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의 법휘는 휴정이고 호는 서산이며 살고 있는 집을 청허당이라고 편액을 내걸었다. 속성은 최씨이고 아버지는 세창이니 어천찰방 벼슬을 지냈고 안주 사람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김씨의 꿈에 한 자(一尺)나 되는 유리병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슴속으로 날아 들어오자 마음속으로 기뻐했는데 곧 임신이 되어 정덕 연대인 경진년(중종15년1520) 삼월 그믐날 태어났다. 목욕을 하지 않아도 신체는 청결했고 나이 겨우 다섯 살 때 누린내를 싫증냈으며 속세에 살면서도 출가자의 행실이 있었다. 또 일곱 살 때는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하자 소리 내어 슬프게 울기를 삼년이나 했으며 아버지가 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닦는 일을 이끌어주며 부탁하려하자 마침 박상이 중국으로 사신가면서 사행길이 안주를 경유하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그를 보고는 “이 아이는 기재로구나. 장차 크게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겠다.” 라고 했다. 참으로 더 좋게 보고는 복명(復命 왕명을 받아 일을 맡은 관원이 그 일을 마치고 결과를 보고 하는 일)할 때 대사를 불러서 함께 한양 본댁으로 입경하고자 했다. 교육과 학문은 거의 이루어졌다고 판단해 성균관 학업수련을 따르게 했는데 박상이 전주의 수령으로 나가자 대사도 따라가서 원암사에서 글을 읽었다. 일 년 만에 박 수령이 어머니상을 당해서 한양으로 돌아오자 대사와 동지들은 붓과 벼루만을 지니고 머나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온갖 구경을 마치고 동지들은 한양으로 돌아갔으나 대사는 영관대사의 법회에 참석하여 불법을 청강하고서는 믿고 곧이 들었다. 숭인장로에 의지해서 원통암에서 머리털을 깎고 부용영관을 전법사로 삼고 나중에는 의신동 위 철굴암으로 들어갔다. 묵언수행 삼년을 마치고 금강산 구연동에 들어가서 참다운 의미에서의 본성을 깨닫고 여름 석 달 동안 좌선하고 내원동 향로암으로 깊이 들어갔다. 삼년을 면벽하고 좌선하다 하루는 창문을 열자 갑자기 미륵봉 앞에서 급한 기운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도 못하면서(목등구아目瞪口啞) 혼자서 읊조리기를 “누가 한 납자의 천만 곳 상처투성이 속을 알겠는가. 세발 달린 금 까마귀가 한밤중에 날아가누나. 하하,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도리어 바보천치로 산지 여러 해가 되었구나.”라고 했다. 주머니속의 송곳은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니 부득이하게 교화의 문을 또 다시 떠나 이류중행(異類中行 이류 가운데 행한다)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임자년(명종7년1552) 방선과(牓禪科)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낙산사 주지를 맡았고 다음은 선종 전법사를 맡았고 그 다음은 판대화엄종사 겸 판대조계 종사를 맡자 자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수등계의 선호(禪號)를 하사 받았다. 반복사유하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높은 평판을 받아 상서롭지 못하다.” 하시고는 심야에 보던 종무에서 몸을 빼내어 홀로 떠나 묘향산 내원암으로 들어가자 산중의 높은 덕과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 운집했다. 하안거 결제를 두 번 마친 다음 해 심원동 법왕대로 깊이 들어가 하안거 결제를 두 번 끝내고 경인년(선조23년1590) 가을 9월에 구룡산 대승암으로 자리를 옮겨 오래지 않은 세월동안 머물러 살았다. 국가는 삼강과 오상을 위반한 죄로 의금부에서 포박하고 법에 의거하여 국문하자 대사는 침착하고 태연자약하며 말은 곧고 이치가 통하면서 논변은 변화무쌍했다. 주상이 듣고서 가상하게 여기시고는 사면을 허락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임진년(선조25년1592) 4월 남쪽 오랑캐가 국토를 침범해 한양이 무너지자 주상은 도성을 떠나 의주로 난리를 피했다. 