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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 근면] 추락하는 근면의 가치
“자기의 노고로 먹고 마시며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은 없다”(코헬 2,24).
성실과 근면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가치이자 동시에 현실적으로 유리한 행동 전략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워라밸’(일과 개인의 삶 사이의 균형 - 편집자 주)을 따지고 ‘저녁 있는 삶’을 부르짖는 세태가 한심스럽다.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때가 불과 수십 년 전인데 말이다.
현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너 게으름뱅이야, 언제까지 누워만 있으려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잠언 6,9-11).
부디 다시 심기일전하여 부국강병을 위해 근면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남 탓만 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보면 걱정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러면 왜 현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는 것일까?
나태의 역설
나태는 칠죄종의 하나다. 그 자체가 누구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영혼을 갉아먹는 정신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근로 시간으로 전 세계 1, 2위를 다투는 한국인이야말로 나태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에서 우리 민족을 당해 낼 민족은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부지런한 국민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삶을 분주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이 근면일까? 잠시도 주변을 돌아볼 시간 없이 다음 갈 곳으로 바삐 움직이는 것만이 건강한 성실함일까? 나태란 단지 부지런함의 반대말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태가 우울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아예 나태 대신 우울을 칠죄종에 올리기도 했다. 정신의학적인 면에서 나태는 단지 느릿느릿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 무기력에 더 가까운 용어다.
당신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현대인의 시간은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한 회사의 과장이자 한 집안의 아버지이고, 봉사 단체의 총무이면서 동호회의 회장이고 동창회의 임원이다. 겸업도 하고 세 겹벌이도 한다. 다이어리는 여러 일정이 들어서다 못해 여러 개의 일정이 포개지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현대인을 게으르다고 비난할 것인가?
하지만 현대인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한다. 자녀의 학예회에서 업무에 관련된 카카오톡을 쉬지 않고 날리고, 회의에 참석해서도 다른 업무를 고민한다. 정작 사무실에서는 집안일을 걱정한다. 모처럼 친구와 등산을 하면서는 온통 사업 이야기뿐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순간조차 비워 두지 못한다. 눈과 귀는 스마트폰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배변하는 순간마저도 온전히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우울과 나태의 주된 증상은 바로 무의욕증과 무쾌감증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것도 즐겁지 않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무엇이라도 가져와서 한 번뿐인 ‘순간’에 욱여넣는다. ‘쓰레기’ 같은 정보로 시간과 정신을 가득 채운다.
헐레벌떡 자녀의 학예회에 오면 무슨 소용인가? 연신 회사 일로 카카오톡을 주고받는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회사에 있는 것만 못하다. 솔직히 말하면 자녀의 학예회에 별 관심이 없다. 등산도 마찬가지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 것도 아니다.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야근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에도 진정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허전함을 채워 줄 무엇인가로 시간을 채워 넣는 것이다.
분주한 게으름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큼 사람에게 좋은 일은 없다.” 「공동 번역 성서」 코헬렛 2장 24절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고’가 아니라 그러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다. ‘수고한 보람으로 더 수고하고 더 수고해서 끊임없이 세계 1위가 될 때까지 계속 수고해라.’라고 하지 않았다. 수고한 삶이 정작 본인을 위한 시간을,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보낼 시간을 빼앗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분주한 게으름이다.
어느 날 가족 모임이 귀찮아서 야근을 자청했다. 하지만 사실은 긴 저녁을 먹고 ‘인터넷 서핑’을 하느라 야근 시간을 허비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비싼 택시비를 내고 퇴근했다. 가족 모임에 가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 공연히 인상을 북북 쓰면서 귀가했다. 술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출근을 했다. 어제 야근을 했으니 쉬어야 한다면서, 연신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렸다.
도대체 뭐가 근면한가?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것이 없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서 끊임없이 도망치기만 했을 뿐이다. 가족 모임도 가지 못한 채 야근도 했고 머리 감을 시간도 없었으니 남들에게는 부지런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도시의 빌딩을 가득 채운 현대인은 모두 “나는 바쁘다. 나는 성실하다.”를 외치면서 정작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치고 있다.
그러면서 이유 없는 억울함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보상이 보잘것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근면한 것이 아니라 근면한 척하고 살았을 뿐이다. 도망치기만 했는데 무슨 보상이 있을까.
게으른 성실
우리는 종종 상상한다. 만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일단 형편없는 직장에 사표를 날릴 것이다. 지루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가족들과 한 번뿐인 삶을 즐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사실 우리 조상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 아닌가?
행복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그리 대단치 않다.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이제 ‘게으른 성실’의 삶을 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풍족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자원은 바로 ‘시간’이다. 필요 이상의 근면한 삶은 가장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와 권력을 다 얻었지만 결국 헛되고 헛되다는 이야기는, 아마 굶주리고 헐벗은 동시대인에게는 그다지 크게 공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게으른 분주함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정말 유익한 이야기다. 자신의 시간을 팔아 물질을 얻는 것이 지난날의 근면이었다면, 이제 소중한 시간을 얻는 것이 새로운 근면의 기준이다. 현대인보다 풍족한 삶을 훨씬 일찍 맛본 코헬렛의 현자가 말하듯이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코헬 1,2).
