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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몸과 영혼의 영약
고혜경 박사
(신화학자, 꿈 분석가)
차례
1. 들어가는 말
2. 꿈의 치유력
3. 꿈을 통한 신체 질병의 예단과 치료
4. 꿈을 통한 혼란한 감정의 이해와 수용
5. 꿈을 통한 신화에 대한 질문
6.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거울아, 거울아 !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왕비님도 예쁘지만, 숲 속에 사는 백설 공주님이 더 예뻐요.”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와 거울의 대화이다. 한 치의 융통성도 없이 올곧게 진실만을 말하는 이 고집스런 거울을 우리가 매일 밤 꾸는 꿈의 은유로 바라보면 어떨까? 꿈이란 거울은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는 황당하고 의미 없고 때론 불편하게 여겨지지만, 내면으로 향한 눈으론 오직 진실만을 투영하여, 꿈꾼 이 안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준다. 꿈은 영혼의 음성을 이미지로 투사하는 ‘마술거울’이기 때문이다.
‘마술’이란 단어를 붙인 이유가 꿈이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치 마술을 하듯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무의식의 잠재된 가능성들을 형상화해주어 의식으로 통합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내가 누굴까?’ ‘어떻게 지금 여기 있지?’ ‘어떤 사람으로 성숙해 갈까?’ 꿈은 이런 질문에 대해 상징적인 답을 해준다. 그렇지만 꿈이 하는 답은 왕비가 보이는 태도처럼 단순한 답을 얻기보다 삶에 대한 질문으로 간주할 때, 더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왕비가 숲 속으로 공주를 찾아나서는 대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동화는 어떻게 전개가 될까?
“내가 제일 예쁘지 않은 이유가 뭐야?”거울에 시기심으로 눈과 귀가 먹은 왕비의 모습이 드러난다. “아! 나는 아름다움을 볼 눈이 없고 진실을 들을 귀가 막혔구나.” “왜?” 멀리 공주만 주시하느라 가까이 있는 자신은 보지 못해서 자기 필요는 오랫동안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게 내 모습이구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꿈이란 ‘마술’거울은 볼수록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만드는데, 계속되는 질문과 함께 꿈 이미지가 수직으로 그 차원을 확장한다. 꿈거울은 마치 동양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물거울과 유사하다. 들여다볼수록 맑아지고 선명해져서 깊은 지혜와 본질이 드러난다.
왕비의 경우처럼 꿈거울은 종종 외면해 왔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데, 이는 꿈이 꿈꾼 이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전일성(Wholeness)으로 인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이 강조하듯 집단 무의식은 개성화 과정에 박차를 가하고 무의식의 한 표현인 꿈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치유를 의미하는 ‘heal’은 온전하다는 ‘whole’과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진정한 치유와 건강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가치나 삶의 의미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존에 이 부분은 종교의 영역으로 간주해 왔고, 영혼이란 단어도 종교의 전유물처럼 생각해왔다. 그런데 심리학자 칼 융은 초자아적인 영역(transpersonal level)의 정신 탐구에 주력하였고, 특히 개인적인 영성 체험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인간 정신의 종교적 영역 탐구에 일생 몰두 하였다. 융 사후에 포스트 융 심리학의 한 분파인 제임스 힐만을 중심으로 하는 원형적 심리학(archetypal psychology)은 영혼의 심리학(soul psychology)라고 할 정도로, 핵심 단어가 영혼이다. 심층 심리학자 라이오닐 콜빗(Lionel Corbett)은 기존 종교에서 쓰는 ‘영성적인’(spiritual)이란 단어를 심층 심리학에서는 ‘심리학적인’(psychological)이란 단어로 사용한다고 진술한다.
그렇지만 이 글은 융이 몰두했던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나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꿈을 통한 심층 심리학적 접근으로 궁극적인 삶의 가치나 영혼에 대해 탐색하는 방법을 안내하려 한다. 내면세계에 복잡하게 얽힌 감정 정서를 다루고, 어린시절 상처를 보듬고, 현재의 자기기만을 인식하여 건강과 온전함으로 나아가는데 꿈이 어떻게 기여를 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소개하려 한다.
