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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송년예배 특강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 / 마가복음 11:20-25
요절 /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또 실생활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는 현 상태에 머물거나 체념하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믿음 생활은,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신가? 그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시고, 우리가 어떤 살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잘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명을 능력 있게 감당할 힘을 줍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군중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성전을 돌아보시고 이튿날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다음날 있었던 사건입니다. 제자들이 아침에 보니, 예수님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고, 우리 현실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성전으로 다시 가는 길에 전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향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그런데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단 하루 만에 뿌리째 마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 기적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부패한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신앙적인 열매 없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부패하고 죄악된 성전과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심중은 생각지도 않은 채, 다만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놀라 외쳤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수많은 귀신 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쳐주신 것과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만 주님의 권능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저주’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나옵니다. 신명기에 보면, 축복과 저주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축복과 저주를 사용하시고, 이로 인해 능력이 나타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발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권능만을 신적 능력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저주와 심판 또한 우리 예수님이 지니신 놀라운 신적 능력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깊이 알 때 주님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가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뭔가 특별한 비결을 기대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첫째, ‘오직’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믿음의 대상을 삼는다는 것은 그것이 의지할 만하고 우리 인생을 보장해줄 것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인생을 보장해 줄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앞으로 있을 치열한 경쟁에 대비해 영어나 수학 등, 기초를 쌓기 위해 무진 노력합니다. 중고등학교 때도 성적을 올리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또 대학에 들어가서는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그곳 안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을 보장해줄 뭔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의지할 뭔가를 찾아 나섭니다. 돈, 권력, 명예와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쫓아가도 잡을 수 없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물론 삶의 방향성과 현실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의지의 대상, 믿음의 대상, 나의 인생을 진정으로 책임져 주고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믿음의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설계해가는데 있어 변함없고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반석을 찾는 것이 다른 그 무엇의 삶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과연 어떠하길래 의지할 만하고 우리 인생을 보장해줄 것으로 믿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먼저, 창조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땅과 바다, 각종 채소, 꽃과 나무, 각종 동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새의 종만해도 11,000종이 넘습니다. 각 종은 개별적으로 색깔이 다르고, 고유한 특성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별개의 소리를 냅니다. 광활한 우주도 보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거대해 보입니다. 그러나 태양에 비하면 매주 작습니다. 은하계도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이 존재합니다. 또 과연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요? 이는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 능력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의 경우, 겉으로는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안정된 직업과 가정도 뒤로하고,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보다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면 정치적 지위를 얻기를 원했고 재물과 권세도 함께 얻기를 바랐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드러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겼고,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연약했습니다. 진정성 있게 하나님을 그들의 인생의 굳건한 반석으로 의지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라는 의미입니다. 상대적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의지의 대상,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인생의 굳건한 반석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도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신뢰하지만, 들어주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제자들의 소원대로 예루살렘 성을 토대로 메시아 왕국이 세워져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감탄했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이나 로마와 같은 강대국들도 결국 무너져 내렸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유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은 ‘유일하게’ 영원하시고 절대적인 전능자이십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은 상대적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힘들어하고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누구와도 어떤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십니다. 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신뢰를 받으실 수 있고, 우리의 믿음에 능력으로 응답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제자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바라던 눈을 들어 영원하시고 절대자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에 얽매이거나 미련두거나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영원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물론 이 같은 믿음이 한순간에 생기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변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끊임없이 요동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진정한 굳건한 반석이 되어주실 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루실 것에 대한,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훌륭하다고 말하지만, 자기 확신에 기초한 믿음은 헛된 믿음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루시고 왕이 되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기 생각에 기초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복음을 여러 번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올바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된 말씀인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묵상함으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사랑과 능력이 어떠한지 알아가야 합니다. 또 이 같은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할 때 더욱 깊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 때 올바른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더욱 깊이 알아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고 신앙생활 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을 소유할 때 믿음의 효력이 어느 정도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말씀하신 후, 구체적으로 ‘이 산’과 연관시켜 말씀하십니다. 23절의 ‘이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성전산입니다. 또 ‘바다’는 구약에서 ‘멸망, 심판,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산이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이 산이 심판받아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을 심판해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제물을 드려 죄 사함 받는 일입니다. 둘째는, 제사장을 통한 중보기도 요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전을 대신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와 같이 성전 기능을 하는 새 성전이 되시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건물 성전을 대신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천지개벽과 같은 이야기이고, 대변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이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건물 성전은 심판받아 사라지고, 새 성전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어느 누구나 죄 사함 받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 요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산’은 요지부동의 장애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을 건축하다 낙심해 있던 스룹바벨 총독에게 말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의 장애물을 친히 해결해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볼 때도 옛 건물 성전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큰 산’과 같은 장애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한은 도저히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산을 옮기는 믿음을 말씀하신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다는 것도 사실 생각하기 어려운데 산이 단순히 지진처럼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산이 뽑혀져 바다에 던져져 사라지는 모습은 공상과학 영화에도 나오지 않는 장면일 것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비유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역사를 방해하거나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을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바라야 합니다. 우리의 연초 요절 말씀처럼 우리의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놀라운 새 일을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표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산을 바다에 던져지게 하는 일은 꼭 거창한 일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크고 작은 현실 문제들에 부닥칩니다. 우리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산과 같은 문제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사건, 사고나 가정문제, 인간관계의 문제나 장래문제, 물질 문제, 건강문제, 자녀교육문제, 제자양성 문제 등 실로 다양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신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성장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산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해 나를 도우실 하나님을 확신하고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은 지속성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순간 실패를 경험하기도 할 수 있지만, 물러서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믿음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에 도전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문제 자체보다 우리의 ‘의심’입니다. 의심은 말 그대로 믿음의 정반대 단어입니다. 의심에 사로잡히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무기력한 생각에 빠져 산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말씀들과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이 넘치도록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듣는 가운데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 때 의심을 물리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신 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의 능력은 곧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합니다. 또 기도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독생자마저도 우리를 위해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구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구하였으면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분으로 확신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때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에 대한 확신이 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도하고, 기도하였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셨음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권면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님은 이제 기도할 때 마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도와 용서의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므로 그들과도 올바른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우리 죄인들은 결코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즉 수 조에 해당하는 액수를 하나님께 빚진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평생토록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한편 대조적으로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죄는 백 데나리온, 즉 대략 200만원에 해당하는 비교적 적은 빚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수 조에 해당하는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 받았는데, 형제에게 200만원 정도의 적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있으면 과연 되겠냐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그 사람을 ‘악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마18:32). 여러분은 악한 종이 되고 싶습니까?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형제가 우리에게 지은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은혜를 기억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 성령께서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 아버지 하나님을 둔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다른 형제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우게 되면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되고,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복과 사랑을 나누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알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기꺼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현실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하는 인생 되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를 용서하고 믿음의 간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