[행복을 찾아서 – 겸손] 낮은 자리
“높은 자리에 오르면, 남을 거느릴 것도 생각나고, 원수를 잡아들여 보복할 것도 생각나고, 나를 두려워하며 아첨하는 자들이 나를 기쁘게 할 것도 생각나고, (내가) 어떤 사람을 땅에 내칠 수도, 어떤 사람을 하늘 위로 끌어올려 줄 수 있다는 것도 생각나고, 불쌍한 사람이 하소연하면 그들을 도와줄 것도 생각나고, 도움받은 이들이 나를 칭송하고 좋아할 것도 생각나고, 그러면 (칭송을) 겉으로 사양하는 척할 것도 생각나는 것이다”(판토하, 「칠극」 참조).
교만한 현대인
교만은 현대 사회에서 특히 맹위를 떨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도한 느낌, 자신이 이룬 성취나 재능에 대한 과장, 우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성공과 권력, 명성에 대한 끝없는 갈구, 과다한 존경과 특혜 요구, 타인을 지속해서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경향 등이다.
오만하고 교만한 행동은 사회 지도층에게서 흔히 관찰된다. 그래서 약간의 오만함은 마치 유능한 지도자의 어쩔 수 없는 덕목으로 눈감아 주는 일도 있다. 사실 병적인 교만함과 건강한 긍지를 구분하는 것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귀엽게’ 볼 수 없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으로 가득한 성품을 정신의학적으로 말하면 자기애적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은 온통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화려하고 멋진 젊은 시절을 추구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선망한다. 내가 잘났으니 자신의 주변도 최고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 최고의 친구를, 가장 멋진 연인을, 가장 보기 좋은 일자리를 찾는다.
도덕적 교만
속물적인 가치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우월성이나 윤리적 결벽도 자기애적 성격의 ‘증상’이다. 엄격한 기준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지만, 이는 남보다 우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매도한다. 관용과 이해는 없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냉정한 평가절하를 마치 자신의 높은 윤리성에 대한 증거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교만이 죄 중의 죄, 죄의 여왕이라고 했고, 16세기 영국의 성직자 헨리 스미스는 모든 죄의 으뜸이 교만이라고 했다. 교만한 사람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타인의 느낌과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을 점점 자신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종종 주변을 잘 돕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내가 이렇게 똑똑한 데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라는 왜곡된 오만함으로 가득하다.
정직한 겸손
인간의 성격을 나누는 몇 가지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겸손과 정직이다. 이 둘은 뜻이 다르지만, 사실상 비슷한 가치를 말한다. 정직하면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나 겸손한데 거짓으로 가득한 사람은 별로 없다. 가식을 싫어하고 공정을 추구하며 사치와 향락을 꺼리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다.
지난날에는 인간의 기본적 성격을 다섯 가지 요인으로 나누기도 했다. 외향성, 순응성, 성실성, 신경성, 개방성이다. 이러한 요인의 상대적인 조합으로 한 사람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대규모 연구를 통해서 여섯 번째 요인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바로 겸손과 정직이다. 마치 그 이름처럼 다른 성격 요인에 묻혀 자신을 숨겼던 성격 요인이다.
겸손은 예로부터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적 덕목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태도가 군자의 조건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겸손의 가치는 급락하고 있다. 신속하고 명확한 자기과시가 겸양의 미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겸손의 가치가 너무 ‘겸손’해져 버린 세상이다. 모두 자신을 자랑하기에 힘쓴다. 돈과 지위를 드러내는 사람이나 청빈과 소박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전제되었다면, 두 가지 모두 정직한 태도는 아니다. 억지로 높은 위치에 올라 타인을 내려다보려고 한다. 높은 자리는 늘 북적이는데 낮은 자리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겸손한 나를 위해서
미국의 정신 분석가 하인즈 코헛은 자기애적 소망이 깨지는 고통의 순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애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 고통의 순간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그 불편한 순간을 감내하지 못하고, 당장 자신의 허약한 마음을 위로해 줄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선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거짓된 자기를 만들어 낸다. 과장된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속인다. 부풀려진 자기상을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 숨으려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다른 덕목과 달리 독특한 특징이 있다. 말 그대로 ‘겸손’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고 칭찬해 주기도 어렵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요.’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요.’라는 주장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니 칭찬할 수도, ‘올해의 겸손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상을 줄 수도 없다. 양보하기 시합에서 모두를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겸손한 사람이라면 이런 글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겸손의 미덕을 공개적으로 떠드는 글을 쓰고 있지만, 이야말로 정말 교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은 나서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자리는 피하고 은밀하게 양보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하다.’라는 사회적 평판을 날름 빼앗아 간다.
