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선생, 지하에서 통곡하다
2016.7.13(수).03:00경 우연히 TV를 켜보니, EBS(교육방송)에서 주관하는 "고전이야기"라는 프로에서 ‘포은 정몽주와 이방원 그리고 정도전’이라는 제목으로 광운대학교 모 교수가 강의(재방송?)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첫 회 강의는 포은선생에 대한 내용을 위주로 하고, 1주일 후인 다음 회에는 이방원과 정도전에 대한 내용을 강의할 것으로 보였었습니다. 즉 포은선생이야기는 후자에다 초점을 맞추기 위한 전주곡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듣다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 몇 가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강의자는 서두에 포은 정몽주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으며 시골출신이다. 라고 했는데, 강의 내용 중 뒷부분에 거론한 말과 연결시켜보면, 강의자는 평소 서울과 시골을 차별하는 의식을 가진 내면의 소유자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발언은 1)정몽주의 중국과 왜국(일본)에 대한 외교활동에 대하여, 당시의 대다수 관료들은 생명의 위험을 느껴 기피하는 분위기이었기에 어떤 관리는 뇌물을 제공하여서라도 사신으로 가는 것을 은근슬쩍 빠져나갔는데, 강의자께서 정몽주는 책임의식이 강했다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표정이나 여러 가지 언동 등을 감안할 때 전체적인 말의 뉘앙스는 마치 포은선생께서는 남들이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신 우직한 사람의 이미지로 시청자들에게 비추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귀주대첩에서 잘 알려진 서희선생을 고려 제1의 외교관이라 칭하였고, 포은선생은 2등이라고 하였음.
2)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것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살아있는 이방원이 후에 자신에게 불리한 시조 내용을 세상에 들추어 낼 이유가 없으며, 또한 그 이전의 책(강의자가 거론한 책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에 하여가 및 단심가와 동일한 내용의 시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종 때 처음 발간한 포은문집에도 단심가는 게재되어 있지 않는데, 후손인 아들이 아버지가 생전에 지은 시조를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 재차 포은문집을 발간할 때 정몽주의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없는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넣었다고 하였음.
3)정몽주가 죽은 장소는 선죽교(선지교)가 아니다. 라고 하였음
그 이유는 정몽주의 죽은 장소가 그려진 그림은 세종 때 그려진 것과 정조 때의 그려진 삼강행실도가 있는데(방송 중에 그림 2점을 공개), 전자에는 다리(橋:선죽교)가 없고, 후자에만 다리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데, 정몽주는 자신이 살았던 개성에 있는 마을에서 이방원의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하였으며, 고려사에도 정몽주의 선죽교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었다고 한 것은 조선 중기이후로 접어들면서 포은선생의 학통인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사림들이 포은선생을 극도로 신격화(神格化)하면서 없는 것을 조작했으며, 현재의 역사 교과서도 조작된 내용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다리위에 핏자국이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하였음.
4)정몽주가 이방원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은 고려의 사직을 위한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이성계를 추종하는 일파들이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에게 “본 떼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였다고 했으며, 더욱이 정몽주는 시골출신이라 세력이 있는 가문도 아니기 때문에, 죽여 보았자 저항할만한 배경세력이 없어서 이방원 등이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음.
*참고로 강의자는 강의 서두에 성리학의 정의를 “자연과 인간세상의 본성을 밝히는 학문”이라고 하면서도 시청자들에게 성리학의 정의를 말로하면 어려운 것 같으나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예부터 “죄를 지으면 벼락 맞아 죽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말들이 모두 성리학에 기초한 것이라고 했으며, 강의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정몽주라는 호칭을 “포은선생” 또는 “정몽주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시청자들을 의식하여 뒤늦게 그렇게 한듯하고 또한 호칭과 관련하여 자신의 강의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함과 동시에 도덕적 책임을 면하려는 최소한의 껍데기 언어로 보였으며, 포은선생의 생전의 업적 중에서 거론한 것은 과거시험방법 개선, 성균관과 향교 등 교육기관 설치, 의창제도(빈민구제기관)도입, 재정관련 장부제도 개선 등을 나열하였음.
사견(私見)
1)어떤 교수는 인터넷 글에서 세종 때 ‘포은문집’ 발간을 국가에서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문집을 발간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국가에서 허락을 했든 또는 문중에서 자의적으로 문집을 발간했는지는 모르지만, 초창기의 문집에서 단심가가 누락 된 것은 문중에서 편집을 하면서 부주의에 의한 누락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록 세종 때이나 이방원(세조)의 잔존세력들이 금방 소멸되지는 않았기에 조정의 눈치를 살피느라 의도적으로 제외시켰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강의자께서 그 이전의 어느 책에, 하여가와 단심가가 이미 수록되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는 차후에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여 짐.