2. 꿈의 치유력
꿈이란 ‘마술거울’이 ‘지금 꿈꾼 이의 영혼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그래픽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고 했다. 이 이미지를 탐색하면 개인과 신과의 관계에서 손상된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여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면 장애물로 막혀 흐르지 않던 에너지를 다시 흐르게 하여 건강과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꿈의 어떤 면이 이런 기능을 할까?
꿈의 치유력은 에너지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꿈이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융 심리학자 죤 샌포드는 “꿈의 이미지에 치유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꿈의 치유력을 무의식의 힘에 압도당하는 경우와 무의식의 에너지가 차단된 경우의 두 극단의 경우를 살펴보자.
무의식의 힘에 압도당하는 경우는, 정신에서 내면세계의 에너지 재편이나 인격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에 엄청난 무의식의 힘이 의식으로 침투한다. 이럴 때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극도로 불안하고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이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를 억압하려 들거나 과잉으로 방어적으로 되기 쉽다. 그런데 무의식의 에너지를 이런 식으로 통제하려 든다면, 몸과 마음은 점점 더 경직되고 결국은 무의식의 힘에 압도되어 신경증이나 정신질환으로 까지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 꿈에 집중을 하면, 꿈이 무의식의 힘과 의식 사이에 교량역할을 하여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흐르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웠던 에너지를 창의적으로 변형하여 의식 확장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꿈은 이런 가능성을 위해 진정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한 이미지를 제공함으로 상황인식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개선의 실마리도 제공해 준다.
그런데 대다수 현대인들에게는 무의식에 압도당하는 경우 보다 오히려 무의식과의 접촉이 차단되어서 초래되는 에너지 결핍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빈번하다. 권태, 우울, 무감각, 허무주의 등이 그 증상인데, 이런 순간 꿈에 집중하면 에너지의 원천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데, 꿈이 무의식의 엄청난 에너지를 의식으로 전달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지니는 보상기능 또한 치유와 관련이 있다. 개개인이 성장과정에 정신의 일부분은 의식으로 수용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무의식 상태에 남겨진다. 자연히 의식은 종교 문화 교육 등의 환경적 영향을 받고 결과적으로 자아 중심이나 자기본위라는 근시안적 편향성이 초래된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자아에 꿈이 대극에 있는 관점을 표면화 시켜 줌으로 의식의 편향성을 보정하고 정신의 중심으로(the self)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준다. 이런 편향성의 극복이 균형있는 사고나 감각을 유지하게 만들어 건강한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3. 꿈을 통한 신체 질병의 예단과 치료
꿈 이미지는 내재적으로 치유의 기능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치유란 심신통합적인 (holistic) 의미이므로 몸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인지하는데도 꿈이 기여를 한다. 이는 몸이 언제나 꿈을 꾸기 때문에 몸 안에서 뭔가가 진행되면 통증이나 아픔을 자각하고 이런 징후를 무의식이 감지하여 꿈에 이미지로 표현해 준다고 설명을 한다.
특히 오랜 기간 서서히 진행되어 시간이 꽤 경과된 후에야 병원에서 진단이 가능한 경우, 가시적인 증상이 몸에 드러나기 훨씬 이전에 꿈은 몸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꿈을 신체 이상에 대한 일종의 경고 시스템으로 인식하고 있으면 꿈꾼 이의 건강상태를 파악하는 주요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종종 꿈을 통해 질병을 자각하여 조기 치료를 할 수 있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경우가 작업을 하다보면 빈번하게 등장한다. 실제 개인적인 작업을 하는 동안에 드러났던 육체적 질병과 관련된 꿈 이미지들을 사례로 소개한다.
낡은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바닥은 나무로 된 마루바닥이다.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부지직하고 부서진다. 골다공증이 심각한 50대 여성의 꿈이었다.
부엌 싱크대를 열었더니 시커멓게 곰팡이가 끼어있어 놀란다. 후에 병원에서 질에 염증을 발견하게 된 여성의 꿈 이미지이다.
마당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면서 지붕을 뚫었다. 꿈을 꾸고 며칠 뒤 뇌출혈로 쓰러졌다.