겸손이라는 가치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주변에서 정말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을 만나서 기쁜 마음이 든다면, 드러나지 않게 도와주어야 한다. 워낙 드러나기 싫어하는 사람이니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상을 주는 것은 무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본인도 모르게, 뒤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스스로 드러내고 자신을 알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현대 사회다. 허세와 교만, 자기 자랑과 오만으로 넘실댄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도 보석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다. 낮은 자리를 자처한 겸손한 이들이야말로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스스로 겸손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게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행복을 찾아서 – 인내] 오래 참는다는 것
행복 강박증에 시달리는 현대인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된 지 오래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는 물론이고 대중 소설가나 뇌과학자 등도 행복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끝없이 써 내고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 가운데 아홉 권이 ‘심리 에세이’였다. 종교 기관도 마찬가지다. 강론과 설교는 일종의 심리강좌처럼 변해 간다.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상담하고, 끝부분에 성경 구절이 양념처럼 살짝 얹힌다.
행복을 좋아하고 불행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점점 행복은 삶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이 되고 있다. 직장에서는 정기적으로 설문지를 풀고 자신의 행복 점수를 통보받는다. 점수가 낮으면 승진도 어렵다.
행복하게 보이려고 자신을 속여야 한다. 성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다.
현대인은 점점 고통을 참고 견디는 일에 질색하게 되었다. 행복이 목표가 된 사회에서 묵묵히 인내한다는 것은 스스로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고통과 실패를 겪더라도 어떻게든 그 위험천만한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애써 미소 짓는다.
실패보다 두려운 것은, 불행을 남에게 들키는 일이다. 흔히 행복하려고 산다는데, 실제로는 ‘행복하게 보이려고’ 산다. 맛없는 음식은 뱉어 버리듯이, 행복하지 않은 삶은 ‘이미 망한’ 인생이다. 현대인의 행복 강박증이다.
인내라는 덕목의 추락
사실 지난 수천 년간 ‘인내’는 가장 위대한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그 반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쓰이지도 않았다. 그 어원 자체가 ‘우연한 행운’에 가까운 말이다. 주로 뜻밖의 횡재를 했을 때 “행복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행복은 그 지배 영역을 크게 넓혔다.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기쁨,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안정, 고통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느낌이 지속되는 상태를 모두 뭉뚱그린 상상의 거대 복합체가 되었다.
예전에는 불행과 이를 참고 견디는 인내는 삶의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입에 쓰지만 꾹 삼키는 약이었다. 의료계에서는 정말 심각한 정신 장애가 아니면, 소소한 불행감은 병으로 치지도 않았다.
정신과 의사는 ‘신경이 쇠약’하다는 사람에게 이른바 ‘행복’을 처방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방한 것은 ‘그래도 괜찮아, 당신은 문제없어.’라는 부류의 달달한 위로와 지지가 아니라, 사회적 격리와 요양, 동료와의 대화 금지와 장기간의 침묵, 금욕적인 식이 조절,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이었다. 절제와 인내가 주처방이었다.
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는 오히려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금욕적인 삶과 절제된 노동, 깊은 기도와 긴 사색을 통해서 더 본질적인 영혼의 답을 찾으려고 했다. 삶의 쾌락과 편안한 안락은 오히려 배격해야만 하는 악덕이었다.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었다. 과도하게 세상의 인정을 바라거나 지나친 부를 모으는 것도 옳지 않았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었고, 오히려 경계해야 할 유혹이었다. 미국의 작가이자 연설가인 에드윈 허벨 채핀은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위대함 그리고 절대적 존재와 맺은 관계는, 이루어낸 업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에서 드러난다.”
행복 심리학은 각광받는 신흥 사업이 되어 사회의 여러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분명 선조보다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자유로운 세상에 살지만, 현대인은 끝없는 행복에 목말라한다.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 어떻게든 ‘가해자’를 찾아서 ‘항의’하고 ‘적절한 보상’을 요구한다. ‘나 님’이 누려야 할 행복을 감히 방해한 죄다. 마땅한 대상이 없으면 세상 전체에 화살을 돌리고, ‘이게 나라냐!’며 더 큰 안락과 부와 편안과 자유를 달라고 끝없이 외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종교 활동의 목적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이제 죄를 고백하고, 삶의 진리를 찾으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공간이 아닌, 부부 갈등이나 대인 간의 불화가 있을 때 찾는 상담소가 되기도 한다.
우울하거나 불안하면 성가를 명상 음악처럼 틀어 놓고, 마음을 달래는 종교 심리 에세이를 읽으며 스스로 위로한다. 수요가 공급을 낳듯이 종교 기관이 점점 행복 산업의 말단 대리점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오래 참음’을 말하는 성직자는 도무지 인기가 없다. 대중의 바람대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편집자 주)과 ‘욜로’(You Live Only Once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로, 한 번뿐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살라는 뜻 - 편집자 주)를 이야기해야 ‘트렌디’(trendy)한 성직자로 인정받는다. 영원함을 희구하는 성직자가 ‘한 번 뿐인 인생 마음대로 즐기라!’고 하는 괴상한 현상이다.
