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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면 (馬川面)
마천이란 이름은 가야나 신라 시대에 그 흔적이 있으나 문헌상의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마천소(馬川所)와 의탄소(義呑所)가 처음 나온다. 마천(馬川)이란 지명의 유래는 냇물이 바위에 부딪히면서 물굽이를 치고 급하게 흐르는 모습이 마치 말이 뛰어가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마천(馬川)이라 했는지 모르나 지형상 금마음수(金馬飮水) 형국이라 하여 마천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여러 골짜기서 모이는 물이 엄청나게 불었다 하여 엄천(嚴川)이라 한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산내, 삼정, 백 무·추성, 창원에서 흐르는 물이 마치 말이 꼬리를 들고 뛰어가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도 같다. 금대산(金坮山) 밑 도선의 지리 명당 결에 천마시풍(喘馬嘶風) 자리가 있는데 달려온 말이 숨이 차서 하늘을 쳐다보고 숨을 내뿜는다는 설이라 하여 여기에서 온 이름일 수도 있다. 면의 서부에 삼정산, 남부에 지리산, 북부에 삼봉산이 있고 중앙에는 창암산, 오공산 등 험한 산지로 되어 있으며 중앙으로 흐르는 임천강 유역에 적은 농경지가 붙어 있고 계곡 주변에 마을을 형성하여 사는 고장이다.
주 산업은 1970년 이전에는 농업, 잎담배와 닥나무가 많아 예부터 곶감, 옻칠 한지 생산이 유명한 곳이다. 지리산에서 나오는 산채 및 약초 토종꿀 등 산에서 나는 임산물이 주민의 주 소득원이 되었으나,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토종꿀은 전멸하였고, 약초 등 임산물은 거의 없어지고 주변의 농경지를 이용한 농업을 주로하고 지리산을 등지고 있는 추성리, 백무동, 삼정리 등 지리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하는 민박 펜션등 관광업을 하는 농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유물로 마애여래입상과 벽송사 삼층석탑, 금대암 삼층석탑, 최근에 동구사 청동 북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가흥(佳興), 군자(君子), 덕전(德田), 삼정(三丁). 강청(江淸), 추성(楸城), 창원(昌元), 의탄(義灘), 구양(九楊) 등 9개리 2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면이다.
※ 옛 선비들이 남긴 마천 팔경(馬川八景)
① 백석신월(白石新月) - 당흥마을 앞 강변에 펼쳐진 넓은 반석
봄, 여름철 천엽하며 즐겨 노는 곳.
② 임천어적(臨川漁笛) - 어옹(魚翁)들의 한가로이 낚시질 모습
② 유교한우(柳橋閑雨) - 옛 마천 토다리 옆 능수버들 늘어진 풍경
④ 부연폭포(釜淵瀑布) - 부연정 앞 백척 폭포의 장관
⑤ 학정노송(鶴亭老松) - 운학정 정상에 있었던 천년 노송
⑥ 금대모종(金台暮鐘)-금대암에서 저녁을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
⑦ 창암낙조(蒼岩落照)-창암 앞산의 석양의 아름다운 장식
⑧ 방장귀운(方丈歸雲)-지리산 운하 선경의 경관
① 가흥리(佳興里)
가홍리는 마천면의 소재지가 있는 마을로 면의 각 기관이 모여 있고 오일장이 지금도 서고 있는 곳으로 마천면의 중심지이다. 1914 |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당흥(堂興) 마을과 가채(佳採)마을을 합해서 가채의 가자와 당흥의 흥자를 따서 가흥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 땅벌 (堂興) 마을이라고 하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로 당벌인데 경상도 발음으로 땅벌이라고 불러왔다. 한자어로 당벌(堂伐)은 당집이 있는 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당집의 흔적이 있다. 이곳에서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금대암으로 가는 길을 당산 골목이라 한다. 마을이 형성되기 전 아주 옛날 당 할머니를 섬기고 사는 몇 사람이 생활하던 것이 차차 인가가 불어나서 마을로 형성하게 되었다. 뻘건 벌판이라는 뜻도 들어있는데 인가가 없었던 옛날에는 전답도 없어서 황폐한 벌판이었었다. 마을 앞들을 당 앞들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당산 골목 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현재 상수도 물탱크 위쪽) 마을의 잦은 사고로 인하여 웃어른들이 마을을 아래로 옮기었다. 마천면 내의 당집은 당벌(堂興) 마을과 백무동 입구에(현재 고불사) 있었다. 특히 백무동 당 할머니는 큰 바위 밑에 조그맣게 석상으로 모셔있는데 연중 소원을 비는 기도원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모여들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당 할머니를 섬기는 지극한 신도가 기도원을 건축하리라는 말이 있어 지금은 고불사라는 사찰로 변하였다. 