민초들이 어육처럼 마구 짓밟히자 주상은 대사가 비록 석가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문무를 겸비해 갖추었다고 평가하며 조서로 소환하면서 명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적을 없애라.”고 하자 대사는 왕명을 받들고서 승군(僧軍) 일만 삼천을 거느리고 천병(天兵 명나라 천자의 군사)과 합세하여 기성(箕城 평양의 옛 별호)의 왜적을 치고 남쪽 변방 밖으로 몹시 괴롭게 하여 쫓아냈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우자 절충장군에 봉하면서 “불문(佛門)의 매우 씩씩하고 굳센 장수라 할 만하다.”고 말했다. 크게 전공을 수립한 후에 그 벼슬을 돌려주자 임금이 교지를 도로 거두어들이니 묘향산에서 안개와 노을 속에 편안히 지내며 금강산의 빼어난 경승에 빠져 심사고거(深思高擧 생각은 깊게 하고 거동은 고결하게 한다)하고자 했다. 거듭해서 옥설봉 산등성이의 하늘과 푸르른 뽕나무밭 같은 바다를 완상하고는 묘향산 내원암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하안거 결제를 한 차례 수행했다. 갑진년(선조37년1604) 정월 22일 문인 두세 사람과 수레를 타고 여러 암자 곳곳을 돌아다니다 말씀하시기를 “내일 해시(亥時)에 막 떠나겠다.” 하고는 붓을 들어 임종 게를 썼다. 쓰는 일을 그만두자 불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는 바로 입적했다. 이에 상서로운 구름이 사면을 둘러싸고 햇빛은 쓸쓸하더니만 이레 째 날에 이르러 문인들이 육신을 모시며 수레는 측량할 수 없는 고갯길을 넘어갔다. 재가자와 출가자 수천이 길을 막고 영전(靈前)에 차를 공양하자 슬퍼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산골을 요동치니 모두가 목이 메여 통곡했다. 다비하는 날 밤에는 신령한 빛이 동천 일백 리 밖까지 비추자 구경하던 사람들은 망배(望拜)를 올렸다. 문인 대덕 원준(圓俊)ㆍ인영(印英)ㆍ영관(靈觀)의 무리들이 사리 두 개를 수습해 묘향산 보현사 서쪽 기슭 나옹화상 석종 곁에 탑을 세웠다. 금강산에도 문인 대덕이 있어 자휴(自休)ㆍ설잠(雪岑)ㆍ경헌(敬軒)ㆍ혜진(惠眞)ㆍ보희(寶熙)의 무리도 기도하고 사리 세 개를 거두어 유점사 북쪽 기슭에 석종을 세웠다. 대사의 세수는 85세이고 법랍은 63년이다. 오호라, 부처 세계의 오물은 금일처럼 심한 적이 없었으니 산문(山門) 수행자를 군사(軍士)로 징발하는 큰 슬픔의 벼리(綱)는 누군들 인간과 천상의 물고기를 구제한다고 하면서 열반의 저 언덕에 방치해두겠는가. 말세 부처의 훌륭한 인재들은 불법의 중생제도는 당연히 이러해야만 하는가.
만력 41년 임자(광해5년1613) 가을 7월 일 문인 여여자는 삼가 짓다.
역자 注) 만력 41년은 임자년이 아니고 계축년이 맞다. “淸虛堂集”은 경기도 삭녕 수청산 용복사龍腹寺에서 1630년(인조8) 간행했는데 이 판본에는 제월당 대사가 쓴 위 “청허대사 행적”이 실려 있지 않고 청허당의 일생을 관통(貫通)한 유일한 승려의 글은 이것 밖에 없다. 모두가 주변의 파편적인 문헌을 통해서 전체적인 생평을 종합했다고 보면 되고 서산대사가 갑진년(선조37년1604)에 입적했으니 10년 뒤에 작성된 최초의 행장이다. 적전제자(嫡傳弟子)로서 서산을 가장 가까이 서 본 인물이 기록해서 사실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고 儒子의 손을 빌리지 않았으므로 적실성(的實性 relevance)을 확보했다. 세상에 처음 빛을 본 매우 값진 유문이고 청허의 수행 과정과 사상 당대 승단의 정황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주요한 자료이다. 천관산 대선사 제월당 경헌대사는 값진 유산을 남겼고 역자는 문향(文香)을 느끼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음미하며 국역했음을 밝힌다. 여여자(如如子)는 자호(自號)이고 허한 거사(虛閑居士) 라고도 했다. 참고로 청허당집 제7권(淸虛堂集 卷之七)에는 “완산完山 노 부윤盧府尹에게 올린 글(上完山盧府尹書)”이 있는데 이는 서산이 자신의 가계와 산중의 절집생활을 담담하게 진술한 自傳的 記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