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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맞이하는 태도
(마태복음 2:1~12)
성탄절을 영어로는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 크리스 마스란 두 단어가 합하여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이 쓰여진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즉 그리스도란 말과 ‘매스’ 즉 미사 혹은 예배라는 뜻을 가진 말이 합하여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예배하는 날로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안타까운 사실은 성탄절의 참된 의미는 사라진 채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날로 하루쯤 편하게 쉬는 휴일로 쇼핑을 하고 선물을 교환하는 소비의 날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다른 표현으로 엑스마스라고도 합니다. 영어로 그리스도를 ch로 시작을 하지만 헬라어로는 ‘크’ 즉 영어의 X로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줄여서 엑스마스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발음입니다. 엑스마스가 카이마스라고 줄여서 부르는 것이 좀 더 올바른 표현입니다.
영어에서 X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영어에서 X는 10 달러 지폐를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영어에서 X는 알지 못하는 숫자인 미지수를 표시할 때 사용합니다. 또한 연애편지의 끝이나 겉봉투에 표시하는 키스 부호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등급으로 표시할 때 청소년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영화를 X등급으로 표시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성탄절을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리는 크리스마스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엑스마스로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X가 10달러 지폐를 나타내듯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날을 세일을 하여 돈을 버는 날로 잘못 지킵니다. X가 수학에서 미지수를 나타내듯이 크리스마스의 뜻도 모른 채 유흥에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X가 키스 부호를 의미하듯이 연인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고 데이트를 즐기는 날로 생각합니다. X가 영화 등급을 표시하듯이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를 보고 즐기는 공휴일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똑같은 12월 25일 성탄절을 보내면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성탄절을 크리스마스 예배의 날로 보내기도 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날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러한 나눠짐은 오늘날 현대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처음 오셨던 그때에도 똑같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장의 말씀을 통해 이천년 전 첫 번째 성탄절을 맞이한 사람들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준비하고 성탄절을 보냈는지 그 풍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분노의 성탄절입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니 첫 번째 성탄절을 분노함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헤롯 왕입니다. 헤롯 왕은 원래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보다 더 남쪽에 있는 이두매인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그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던 대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유대를 다스리는 왕으로 있었습니다.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46년에 걸쳐 건축하는 열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헤롯 왕을 찾아왔습니다. “헤롯 왕이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그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부터 달여 왔습니다. 그분께 경배하려 하니 알려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헤롯 왕은 당황함과 두려움으로 온 예루살렘은 온통 술렁거립니다. 마태복음 2장 3절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추수린 헤롯 왕은 성경을 잘 아는 율법학자들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성경에서 찾아보시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율법학자들이 예언서를 찾아보고는 “유다 땅 베들레헴이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에서 내 백성을 다스릴 목자가 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박사들에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말을 전해주고는 “가서 아이를 찾거든 나에게도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를 해야겠습니다” 정말 헤롯 왕이 그가 말한 대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였다면 헤롯 왕에게도 성탄절은 크리스마스,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어떠했습니까? 겉으로 말하기는 “가서 아이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를 드려야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나 외에 유대인의 왕이 어디있단 말인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면 나의 후손에서 태어나야지. 나도 모르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단 말인가?”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그렇다면 후환이 없도록 모든 어린 아이들을 다 죽여버려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속은 줄로 생각하고는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립니다. 베들레헴 주변에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 결과 가장 성스러원향 할 성탄절은 가장 잔인한 날이 되었고 가장 축복받아야 할 날이 아이들의 피로 물드는 날이 되었습니다. 찬양이 넘쳐야 할 날이 여인들의 통곡소리로 채워지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헤롯 왕의 성탄절은 성탄이 주는 기쁨과 평강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헤롯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면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채워졌을 텐데, 그렇지 못하게 되자, 분노하는 마음, 살인자의 마음으로 채워지고 술렁이며 소동을 벌임으로 베들레헴을 피로 물들이고 통곡소리를 채우는 참담한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크리스마스가 예배하는 날이 아니라 엑스마스로 술렁이는 거리에서 유흥을 즐기고 성탄절을 달콤한 쾌락을 즐기는 날로 생각한다면 헤롯과 같은 성탄절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무관심의 성탄절입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니 첫 번째 성탄절을 무관심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헤롯 왕이 묻습니다. 마태복음 2장 4절에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제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아기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셨다는 것을 알았으면 앞장서서 백성들을 이끌고 아기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의 후손인 제사장 그룹은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 땅을 본배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들의 역할을 48개 성읍에 흩어져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배를 집례하고 신앙을 교육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보다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의 달콤함에 취해 있다 보니 마음은 굳어졌고 메시아의 탄생이 기다려지기는커녕 귀찮게 느꼈던 것입니다.