천왕 할머니를 모시는 당집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지리산 기행문이나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성모사 여신에게 제문을 지어 날씨가 쾌청하여서 주기를 빌었다는 대목이 있다. 성모사는 지리산 정상에 있는 당집이다. 마을 동쪽에는 무당이 굿을 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하는 무당 소가 있고 상투바위 비네바위가 동서로 나란히 있으며 마을 북쪽에 산 짓 골이 있는데 이곳은 매년 정월 초삼일에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가홍리에 있는 안국사는 신라 태종 3년에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자는 행 오조사라고 하며 절 뒤에는 부대 화상 탑이 있고 앞에는 행 오조사의 부도가 있다. 이곳에서 난세를 평정하고 국태민안을 빌었다고 해서 안국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해방 후 소실되고 산신각만 남아있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일부 부지가 소실 되었으나 복원되어 안국사가 중창되었다. 안국사의 산 등을 넘으면 금대암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뒷산의 큰 바위가 밤중에 굴러 넘어지면서 부처님의 영기로 피하여 옆으로 굴러졌다고 하는 설이 있다.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금대암 복구 기성회가 조직되어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았다. 금대암 삼층석탑은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기단부가 없이 암반 위에 바로 탑이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 가치래미 (佳探) 마을은 마을로 형성되기 전에 가체 암이라는 큰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을 지나 강청마을로 가는 길가 논들을 한 절들이라고도 한다. 한 절이란 큰 절 즉 대사찰이라는 뜻이다. 논들 입구에 있는 한절보 개설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에도 대사평보(大寺坪湺)라고 적혀있다. 사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한 절들이나 가채마을 어느 곳을 파도 기왓장은 나온다고 한다. 당시에는 큰 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형성은 큰 절로 인하여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나 조선 인조 때 김해김씨가 순천 형성되었다고 추측되며 조선 인조 때 김해김씨가 와서 살았고 영조 때에 달성배씨가 담양에서 왔으며 경주정씨가 엄천에서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가채암은 세월이 오랫동안 흐름에 따라 그 이름이 변음되어 가치램이로 변화되었다고 본다.
② 군자리(君子里)
군자리는 남원시 산내면에서 들어오면 우측 강 건너 금대산을 마주하고 있는 동리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자마을과 도마(都馬)·[도만(桃滿)]마을, 그리고 외 마천(外馬) 등 세 마을을 합쳐서 이루어진 행정 동리이다.
※군자(君子) 마을은 신라 26대 진평왕이 왕자를 낳고 신라로 돌아갈 때 진평왕의 집을 군 자사라 하고 그 주위를 군자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나 진평왕이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전설인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고 그의 딸이 여왕이 되었다. 진평왕께서 서라벌로 돌아가시고 나서 왕이 거처하던 집을 궁실이라고 해서 또 크고 좋았기 때문에 사찰로 만들어서 군자 사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마천면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 아니었나 싶다. 물이 많아서 못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그 절이 없어졌지만, 탑신의 파편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도 군 자사로 갈려고 하였는데 당흥마을 뒷산 지리면당설 천마시풍(地理明堂說喘馬斷風)의 바람재를 지나 조금 오르면 태봉(胎封)이란 조그마한 산이 있는데 바위 밑에서 아들을 낳아 그 태를 묻었다 하여 한자로 글을 돌에 새겨놓았다. 마천교에서 군자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장승배기라고 한다. 옛날 군 자사 절이 크게 발전하던 시절에 장승을 길 양편에 세워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개구리처럼 생긴 개구리 봉이 있고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의 형국인 배암날 모퉁이가 있다. 개구리봉 옆에 황새봉이 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황새가 뱀을 쫓는 형국이라 한다.
