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놔!
심하게 몸부림치고 반항하지만 정현을 마치 범죄자 다루듯 하는 형사들, 발버둥치는 정현을 개 끌듯 질질 끌고 로비 밖으로 나간다.
씬 47. 경찰서 앞.
건물 앞으로 택시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멈추며 서둘러 차 밖으로 뛰어내리는 윤희, 경찰서 안으로 정신없이 달려 들어간다.
씬 48. 경찰서 수사과 내 유치장 안.
화면 가득, 좁은 창살 안을 성마르게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정현, 초조한 듯 고개 돌려 창살 밖을 보면 잡혀 온 문신투성이의 깡패들로 바쁘게 돌아가는 수사실 전경과 잠시 후, 문을 열고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윤희의 모습, 낯선 환경에 잠시 주춤 서면 입구의 형사 하나가 윤희를 보며 “어떻게 오셨어요?” 묻는데.
정현: (창살을 움켜잡고) 윤희야!
소리에 정현을 휙! 돌아보는 윤희, 표정이 창백하게 질리며 형사의 물음엔 대꾸도 없이 정현을 향해 뛰다시피 걸어오는 뒤로, “이봐요, 아가씨!” 하며 벌떡 일어나는 입구의 형사를 정현을 끌고 온 형사 1이 얼른 제지하는 모습 등이 보여진다.
유치장 앞으로 곧장 걸어와 서는 윤희를 보며 창살 사이로 손을 뻗는 정현, 윤희의 손을 끌어 잡으며.
정현: 미안해. 많이 놀랬지.
윤희: 왜 자기만 일방적으로 갇혀 있어야 해? 그 사람이 우리한테 한 짓은 말 안 했어?
정현: 소용없어. 법이 걸릴만한 짓은 없었으니까.
윤희: 왜 없어? 계속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돌까지 던졌는데.
정현: 글쎄, 그걸 증명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없잖아.
윤희: (침착하려 애쓰며)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정현: 합의 안 해주면 구속이야.
윤희: (놀라) 뭐라구?
정현: 아무래도 그 자식한테 잘못 휘말린 것 같다. 뭔가 계획적인 느낌이 들어.
윤희: 그게 무슨 소리야?
정현: 생각해 봤는데 그 자식, 내가 때릴 땐 반항도 않고 맞더니 바로 고발한걸 보면, 고의적으로 맞은 게 틀림없어. 것도 사람 많은 장소를 골라서 말야.
윤희: 뭐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이 얻는 게 뭔데?
정현: 모르지. 돈을 노리는 건지 뭔지, 암튼 그 자식이 진단서 떼 오면 만나게 해준 댔으니까 그땐 알겠지.
윤희: 그 사람, 어느 병원으로 갔데? 내가 만나서 얘기해 볼게. (하자마자)
정현: (빽!) 안 돼!
윤희: (깜짝 놀라 보고)
수사실 내의 형사들, 일제히 두 사람을 돌아본다.
정현: (목소리 낮추고) 잘 들어, 윤희야. 너는 그 자식 가까이도 가지마. 혹시 그 자식이 이 일을 빌미로 만나자 그래도 절대 만나선 안 돼. 알겠지.
윤희: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왜?
정현: 그냥 내가 시키는 데로 해. 여기서 나가면 바로 호텔로 가서 기다려. 전화할게.
尹희
씬 51. 병원 건물 앞/택시 안.
병원의 현관 앞으로 차를 갖다 대는.
운전수: 여기가 마지막 병원 이예요?
하며 뒷좌석을 돌아보면 이미 차 밖으로 내려 선 윤희, 병원 현관을 향해 서둘러 걸어가고 있다.
씬 52. 병원 1층 접수대.
안을 두르며 접수대를 향해 급히 걸어오는 윤희, 접수대의 간호사를 보며.
윤희: 혹시 여기, 폭행으로 진단서 끊으러 온 남자 한 사람 없었나요?
간호원: 폭행이요……. 아! 뭐, 경찰서에 넣을 진단서 끊어 간 그 남자 분이요?
윤희: (놀라) 갔어요?
간호원: 한, 한 시간쯤 됐을 걸요?
윤희: (기운이 쭉 빠지지만 곧) 진단 결과가 얼마나 나왔어요?