자칫하면 열심히 노력할 뻔했다.’는 식의 책은 더 이상 보답 없는 고생은 하지 말라고, 다시는 성실할 필요 없다고, 다 세상이 너를 이용하려 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현대인이 얼마나 힘들면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 역사상 지금의 우리 사회가 최악의 세상 같지는 않다. 그저 고릿적부터 사람들을 유혹하던 달콤한 이야기일 뿐이다. 성경에도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1코린 15,32)라고 하지 않는가.
오래 참음의 가치
행복 추구권은 헌법상의 권리라고 하지만, 사실 헌법에 행복 추구권을 규정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1980년 8차 개헌 때 처음 들어간 것인데 아마 미국 독립 선언문의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일까? 행복은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와 같기 때문이다. 행복 자체는 영원한 목적이 될 수 없다. 얻을 수도, 줄 수도 없다. 좇으면 좇을수록 도망간다. 쾌락도, 부유함도, 명예도, 인정도, 건강도 마찬가지다. 다만 행복을 추구하며 겪는 시련과 인내로 오히려 진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참을 수 있지만, 단 하나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행복한 날이 계속되는 것이다.” 독일의 극작가 괴테가 한 말이다.
인내는 눈에 보이는 영광을 위해 잠시 꾹 참는 것이 아니다.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를 위해서라면 누군들 참지 못할까? 뜻밖의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불운,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일도 견뎌 내는 것이다. 굴복도 아니고 용기 없음도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영혼은 점점 아름답게 빚어지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썼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5,3-4).
[행복을 찾아서 – 친절] 따뜻한 새해
역사상 가장 친절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흥미롭게도 이에 대한 정설도 논의도 없다. 가장 악랄한 살인마나 최고의 욕심쟁이 등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가장 따뜻하고 착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억지로 찾아봐도 진부한 위인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친절에 관한 책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어린이용 도서를 제외하면 고작해야 「오늘부터 자신에게 친절하기로 했다」는 식의 달달한 위로서나, 「친절을 파는 15가지 원칙」 등 마케팅과 관련된 책이 있을 뿐이다. 현대인에게 친절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거나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정도로 인식되는지도 모르겠다.
친절에 대한 오해
친절은 따뜻하고 착한 태도를 말한다. 정겹고 착한 행동으로 상대를 만족스럽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떠한 의도도 없어야 한다. 돈 받고 하는 친절은 그저 용역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요구할 뿐, 스스로 친절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따뜻한 태도는 다른 재화와 맞바꾸는 것이니, 거저는 친절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친절을 보아도 뭔가 속으로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타인에게 너무 잘해 주면서,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부당한 요구에도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정작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면서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궁금하면 주변 친구에게 “나는 너무 착한 것 같지?” 하고 물어봐도 좋겠다.
친절하고 따뜻한 행동 하나하나에 전혀 감정적 손해를 보지 않으려니, 받은 친절과 준 친절 간의 대차 대조표를 마음속에 만들고 있다. 그런데 빌린 돈은 잊어도, 빌려준 돈은 잊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이 죄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자체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오진이다.
현대 사회의 친절
친절에 대한 가장 부적절한 사회적 현상이 ‘친절상’이다. 회사나 기관마다 직원에게 친절상을 준다. 서비스 업종에서는 직원의 친절도를 평가하여 성과급을 매긴다. 학교에서 받은 친절상은 대학 입시 때 가점도 받는다.
친절상을 두고 싸움도 난다. 서로 받겠다고 하면서 주변 직원에게 자신을 추천하라고 종용한다. 다른 사람이 친절상을 받으면 질투심에 이글이글 타오른다. ‘내가 더 친절한데, 왜 쟤가 칭찬을 받느냐!’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라는 칠죄종에 대비되는 칠추덕이 바로 친절인데, 정작 친절을 두고 시기심에 빠지니 이런 모순이 달리 있을 수 없다.
친절, 곧 이타적인 행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연구의 방향은 대부분 똑같다. 이타적인 행동이 사실 행동의 공여자에게 도리어 이득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다. 상식적으로 착하고 친절한 사람은 친구도 많아지고 주변의 보답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절하면 복이 오니 친절하라고 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진짜 착한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친절을 베풀기 때문에 보답받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연구 결과를 보고 ‘아, 따뜻하고 착하게 살면 도리어 이득을 얻는군!’ 하며 생각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그런 연구를 들이대면서 “얻는 것이 있으니 더욱 친절하시오!” 하는 사람도 있다. 목적이야 어쨌든 친절해지면 좋은 일이니, 상관없지 않느냐고? 처음부터 보상을 바라고 친절을 행한다면 그저 ‘투자’나 다름없다. 진짜 따뜻하고 착한 사람마저 이리에 밝은 투자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친절을 찾아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세에는 뭔가 바라지 말고 대신 내세의 복이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또한 친절상에 욕심내는 직원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상을 주는 주체가 하느님으로 바뀔 뿐이다.