※ 도마(都馬) 마을은 도만(桃滿)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복숭아꽃이 만발한다는 뜻이다. 도마마을 뒤 계곡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복숭아나무 골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이 복숭아나무 자생지로 적합한 곳이다. 옛날 복숭아나무가 가득히 나서 무성하여 봄날이 따뜻하면 이곳에서 떨어진 복사꽃 꽃잎이 계곡물에 가득히 떠내려왔다고 한다. 그야말로 도원경이다. 그래서 도만이 골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행정구역 개편 시에 마천에서 으뜸가는 수도마을이라 하여 도마천(都馬川)이라고 하였다 하는데 그 후에 줄여서 도마라고 했다. 이 마을은 6·25동란 때 인민재판이 열리기도 하였으며 마을 뒤로 산내면 약수암과 실상사를 바로 연결되는 산길이 있다. 청주한씨의 정착촌이기도 하다. 또 마을 입구 강변에 아담하게 지어놓은 경치가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데 그 정자의 현판이 도원정(桃源亭)이라고 되어 있다. 마을 서쪽에는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나한 굴이 있고 냇가에는 부연정(釜淵亭)이 있다. 부연정은 듬붓소에 가마솥을 넣어 백두산의 기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군자로 넘어가는 소 목재가 있다.
※ 외마천(外馬川) 마을이 있다. 나주임씨와 남평문씨의 집성촌이다. 외마천은 마을의 생긴 형세가 말이 누워있는 격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외마천과 군자마을 사이 산 능선을 대왕재라고 한다. 옛날 신라 진평왕이 지리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왕자와 궁녀들이 군자 앞산에서 왕을 마중 나와 기다렸다고 하여 대왕재라고 한다.
또 외 마마를 밑에 운학정(雲鶴亭) 있다. 마천의 팔경을 이야기 한 시에 학정노송(鶴亭老松)이란 구절이 있다. 산 정상에 천년 노송이 있었는데 일제 말기에 벌목해 버렸다. 지금은 주위에 소나무가 옛날의 천년 노송과 같은 소나무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산 정상에는 평평한 곳이 있는데 씨름판 몬 당이라 한다. 1970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에서 면민 씨름대회를 했다고 한다.
운학정에는 낙석을 막아주는 피암터널이 있고 운학정(雲鶴亭) 석각이 있고 대지 정리와 정자를 함양군에서 설치하여 옛날의 운학정의 유적지를 연상하고 있다.
③ 덕전리(德田里)
덕전리는덕전천 골짜기에서 가장 넓은 들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며 백무동과 삼정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해서 흐르는 곳이라 항상 맑은 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 마천(內馬)마을 매산바우(梅岩) 그리고 실덕(實德)마을과 말밭(磊田) 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동리다. 실덕과 뇌전의 이름을 따서 덕전이라 했다.
보물 375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이 마을 뒤 언덕에 있다.
※안 마천(內馬) 마을은 내마라고 부른다. 외마마을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대마마을이 나온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왼편 산맥 끝에 광천동씨 입향조의 묘가 있는데 와우형(臥牛形)이라고 한다. 산맥을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떡닥날이라고 하는데 송아지의 등 날이라는 것이다.
※ 매산바우 (梅岩) 마을은 지형상으로 안 마천과 밖 마천의 소를 매어놓은 곳이라 한다. 마을 뒤로 조금 오르면 소고뱅이 몬 당이라는 지명이 그리고 매암마을 가운데 큰 바위가 있는데 장군바위라고 부르고 그 바위 아래에 자리한 집을 장군바우집이라고 부른다. 소고삐를 바위에 매어 두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을 형성 연대는 기록이 없으나 조선 영조 때에 현풍곽씨가 장수에서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을 서쪽에 홀로 서 있는 고자바우가 있고 남쪽에는 깐치바우, 중앙에는 장군바위가 있다.
마을 서편 조그마한 고개를 넘으면 십여 호의 인가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절터 골이라고 부른다. 옛 법당 터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데 집터가 좋다고 한다. 마을 곳곳에 탑신조각이 흩어져 있는데. 옛날 신라 시대 덕봉사 절터라고 한다. 그리고 아래로 마전초등학교 뒤편 들을 덕봉들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곳에 절이 있었는지 고증은 없다.