사는 집 아파트에 거실에 실제 그림이 걸려 있는 자리에, 꿈에 그 자리에 등이 달려 있다. 어머니가 청소를 하시다 건드려 등이 떨어지는데 안쪽에 파란 이끼 같은 것들이 잔뜩 자라 있다. 실제 거실에 걸려 있는 그림은 평화로운 집 그림이라 했다. 여성의 신체에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자궁에 모르는 사이 뭔가가 자라고 있었고, 진단 결과 자궁 내막증이었다.
알루미늄 샤시로 된 창문이 있고 이 창문을 여는데 문이 삐꺽 삐꺽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리지 않는다. 꿈을 꾸고 여러 해가 지나서 관절염으로 진단이 났다.
병으로 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발생할 수 있는 건강에 대한 위험을 꿈을 통해 미리 인식할 수도 있다.
꿈에 누군가 등장했는데 지나치게 지치고 피곤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꿈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꿈꾼 이의 일부를 나타내므로, 꿈꾼 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 그 등장인물만큼 지쳐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꿈에 한쪽 어깨에 무거운 소금자루를 메고 간다. 염분 섭취량이 과다해서 체내 염분 함량이 높은 사람의 경우였다. 때때로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을 꿈을 통해 감지하고 질병이 너무 심각하게 진행되기 이전에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선홍색 피가 한 방울 떨어진다. 꿈을 깨고도 며칠 피의 이미지가 뇌리에 떠나지 않아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자궁경부암이라 급히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위의 몇몇 사례에서처럼 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몸 상태를 표현해 준다. 꿈을 다루는 책들에서 꿈을 통해 치료제를 구하거나 함께 섭취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식품들을 꿈이 말해주어 섭취를 중단하였더니 여러 해가 지나서 동시에 섭취하면 위험하다는 실험 결과가 나와 경고를 한다는 등의 사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꿈의 한 층위는 신체의 건강을 나타내어 주기 때문에 꿈을 통해 육체적 건강과 관련된 이미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꿈에 집중을 하더라도 꿈의 다양한 은유적 표현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간과하는 경우도 있다는 한계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의료적 진단의 보조 수단 아니면 몸이 보내주는 자가 진단의 수단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4. 꿈을 통한 혼란한 감정의 이해와 수용
내면세계에는 언제나 평화를 얻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는 듯하다. 본능이 지배하는 욕망(id)과 도덕적이고 청교도적인 초자아(superego) 사이에 끝없는 갈등이 발발한다. 욕심과 죄책감 사이에는 만성적인 투쟁이 진행되고, 성적인 욕망과 이를 억압하고 부인하려는 태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수치심 사이에도 전투가 발생한다. 삶을 영위하는 동안 이런 갈등과 투쟁에서 자유로워 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은 덜 혼돈스럽고 성숙한 방식으로 이런 갈등을 다루는 방식을 배운다면 감정을 통해 도덕적으로 성장하게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일으키는 긴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혼란을 겪을 때 이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 ‘종교적인 접근법’ 대개 ‘그리스도교적인 대응’과 심리학적인 접근은 상반된다. 심리학적인 접근 그리고 꿈 작업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내면에 등장하는 모든 감정 정서는 무조건 수용한다. 각기 다양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심리학적 방식이다.
반면, 종교적인 접근법은 감정과 정서를 쉽게 억압한다. 순결, 정직, 고결, 선함이란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느라 내면에 등장하는 감정들을 억압하고 근절시키려 드는데, 종교인이든 아니든 개인의 감정이 별로 존중되지 못하는 문화권에 사는 우리 대다수도 이 방식에 길들여져 있다. 이렇게 감정을 근절시키려는 대응의 극단적 이미지 하나를 소개한다.
세탁장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 위층에서 내려와 세탁장으로 들어간다. 탈수기 안에서 완전히 탈수가 되어 죽어 있는 아기를 발견한다.
아마도 꿈꾼 이의 주 감정이 죄책감인 듯하다. 깨끗해야만 하는 거룩한 이상에 맞추려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내려는 이미지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런 처절한 노력의 결과, 생명의 물기가 탈수되어 마침내, 생명의 씨앗이자 에너지의 원천이고 꿈 꾼 이가 살아내어야 할 미래의 가능성일 수 있는 아기를 죽음으로 내몬다.