또한 서기관은 무엇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헤롯이 그리스도의 탄생이 어떻게 예언되었는가 물어보았을 때 성경구절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6절에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떻습니까? 머리로는 정확하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굳어져 있으니 감동이 없었습니다. 머리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발걸음을 베들레헴으로 옮길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성탄의 감동, 성탄의 기쁨, 평강도 맛보지 못한 채 무관심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첫 번째 성탄절에 이러한 무리들처럼 오늘 교회 안에 있는 우리도 성탄의 감동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분명 성탄절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이고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선포되는 날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매년 똑같은 성탄절을 보내다 보니 감동과 감격이 사라져 그저 형식적인 날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헤롯 왕처럼 분노하거나 쾌락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보내다보면 무관심과 아무런 감동, 감격이 없이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탄의 감동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예배의 감격, 기도의 능력, 찬양의 기쁨, 헌신의 열매 등 이런 모든 것에서 감동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심지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의 재림의 날이 있을텐데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이 서기관들처럼 재림의 날을 맞이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셋째, 예배하는 성탄절입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니 첫 번째 성탄절을 분노함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예배함으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동방박사들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헤롯 왕궁을 찾은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사막을 횡단한 것은 탐험가의 기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이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땅에 온 것은 황금을 찾고 발달된 학문을 섭렵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내 삶의 목적, 내 삶의 최고의 가치를 예배에 두는 사람들에게 성탄절은 의미가 있습니다.
11절에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을 보십시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가 있는 집에 인도함을 받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1,700년대 탐험가로서 동방견문록을 썼던 마르코 폴로라는 사람이있습니다. 그는 옛날 페르시아 왕국의 후예들이 살고 있던 지금의이란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주 귀한 비석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비석에는 이런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황금을 예물로 드렸던 멜키오르는 정치학 박사인데 왕 중에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여! 이 황금을 예물로 드리오니 이 세상을 정의로 다스려 주옵소서” 유향을 드렸던 가스파르는 철학 박사인데 “이 유향을 예물로 드리오닌 이 세계를 진리로 다스려 주옵소서”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발타자르는 의학 박사인데 “이 몰약을 예물로 드리오니 이 세계를 사랑으로 다스려 주옵소서”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의 이름과 지역은 꾸며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예물에는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이 동방박사들의 예물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주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칼빈은 세 가지 예물을 주석하기를 황금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유향은 선지자와 참된 스승으로 오신 예수님께, 몰약은 십자가로 다리를 놓으신 구원자 예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해석합니다.