또 학교 뒷산 암벽에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고담사 절이 있다. 이 절은 덕봉암(德奉庵)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1980년대에 고담사(古潭寺)로 절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 양식으로 8세기 불상들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보물 375호로 지정된 십 세기경의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 실덕마을은 현재 실덕(實德)이라고 기록하지만 실득(實得)이다. 열매를 얻어온다는 뜻이다. 실덕마을에서 뇌전마을로 가는 중간도로변 마을을 꽃밭 말(花田村)이라고 하는데 꽃밭에서 결실을 보아 열매를 얻어 오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 마을뿐만 아니라 마천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오미자나 구기자를 비롯한 각종 약초 열매나 잣, 도토리 등 식용 열매 그리고 과일 등 각종 열매 채취에 노력한다. 그리고 실덕에서 강청마을로 가는 중간에 오륙 호 사는 마을이 있는데 송 알이라고 부른다. 크게 고함을 쳐서 원통하게도 받은 복을 보냈다는 뜻이라 한다. 또 실덕마을 건너편 강청 마을의 진양 강 씨 묘소인 창암산 밑 장군대좌에 묘를 썼더니 과연 장군감의 옥동자가 태어났는데 장군이 되어 장차 역적이 될까 봐 두려워 가족들이 모의하여 죽이니 그의 용마가 원통하여 송알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원래 송환(送限)인데 음이 변하여 송 알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 북쪽에 고양이 머리처럼 생긴 괭이 바 우가 있고 괴바우소가
있는데 산적들을 깨우친 사냥꾼 전설이 있다.
※ 말밭 마을은 지금은 뇌전(磊田) 마을이라고 기록한다. 돌무더기 뇌지를 쓴 것은 이 마을이 마천면의 마을 중에서 수리안전답이 없고 대부분이 밭이나 천수답으로 한발이 가장 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돌자갈도 많고 거칠고 메마른 땅이다. 옛적부터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어 생활해 왔지만, 땅이 말라버린 밭이라 하여 말밭이라고 불러왔는데 한자로 표현한 글자가 마땅치 않아 뇌전(田)이라고 쓰고 말밭이라고 불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④ 삼정리(三丁里)
삼정리는 마천면에 편입된 마을로서 마천에서 실덕마을을 거쳐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벽소령을 넘어가는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일제가 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양지말(陽丁)과 음지 말(陰丁) 그리고 아랫말(下丁) 합하여 이르는 동리이다. 영원사가 있고 선 유정의 전설과 벽소령의 전설 등이 있다. 물이 맑고 비교적 조용한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음정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벽소령으로 올라가면 마천 자연휴양림이 있다.
※ 양지말 (陽) 마을은 양지 정쟁이(陽地 停莊)라고도 부른다. 장(莊)은 고려 시대에 특수한 행정구역인데 고려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찰은 농토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승려가 아닌 주민들이 전답을 소작으로 경작하여 세미를 바쳤고 어렵게 생활해 나왔다.
삼정은 영원사가 통일신라 시대부터 있어서 서산(西山) 청매(靑梅) 사명(四溪) 포광(包光) 등의 대사들이 수도하였던 큰 절이었다.
따라서 부자질이기에 절의 혜택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 군지에는 정장(停莊)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마을에는 정자가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현재 아랫말에 선 유정이란 정자가 있지만 그렇게 오래된 정자가 아니다. 이곳 양지말 과는 거리가 멀고 지명이 생길 정도의 정자도 없다.
