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 겟세마니 피정의 집 → 곰실공소 → 춘천주교관 → 죽림동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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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겟세마니 피정의 집
강원도 인제군 소양강 변에 위치한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1991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
조선희 필립보(Philip J. Crosbie)신부가 설립하였다.
조선희 신부는 1915년 호주에서 태어나 1939년 수품 후,
1940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58년 동안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해방 전 이미 일제에 의하여 강제 구금과 추방을 경험했던 조 신부는,
홍천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교우들과 성당을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죽음의 행진’과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수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조 신부는,
주님의 은총으로 생환하여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사로 신앙을 전하며 일생을 온전히 헌신하였다.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웃에게 모자람 없는 참사랑을 실천하였다.
일선 사목에서 물러난 뒤에는 6·25 전쟁이 벌어진 38선 위에
세상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피정의 집을 세워,
신자들을 지도하고 함께 기도하며 생활화였다.
1998년 노령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제 영혼의 반은 한국에 놔두고 갑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본국으로 돌아가 2005년 3월 24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24. 곰실공소
죽림동 본당의 모체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였다.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엄주언의 딸 엄 루치아의 증언이나 1894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중에서 '목' 씨 성을 가진 신부는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브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 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 방문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25. 춘천주교관
주교관은 춘천교구장 주교의 거처이자
선교사들이 교구 일을 돕거나 기거하는 거점으로
강원도 지역을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158년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의 전형적인 외국인 선교회풍으로 지었는데,
유별나게 서향으로 세운 것은
햇빛이 아쉬운 아일랜드 풍습의 영향으로 보인다.
6.25 전쟁이 끝난 뒤, 포격으로 피해가 많았던 춘천에
아일랜드풍으로 세워진 건물로서, 현재까지 보존이 잘 되어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춘천교구 신앙 교육의 요람인 교육원은
58년 주교관이 지어진 후 건축이 시작되어 이듬해에
주교관과 같은 분위기로 지어졌다.
교육원은 당시 교구장인 구 토마스 주교의 뜻에 따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들에게 신앙을 심기 위한
전교 수녀 양성을 위한 수련소로 사용되었다.
1969년 수녀회의 서울 이전 후에는
춘천에 거주지가 없는 학생 기숙사로 활용되었다.
이후 이곳은 신앙재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교육원은 전쟁 이후 지어진 건물로
현재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보존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교구의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년 2월 등록문화재(제 743호)로 지정되었다.
26. 죽림동 순교성지
6·25 전쟁 때 피살 당한 성직자들의 묘소 보존
천주교의 강원도 전래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실학(實學)의 학풍을 일으킨 남인(南人)계 선비들이
18세기 말엽에 이른바 강학회(講學會)를 연 것이
교리 탐구와 신앙 수련의 모태가 되면서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선배와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면서부터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태동하였으나
멀지 않아 거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에 이은 신유대교난(1800-1801년)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 강원도 등의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신태보 베드로가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퍼져나간 신앙에 귀의한 초기 교우들 가운데
춘천 신읍리 지방의 최 요한과 회양 지방의 조신철 가롤로처럼
1815년에 투옥된 이들이 있는데,
조신철 가롤로는 강원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1984년 5월 5일 서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들보다 늦게 1840년에는 춘천에서 신자 아홉 명이 투옥되어
그 중 두 명이 옥사하기도 하였다.
1880년을 전후하여 종교의 자유가 공인되기까지
강원도의 시골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힘겹게 전교에 헌신한
김 시몬 신부와 최 요한 신부도 울진과 춘천 말고개에서
각각 잡혀 모두 원주 감영에서 치명하였다.
이처럼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민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그 후 곰실 본당은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1938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1940년 제2대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퀸란 신부는
1949년 4월 새 성당 건립을 시작했지만
다음해 6.25전쟁의 발발로 인민군에게 피랍되었고,
성당 또한 1951년 5월 유엔군의 반격 공습 중 일부 파손되었습니다.
전쟁 중인 1951년 8월 제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 토마스 신부는
복구 작업을 시작해 미군과 교황청의 도움으로
1953년 대부분 마무리했습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뒤뜰에는 교구 순교자 묘역이 있는데,
이곳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이 동시에
신앙을 증언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다가 희생된
순교자들이 함께 모셔진 곳이다.
이 묘역에는 한국 전쟁 중 희생당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고 안토니오 신부, 라 파트리치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북한 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이광재 티모테오,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아울러 '죽음의 행진' 속에서도 살아남아
교황 사절과 춘천교구장으로 교구의 초석을 놓은
구인란 토마스 주교의 묘도 함께 있다.
오늘은 주일로 이곳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30분 전에 들어가서 미사준비하는 모습과
직접 전례봉사자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먼저 마이크마다 음량 측정기를 들고가 일일이 체크하는 모습,
해설자. 독서자들이 마이크 테스트하는 모습
화답송 연습을 하는 모습 등 거룩한 미사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교좌 성당치고 규모는 작았지만 미사진행은 거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