간호원: 아마 8주정도 나왔을 거예요.
윤희: …….
씬 53. 호텔 복도.
복도를 돌아 탈진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윤희, 룸을 향해 걸어가 문 앞에 서며 핸드백에서 키를 꺼내 문을 돌려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씬 54. 호텔 룸.
문을 닫고 방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윤희, 침대 위로 키를 던지듯 놓고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다가 문득 탁자의 전화기를 돌아보며 다시 벌떡 일어나 탁자로 걸어간다.
수화기 들어 프런트 호출을 한 뒤.
윤희: 저기 혹시, 1224호 전화 온 거 없었어요?
하는 윤희의 뒤로 갑자기 욕실 쪽의 벽면 모서리에서부터 소리도 없이 쓰윽 나타나는 M!
이마와 한 손에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한 발짝 다가서지만 윤희,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윤희: (듣고 더욱 힘 빠진 듯) 네에……. 알겠어요.
하며 낙담한 얼굴로 딸칵, 수화기를 내리는 윤희,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재킷을 벗으며 돌아서다가 자신의 바로 뒤에 우뚝 서 있는 M의 새카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힌다!
허억-!
뒤로 나자빠질 듯 놀라는 윤희, 정신없이 뒷걸음질 치며 비명을 지르려는데 그보다 더 빨리 성큼 앞으로 다가서는 M, 한 손을 휙 들어 비명을 막듯 윤희의 목을 콱!
움켜쥔다.
윤희: ! (숨을 멈추며 온 몸이 공포로 얼어붙는데)
얼굴이 맞닿은 듯 한 치의 틈도 없이 윤희의 몸으로 바싹 몸을 붙이며 서는 M, 윤희의 눈을 들여다보며 쉬이…….
소리는 없이 입술만 오므려 경고하면.
윤희: (침착하게 행동하려 애쓰며) 여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엠: (속삭이듯 나지막이) 보고 싶어 했잖아.
하며 시선을 떨어뜨려 움켜 쥔 윤희의 하얀 목을 내려다보는 M,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엄지손가락으로 윤희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소름이 오싹 끼쳐 그대로 몸이 굳는 윤희, 마른침을 삼키며.
윤희: 이러지 말아요. 이러지 말고 우리,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네?
하는 말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윤희의 목을 움켜잡은 채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을 감는 M, 들썩이는 윤희의 숨결에 코를 들이대며 마치 그녀의 냄새를 맡듯 천천히,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윤희: ……. (공포스럽고 불쾌한 열기에 휩싸이며)
눈동자를 굴려 급하게 주변을 두르는 윤희, 손을 뒤로 뻗어 탁자 위를 급히 더듬다가 어느 순간 스탠드 옆에 놓여진 유리 재떨이가 손끝에 와 닿는다.
재빨리 거머쥐며 힐끗 M을 보면 어느 사이엔가 눈을 뜨고 윤희를 빤히 지켜보고 있는 M. 움찔!
놀라 딱딱하게 얼어붙는 윤희를 유리알처럼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꿰뚫어 보듯 윤희를 보며.
엠: (나지막이) 서툰 짓은 않는 게 좋아.
윤희: (힘겹게 노려보며) 놔 줘요. 안 그러면 소리치겠어요.
엠: 맘대로. 하지만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걸 본 사람은 없어. 당장 니 숨통을 끊어 도 아무도 모를걸?
윤희: (하얗게 질리며)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씬 55. 경찰서 수사과 안.
전화 받고 있는 형사 1(정현을 끌고 온), 유치장 안의, 무릎을 세워 안고 고개를 푹 떨군 채 꼼짝도 않고 처박힌 정현을 빤히 바라보며.
형사 1: 그래요? 그러죠, 그럼.
끊고 유치장 앞으로 걸어가는 형사, 털컹!
유치장의 문을 열면 번쩍 고개 들어 형사를 돌아보는 정현.
형사 1: 나와요. 고소 취하됐어요.
정현: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뭇머뭇 일어나며) 어떻게요?
형사 1: 방금 맞은 사람이 전화했었어요. 합의했다고.
정현: ?
씬 56. 경찰서 내 복도.
문이 열리며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오는 정현, 밖을 둘러보면 복도의 대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윤희.