※ 영원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영원 대사가 지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영원사라고 한다. 한때는 그 규모가 내지리(智異)에서 제일가는 사찰이었다고 선하다. 그러나 중년에 와서 퇴락하여 보잘것없는 절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당대에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 들어와서 도를 닮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산대사가 불도를 닦기 위해 분 제자로 입문한 제 남원 산 내면에 있는 달 궁의 황령사에서 삭발하고 그 후 이곳의 영원사로 들어와 12년간 도를 닦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동쪽 계곡에 노첨지소가 있는데 바람난 노인이 술집 추모를 짝사랑하다가 빠져 죽은 전설이 있고 영원사의 황소 곡 전설이 있다
* 음지 말(陰丁)이라고도 부른다. 음지에 있는 집단촌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 말 서편 골짜기를 비린내 골이라고 한다. 아랫말의 선유정 진 설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다.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살다가 날개옷을 찾은 뒤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남편과 아들이 하도 원통하여 바라보고 있다가 화석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현재 벽소령 정상에는 부자바위가 서 있다 원통하게 떠나보내 버린 유모 엄마의 골이라고 하여 비리네(飛離嬭) 골이라고 했다 한다. 현재 지방산림관리청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휴양림으로 개발하고 있는데 신비의 자연림과 맑고 맑은 옥류천은 유명한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 아랫말 (下丁) 마을은 아래 정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 마을 중 아래쪽에 위치하는 장(莊)이라는 뜻이다. 이 지리산 계곡 마천면은 촌락형성의 단계에서 사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마을이 많다. 영원사 상무주암을 주축으로 하는 삼정리가 그러하고 매암, 내마 실덕마을은 덕봉사, 군자, 도마, 외마 마을은 군자사 당흥마을 안국사, 등구, 창원, 촉동마을은 등 구사 등 마천면은 절을 중심으로 하는 촌락이 이뤘다.
하정마을 북쪽에는 문처럼 길 양쪽에 우뚝 서 있는 문바위가 있고 마을 입구에는 배처럼 생긴 배 바위가 있다. 마을 서쪽에는 지형이 디딜방아처럼 생계 다하여 방아골이 있다.
⑤강청리(江淸里)
강청리는 옛날에는 산에서 주로 심마니, 땅꾼, 약체를 캐며 생활하는 사람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섬망(島村)과 강청(江淸)마을 그리고 백무동(웃백무, 가운데 백 무, 아래 백 무) 마을, 계점과 새터 양지를 합쳐서 이르는 동리다. 특히 계곡의 맑은 물과 우거진 숲으로 인해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리는 중간지점으로 지금은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동리이기도 하다.
※ 섬말 (島村) 마을은 섬으로 생긴 마을이다. 백무동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삼정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하는 지점으로 수해가 나서 섬이 생긴 마을이다. 백무동에서 내려오는 물은 애초에는 마을 안으로 흘렀다 이를 제방을 쌓아 물길을 현재 하천으로 돌려 마을을 이뤘다. 제방을 쌓기 전에는 여름철이 되면 홍수의 피해를 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제방 공사를 튼튼히 해서 수해를 입을 염려는 적어졌다.
※ 강청(江淸) 마을은 전망이 좋은 마을이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임천강 상류인 삼정 골 물과 백무동 쪽 물이 합수가 되어서 흐르는 물은 낚싯대를 던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강청이란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물이 맑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조선 영조 시대에 진양 강 씨가 산청에서 왔고 신창표씨가 휴천에서 들어와 살았다. 바위 밑에 굴이 있는 굴바우와 괭이바우, 생이 바우, 시럽바우, 투구바우, 병풍바우 등 바위가 많다. 마을 북쪽에 극심이 너덜겅 경이란 곳이 있는데 청태산의 늙은이 할멈이 치마에 돌을 싸서 와서 부어놓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돌너덜 또는 돌 너더라 이라고도 한다. 또한 창암산 장군대좌는 강청마을의 강씨 문중 「애기 장군」 전설과 오 씨네 장군대좌 전설이 있다.
지금은 지리산 생태공원이 2018년에 조성되어 함양군에서 지리산을 찾아오는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생태공원은 지리산의 야생 꽃 및 외국산의 꽃들도 탐방객을 위하여 철마다 다른 꽃들로 선을 보인다.
