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각본 제작 영화 ‘해무’
내가 본 한국 영화 중에 단연 최고의 영화다.
60 년 이상 살아온 내 삶은 늘 바다와 같이 있었다. 그래서 해무는 마치 내 곁에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다.
봉준호가 감독이 아닌, 작가로서 참여한 우수한 영화다.
김윤석의 중후하고 멋있는 연기가 살아있는 영화다.
바다는 미지의 세계를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역사에서 항해로 새로운 장소가 많이 발견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말이다.
이는 영화 <해무>에서도 마찬가지의 이미지로 작용하면서,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때는 90년대 후반, 여수 바다를 호령하던 어선들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다.
경기침체와 더불어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뱃사람들은 하나 둘씩 일자리를 잃어간다.
이러한 여파는 <해무>의 주인공들이 타는 낡은 어선도 비켜갈 수 없다. 혹독한 현실에 배를 팔아치우려는 선주의 독촉이 이어지고, 선장 김윤석이 이끄는 '전진호'마저도 감척의 대상이 될 상황에 처한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철주는 밀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삶의 터전이자 선원들의 생활이 달린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배를 지켜내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을 주선한 쪽에서 밀수가 아닌 밀항을 맡기게 되고, 차마 내키지 않지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선원들도 동참하게 된다.
법에 어긋나고 위험한 일이기에 두렵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선장을 포함한 여섯명의 선원들이 나아간 바다에서 배에 가득 태운 것은 고기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중국에서 넘어온 밀항자들의 수는 예상보다도 훨씬 많았고, 그 와중에 마주친 해무가 전진호를 감싸고 그 앞에 놓인 바다를 뒤덮는다.
안개에 가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뱃길처럼,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모른 채로 그들은 천천히 먼 바다로 나아간다.
영화의 시작에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모두 만선의 꿈으로 한껏 부풀어 있다.
선원들은 어촌 마을의 소박한 일상에 만족하며 큰 욕심없이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받아든 불법 밀항 제의는 마치 하나의 작은 기회처럼 느껴졌고, 그저 조금 더 큰 돈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항하는 배에 올라탈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이 밀항을 맡은 순간부터 바다는 더욱 거칠고 무서운 공간으로 변한다.
잦은 조업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평소 친분이 있던 해경 간부는 감시자가 되어 범죄가 발각되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신분도 모르는 상태로 배에 태운 밀항자들은 낯선 존재로서 '언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 와중에 맞닥뜨린 바다의 짙은 안개는 시야를 가리며 더욱 숨막히는 분위기를 만든다. 이 다양하고도 많은 요소들이 퍼즐처럼 차곡차곡 엮이면서 숨통을 조인다.
파도가 출렁이는 망망대해에서 자욱한 안개를 만난 전진호.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있지만 정작 발 디딜 곳은 한정되어 있고, 고립된 상태에서 선원들은 자신의 욕망을 고스란히 마주하게 된다.
여자를 품에 안아보고픈 욕구에 눈이 먼 이희준과 유승목, 배를 구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김윤석, 선장을 도우며 임무 완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갑판김상호. 이들이 드러내는 냉혹한 태도는 잔인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구하고자 발버둥치는 기관장 문성근과 박유천의 모습과 대비된다.
막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욕망을 무기처럼 꺼내들자 마침내 피할 수 없이 서로 충돌한다. 누구보다도 끈끈한 유대감을 보이던 선원들은 다른 욕구를 충족하고자 서로 뭉쳤다가 또 등을 돌린다. 결국 만선이 되어 뭍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들의 꿈은 망가진 상태로 처참하게 침몰한다.
2001년에 일어난 ‘태창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바다는 솔직하다. 바다의 욕망은 꾸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