정현: (재빨리 다가가며) 어떻게 된 거야?
윤희: 가면서 얘기해. (돌아서면)
정현: (얼른 윤희의 팔을 잡고 돌려세우며) 어떻게 된 거냐니까?
윤희: (차분하게 보며) 호텔 방으로 그 사람이 전화가 왔었어.
정현: 너…….
윤희: 커피숍에서 만나 합의 본 거야.
정현: 너 왜 약속 안 지켜? 너 혼자는 절대 그 놈, 만나지 말랬지.
윤희: (벌컥) 선택할 여지가 없었어! (해놓고 당황하며 얼버무리듯) 어쨌든 그래서 자기가 나왔잖아.
정현: (윤희를 살피듯 훑어보며) 그 자식이……. 무슨 이상한 짓 안 했니? 아무 일 없었어?
윤희: (표정 흔들리지만) 없으니까 이렇게 왔지.
정현: 정말이야?
윤희: 정말이야.
정현: (표정 굳으며) 합의 조건이 뭔데.
윤희: (돌아서며) 나가서 얘기해.
씬 57. 경찰서 밖 거리/오후.
황당하고 어이없는 얼굴로 돌아보며.
정현: 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윤희: ……. (잠자코 보면)
정현: 우리랑 같이, 여행을 해?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윤희: 화 낼 생각 하지 마. 그거 아니면 합의 못해 준댔어.
정현: 안 돼. 그런 조건은 못 받아들여.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야. 아니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어딨어!
윤희: 말이 되든 안 되든, 받아 들여야 해. 이미 합의 끝냈어.
정현: 난 못해. 그런 놈과 여행하느니 차라리 감방 가서 형을 사는 게 나아.
윤희: 진단서 결과가 8주면 최소한 6개월 이상은 감옥살이래! 일주일이랑 6개월이랑 뭐가 더 쉬워?
정현: …….
씬 58. 레스토랑 안/저녁.
누군가의 시선으로, 복잡한 미로처럼 얽힌 구조물과 인테리어 된 나무들 사이를 따라 실내의 테이블들을 훑으며 돌아가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테이블 의자에 떡 하니 앉아있는 M, 그의 시선이 다가오는 누군가를 조용히 지켜보며 바로 앞에서 멈추면 화면, 다가 선 누군가의 시선으로 팬 한다.
보면, 불쾌해 미치겠는 얼굴로 서 있는 정현과 불안한 눈길로 정현을 보는 윤희, M을 돌아보며.
윤희: 좀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1
하는 순간, M의 맞은 편 의자를 거칠게 끌어내고 털썩 앉는 정현.
윤희: ! (놀라서 어정쩡 그 옆으로 앉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정현을 지켜보던 M, 윤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엠: 합의 한 건가?
윤희: (조심스레 정현의 눈치를 살피며) 물론 이예요.
하면 다시 정현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M, 보다가 테이블 위로 불쑥 손을 내민다.
정현: ……. (입 꾹 닫은 채 뭐냔 듯 M을 쏘아보면)
엠: 인연인데 악수 한번 하지.
하는데 보란 듯,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척척 찔러 넣는 정현, M을 똑바로 노려본다.
윤희: !
엠: …….
풀썩 웃으며 손을 거두는 M의 위로 쾅쾅!
터져 나오는 메탈 음악.
씬 59. 나이트클럽.
판을 돌리는 무대의 디제이, 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과 테이블 사이로 바쁘게 오가는 종업원들을 따라 화면이 이동하면 구석 테이블에 맥주를 시켜놓고 M과 마주 앉아있는 정현과 윤희. 주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팽팽하게 긴장된 침묵이 감돌며 외면하듯 무대만 보고 있는 정현과 정현만을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는 M.
둘 사이에서 윤희, 곤혹스런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데 음악이 메탈에서 블루스로 바뀌면 느닷없이 정현의 어깨를 툭! 치는 M.
번쩍 고개 돌리는 정현, M을 매섭게 노려보며.
정현: 뭡니까.
엠: 춤 춰.
정현: 뭐요?
엠: 춤추라고. 둘이 추는 거 보고 싶어.
하면 정현의 표정, 황당하게 일그러지고 참으란 듯 얼른 정현의 팔을 잡는 윤희.