※ 백무동(白武洞) 마을은 세 군데의 마을이 기다랗게 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구 군지에는 백무(白霧)라고 기록되어 있다. 높은 지대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무는 백무(白巫)로도 불린다. 옛날 전국에 흩어져 있던 무당들이 섣달그믐이 되면 지리산으로 몰려와 행사를 하였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정상에 오를 수가 없으므로 이곳에서 망배를 하였다고 한다. 전국서 백여 명의 무당이 이곳에 집결했다고 해서 백무(百巫)라는 지명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선비들의 유람록에는 백모당(白母堂) 당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지리산 백 무 이야기에는 지리산 산신이 법우화상과 혼인하여 8명의 딸을 낳아 신과 인간의 사이를 왕래하는 무당으로 키워 조선 8도에 보낸 8도 무당 설이 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개편에 따라 백무(白武)로 고치었다. 옛 선비들은 지리산에는 청학동과 백학동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리산 남쪽에는 청학동(靑鶴洞)이 있고 북쪽에는 백학동(白鶴洞)이 있다. 함양 천령지에도 백무동은 백무(白霧, 白舞)로 표기하였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흰 안개가 춤을 추는 곳 백무동을 백학동(白鶴洞)이라고 했다. 이 마을은 천왕봉, 장터목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한신계곡, 세석산장으로 가는 길목이다. 첫나들이 폭포, 가내소폭포, 오층 폭포 등 크고 작은 계곡의 소(沼)들이 신비의 장관을 이루며 지금은 등산객이나 관광인 들의 집결지가 되고 있다. 또한 한신계곡은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명승지 72호로 지정 지리산의 3대 계곡으로 불리고 있으며 항상 외래객들로 붐비는 마을이기도 하다. 대부분 음식점과 숙박업을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다.
백무동은 옛날에는 몹시 가난한 마을로 피난민의 이나 무속 신도들이 살고 약초나 캐며 심마니들이 살던 곳이지만, 1960년도에는 지리산 남선도벌 사건 때에는 산판 인부들의 유입으로 온 동네가 북적이기도 했으며, 송알에서 가내소폭포까지 산판도로가 나 나무를 실어나르는 지엠시가 다녔다. 지금은 함양의 관광마을 백무동으로 동서울에서 백무동까지 함양 지리산 고속버스가 하루에 10여 차례 다니는 관광지로 변하였다.
⑥ 의탄리(義灘)
의탄리는 마천 소재지에서 임천강을 따라 내려가면 추성리 칠선계곡으로 들어가고 창원 등 구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고려 시대에는 의탄소(義香所)가 있던 곳인데 1914년 행정구역상 중말(義中)과 평전 말(義坪) 그리고 노늬목(金鷄)마을을 합한 동리이다.
※ 중말 (義仲) 마을은 의탄리의 가운데 마을이라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탄소(義春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탄의 여울 탄 자를 쓰는 것은 여울목이라는 뜻에서 쓴 것으로 추측되며 탄 자(呑)를 쓰기도 한다.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오래된 것 같으나 확인할 수 없고 조선 선조 때 함양박씨가 살았으며 경주정씨가 남원에서 들어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 평정 말 (義坪) 은 의탄의 평평한 그곳에 있다고 해서 이르는 이름이다. 마을 입구 큰 정자나무가 있는 곳을 새 장터라고 부른다. 옛날 하동 나루에서 소금을 사지고 벽소령을 넘어와서 이곳에 오고 오도재를 넘어 함양에서 일용품을 사다가 이곳에서 장을 보게 했다.'라고 한다. 그래서 새 장터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사장 터(射場)가 있었다. 이는 고려 시대의 특수행정기구인 의탄소(義灘所)가 있어 활쏘기 훈련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새별들 가운데 담바위가 있다. 일본 강점기에 마천초등학교가 처음 생길 때 이진우 선생이 논 백 마지기를 기부하여 마천 교육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시었다.
이 덤 바위(德巖)에 선사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성혈이 있다, 이는 자손을 번창케 하는 행위와 별자리를 관측하는 것으로 북두칠성의 별자리 바위구멍과 카시오피아의 형태가 그대로 바위 위에 파 놓았다. 마천면의 선사시대의 유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며 마천 사에서 언급한 돌칼 등 당시의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학술 가치가 높다고 본다. 함양군에서는 이곳에 궁도장을 건립하여 생활체육을 권장하고 있고 궁도장으로 인하여 전국의 궁도인이 지리산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관광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 노뒤목(金鷄) 마을은 지금의 의탄교가 가설되기 전에는 징검다리가 있었다. 냇물을 건너다니는 징검다리 노뒤 의 목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6·25사변 전에는 초가집 몇 채밖에 없었다. 의중 마을에 거주하던 이종식(李鍾植) 씨가 정감록에 있는 금계동이 금태산밑(金台山 下) 현재의 금계마을이라고 단정하고 바위에다 금계동(金鷄洞)이라고 새겨놓고 이곳이 지리산 피난지라고 하였다. 그 후 지리산 공비 소탕 때 추성리와 의탄리 주민 전체를 이 금계마을로 소개시켜서 일시에 이백여 호가 법석거렸다. 그 후 소개민은 복구되었지만, 현재 구십여 호의 마을로 변하였다. 지리산 둘레길이 열리면서 의탄 초등학교가 둘레길 안내센터가 되었고 금계마을 뒷산에는 탐방객을 위한 펜 센 및 민박 시설을 갖춘 관광마을로 변하여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할 수 있는 마을로 외지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다. 옆 산은 마천 오석(烏石) 원석 채취장이 되어 연간 수십억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탄리에는 의탄 북쪽에 감투 바위가 있고 새벌들 가운데 덤바우,의탄 동쪽에 둥둥바우, 뒷편에 명맥이바우, 물방웃골, 쑥밭재, 진등재, 창바우재, 천진폭포, 홍골 등의 지명이 있다.