감정 정서에 대한 이런 청교도적인 접근은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감각을 둔화시킨다. 결국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하게 되고 우울에 빠진다. 죄책감, 성욕, 시기, 질투, 증오, 공격성 같은 부정적, 파괴적으로 간주되는 다루기 힘든 감정들을 ‘내면세계에서 몰아내라. 그러면 죄에서 해방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응하려 든다면, 결과는 위의 꿈 이미지처럼 에너지의 소진과 생명력의 탈수 그리고 우울일 것이다. 심리학적 접근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내면의 감정들이 아무리 어리석게 여겨지고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수용을 한다. 때로 수치스러울 수 있고 외면하고 싶고 심지어 사악하게 여겨질지라도 이 모두를 존중한다. 이런 감정을 자세히 탐구하고 다루기 위한 자리부터 마련을 하는데 이로부터 감정, 정서를 탐구한다. 흔히 ‘이래야만 해’라는 당위와 ‘도달해야 하는 이상’을 설정해 놓아 허용범위가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협소하게 좁혀 놓은 허용 범위를 넓힌다면 내면세계의 영토가 확장된다. 확장된 자리는 내면에서 등장하는 감정이나 정서가 무엇이든 그대로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이렇게 하면, 실현 불가능한 순수 순결 고결 정직을 갈구하는 취약한 자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영성적인 팽창 (inflation)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심리학적 방식으로 다루는 꿈 사례를 소개한다. 감정을 수용하고 표출한 결과 어떻게 달라지는지 엿볼 수 있다.
육체적 학대와 바람으로 일관하던 아버지와 이런 남편 대신 자녀들의 생계와 양육을 전담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난 30대 후반의 여성이다. 이 가정에서 제일 심한 말은 ‘아버지 닮았다’라는 표현이고, 이런 아버지와 상대적으로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녀들을 돌본 거룩한 희생자였다. 이 여성의 내면세계엔 악한 아버지와 희생적인 순교자 어머니가 극과 극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꿈 이미지에 거듭 어머니로부터 학대받은 흔적들이 등장하지만 이 여성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신앙’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절대 손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는데,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과잉으로 방어적이었다.
이런 태도에 전환점을 맞게 된 꿈이다.
어디를 갔다 집으로 오니 나도 모르는 사이 집안에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잔치 상을 받고 있다. 내가 들어가는데 어머니는 눈길 한번 안주신다.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쭈그리고 앉았는데 어머니가 내 앞에 조그만 상 하나를 던지듯 가져다 놓으신다. 상 위에는 피가 흐르는 생고기 한 덩어리가 놓여있다.
감정적 진실이 담긴 이 꿈 이미지로 인해, 이 여성은 오래 부인해 오던 내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앙’처럼 간직해왔던 이상화해 놓은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꿈꾼 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대접은 꿈이 드러내는 이미지 비슷한 것이었다. 비로소 엄마가 밉다는 소리가 할 수 있었다. 이 여인처럼, 부모와 인간적인 차원에서 관계를 형성하려면 학대를 받은 자녀가 부모를 비난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한다. 혼전 임신으로 현재 남편 즉 이 여성의 아버지와 혼인을 해야 했던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다 너 때문이야’ 라는 말을 이 여성에게 반복했고, 어머니 불행의 원인을 이 여성의 탓으로 돌리곤 했다. 덧씌워진 죄책감으로 인해 이 여성은 어머니에게 늘 관대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어머니의 눈과 입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순교자 어머니’ ‘자녀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신 거룩한 어머니’는 이 여인이 믿고 싶었던 ‘거짓 신념’이었을 뿐이다. 이는 어머니와의 취약한 관계의 표징일 뿐, 꿈이 이 여인에게 ‘조작된 신화’를 꿰뚫어 현실을 직시할 눈을 주었다.
진실을 대면하자, 비로소 오랜 분노와 공격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서서히 ‘성스러운 어머니’는 지상으로 하강하고 ‘사악한 아버지’는 지상으로 구출되면서 부모와의 관계가 건강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꿈꾼 이가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비난과 원망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표출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였기에 가능했다.
