이른 저녁을 후다닥 먹고 자동차 창문을 다 열은 채 굽이굽이 아름다운 동강을 바라보며 방곡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짐짓 놀랐다.
**민박 ... 그 곳은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차를 세우자 공익요원을 하며 취업준비를 한다는 둘째 아들이 나왔다. 아들은 자기가 혼자 여기를 지킨다고 하더니 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아들에게 숙박료와 내가 갖고 있던 컵라면과 참외를 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옆 동으로 안내했다.
엄청나게 큰 거실, 7-8명은 족히 잘 수 있는 큰 방이 두개, 주방, 화장실, 작동이 멈춘 노래방 기기와 프로젝션 티브이, 그야말로 한 동(棟) 전체를 나 혼자 쓰게 된 것이다. 그때서야 혼자 주무셔야 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청소를 해놓은 개울 쪽 방에 짐을 풀고 샤워를 했다. 그야말로 영하 15도의 찬물샤워를 하고 나니 정신이 뻔쩍 났다. 그때 다시 민박집 아주머니의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은 집으로 와서 아침을 꼭 드시고 가시라고 ...
날은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방에는 개울 쪽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이 두 개나 있는데 열어두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창은 닫았지만 닫히지 않는 유리 미닫이 현관문과 삐걱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방문, 나는 이 어둠에 완벽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평생 방문을 닫고 잠을 자는 삶을 산 내게 참으로 불안한 시추에이션이 연출된 것이다.
나이 오십에 으스스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왠지 자존심이 상해 잠시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좀처럼 기도가 깊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시원한 밤바람이라도 쐴까 하고 마당에 나가보니 칠흑 같은 밤에 멀리 불빛이 2개 보였다. 근방에 집이라곤 딱 3채 뿐인가 보다. 볼 것도 없고 달도 없고 그저 까맣기만 한 밤, 하릴 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시간은 아직 8시 경, 잠을 자기엔 정말 이른 시간이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핸드폰도 안 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정말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오토바이 소리가 나기에 밖을 내다보니 옆 동에 있던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휙 하고 가버렸다. 나를 다 맞이했으니 잠을 자기 위해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때서야 또 다시 깨달았다. “아, 이게 정말 혼자 자야한다는 소리였구나”
그때부터 엄청난 불안이 엄습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지도를 꺼내 스케줄을 점검하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창문 밖에선 개울소리, 개구리 소리, 벌레우는 소리, 새까만 산에서는 꺼이꺼이 이상한 새소리, 평소 같으면 정겨울 소리들이 모두 두렵게만 들렸다. 바로 위에는 1천명이나 되는 학살 희생자들의 영령들이 잠들어있지 않은가?(밤에는 그 분들도 깨어날지 모른다) 두려움을 이겨보자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뿔싸. 그 민박집 마당에 가득 세워져있던 수많은 돌탑들, 그 돌탑들이 새까만 어둠 속에 정말 움직이고 있었다. 졸지에 나는 폐허 속 괴담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침을 꾹 삼키고 진정을 한 후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내 경험 상 이럴 때 허둥대면 더 무섭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가지고 일단 밖으로 나와서 다시 그 집을 바라보자 도저히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불은 꺼주고 가야겠기에 일단 차에 시동을 걸고 헤드라이트를 켠 후 정말 용기에 용기를 내서 방의 불을 껏다.
그때서야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심정으로 차에 탄 후에 무조건 엑셀을 밟았다. 주위엔 불빛 한 점이 없었다. 한참을 내려오자 집도 없는 길에 띄엄띄엄 불빛만 보인다. 그렇게 아름답던 동강의 임도로 들어서자 아름답던 강물은 시커멓고 흉물스럽게 흘렀고 절벽을 절단해 길을 낸 임도는 무시무시한 괴기소설 속의 길 같았다. 이제 9시 밖에 안 되었는데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땀을 흘리며 한참을 내려오자 마을과 상점들이 보였다. 문이 열려있는 상점 앞에 차를 세우고 나니 그제야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났다.
고민하다가 갑자기 아예 수철코스를 건너뛰고 산청으로 가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얼른 내비게이션에 산청을 찍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정말 둘레길 제5코스는 나와 참으로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청에 도착하니 그 작은 산청읍이 거대한 도시로 느껴졌다. 마트 하나가 곧 문을 닫으려하기에 얼른 가서 순대를 샀다.
이른 저녁을 먹었고 긴장이 풀리다보니 이상하게 속이 허했다. 순댓집 아저씨 아줌마는 서울 말씨를 쓰는 내게 시골경제가 다 망했다고 볼멘소릴 해댔다. 저렇게 불만이면서도 매번 같은 당을 찍어대는 이곳의 정치의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읍을 몇 차례 순회한 결과 허름하고 오래된 여관으로 들어섰다. 티브이를 보고 있던 영감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더니 말을 시켰는데 대답을 해도 전혀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던 노친네의 통역이 정말 재치가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할아버지: 어디서 오셨나?
나: 방곡리 민박집에서 잘려다가 너무 시설이 안 좋아서 돈 다 내고 이리 내려왔어요.
할머니: (못 알아들은 할아버지께) 서울서 놀러왔대 ~ (할아버지 끄덕끄덕, 그리곤 할머닌 날 보고) 요즘 민박집이 장사가 잘 안 되서 그래.
나: 깨끗하고 조용한 방 주세요.
할아버지: 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키 달래. (할아버지가 내게 키를 주자 할머닌 내게) 그 방이 기중 좋습니더.
이런 식이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나는 두 분에게 남은 참외 두 개를 드리고 방으로 왔다. 방에 들어서자 정말 촌스러운 꽃무늬 베게와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불을 덥자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베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랑 2장을 준 수건을 베개에 덮어도 냄새는 여전하였다.
할 수 없어 배낭을 열어 옷을 꺼내 수건에 뭉쳐 베개를 만들고 이불도 덥지 않은 채 창을 열어놓고 잠을 청했다. 허이구, 그런데 피곤했지만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바로 아래층이 노래방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동일한 비트의 둔탁한 베이스 울림, 게다가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의 째지고 멱따는 소리에 고생하다 잠이 든 것이 새벽 1시는 족히 넘어서였다.(계속)
첫댓글 이런 여행기를 무려 30 꼭지 이상 썼다는.....
ㅎㅎㅎ..재밌어요~~다음편 빨리 올려주세요~~ㅋㅋ
에이...부끄럽네요. 재밋게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읽습니다. 정작 여기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을 멀뚱멀뚱~~~ㅠㅠ
있을때 잘해야되는데요...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