정현: (가까스로 참고) 왜, 아예 스트립쇼를 하라 그러지. (하며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엠: (웃으며) 그럼 더 좋고.
소리에 쾅! 잔을 탁자에 놓는 정현, M을 죽일 듯이 보며.
정현: 당신, 똑 바로 들어. 같이 다니잔 약속했지, 노리개 감이 된다고 하진 않았어.
하자마자 테이블을 퍽!
걷어차며 일어나는 정현, 주먹을 쥔 채 휙 돌아서 화장실 쪽으로 가면 다급하게 따라 일어나는 윤희, 정현의 뒤를 쫓으려는데 순간 윤희의 팔을 탁! 잡는 M.
윤희: ? (M을 본다)
씬 60. 화장실.
문을 쾅! 차며 들어오는 정현.
안에서 소변을 보고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화들짝 놀라 정현을 돌아보지만 그따위 뵈지도 않고, 화풀이 대상을 찾듯 씩씩거리며 안을 휘둘러보는 정현, 곧장 구석의 휴지통으로 걸어가더니 미친 듯이 걷어 차 대면 젊은 남자, 겁에 질린 얼굴로 얼른 바지 추스르며 슬며시 뛰쳐나가고.
정현: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바닥으로 쓰러져 뒹구는 휴지통을 지치도록 걷어차 댄다.
씬 61. 홀.
소리: (윤희) 저는……. 춤을 잘 못 추는데요.
흐르는 블루스 음악의 무대 위로 M의 손에 끌리듯 나오는 윤희,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아랑곳없이 윤희를 당겨 품속으로 안는 M, 윤희와 시선을 맞추며 윤희의 한 손을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리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는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윤희, 당황과 부끄러움이 미묘하게 교차하며 몸을 뒤로 빼려는데.
엠: 가만. 가만히…….
하며 윤희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안는 M, 윤희를 리드하듯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점차 둘의 몸이 부딪히며 시선 둘 곳을 모르는 윤희, 힐끗 홀을 둘러보지만 정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느릿느릿 윤희를 리드해 가는 M, 얼굴을 부드럽게 윤희의 머리카락으로 묻는데 갑자기 그의 뒤에서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며.
소리: 뭐 하는 짓이야!
하며 M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돌려세우는 정현.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M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면 그대로 딱 버티고 선 채 정현을 노려보는 M.
윤희: (당황해서 얼른 정현을 불들이며) 왜 이래, 하지 마. (하며 M을 보면)
M의 눈빛, 어딘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몹시 위험스럽고 음습한 눈빛으로 변해가며 정현을 가만히 지켜본다.
정현, 윤희: ……. (섬뜩함을 느끼며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다)
씬 62. 도로/달리는 정현의 차 안.
운전석의 정현과 조수석의 윤희, 긴장으로 굳은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딱 닫고 앞만 보고 있고 뒷좌석의 M, 말없이 두 사람만 지켜본다.
씬 63. 호텔 로비.
굳은 표정들로 로비의 문을 밀고 들어오는 정현과 윤희.
보호하듯 윤희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걷는 정현과 그 뒤를 잠자코 따라 걷는 M.
씬 64. 엘리베이터 안.
뻣뻣하게 선 정현과 윤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 뒤에 묵묵히 서 있는 M, 시선이 둘의 하얀 뒷덜미에 고정된 채 천천히 숨을 내쉬다가 얼핏 시선 들어 승강기의 올라가는 층수 버튼을 보더니 다시 쓰윽 시선을 내리는 M, 둘의 뒷목덜미에 시선이 꽂히며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갑자기 어떤 욕구가 치미는 듯,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소리에 문득 긴장하는 정현과 윤희, 점점 거칠어지는 M의 숨소리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지만 돌아볼 엄두는 나지 않고…….
어떤 욕구에 표정이 점점 흥분으로 고조되는 M, 터질 것 같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억제하듯 흥분으로 떨리는 두 손을 재빨리 재킷 주머니로 쑥 집어넣고 질끈 눈을 감는다.
씬 65. 정현 방.
들어와 세차게 쾅! 문을 닫는 정현과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윤희.
윤희: (목소리를 낮추고 급히 옆방을 손짓하며) 왜 이래, 들어!
