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2-18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는 하나님 / 조상호 목사
옛날 어떤 나라에 지혜로운 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지혜에 대한 책을 만드시오. 그 책은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 만드는 책이니, 모든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야 하오.”
신하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2권에 달하는 책을 만들어냈습니다.
왕은 다시 명령했습니다.
“나는 이 책이 지혜에 관한 책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그러나 너무 두꺼워서 사람들이 읽지 않을까 두렵소. 그러니 이 책을 더 얇게 줄여 주시오.”
신하들은 또 다시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몇 번을 고쳐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여전히 분량이 너무 많다고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은 한 권의 책을 한 장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여전히 분량이 너무 많다고 줄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한 문장으로 줄어지게 되자, 그제 서야 왕이 만족했습니다. 바로 그 한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뭐든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알았으면서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도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도박을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하는 이유는 쉽게 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당첨될 확률이 겨우 800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 이유는 쉽게 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지불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속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대속’이라는 말은 “대신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 찢기시고 피 흘려 돌아가시는 대가를 치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구원은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공짜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공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공자는 없습니다.
중국 속담 가운데 “인생이란 커다란 가게에 들어가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가라. 다만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미국 속담 가운데 “공짜 점심식사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남들이 쉴 때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해야 합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잠 잘 때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대가 없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다같이 12절과 1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야훼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전체 므낫세 지파 중 반지파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지파들은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기르고 있는 가축의 수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쪽은 가축을 기르기에 매우 적합한 땅이었습니다. 이 요단강 동족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정복한 땅입니다. 그래서 루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그 땅을 자기 족속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쪽에 사는 가나안 일곱 족속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전시상황인데, 그들이 전쟁에서 빠진 채 이미 정복한 요단 동편의 땅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들은 모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자신들이 가나안 정복전쟁에 앞장서겠고, 요단 서쪽 땅을 정복해도 그 땅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에 오른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그 때의 약속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다같이 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라는 말씀입니다.
아내와 자식들과 가축들은 요단 동편 땅에 머물러 있되 남자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 앞장서라는 것입니다. 이미 모세와 약속한대로 요단 동편에 정착하기로 한 3지파의 남자들은 가나안 전쟁의 최선봉에 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복을 주시기 전에, 승리를 주시기 전에, 응답을 주시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먼저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8절 이하를 보면, 한 서기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것을 보고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고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람들로서, 유대 사회에서는 엘리트 계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서기관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Yes'나 ’No' 둘 중의 한 가지 대답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면,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같은 대답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를 따르면 출세할 줄 아는 모양인데 잘못 알았다. 나는 오늘 밤 당장 어디에서 잠자리를 얻어야 할지도 모르는 가난한 사람이다. 정말로 네가 나를 따르려기 원한다면, 나처럼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 서기관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를 보면,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때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여기 ‘마시려는 잔’은 십자가에서 접하게 될 고통의 잔을 의미합니다.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왕의 왕이신 주님 옆에 앉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광을 맛보기 전에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전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사람들입니까?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원하면서도 대가 지불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심은 대로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삼일교회의 전병욱목사님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을 패러디해서 ‘공짜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열심히 일은 하지 않은 채 도박이나 하고 로토를 구입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라가 망합니다. 가정이 어려움을 겪고 개인의 인생이 깨어집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공짜는 함정입니다. 마귀는 공짜가 있다고 속삭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심어야 거둘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대가를 지불한 만큼 그 결과가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대가 지불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의 반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앞장서라는 여호수아의 명령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야훼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16~17절)
무슨 말입니까?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이 끝날 때 까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요단 서쪽 땅을 정복하는데 앞장서겠다는 약속을 다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약속한대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사실 그들이 약속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길보다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옛말에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어려울 때는 약속을 하지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에 약속을 했다 할지라도, 그 약속을 무시하고 그냥 요단 동편에 눌러 앉아있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어느 젊은 비행기 조종사가 한 여성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출격 때마다 느끼는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 가운데에서조종사는 그 여성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위로를 받고 삶의 용기를 얻곤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약속한 장소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꽃 한 송이를 들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대합실에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꽃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가씨라기보다는 아주머니에 가까웠습니다. 조종사는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자신이 편지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그 여인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체하고 그냥 지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 아가씨가 내 손에 이 꽃을 쥐어 주면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이 이야기는 <사랑의 약속>이라는 짧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너무 쉽게 어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르바이트해서 주급 받으면 커피 사주겠다‘는 말을 듣고 기다렸지만, 커피는 커녕 냉수도 주지 않습니다. ’전화하면 밥 사주겠다‘고 해서 쫄쫄 굶고 시간이 돼서 전화했더니, 지금 다른 사람과 밥 먹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해놓고서 ’미안하다. 할 수 없어서 그랬다‘고 변명을 합니다. 우리는 약속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리고 쉽게 한 그 약속을 잘 지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목사인 저도 약속을 어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몇 시까지 가겠다‘고 해놓고 그 시간까지 가지 않고, ‘꼭 기도해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서 깜빡 잊고 기도를 해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의 반지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약속대로 7~8년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떠나 가나안 정복을 마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요단동편 땅을 분배받기 위해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요단 동편의 땅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정복전쟁이 끝난 후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요단동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사람을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어제 말씀을 준비하다가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소개합니다.