드러날까 두려워서 억압하고 부인하려 애쓰느라 자신을 마비시키는 대신에 허용할 수 있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자기 안에서 확대를 하면 삶이 훨씬 편안해진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맞추려 애쓰면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에 그대로의 자연스런 자신을 볼 수 있는 넉넉한 자리를 마련하면 두렵고 취약한 감정들에 대해 오히려 유머를 찾을 수 있다. 제임스 힐만은 감정이 땅적인 삶의 테마라 했다. 자아가 설정해 놓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으로선 불가능하다. 위의 사례에서처럼, ‘거룩한 어머니’같은 취약한 이상을 현실로 끌여내려 땅적인 삶을 살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감정이다. 결과적으로 훨씬 성숙하고 건강한 모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부인하고 싶었던 감정 정서를 인정하고 드러내었기에 가능했다.
내면에서 저절로 등장하는 인간의 감정은 우리를 땅적인 삶으로 초대해주는 무의식의 힘이다. 거부나 억압하려 드는 대신 허용하는 자리를 마련한다면, 감정들 안에 내포된 열망을 이해할 수 있다. 혼돈스럽고 또 다루기 쉽지 않는 것이 감정 정서 이지만 잡히지 않는 감정을 이미지로 비추어주는 꿈거울을 반추하면, 위의 사례처럼, 결국은 종교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을 땅적인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5. 꿈을 통한 삶의 신화에 대한 질문
꿈에 관심을 갖고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삶으로부터 피정을 가거나 초월이나 피안의 세계로 피난을 가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치유란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므로 자기 탐색의 영역을 무의식의 세계까지 확대하여 적극적인 의식의 참여로 무의식 본래의 건강과 전일성으로 나아가는 방향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인 꿈이라는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바깥으로 드러내는 자신, 남들이 바라보는 자신,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자신과 내면의 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극명한 차이를 60대 초반의 한 가장의 꿈을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쉽지 않는 성장 과정에도 명민한 두뇌와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60대 초반의 남성이다. 34년간 단 하루도 결근을 한 적이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모범 시민이고, 열심히 산 이 땅의 전형적인 가장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진다. 결국 차가 더 나아갈 수가 없어서 차에서 내린다. 내려 보니 언덕 아래에 다른 길이 있다. 두 손으로 차 핸들을 번쩍 들어 올려 차를 언덕 아래 길 위에 내려놓고 계속 운전을 하고 앞으로 나아한다.
꿈 이미지가 말해주듯, 삶에 주어지는 어떠한 난관이라도 극복하고 앞으로만 매진하며 살아온 가장이다.
중학교 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터득하였다는 꿈꾼 이의 일화가 이 사람의 삶을 잘 집약해 준다. 1학년 체육 시간에 턱걸이 시험을 쳤는데 하나도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했다. 혼자 열심히 노력한 결과 6개월 뒤에 20개를 하고 1년 뒤에는 60개를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그때부터 꿈꾼 이 앞에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현재 ‘성공’한 사회인이고 ‘모범’적인 가장이며 유복한 경제생활을 누린다. 외형적으로 꿈꾼 이 는 성공한 사회인의 전형이고 모범 시민이고 책임있고 도덕적인 사람의 귀감일 수 있다. 부부싸움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족과의 대화를 위해서 매일 아침 온 가족이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절대 화를 내는 법이 없고 힘들어도 불평이나 내색을 하지 않으며 혼자 모든 걸 소화한다. 본인의 표현대로면 완벽한 가장이고 완벽한 가정의 모습일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꿈꾼 이의 자녀들은 크면서 단 한번도 아버지와 대화를 한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감정의 교류나 상호 공감이 없이 일방적으로 하는 말을 꿈꾼 이는 대화라 간주한다. 평생 부부싸움을 안한 이유는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다룰 정도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 같다. 완벽하다는 이 가정의 자녀들은 성장과정에 가정에서 겪은 심각한 상처로 인해 오랜 기간 치유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이다.
꿈에 등장한 차가 친숙하냐는 질문에, 오래 전 가족여행을 하면서 렌트를 했던 차가 같은 차종이었다고 한다. 그때 여행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자녀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여행할 기회가 드무니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겨라” 라고 말했다고 답한다. 꿈꾼 이의 표현에서 느낌이나 감정은 실종된 단어이다. 길이 좁아지면 차를 옮기는 의지로, 일관되게 앞으로만 매진한 사람의 삶에서 지불해야 했던 대가가 있다.