첫 번째 황금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보배함을 열어 제일 먼저 황금을 예물로 드립니다. 너나없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의미 있는 날이면 금을 선물로 주고 받습니다. 백일잔치나 돌잔치의 최고의 선물이 금붙이고 결혼 예물의 필수도 금가락지입니다. 높은 공직에 으르면 행운의 열쇠를 금으로 만들어 선물하고, 회갑이나 칠순 선물로는 마고자의 단추를 금으로 만들어 선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안방 깊은 곳에 금붙이가 하나둘쯤은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이 금을 좋아하듯이 하나님도 금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올리십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선물하시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법인 십계명을 주시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인 성막의 설계도를 주십니다. 설계도를 펼쳐보니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이 되었고, 지성소에는 법궤가, 성소에는 향을 사르는 향단, 안식일이 돌아올 때마다 떡을 만들어 올려놓는 떡상, 그리고 성소 안을 환하게 밝히는 촛대가 그려져 있습니다. 설계도에는 성구들의 크기, 만드는 재료, 사용하는 방법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릐 일종인 조각목으로 만들고 안팎은 정금으로 금으으로 덧입혔습니다. 법궤도 금으로 덧입히고 향단과 떡상도 금으로 덧입히고 촛대는 전부를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처럼 금을 좋아하셔서 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막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 성막 안에서 그의 백성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실 때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는 ‘팍스 로마나’라고 하여 로마의 법 아래서 평화, 로마가 정한 질서 아래서의 평화 모라 군대의 칼 아래서 평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칼 아래는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 간에 끝없는 갈등이 있었고, 로마의 법 아래의 모든 특권을 누리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 미움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로마의 칼 아래서 숨을 죽이고 있는 유대인으로 로마의 법 아래서 핍박을 받은 베들레헴의 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는 칼이나 법, 제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박사들이 황금을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던 의미 속에는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시여! 내 마음 속에 왕으로 좌정하시고, 종을 다스려 주옵소서”라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향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사역에 대한 표시로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인데 세상 보화보다 더 귀한 말씀이기에 산상수훈, 산상보훈이라 지칭합니다. 이 산상수훈이 끝나는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9절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말의 가르침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해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몸소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하늘 보좌를 버리고 구유 위에 오시기까지 낮아지시고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소금과 빛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리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산으로 오르셔서 밤을 새우고 기도하셨고 새벽 미명에 조용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탄절이 의미가 있을까요? 동방박사처럼 유향을 드리면서 “주님은 나의 참된 선지자, 나의 참된 선생님입니다. 주님을 따라 살기를 원하오니 진리로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성도에게 성탄절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리면서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제 태어나신 지 며칠 안 되고 저희는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살아온 흔적은 깊이 파인 주름살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참된 선생님은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저희는 세상에서 박사의 칭호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구한 학문의 세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선생님은 아기 예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유향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몰약입니다. 무슨 약물인 것 같은데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지, 어떤 곳에 사용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동방박사들의 예물로 몰약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몰약이 또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앞장서서 치렀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무덤을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과 몰약을 가져온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을 바른 후 세마포에 싸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보면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주님의 십자가와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황금을 예물로 드리면서 아기 예수님은 나의 왕이 되십니다. 유향을 예물로 드리면서 아기 예수님은 나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몰약을 예믈로 드리면서 아기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갈 다리를 놓으신 분, 십자가로 죄악의 담을 헐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실 분, 몰약을 받으실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동방박사는 예배가 삶의 목적이어서 복된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배의 대상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고도 바르게 고백합니다. 황금을 드리면서 나의 왕이 되십니다. 유향을 드리면서 나의 스승이 되십니다. 몰약을 드리면서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마태복음 2장 12절에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라는 말씀처럼 표면적인 설명은 헤롯 왕에 독기를 품고 있기에 나쁜 모략을 품고 있기에 아기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의 꿈속에서 헤롯 왕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갔습니다.
출애굽기 13장 말씀에 보면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가는데 두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해변길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 길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을 연결시켜 주는 두 길, 지중해변을 따라 올라오는 해변길이 있고 시나이 반도를 두루 돌아가는 광야 길이 있습니다. 해변 길은 짧고 광야 길은 멉니다. 해변 길은 길이 평탄하고 광야 길은 험합니다. 해변 길은 샘이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 길은 뜨거운 태양과 사막의 추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해변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해변 길 끝자락에는 철제 무기로 무장을 한 블레셋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보면 뒤로 돌아 이집트로 다시 돌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멀고도 험한 광야 길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길은 멀고 험하지만 구름 기둥이 인도하고 불기둥이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멀고 험하지만 아침마다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샘이 솟는 길입니다. 그 길은 멀고 험하지만 율법을 받고 성막을 세우는 길입니다. 그 길은 멀고 험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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