대인 관계에서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심리적 모듈은 유독 인간에게 고도로 발달되었다. 이는 복잡한 사회 구조를 지탱할 뿐 아니라, 나쁜 사기꾼을 물리치는 강한 힘을 가진다. 반드시 필요한 인지적 능력이다. 그런데 따뜻한 배려나 착한 친절은 타인 지향적 가치다. 절제나 근면, 인내 등 내적인 덕목과는 다르다. 그래서 친절을 행할 때는 이득 · 손해 모듈이 자동으로 켜진다. 분명 뭔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메말라 죽어 가는 풀을 보고 물을 준 적이 있는가? 물을 주면서, 풀이 다시 생생해지면, 물값을 청구할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금전 출납부에 ‘2019년 1월 1일 멸치 일곱 마리’라고 적어 두는가? 이득 · 손해 모듈이 아예 켜지지도 않는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득·손해 모듈은 유독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 활성화되는 특징이 있다. 개에게 만 원짜리 사료를 줄 때는 기분이 좋기만 하지만 친구에게 사 준 5천 원짜리 분식값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한 비용을 꼭 보상받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친절하고 따뜻한 행동을 하고 싶은, 막연하지만 선한 마음이 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상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녀석이 나에게 했던 못된 행동도 생각나고, 왠지 친절하게 해 주어도 돌려받지 못하고 손해 볼 것만 같다. 선뜻 정겨운 행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고양이에게 줄 멸치를 산다.
뭔가를 받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친구라는 확신이 들어야 비로소 마음이 움직인다. 그런 것도 없다면 ‘천국 입학시험에 가산점이라도 되지 않을까?’라고 위안을 삼아야 편해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터무니없는 손해를 본 것 같아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왜 저 고마워하지도 않는 배은망덕한 녀석에게 친절을 베푼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불을 뒤척이며 밤잠을 설친다.
친절은 시기에 반대되는 덕목이다. 착하고 따뜻한 타인 지향적 태도와, 남을 부러워하며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시기심이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기심에서 진정한 친절을 베푸는 심리학적 팁을 얻을 수 있다.
시기심이란 스스로 손해를 본 것도 없이 상대에게 미운 감정이 드는 심리적 현상이다. 반대로, 주고 나서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이 친절이다. 혹시 살면서 까닭 없이 남을 시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까닭 없이 남에게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 될 자질은 충분하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동일시의 심리학, 블랙 팬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와칸다에는 흑인들만 산다.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해 갖는 고정 관념과 일치하듯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계에서 아주 가난한 나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위장일 뿐이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2018년 작 ‘블랙 팬서’의 와칸다는 겉모습은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작은 나라지만, 실제로는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뛰어난 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뤄 낸 곳이다. 이곳에는 지구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브라늄이 있다. 아주 오래전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 덕분이다.
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그리고 철기 시대로 문명의 수준이 달라졌듯이, 비브라늄은 인류 문명의 차원을 바꿀 수 있는 금속이다. 와칸다는 비브라늄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척추에 총알이 박힌 사람을 하루 만에 온전히 회복시킬 수 있고, 코앞의 빌딩만 한 비행체를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착하고 똑똑하며 깨끗한 흑인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블랙 팬서’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보여 주는 세상의 모습이다. ‘블랙 팬서’의 세상에서는 슈퍼히어로의 피부색이 검다. 블랙 팬서와 와칸다로 대변되는 이 영화의 흑인들은 착하고, 똑똑하며, 깨끗하다. 인류 최고로 번성한 문명과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인간적인 이 흑인들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그 반면, 율리시스 클로로 대변되는 백인과 백인 문명은 폭력적이고, 악의로 가득 찼다. ‘블랙 팬서’에서만은 백인과 백인 문명이 세상을 파괴하려는 악이고, 흑인과 흑인 문명이 세상을 지키려는 선이다.
이 모습은, 지구가 위기에 놓이면 늘 백인 슈퍼히어로들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우리에게는 꽤 낯선 풍경이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흑인은 폭력적이고, 지적 수준이 떨어졌다. 게다가 지저분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흑인이 ‘블랙 팬서’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다수’다. 출연 배우의 90퍼센트 이상이 흑인이다. 이들은 흑인 특유의 억양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착하고, 똑똑하며, 깨끗하고, 정의롭다.
지난날에도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그 주인공만 특별했을 뿐 다른 흑인 출연자들이 맡은 역할은 기존의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 관념과 대부분 일치했다. 기존의 영화는 흑인들 가운데 더러 괜찮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했다.