씬 66. M의 방.
딸칵, 스탠드의 줄을 당기면 켜지는 스탠드의 불빛.
줄을 놓고 침대 가로 우뚝 서는 M, 고개 돌려 천천히 방안을 둘러본다.
씬 67. 정현 룸.
터지려는 화를 누르며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이는.
정현: 도망가자, 우리.
윤희: 뭐라고?
정현: 그냥 도망가자고. 도저히 안 되겠어. 이러다 또 사고 칠 것 같아.
윤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일주일간 그냥 눈감고 귀 막자 그랬잖아.
정현: 저 자식 하는 거 봤잖아. 눈빛이 정상이 아냐. 일주일간 아무 일 없이 그냥 무사히 지날 것 같아?
윤희: 우리만 조심하면 돼. 어쨌든 우린 둘이고 저 사람은 혼자니까.
정현: (답답한 듯 낮은 외침으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우린 정상이고 저 자식은 정신병잔데!
하는데 쾅쾅 쾅쾅쾅! 부서져라 두드리는 문소리.
씬 68. 정현의 방문 밖.
화면 가득, 쾅쾅 쾅쾅쾅! 두들기는 주먹.
벌컥 문이 열리며 정현이 성난 얼굴로 쏘아보며.
정현: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양주병을 들어 보이며 씩 웃는 M.
엠: 잠이 안 와. 얘기나 하지.
M, 뭐라 할 틈도 없이 정현을 밀치고 들어가려면.
정현: (M을 거칠게 확 떠밀며) 이것 봐요! (하는데)
안에서 정현을 밀치며 급히 튀어나오는 윤희, 애써 우호적인 미소로.
윤희: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씬 69. 정현의 방.
소리: (M) 안 들 텐가?
화면 가득, 탁자에 놓인 커다란 물 잔에 철철 넘치도록 가득 따라지는 독주.
화면 빠지면, 룸의 탁자에 앉은 정현과 윤희.
긴장한 얼굴로 M을 지켜보면 순식간에 반이나 비워진 술병을 자신의 앞으로 내려놓고 묻듯 정현을 올려다보는 M.
정현: (퉁명스럽게 또박또박) 생각 없습니다.
엠: 그래?
하며 잔을 들어올리는 M, 정현을 빤히 보며 천천히 꿀꺽꿀꺽 말끔하게 잔을 비워낸다.
정현, 윤희: ! (질려서 보는데)
M의 모습, 한 점 흐트러짐이 없고 시선을 여전히 정현에게만 못 박은 채 술병을 들어 연거푸 넘치도록 잔에 가득 붓는 M, 거의 바닥을 드러낸 술병을 놓고 다시 천천히 쉬지 않고 술을 들이키며 잔을 비워간다.
지켜보며 불안감에 휩싸이는 윤희와 그깟 일쯤으로 기죽지 않겠단 듯 오기로 똘똘 뭉쳐진 표정의 정현, M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정현: 무슨 말이든 빨리 끝내죠. 피곤해서 자야 하니까.
들으며 다 비워진 잔을 천천히 입에서 떼 내는 M, 손안에서 유리잔을 빙글빙글 굴리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엠: 잠을 잘 수 없다는 게 어떤 건지……. 너, 알아?
하며 정현을 빤히 지켜보면 당장이라도 집어던질 듯 아슬아슬하게 보여지는지 M의 손에서 느릿느릿 굴러가는 유리잔에 잔뜩 신경이 쓰이는 정현과 윤희, 경계하듯 뚫어지게 지켜보며.
정현: (딱딱한 목소리로) 관심 없음다.
엠: (무시하고) 몇 년간. 단 일초도 편하게 잘 수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아냐구.
정현: (표정 일그러지며 고집스럽게) 알고 싶지 않슴다.
윤희: ……. (바짝 긴장해서)
서로를 노려보듯 보고 있는 정현과 M과 M의 손에서 굴러가는 유리잔을 두려운 듯 번갈아 돌아보는 윤희, 분위기를 바꿀 듯 뭔가 말을 하려지만 쉽사리 입을 못 열고 망설이는데 일순 입술을 비틀어 올리듯 씩 미소 짓는 M, 정현을 응시하는 눈빛이 싸늘하게 굳으며.