2)그림속의 선죽교 다리는 세종 때에 그려진 그림에는 없었으나 후대에 와서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그려진 그림에는 존재하는데, 선죽교에서의 죽음은 후대에 와서 학자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강의내용과 관련하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건국초기와 비교해볼 때 엄정했던 정치적인 분위기는 다소 완화 되었을 것이나 세종 때라고 하여도 집권세력인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기에, 포은선생의 업적과 위상을 의도적으로 오히려 축소시켰을 가능성이 더 농후하며, 여기에 더하여 조정에서 포은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함으로써 자신들의 관대함을 대외에 과시하는 동시에 한편은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의도(자신들이 고려를 배신하였기에, 자신들이 세운 조선도 다른 사람들이 배신할 수도 있기에, 절의의 상징인 포은 선생을 추앙함으로써 충성과 절의를 최고의 가치이념으로 부각시킴)로도 보여 짐. 고려의 역사를 수록한 책인 고려사 편찬 역시, 세종 때 시작하여 문종 때 완성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강자인 조정의 뜻이 우위를 점했을 가능성이 농후함. 그리고 삼강행실도가 만들어진 때는 개혁군주로 유명한 정조 때이며, 더군다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정직 즉 신독(愼獨)을 목숨보다도 더 중히 여겼던 것이 선비나 학문을 중시했던 일부관료들인데 그들이 평생 닦아온 학문적 양심을 속이고, 사실을 조작하여 포은 선생을 신격화했다는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고, 오히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세상이 다소 느슨해지자 진실한 사실을 밝히려는 회귀현상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으로도 볼 수 있음.
3)강의자는 포은선생의 죽음을 고려에 대한 충성과 절의로 보지 않고, 이성계 일파와의 정치적인 의견이 맞지 않는 사사로운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포은선생의 대의명분을 축소시키고 그리고 폄하하려는 소위 가시 돋친 말이며, 또한 포은선생께서 생전에 정도전의 출신성분을 “아전의 집안”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심리적인 역공격의 일환으로써, 강의자는 포은선생을 가리켜 시골 출신으로서 변변치 못한 가문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고 소설을 쓰고 있는데, 그분께서는 포은선생의 직계 또는 가까운 방계선조께서 고려 말과 조선 초에 3대에 걸쳐 판서를 지내신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4)강의자는 또한 정도전의 묘소는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정몽주의 산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으며, 왕릉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하였고 또한 묘소 옆에는 서원도 존재하는데 서원은 그 곳뿐만 아니라 영천에도 있고, 개성에도 있다고 말한 후 그것은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士林)들이 포은선생을 신(神)처럼 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음. 성리학에서는 왕권신수설 즉, 임금은 하늘이 낸다고 했으며 또한 임금을 천자(天子)라고도 호칭하였는데, 중국의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황제처럼 군림하면서도 자신의 호칭을 줄곧 “승상”이라고 하였고, 우리나라 역사의 경우에도 임금이 나이가 어리면 설령 수렴첨정을 할지라도 왕통은 그대로 계승되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며 또한 ‘군사부일체’라고 하여 임금과 스승 그리고 아버지를 하나의 맥락으로 보는 것이 성리학의 근간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입각한다면, 당시의 조선건국을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부지야, 오늘부터 내가 아부지 할 테니, 아부지 니가 내 아들해라” 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런 아들(정도전 등)에게 산소를 만들어 줄 선비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 역사는 왜곡되었다고 하며, 그 왜곡이란 말을 이유로 다시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통탄할 일이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무관(군인)에 의해 세워진 조선의 건국은 개혁이고, 인명살상 없이 군인들에 의해 세워진 제3공화국은 구테타에 의한 독재라고 그들은 말하니, 모순도 이런 모순은 없을 것이다. 그 내면에는 특정지방을 고립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음이 불을 보듯 뻔한데, 한때는 그들에게는 가시와도 같은 퇴계선생이 눈에 거슬렸는지, 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진 1000원짜리 지폐를 없애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1000원짜리가 이미 국민들의 경제적인 실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감자를 먹어보지도 못했던 그들이다. 선죽교의 핏자국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굳이 말한다면, 단국신화도 역사책에서 제외시켜야 될 것이며, 소위 ‘해동6용’이라고 호칭되는 태조 이성계의 윗대 6대조의 업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야 말로 정권에 아부한 진정한 역사의 왜곡임을 그들은 알고 있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최근에 재차 연속하여 제작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 인터넷 등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죄(罪) 중에서도 입으로 지은 죄가 가장 크다고 했다. 포은선생께서 앉아 계시는 정자의 지붕에 언제부터인가 비가 새고 있는데, 후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량해전이란 영화에서 자신의 선조를 명예훼손 했다며 해당 영화감독을 형법상의 ‘사자명예훼손죄’에 의거 고소한 후손도 있는데, 지금의 우리는 무식한 탓인가, 관심이 없는 탓인가, 아니면 비겁해서인가,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잘못된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이며, 그에 대한 사실관계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그리고 관련입증자료를 구비하여 주인과 겸상하려는 도둑이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