따라서 ‘블랙 팬서’에서 그려 낸 세상은 기존의 영화가 만들어 낸 결과대로 흑인에 대한 부정적 고정 관념과 편견에 균열을 일으킬 만큼 파격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배우는 것들
우리는 수많은 고정 관념과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처음부터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학습할 뿐이다. 고정 관념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교육받지만, 정작 사회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를 배우면서 자란다.
영화도 그 가운데 하나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인디언을 직접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는 누가 선하고 누가 나쁜지, 누가 똑똑하고 누가 멍청한지, 누가 성실하고 누가 게으른지 배우게 된다.
영화는 세상에 대한 고정 관념과 편견을 가르치는 데 중요한 도구다. 특히,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주인공의 시각에서 세상을 본다. 관객은 서부 영화에서 백인 보안관의 시점으로 인디언을, 백인 경찰의 관점으로 흑인 범죄자를 바라본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는 동안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주인공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흑인이나 인디언과 아무런 상호 작용의 경험이 없어도, 우리는 백인이 흑인과 인디언에 대해 갖는 고정 관념과 편견을 배우고, 이를 내면화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고정 관념과 편견의 피해자가 자신을 겨냥한 부정적 고정 관념과 편견을 배우고 받아들여 스스로를 비난할 때 생긴다.
인형 연구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지만 피부와 머리색이 다른 인형 네 개가 있다.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의 인형 두 개와, 흰 피부에 노란 머리의 인형 두 개다. 인형들은 옷은 입지 않은 채 기저귀를 차고 있다. 똑같은 얼굴과 신체의 흑인과 백인 아기 인형이다.
사회심리학자인 클라크 부부는 세 살에서 일곱 살 사이의 흑인 어린이들에게 인형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어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은지, 어떤 인형이 착하게 생겼고, 어떤 인형이 나쁜 사람처럼 생겼는지 고르라고 했다.
놀랍게도 다수의 흑인 어린이들은 백인 인형을 착한 인형으로, 흑인 인형을 나쁜 인형으로 선택했다. 같이 놀고 싶은 인형도 백인으로 골랐다. 이 결과는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을 좋은 사람으로, 자신과 피부색이 같은 흑인을 나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클라크 부부는 마지막으로 어떤 인형이 자기 자신(어린이)처럼 생겼는지 고르라고 했다. 아이들은 다수가 흑인 인형을 골랐다. 아이들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나쁜 사람처럼 생겼다고 선택한 인형과 자기 피부색이 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감정적으로 힘들어 했다. 심지어는 화를 내며 방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클라크 부부의 연구는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수행된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방송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반복 실험한 결과도 이 부부의 발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별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는 차별의 피해자들까지 자신들은 문제가 있고, 그래서 차별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 살에서 일곱 살 정도의 나이에 벌써 자신에게는 나쁜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게 되면, 과연 그 아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을까?
자기의 피부색이 나쁜 사람의 징표이고, 이 징표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차별의 일상화는 이렇게 아이들의 미래를 아주 이른 시기에 망가뜨린다.
동일시의 대상
낡고 지저분한 빌딩들. 심지어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미국의 빈민가에서 흑인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우주선으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행체가 나타난다. 농구를 멈춘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경외의 시선으로 우주선을 바라본다.
‘블랙 팬서’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와 같은 검은색 피부를 가진 슈퍼히어로. 이제 흑인 아이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 검은색 피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존재가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통과 욕구, 원더
“성형 수술 받아 보는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어기’의 단짝 친구 ‘잭’이 묻는다. 어기가 잭에게 ‘뭘, 잘 모르나 본데.’ 하는 투로 말한다. “이거 성형 수술받은 얼굴이야. 여러 번 해서 그나마 이 정도로 괜찮게 나온 거라고.”
평범하지 않은 얼굴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의 2017년 작 ‘원더’(Wonder)의 어기는 열 살짜리 소년이다. 그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자전거를 타며, 게임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어기의 탄생은 평범하지 않았다. 엄마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수술실로 직행한 어기는 그 뒤 27번의 수술을 받았다.
덕분에 스스로 숨을 쉴 수 있고,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으며,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경험하는 세상에 어기는 수술을 통해서 가까스로 다가갈 수 있었다.
어기는 얼굴도 평범하지 않다. 스물일곱 번의 수술 중에는 어기의 얼굴을 평범하게 만들려는 수차례의 성형 수술도 포함되었다. 수술 전보다는 얼굴이 나아졌지만 그 어떤 성형 수술도 어기를 보통 아이처럼 보이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기의 얼굴에는 아직도 많은 흉터가 남았고, 얼굴 전체가 마치 큰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잭’의 착하기만 한 어린 동생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어기의 얼굴을 처음 보고 곧바로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다. 다른 아이들도 어기가 괴물처럼 생겼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기가 아주 고약한 전염병에 걸렸을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어기와 악수만 해도 자기에게 병이 전염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감출 수 있어 좋은 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멋진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크리스마스는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날이다. 더구나 어기가 다니는 학교는 2주 동안 겨울방학에 들어간다. 단지 사탕을 몇 개 받을 수 있는 핼러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날이다.