엠: 알게 될 거야.
정현: ?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M을 헤아리듯 살펴보면)
딱! 하고 불이 꺼지듯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며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는 M, 유리잔을 탁자위로 탁, 내려놓으며.
엠: 내일보지. (일어나 문으로 걸어간다)
씬 70. 호텔 전경/새벽.
깊은 밤의 고요와 정적 속에 우뚝 서 있는 호텔 건물, 호텔 이름의 네온사인만 켜져 있을 뿐 모두 잠이 든 듯 룸의 불들이 모두 꺼져있다.
씬 71. 정현의 방.
화면 가득, 침대 옆 탁자의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는데서 화면이 팬 하면 어둠 속에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는 윤희와 갈아입은 옷가지를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는 정현의 모습.
씬 72. 복도.
굳게 닫힌 객실 문들뿐 텅 빈 복도.
잠시 후, 객실의 문 하나가 조용히 열리며 가방을 들고 조심스럽게 나오는 정현과 윤희, 빈 복도를 두르며 조심조심 객실의 문을 닫으면 딸칵!
경첩이 닫히는 소리.
긴장으로 숨을 죽이는 두 사람, 기척을 살피듯 잠시 움직이지 않다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걸 확인하고는 돌아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는데 M의 방 앞을 스치는 듯 객실 문 하나를 뚫어지게 지켜보며 조마조마한 표정들로 소리 없이 방 앞을 스치는데 순간, 발이 겹질려 바닥으로 어이없게 쿵!
넘어지는 윤희.
정현, 윤희: ! (경악해서 동시에 휙! M의 방문을 돌아보면)
아무런 기척 없이 잠잠하지만 윤희를 돌아보며 그대로 가만있으란 손짓을 하는 정현, 천천히 방문으로 다가가 안의 소리를 들으려는 듯 M의 객실 문에 바짝 귀를 갖다 대면.
씬 73. M의 방.
화면 가득, 스탠드 불 켜진 침대에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M의 뒷모습.
둥글게 웅크린 자세로 이불도 덮지 않고 잠이 든 듯 뒷모습에서 가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다.
씬 74. 엘리베이터 앞.
승강기의 버튼을 초조하게 눌러대는 정현과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복도 쪽만 돌아보는.
윤희: (낮은 소리) 혹시 들킨 거 아닐까?
정현: 아닐 거야. 그랬으면 나왔겠지.
하는데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정현, 윤희를 안고 소리 없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면.
씬 75. M의 방.
화면 가득, 침대에 누워 있는 M의 뒷모습과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숨소리 위로 엘리베이터의 둔중한 기계음이 들려지며 카메라, 그의 몸을 더듬어 오르듯 타고 넘으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는 M,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는다.
씬 76. 로비.
열려진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뛰듯 급하게 나오는 정현과 윤희, 프론트로 걸어가며.
정현: (윤희에게 차 키를 주며) 먼저 가서 시동 걸어 놔.
윤희: (받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빨리 나와?
정현: 알았어.
하면 윤희는 현관문으로 향하고 빠르게 프론트로 걸어가는 정현, 프론트의 남자에게 호텔 키와 함께 포켓에서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 함께 건네며.
정현: 저기, 저희랑 같이 온 남자 기억하시죠?
남자: 1225호 말씀이십니까?
정현: 예. 그 사람이 아침에 오면 이걸 좀 전해 주세요. 돈인데, 주면 알 거예요.
씬 77. M의 방.
치익!
불꽃을 일구며 타오르는 성냥 알. 화면 빠지면, 일어나 침대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M,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타오르는 성냥 알을 손에 든 채 물끄러미 응시한다.
씬 78. 국도/정현의 차.
아직 캄캄한 새벽.
멀리서 혼자 불을 밝히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정현의 차.
화면을 스쳐 지나면.
<차 안>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로 연신 뒤를 돌아보는.
윤희: 꼭 금방이라도 쫓아 올 거 같애.
정현: 글쎄 안 와. 안 올 거야. 우리, 많이 왔어.
하지만 표정에서 찝찝함을 떨치지 못하는 윤희, 걱정스럽게 정현을 돌아보며.
윤희: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정현: 아니면, 그런 미친놈이랑 계속 여행 할 자신 있어?