다음 꿈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왼쪽 차선에서 갑자가 차가 들어와 피할 사이도 없이 두 차가 함께 오른쪽 길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엔진과 조수석이 망가졌다.
굴러 떨어질 때 느낌을 묻는 질문에 ‘아, 또 귀찮은 일 생겼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주 후에 꾼 세 번째 꿈이다.
사방이 온통 회색 시멘트로 된 곳인데 아주 경사지고 길이 울퉁불퉁하다. 대단히 위험한 길이어서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내딛는다. 길이 온통 시멘트로 되어 있고 사방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것이 인상적이다. 경사진 길 저 아래에 넓지는 않지만 개울이 있고 물이 흐르고 있다.
조심 조심이란 표현은 차가 길에서 탈선을 하는 상황에 귀찮은 생각이 든다는 표현 보다 훨씬 느낌에 가깝다. 성취와 목표를 향해 앞으로만 달리는 사람에게 무의식이 길을 좁혀 막지만, 꿈 자아의 강인한 의지는 꺾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자 차가 도로에서 이탈을 한다. 이 사고는 무의식이 몰아간 괘도이탈 같다. 결국은 차를 포기하고 걸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데, 두 다리로 만난 땅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회색 시멘트 바닥이다. 게다가 평탄하지도 않고 대단히 경사져 있다. 딱딱하고 메마르고 사방 잿빛이지만, 언덕 아래 아직은 생명의 물이 흐르고 있어서 인지? 분명 앞으로 나아가지도 달려가지도 못할 길을 두 발로 걷기 시작하자, 위험에 대한 감각이 조금은 몸에서 되살아나는 듯하다.
꿈이란 거울로 들여다본 이 가장의 내면의 상황은 사회에서 칭송하는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 ‘성실한 가장’ ‘불굴의 의지로 삶의 난관을 핸들한 영웅’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왜 이런 간극이 존재하는가? 이 열심히 살아온 가장은 항변을 할 것이다. 성실한 것이 무엇이 문제이고, 바르게 살고자 매진한 것이 어떻고, 앞만 보고 달린 것이 뭐가 잘못인가? 스위스 심리학자 Guggenbuho-Craig가 이 항변에 대한 힌트를 준다. 편향된 신화 즉 한 가지 면만 있는 신화는 위험하고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성실한 가장이 살아온 ‘성공신화’의 대극에 놓이는 신화는 어떤 모습일까?
이성과 금욕적인 자기 절제를 중시하는 아폴로는 디오니소스의 비이성이나 난장에서 드러나는 혼돈이 짝이 맞을 것 같다. 권위적인 제우스는 기지와 순발력으로 넘쳐나는 헤르메스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일중독에 빠진 헤파에스토스는 호전적인 아레스와 짝을 이루어야 할 것 같다. 이런 신화들이 공존할 때 위험하고 해로울 수 있는 편향된 신화가 균형을 맞추고 건강해 질 것이다. 신화시소의 양쪽 날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어느 한 신이라도 소홀히 하고 무시하면 극심한 벌이 가해진다. 원형 심리학은 신으로 체현되는 이런 심리학적 에너지들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데서 평화를 얻는다고 하는데, 원형 심리학의 창시자인 제임스 힐만은 우리 시대에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것 하나가 심리학적 다신(Psychological polytheism)을 회복하는 것이라 주창한다. 그리스 같은 다신들의 우주관이 복잡다단한 인간 경험과 다양한 내면의 필요들을 상상하는데 훨씬 우수한 은유적 토대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다신이란 여러 신을 숭배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 일신적인 한 가지 렌즈가 아니라 다신적인 다양한 렌즈들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다면적이고 복잡다단한 정신의 모든 면을 유연하게 수용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단일화된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이, 하나의 태도가 아니라 다양함을 수용하는 태도가, 또 단일 신화가 아닌 다양한 신화가 훨씬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 주어진 신화, 패러다임, 대본은 많으면 많을수록 삶이 풍요로워 진다. 이 가장의 신화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향적이다. 자아가 만들어 놓은 단일한 비전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오는 동안, 이 가장은 내면에서 요청하는 다양한 요구들은 시멘트로 발라 차단하여 버렸다. 시멘트 화 되어 숨을 쉴 수 없자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측면들이 평면화, 단일화시켜 버려 삶 자체가 무미해져 버렸다. 삶의 향취라 할 수 있는 다양한 감정, 정서, 다채로운 생각, 상상력이 드러날 여지를 삶에서 배척해 버린 것이다. 꿈이 이러한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도록 만들어 다른 쪽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방식을 수용하도록 내모는 듯하다. 느낌이 사라졌던 사람에게 위험이나 조심 조심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내면의 삶이 부분적으로 나마 살아나는 표식인 듯하여 꿈의 에너지나 치유력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지속적으로 꿈에 관심을 기울이고 꿈으로부터 통찰을 얻는다면 시멘트 화, 기계화 되어버린 사람의 인간성이 회복되지 않을까? 머리가 만들어 놓은 성공신화에 맞추려 고속으로 매진만 하는 대신, 탈선을 하여 뒤도 돌아보고 옆길로도 새어본다면 쉼이 돌아오고 여유가 살아나고 감정과 함께 시멘트 틈새로 풀과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지 않을까?