그럼에도 어기가 가장 좋아하는 날은 핼러윈이다. 평상시 어기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인 채 걷지만, 핼러윈에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한다.
주변 사람들도 어기와 몸이 닿으면 마치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하는 듯 어기와의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 하지만 핼러윈 가면과 복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 어기는 사람들 눈엔 그저 평범한 아이로 보였다.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실컷 함께 웃고, 마음껏 사람들과 몸을 부딪칠 수 있는 날이다. 다른 사람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하이 파이브도 한다. 어기에게 핼러윈은 얼굴을 감출 수 있어서, 자신의 본성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날이다.
우주 비행사 헬멧을 쓴 아이
어기는 열 살이 되던 해까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집에서 엄마와 함께 홈스쿨링을 했다. 그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하고만 마주 대하면서 살았다. 밖으로 나갈 때는 우주 비행사 헬멧을 쓰고 다녔다. 사람들은 어기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 덕분에 어기는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어기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어기의 부모는 더 이상 학교에 보내는 것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다. 열 살의 소년에게는 더 많은 인생이 남아 있고, 언제까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들만 만나면서 살 수는 없었다.
이제는 헬멧을 벗고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현실과 직면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통과 욕구
어기가 학교에서 가장 싫어하던 장소는 정문 앞 작은 광장이었다. 전교생이 오가며 만나고, 수다를 떨며, 장난치기도 하는 곳이다. 어기가 그 광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수많은 학생의 시선이 그곳에서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도 어기에게 못되게 굴지도, 수군거리지도, 비웃지도 않는다. 어기가 지나가면 그를 한번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어기에게로 시선을 다시금 돌릴 뿐이다.
시선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시선을 받는 사람은 그 시선의 의미를 바로 느낄 수 있다. 존경의 시선이 있고, 경멸의 시선이 있다. 사랑의 시선이 있고, 미움의 시선이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체 뭐지?’, ‘이상해.’라는 시선도 존재한다. 눈에서 광선이 발사되는 것도 아니건만, 시선이 폭력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샌더 길먼은 자신의 저서 「성형 수술의 문화사」에서 사람들은 소속되어야 하거나 소속되고 싶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다른 구성원의 시선을 끌지 않고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과 욕구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기를 원한다. 시선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것이다.
시선의 폭력이 현실의 폭력으로 바뀌기는 매우 쉽다. 경멸과 미움의 시선은 바로 차별과 폭력으로 변환될 수 있다. 부정적 시선은 단지 싫은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하는 ‘정상성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한다.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자신의 외모를 사회가 제시한 기준에 부합하게 만들려고 한다. 타고난 외모 때문에 고정 관념과 편견으로 차별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고정관념과 편견이 강한 사회일수록 성형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이유다.
무엇을 바꿔야 하는 것일까? 수십 번의 성형을 해서라도 사회가 제시하는 정상성의 기준에 맞추려고 얼굴을 바꿔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가 갖는 고정 관념과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시선은 바꿀 수 있다
어기가 학교에서 무엇보다도 좋아했던 곳은 과학 교실이다. 그곳에서 어기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어기는 과학에 관한 한 동급생들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났다. 아이들은 가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 어기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과학 교실에서만큼은 어기의 얼굴이 아닌 그의 지식과 재능으로 시선이 향했다. 시선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어기를 괴롭힌 학생의 부모에게 말한다.
“부인, 어기가 얼굴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기를 보는 방식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요.”
[심리학이 만난 영화] 접촉 가설, 그린 북
“내 딸이 석탄 자루들하고 있을 때 자빠져 자고 있지 말라고. 알아들었어?” 장인이 사위를 나무란다.
“업체에서 가지들을 보낼 줄 제가 알았겠어요?” 사위도 눈앞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석탄 자루와 가지
클럽에서 새벽까지 일하고 동이 틀 무렵에야 집에 들어온 토니.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두른 손님을 제압하느라 힘을 좀 썼더니 피곤함이 몰려온다. 곤하게 잠들었던 토니는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에서 깬다.
거실로 나가 보니 다섯 명의 남자가 소파에 앉아서 고함을 지른다. 장인과 친척들은 야구 경기 중계방송을 보고 있다. ‘도대체 왜 이 시간에 다들 자기 집에 있지 않고, 여기 모여서 소리를 지르는 거지?’
이유를 물어보니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 곁에 있어 주려고 왔단다. 험악하고 거친 일들이 벌어지는 1962년, 뉴욕 브링스의 코파카파나 클럽에서도 힘과 주먹이 필요할 때 부르는 사람이 바로 토니다. 그런데 토니가 있는 집에 토니의 아내를 지키겠다고 남자 친척 다섯 명이 모인 것이다.