제가 오클랜드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저의 직책은 ‘기획 및 청년’ 담당이었지만, 사실 주로 하는 일은 전도였습니다. 1994년 당시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습니다.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하면 모텔에 머무는데, 제가 모텔을 찾아가서 자동차를 산다든지, 랜트집을 구한다든지, 학교를 입학한다든지, 가구를 구입한다든지 하는 문제를 도와드리고, 교회로 인도해오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제가 전도한 분 중에 L모라는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한국에 있고, 아들과 딸 남매를 데리고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습니다. 그 자매님의 아들이 저의 큰 아이와 나이가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닮아서인지 저의 큰 아이보다 거의 20센티 가량 키도 크고, 교회에서 꼬마대장 노릇을 할 정도로 리더쉽도 있었습니다. 큰 아이가 교회에서 돌아오면 그 아이에게 맞았다고 종종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L모 자매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교회 뒷정리를 한 후 저녁에 모이는 구역장모임까지 1시간 가량 시간이 있어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집에 들렸는데, 집사람이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일학교에서 그 이모자매님의 아들이 연필로 저의 큰 아이의 얼굴을 찍는 바람에 아이의 얼굴에 상처가 났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자세히 보면 지금도 그 때의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는 둘째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아이의 얼굴에 연필심이 박히고, 얼굴이 피범벅이 된 아이를 보고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사람은 남편은 교회 전도사이고, 아이의 엄마인 이모자매님이 교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이기 때문에 쫓아가서 따지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울고만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의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로는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실거야.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역자의 아들을 책임져 주실거야.”라고 했지만, 저도 사실은 마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교회 사무실에 가서 앉아 있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하나님, 꼭 이래야 합니까? 그 동안 그 아이에게 그렇게 맞고 왔어도 말 한마디 못했는데,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까? 큰 아이의 얼굴에 연필심을 박아 놓았는데도 조용히 있어야 합니까?” 제 마음속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결국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L모자매님은 주일학교 교사와 한글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만큼 믿음이 커졌습니다. 서리 집사로 임명을 받아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1월1일 오클랜드에서 더니든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둘째 아이가 생겨 나이가 1살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더니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수요일 저녁 수요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인사를 하는데, 성전 뒤쪽에서 갑자기 둘째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뛰어가서 보니 C모 집사님의 아들이 둘째 아이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손톱으로 얼굴을 할켜 놓은 것입니다. 역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아마도 그 동안 모든 성도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자기 대신 성도들의 귀여움을 받으니까 시기가 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아이의 얼굴에 보면 영광스러운 상처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달려와서 작은 아이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그려 놓고 또 ‘이제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또 순식간에 달려와서 손톱자국을 그려놓았습니다. 당시에 집사람은 그 아이의 부모 앞에서는 웃었지만, 아마 너무 속상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의 부모님이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속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모가 예배에 빠질 수도 없고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가면 그 아이가 또 손톱으로 그릴까봐 항상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편 목회를 위해 치루어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뎠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정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원래 제가 부임하기 전 교회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분이 한국에 있을 때 매우 조용한 고신측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버님도 고신측 장로님이고 어머님도 고신측 전도사님이고, 형님도 고신측 목사님이기 때문에 순복음교회가 자기들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떠나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재정부장과 청년부 교사로 봉사하고, 여자집사님은 성가대와 주일학교교사로 봉사하는 등, 교회의 모든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헌신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 더니든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1년 3개월 동안 주일예배와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만약 그 가정이 없었더라면 제가 더니든에서 처음 단독목회를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 그 가정이 저의 사역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결과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교회 버스를 구입할 수 있었고, 당시 더니든에 있는 청소년들 중 80% 정도가 교회에 나오게 되는 등,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더니든에 있을 때 은혜를 많이 받았고, 가정적으로도 복을 받아 나중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곳 크라이스트처치로 오게 된 것입니다.
제가 왜 길게 이 두 이야기를 소개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불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보면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신하는 것 다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손해 본 것까지도 다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헌신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798년에 제너라는 사람은 천연두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제일 유명했던 영국의 학계의 권위있는 의사들을 위시해서 많은 동료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에서 그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의 ABC도 모르고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한다고 말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르느냐고, 동물에게 실험한 것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가 있겠느냐고 조롱을 하면서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만일 학회에서 거부되면 오랫동안 고생하며 얻은 그의 연구결과가 다시는 빛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동물 실험만 한 것이 아니라, 몇 달 전에 사람에게도 주사를 해서 실험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래도 믿지 못하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들은 한 사람의 임상 실험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또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23명을 실험했고, 낳은 지 열 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자 장내는 조용해졌습니다.
제너는 세상에서 천연두를 없애버리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 없이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공짜를 좋아하게 만드는 마귀에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의 반지파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믿음으로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