⑦ 추성리 (秋城里)
추성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으로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의 양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추성(楸城)이라 하였으며 또 박회성(朴回城)이란 성도 있는 곳으로 지리산 하봉 밑에 있다. 또한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칠선계곡으로 들어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추성과 강점 어름 골 그리고 칠성이 마을을 합한 이름이다.
※ 추성(楸城) 마을은 추성(顯星)이라고 하는 길조의 별이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하나는 가래나무가무성하게 우거진 숲이 있고 옛날 가락국 양왕이 체류하면서 성을 쌓아 가래추자처럼 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추성(楸城)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사름재, 쑥밭재, 의 연골, 장구목, 최 많이 굴, 칠성 이골, 등의 지명이 있다.
추성은 추성리 산 93번지에 있는 성지로서 연대는 미상이나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할 때 가락국 양왕이 군마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군마를 훈련하고 피난처로 이용했다고 하며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있고 높이가 10m나 되는 망석이 있다.
천왕봉 고성은 지리산 하봉 아래에 있는데 박회성(朴回城)이라고도 한다. 추성에서 직선거리로 2·3㎞ 위쪽에 있다. 말과 소도 발붙일 수 없을 만큼 험난한 성이다. 군지에는 박회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 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했다는 말이 있으나 지금은 그 성의 흔적만 남아있다. 추성은 1905년부터 1912년까지 국권 회복을 위해 왜놈들과 싸운 석상용 장군이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 가락국 양왕이 체류할 당시 군량미를 쌓아두었던 곳이라고 하는 곳에 몇 집이 살고 있는데 두지터라고 부른다. 지금도 땅을 파면 곡식이 타버린 재가 나온다고 한다. 어름터는 그 당시 얼음을 저장한 곳이라고도 하며 혹은 일찍 결빙되는 곳이라 자연 어름터라 고도한다. 그 외에 말달린 평정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지리산 정상에는 성모상이 있는데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제1 가지 설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근거하여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위숙왕후를 성모 신화 한 것이다. 제2설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기행문에 의한 석가불 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는 설로 승려들에 의해 구전됐다. 제3설은 팔도 무당 설로 법 우화 상의 무당시도설이다. 정설은 지리산 산 신상이라 할 것이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써 신봉해 온 산신(여신)의 우리말 이름이라고 한다.
※ 강점은 강어리점이라고 부른다. 옛날 벽송사를 창건한 벽 송 대사께서 득도하기 전 이곳에서 도사를 만나 십 년간 강어리 (광주리의 사투리)를 만드는 뒷바라지를 하면서 스승에게 도를 배우려 했으나 십 년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어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는 도중 공중에서 강어리를 던지기에 그것을 얻어맞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벽송사를 창건했는데 그래서 강어리점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고 있다. 벽송사는 1520년에 송지엄대사가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벽송암이라고 했으나 불타버리고 그 후 환황지안대사가 모금하여 복구해 놓은 것이 6·25동란 시에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벽송사는 소실 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복구했다. 서 암이라는 암자에 화강암 불상과 석굴을 만들어 놓았다.
※ 옛적에 일곱 명의 선녀들이 목욕하였다는 선녀탕, 옥녀탕이 있다 깨끗한 청정수는 과연 선녀가 목욕한 곳이라 여길 정도며 폭포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의 신비의 장관이라고 한다는 옥류천과 칠선폭포가 모두 이곳에서 떨어진 곳에 있으나 그 밑에 몇 집 사는 마을을 칠선(七仙), 칠성(七星) 이 마을이라고 부른다.