윤희: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데, 지켜야 했던 거 아냐?
정현: 있는 돈 다 털어서 줬잖아. 그 정도 보상했으면 충분하고도 남아.
윤희: 문제는,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 주느냐야.
정현: 안 해도 할 수 없어. 우린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으니까.
윤희: (한숨)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하지? 뭔가 찝찝해.
정현: 됐어, 그만 생각해. 자꾸 생각해 봤자. (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휘둥그래지며) 뭐야, 또!
소리에 얼른 정현의 시선을 따라 앞을 돌아보는 윤희.
보면, 차의 보닛에서부터 뜨거운 김이 풀풀 솟아나와 휘날리고 있다.
윤희: (깜짝 놀라) 저게 무슨 연기야?
정현: 젠장!
하며 도로의 갓길로 급히 차를 세우는 정현, 보닛의 열림 레버를 당기고 밖으로 뛰어 나가며.
정현: 엊저녁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하며 차의 보닛을 들어 올리면 안에서 펄펄 김이 솟구쳐 오르며 뭔가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재빨리 따라 내려 정현의 옆으로 서는 윤희, 같이 안을 들여다보며.
윤희: (덜컥 겁에 질려) 차가 왜 이래? 어디가 고장 난 거야?
정현: (몸을 숙여 다급하게 이쪽저쪽 살펴보다가) 몰라. 모르겠어. 엔진 아니면 팬벨트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멀리서 달려오는 차의 엔진음 소리 들린다.
퍼뜩 긴장으로 굳는 두 사람, 소리가나는 방향을 돌아보면 하이 빔을 켠 차 하나가 정현들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다.
윤희: (파랗게 질리며) 설마…….
하는 윤희를 다급하게 자신의 뒤로 세우는 정현, 잔뜩 긴장해서 보면 달려와 쌩하니 스쳐 지나는 하이 빔 차, 평범한 봉고다.
씬 79. 작은 마을 입구.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멀리서 레커차에 매달려 견인돼 오는 정현의 차.
마을 입구의 허름한 정비소로 들어가면.
씬 80. 정비소 안.
소리: (남자) 누가 장난을 친 거 같은데요?
화면 가득, 열려진 차의 보닛에서 화면이 옆으로 팬 하면 차 옆에 서 있는 정현과 윤희, 표정이 의아하게 변하며.
정현: 장난을 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하면 차안을 들여다보던 30대의 정비공 남자, 상체를 일으키며.
정비공: 보세요. 엔진에 연결되는 선들이 칼로 자른 것처럼 잘렸잖아요.
정현: ! (표정 일그러지며 얼른 윤희를 돌아보면)
하얗게 얼어붙어 선 윤희, 얼빠진 표정으로 정현을 보고 있다.
두 사람, 뭔가 짐작이 가지만 차마 말은 못하고 멍하니 서로를 보는 위로.
소리: (정비공) 어쨌든 고치려면 두 시간은 걸리겠어요?
소리에 언뜻 정비공을 돌아보는.
정현: 그렇게 오래 걸려요?
정비공: (보닛의 뚜껑을 닫고 헝겊으로 손에 묻은 기름을 닦으며) 차마다 부속을 다 갖다놓진 않거든요. 이 차에 맞는 걸로 갈려면 옆 동네까지 갔다 와야 해요.
씬 81. 식당.
(탁자에 해장국을 하나씩 앞에 두고 앉은 정현과 윤희, 숟가락으로 안을 휘적이기만 하며 멍하니 앉아있다)
윤희: 끝날 것 같지가 않아. (숟가락을 놓으
있다.
만택의 어색한 춤동작, 자꾸만 혼자 앉은 라라에게로 시선이 간다.
사장은 곁에 있는 라라를 계속해서 꾸짖고 있는 모습이다.
갑자기 마샤의 손을 잡고 사장에게 다가가는 만택, 보란 듯이 막춤을 춰댄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장.
비틀대며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히다, 결국 쓰러지고 마는 만택.
갑자기 홀 바닥에 먹은 것을 게워낸다.
희철: (춤을 멈추고 만택을 바라보며) 우째 저래 한결 같노.
보다 못한 라라가 만택을 끌고 밖으로 나간다.
씬 79. 결혼식장 앞/밤.