6. 맺는 말
거울 앞에 선 왕비의 이미지로 이 글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동화의 세계는 무한한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넉넉한 장이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설은 꿈과 꿈으로 하는 내면작업에 너른 상상의 품을 초대하고 싶었다. 왕비의 거울이 진실을 이야기 하듯 꿈거울도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데,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진실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 즉 깊은 영혼의 진실을 비추어 준다.
꿈거울에 비친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떠할까? 만성피로, 소외, 우울, 자살 등 현대가 기능하지 않는 모습은 도처에 널려있고 우리 각자의 모습 또한 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안과 밖의 균형을 상실한 채 편향되게 바깥세계로만 향하게 만드는 주류의 문화는 쉽게 내면세계를 방치하도록 몰아왔다. 결과적으로 내면은 점점 더 황폐하고 메말라 소외감과 외로움 그리고 무의미와 우울이 현대인의 표상처럼 되었다.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어디에서 시작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삶이 의미는 있는 것인지? 이런 질문을 할 때 가장 손쉽게 들여다 볼 방편 하나가 꿈이다.
본문에서 꿈 사례로 소개한 경우들처럼 꿈은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추해 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 치유는 보고 싶고 믿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진솔한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디에 상처가 있는지? 어디가 단절되어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지? 어느 부분을 간과하고 살아왔는지? 정확한 자신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 치유의 첫 단계이고, 이 이미지를 발견하려 할 때 꿈은 간편하지만 대단히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준다.
꿈 이미지는 상징과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 상징은 이미지뿐 아니라 에너지와 결합되어 있어서 꿈을 소중히 다루고 성찰을 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무의식의 에너지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 심층 심리학에서는 현대병이라고 하는 무감각 우울 무기력의 원인을 에너지의 결핍으로 본다. 꿈으로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면 의식이 다시 원천의 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꿈의 언어인 상징과 은유는 언제나 다층적 의미를 지니는데 인내를 가지고 꿈 이미지를 성찰하다 보면, 이미지가 수직으로 차원을 확대하여 내면세계의 깊이를 드러낸다. 꿈을 통한 내면성찰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하는 물과도 같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향하게 되어 궁극에는 영혼적 깊이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꿈을 매일 밤 신이 보내주시는 연애편지라 했나보다. 결국 꿈작업이란, 영혼의 음성을 듣고 영혼의 깊이를 만나려는 탐색이자 내면의 여정이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처럼, 꿈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인내를 가지고 대화를 한다면 거울이 속삭이는 궁극의 답은 ‘내면의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당신’이 아닐지? 누구나 이 꿈같이 아름다운 진실을 말해주는 거울이 있다. 이 거울은 밤마다 영혼의 초대장을 펼친다. 초대에 응하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메마른 곳을 비옥하게 만들고 자신의 참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꿈거울은 꿈같이 아름다운 은총이다. 초대에 대한 응답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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