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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광음악학원 원문보기 글쓴이: 이원장^^^
오늘날 교회의 목사 자격은 어떻게 획득하는가?
중세 때 수도원 출신에 교황의 서품 여부였다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신학교의 졸업과 안수 여부로 가름한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를 졸업해서 일정기간이 지나면 목사안수 받을 자격을 받게 되고 안수 후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된다. 그때부터 그는 소위 성직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의 성경에 의하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뽑히고 임명되는 직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사를 신자들에게 주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도를 완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 하심이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하나님의 은사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인간의 제도로 양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관에서 자기들이 만든 어떤 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분별없이 사람들에게 '사도'자격을 수여한다면 나는 주저할 것도 없이 그 기관을 '사이비'이라고 부르겠다.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사도 바울도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찬가지 원리를 목사나 교사나 복음전하는 자에게 다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목사나 교사로 세울 때는 그가 어떤 과정을 마쳤는가보다는 그에게 그러한 은사가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의 교육과정은 더 나은 질적 향상을 위해서 필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신학대학이 목회자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것은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신학대학이 자격을 수여하는 기관이 되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신학대학은 교육기관이지 자격을 주는 기관이 아니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사람들은 그러한 가시적인 제도가 필요하고 졸업장과 면허증들이 중요한 기준이 되나 교회마저 그러면 안 된다. 적어도 교회는 세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무리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귀머거리, 장님처럼 인간적인 제도를 만들어 놓고 졸업장과 시험점수를 기준으로 자격증을 준 단 말인가? 자격은 스스로 갖추게 하라. 다시 말하면 그가 자신의 은사대로 봉사하다 보면 그의 봉사의 열매와 사역의 결과들이 그의 자격을 말해줄 것이다.
은사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후부터 그의 사역은 시작된다. 안수 받음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안수의 의미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인준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 성경을 살펴보자.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은 선지자나 교사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로 세우라는 것을 순종하기 위해서 안디옥교회의 형제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했다. 바울은 그때 사도직을 임직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안디옥 교회의 안수는 단지 따로 세우심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교회가 순종하고 파송하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바울은 종종 사도직에 대한 도전을 받았는데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할 때 위의 안수 사건에서 근거를 찾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임을 어떻게 강변했는가를 살펴보자.
고전 9:1-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의 표로 그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열매들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증명할 길이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열매는 확실한 객관적 증거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하셨음을 확신하고 있다.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 때문에 사도가 된 것이다. 사도의 자격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왔느냐 아니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 바울의 간증은 너무도 개인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이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표 된 것으로 그의 사역의 열매와 결과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바울의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고후 12:11,12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 - 다시 말하면 그의 사역의 결과와 열매를 사도의 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사역은 바로 사도의 사역이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감독을 세우는 일을 누가 했던가? 바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분명히 사도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고전 9:2)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사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사도가 되려면 첫째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아야 하며 그것이 증명되기 위해서 그의 사역의 열매들을 보면 된다. 만일 사도가 되기 위해 당시 예루살렘교회에서 교육받은 증거나 베드로의 인증 같은 것을 요구하였다면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4년간 교육받으면 자동으로 사도로 임명되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교회는 급속히 성령의 역사가 멈추었을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자. 사도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선지자도, 목사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목사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고 그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목사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목사의 은사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그의 사역의 열매가 나타내 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는지에 대해 생각도 안 해보고 단지 등록금을 착실히 내고 학교에 꾸준히 출석하고 신학시험에 낙제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사 자격을 주는 것이 과연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언젠가 극동방송에서 어느 조그마한 섬에서 사역하는 분의 간증을 듣게 되었다. 그 분은 원래 교회 장로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그 섬에 자원해서 가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은 안타깝게도 학력이 초등학교 중퇴였다. 그래서 그는 목사가 되지 못하고 항상 전도사로 불렸다. 그가 목사 자격을 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에는 정규대학 코스가 아닌 무인가 군소 신학교가 많이 있어서 거기서 그것도 통신 강좌로 과정을 마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형편에 입학금, 등록금을 내면서 다녔을 것을 생각해보라. 나는 더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자신이 비로소 목사 자격이 생겼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건대, 위의 섬에서 목회 하던 장로는 신학교 다니기 전에 이미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양들을 위해 헌신적인 사람이 어찌 목사라고 할 수 없겠는가?
만일 오늘날 신학대학이 순수한 교육기관으로 만족했더라면 교회는 훨씬 큰 유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대학이 자격을 수여하는 기관이 됨에 따라 신학대학을 못 간 사람은 사역할 길이 막혀버렸고 반대로 신학대학을 마친 사람은 은사에 관계없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학력이 낮은 사람은 목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게 되었고, 반대로 형편없는 인간도 목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번 목사 안수를 받으면 그가 정치를 하든, 방송국 사장을 하든 계속 목사로 불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목사는 박사나 석사처럼 학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을 다시 인용해본다면,
그러므로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한 사제는 하나의 관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직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우위권을 가지나 파면되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농부나 시민이 된다. 따라서 의심 할 여지없이 한 사제가 파면을 당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울 수 없는 성질'을 조작해 놓고 파면된 사제도 단순한 평신도와는 좀 다르다고 지껄인다. 사제는 결코 평신도가 될 수 없다거나, 혹은 사제는 사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몽상까지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단순히 공론이나 인간이 만든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목회의 일을 멈추면 그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양을 돌보는 일을 버리고 공장의 기계를 만지면 우리는 그를 더 이상 목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엔지니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반면에 우리가 자식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되듯이 돌보는 교회가 생기면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사지만 그것에 걸맞는 사역이 이루어 질 때 그는 진정한 의미의 목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만 미비해도 그는 문제가 될 것이다. 즉 목사의 은사 없이 목회를 하는 사람이나 목사의 은사는 있지만 목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둘 다 진정한 의미에서 '목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학대학이 진정한 기능을 발휘하려면, 먼저 세상 제도권 대학이기를 포기하고 학위도 주지 말고 참으로 제자양육 기능을 가진 순수 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 졸업해도 목사 자격은 주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그가 졸업한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명을 서줄 수 있지만 그가 목사의 은사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증을 서줄 수 있단 말인가?
신학교는 더 이상 자격을 얻기 위해서나 직업을 갖기 위해서 들어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회 하다보면 자신이 지식이 없고 영적으로 빈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라도 들어가서 교육받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만일 신학대학에서 목사 자격을 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 어떤 사람은 대 혼란이 생길 것을 상상한다. 아무 사람이나 목사가 될 것이고 교회는 어중이떠중이가 목사 입네 하고 설쳐 댈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상상은 틀린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신학대학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격을 보지 않고 열매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에게서 은사가 발견되지 않으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그는 다른 일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것이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될 때 거짓 목사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직장에서 신우회 활동을 20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이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신우회에서는 그를 성경공부 리더로 세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할 적이 있다. 아마도 직장에서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여럿 있으리라 본다.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그가 목사나 교사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댓글 성령의 은사를 따라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의 일꾼들입니다. !!
결국엔 성령충만이 중요한 키포인트인돗 싶습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저또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시면 그자체가 중요한 사역자가 됨을 느끼게 하네요.
버섯탕수욕님의 댓글참여를 감사합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충만으로 살아갈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사람은 거듭나야 합니다. 주님을 믿어야만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9:36, 마25:32, 마26:31, 막6:34, 막14:27, 요10:2, 요10:11-12, 요10:14, 요10:16, 히13:20, 벧전2:25, 눅2:8, 눅2:15, 눅2:18, 눅2:20, 엡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