⑦창원리(昌元里)
마천면 의탄리에서 함양으로 오는 중간에 조그마한 분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동리가 창원리이다. 마천면에서 가장 큰 동리의 하나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원정(元井)마을과 창촌(昌村)마을로 구성하였다.
※ 창말 (倉村·昌元)이라고 부르는데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 마천면 내의 세금을 거둔 차나 약초, 곡식 등을 이 마을의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오도재를 넘어서 지게로 져 날랐다고 한다. 조선 인조 때에 김해김씨가 파주에서 들어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예전에는 아래 등 구라고 불렀던 곳이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생겼는데 양편에 계곡이 있다. 마을 입구에 숲이 있는데 이곳을 독무정이라고 한다. 옛날 강 개암 선생께서 혼자 시를 읊으며 노셨다고 하여 독무정(獨舞亭)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 개암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개암 선생의 갓과 친필 문서가 그가 살았던 김해김씨 집에 보관되어 가보로 전해오고 있다.
※ 원정(元井) 마을은 가운데 우물이 있는데 물이 맑고 질이 좋아 약수로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원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마을 중앙에 우물은 있으나 이용하지 않고 수도를 사용한다. 이 마을에는 조선 인조 때 중국의 대 유학자 동종서의 후손이 중국에서 건너와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⑧구양리(九楊里)
예로부터 등구마천이라고 하여 함양에 마천과 지리산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도재 고개를 넘으면 산 중턱에 붙어 있는 마을들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등구(登龜)마을과 양전(楊田)마을 그리고 빈대골(燭洞) 벼락소 마을을 합쳐서 이루어진 동리이다.
※ 양정계 (楊田) 마을이라고 하는 마을은 버드나무가 많아서 이름을 지었다 옛날 개암 선생의 양진재(養眞齋)가 양전마을과 창촌마을 독무정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양진재의 발음이 변하여 양정제라고 하여 양정 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자어로 기록하면서 영전이라고 한 것이다.
※ 빈대 골 (燭洞) 마을은 비어있는 대궐(大關)이라는 이름이 변하여 불렸다고 한다. 구 함양군 지에는 초법(初法)으로 기록되어 있다.
촉 동(獨洞)이란 이름은 마을 뒤 촛대봉이란 산이 솟아있는데 지관들이 조천납촉(朝天納)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빈대 골로 불러오다가 마을학자들이 촉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구사는 오도봉 아래에 있다고 했고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동구사의 산형은 거북과 같으며 절은 그 등에 올라앉아 있으므로 동구사라 했다. 하였고 축대 틈에 깊숙한 구멍이 있어 시냇물이 북으로부터 내려와 그 속으로 흐르는 소리가 골골하였다고 하였다.
가야국이 입성하지 못한 빈 대궐터라고 하는 곳과 일치하며 매우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급 신라의 삼층석탑이 있다. 1980년대에 동구사가 복원되었다.
※ 벼락 소 마을은 촉동마을 미처 못 가서 7·8가구가 마을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다. 옛날 질이 좋은 약수가 나와서 별 약수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약수터도 찾아볼 수 없다. 지관들의 말에 의하면 촛대봉 밑에 오동서봉(梧桐棲鳳)의 명당이 있고 또 그 밑에 별 악수(鷩顎睡)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독수리가 꿩을 찾아 내려오다 졸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별 악수라는 지명이 오랜 세월 흘러오는 동안 벼락쏘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등 구동마을은 양전동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형국이 거북이 기어 올라간 지형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선조 때 달성서씨가 대구에서 와서 살았고 광산김씨가 파주에서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예부터 이 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으며 함양의 민요 가운도 데 「등 구미천 큰아기는 감 깎기로 다 나가고 효리 가성 큰아기는 산수 따기로 다 나간다」라고 하였다. 법화산으로 넘어가는 버망재가 있고 마을 서쪽에 새낙들이 있다.
끝
출처: <지리산마천면사>에서
첫댓글 그동안 마천을 많이도 갔었지만 잘알지도 못했는데 ㅡ칠성대장 덕분에 많은 ㅡ정보와
마천의 역사와 유래 잘알았네 ㅡ감사하고 ㅡ
마천면사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만큼 느낀다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