주방 바닥에 곰팡이가 나서 업체에 교체 작업을 요청했는데, 인부 두 명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장인이 말한 ‘석탄 자루들’과 토니가 말한 ‘가지들’은, 바로 이 두 명의 흑인을 가리킨 것이다. 장인과 친척들이 모인 이유는 토니가 자는 동안 돌로레스가 흑인 남자 두 명과 함께 있는 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업이 마무리 되자, 돌로레스는 두 명의 인부에게 음료수를 한 잔씩 건넨다. 흑인 인부들은 감사하다며, 음료수를 마시고 조용히 떠난다. 그들의 입술이 닿았던 유리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토니는 마치 병균이 묻은 봉지를 집어 올리듯 유리컵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서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화를 당하지 않고 휴가를 즐기는 안내서
1962년, 인종 분리라는 이름으로 인종차별이 이루어지던 시절, 차별은 법과 관습, 그리고 관례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게 실행되고 있었다.
흑인은 여행 중에 돈이 있다고 아무 데서나 잘 수도 없었다. 흑인들만 머물 수 있는 지정된 업소에서만 숙박이 가능했다. ‘그린 북’(Green Book)은 바로 흑인들이 잘 수 있는 숙박업소가 어디에 있는지 안내한 책자다.
‘화를 당하지 않고 휴가를 즐기려는 흑인 운전자를 위한 안내서.’ 실제 1960년대 그린 북의 표지에는 왜 흑인들이 그린 북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 이렇게 쓰여 있었다.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은 인종 차별을 정상이라 여기던 시절, 백인 남자와 흑인 남자가 두 달 동안 인종 차별이 가장 심한 미국의 남부를 여행한 기록을 담은 로드 무비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탈라아계 백인 남자 토니 발레롱가와 천재적인 흑인 피아니스트 돈(도날드) 셜리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 중 한 명은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다. 닉은 이 영화로 두 명의 작가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셜리 역을 맡은 배우 마허샬라 알리는 같은 날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접촉 가설
그린 북은 서로 잘 맞지 않는 남자 둘이 티격태격하면서 길을 떠나고, 여행을 마친 뒤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결국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한다는 로드 무비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이 영화는 고정 관념과 편견을 해소하려면 직접 만나서 부대끼고,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을 확인시켜 준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접촉 가설’(contact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접촉이 갈등을 줄인다는 것이다.
상대를 자주 만나 보지 않아서 서로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그 결과 고정 관념과 편견이 발생하는 것이니, 이를 극복하려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상호 작용의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접촉 가설은 직관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연구들에 따르면, 고정관념과 편견을 이미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하면 오해와 편견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토니와 백인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돈이 자주 만나면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서로를 더 미워하고 싸울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사랑과 평화를 위해 시작한 만남이 증오와 전쟁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린 북에서는 어떻게 접촉의 빈도가 증가하면서 토니와 돈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만남이 전쟁의 시작이 되지 않으려면
접촉이 우리가 기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유발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함을 심리학 연구들은 보여 준다. 먼저, 접촉하는 두 사람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토니와 돈은 모두 계획된 공연을 마치는 것이 목표였다.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공연 기획사가 약속한 돈을 마저 받을 수 있었다.
둘은 같은 목표가 있었다. 만일 둘의 목표가 다르고, 심지어, 경쟁하는 상황이라면, 고정 관념과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은 쉽게 전쟁으로 변한다.
둘째, 공동의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이 상호 보완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서로의 호감과 존경심은 쉽게 자란다. 토니는 완력과 현장 지능으로 셜리를 보호해 주는 구실을 한다. 반면, 셜리는 토니가 아내에게 쓰는 초등학생 수준의 편지를 아름다움과 감동의 시로 탈바꿈해 주는 선생님 역할을 한다.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하지만 상대가 목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상대에게 가진 고정 관념과 편견은 변하지 않거나 강화된다.
셋째, 상호 작용은 서로 동등한 지위에서 이루어져야만 성공적이다. 둘 중한 사람이 더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가진 상황에서의 상호 작용은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갈등은 다시 기존의 고정 관념과 편견을 강화한다. 토니가 운전기사 면접을 보러 카네기 홀에 있던 돈의 거처를 찾아갔을 때, 돈은 토니에게 여행 중 자신의 옷을 다리고, 구두를 닦으며, 시중드는 일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토니는 단호하게 그런 하인 같은 일을 절대 못한다고 못 박는다. 토니는 돈에게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킨다. 그래서 토니는 공연장으로 돈을 데려다 주고 그를 보호하는 보디가드의 임무를 한다. 둘의 만남은 그제야 동등하게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만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만남을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로 만들려 한다면 만남이 사랑과 평화로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 만남을 증오와 전쟁으로 만드는 악마는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하고 지나쳤던 곳, 곧 ‘디테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