계단 하단에 주저앉아 마저 게워내는 만택.
라라가 물 컵을 들고 다가온다.
라라: 입 좀 헹구십시오.
뒤늦게 나온 희철도 계단 한쪽에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
만택이 물을 받아 입에서 가글거리더니, 그 물을 그대로 삼켜 버린다.
희철: 아이 참, 뱉아뿌리야지, 그걸 삼키노.
만택: (소매로 입가를 훔쳐내며) 라라씨 아인교? 와 라라씨가 나왔노. 내 짝은 어디 가뿔고. 이름이 뭐라 카더라. 마……. 마……. 마 생각도 안 나네.
희철: 아 새끼 술은 와 이리 쳐 묵어가 지랄이고.
만택: 박희철이! 니도 아까 가 봤제?
희철: 누구?
만택: 와 분위기 다 깨고, 멋진 척 나가던 아 말이다.
희철: 가는 와?
만택: 뭐 생각나는 거 없드나?
희철: 뭔 소리고?
만택: (희철을 보며) 영옥이! 영옥이 수택이한테 시집갈 때 말이다. 대구서 카센타하는 수택이.
희철: 일마가 미칬나! 고마해라, 마!
만택: 니 내가 모르는 줄 알지만 내 다 안다. 결혼식 끝나고 니 영옥이네 가, 영옥이 어무이 붙잡고 밤새 운 거……. 내 다 안다.
희철: 그래 좋겠다. 다 알아서 좋겠다. 이, 문딩이 자석아! 지는 여자한테 말 한번 몬 붙여본 자석이…….
만택: 오늘 결혼식이랑 닮지 않았나? 똑같다. 내 보기엔. 영옥이 가도 수택이 돈 보고 간 거 아이가!
순간, 희철이 발끈하며 만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뒤에서 보고 있던 라라 놀라서.
“희철씨!”
하며 급히 사이에 끼어든다.
라라: 왜들 이러십니까? 친구끼리 이 먼데까지 와선…….
희철: 고마하라몬 고마해라마! 와 여까정 와 주정이가, 주정이. 잘 알지도 몬하면서…….
멱살을 뿌리치는 희철.
만택이 뒤로 나자빠진다.
쓰러진 채 계속 중얼대는 만택.
만택: 괘안타마. 우리도 부자라 카지 뭐. 여까정 왔는데 거짓말 좀 하면 어떻노. 결혼만 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란교? 라라씨! 내 인자 농사짓는다고 안 할라꼬요. 라라씨도 성사금 좀 챙겨야지 않겠능교!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라라.
희철: 와 이리 깜깜하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선 희철.
식장 안에서는 계속해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씬 80. 인서트/아침.
자전거를 타고 밀빵(리보슈카)를 팔러 다니는 청년, 수레에 실은 통에서 갓 짜낸 우유를 파는 노인이 보이는 이른 아침 골목 풍경.
씬 81. 호텔 방/아침.
숙취로 괴로운 만택, 뒤척거리긴 하지만 눈이 떠지질 않는다.
문이 열리고 작은 대접이 놓인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희철.
창가 쪽으로 다가가 쟁반을 내려놓고, 커튼을 열어젖히는 희철.
햇살이 방안으로 쏟아진다.
눈이 부신 만택이 힘겨운 표정으로 눈을 뜬다.
희철: 늦겠다. 일나라마!
시계를 보는 만택.
시간은 이미 9시를 넘어서 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옆으로 발을 내려놓는 만택, 머리에는 까치집을 짓고 있다.
희철이 쟁반을 들고 와 옆으로 앉는다.
희철: (숟가락을 건네며) 무라.
만택, 숟가락을 받아들고 보면 그릇 안에 흰죽이 담겨져 있다.
놀란 얼굴로 희철을 바라보는 만택.
쳐다보지도 않고,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죽을 떠먹는 희철.
만택: 웬 거고?
희철: 죽 첨 보나? 싫으면 둬라. 내 먹게.
만택도 죽을 떠먹는다.
만택: (너무 뜨거워 괴로운 얼굴) 뜨겁다꼬 말을 해얄 거 아이가!
대꾸도 없이 계속 죽만 먹는 희철.
만택: 간장 없나?
희철이 ‘이게 정말…….’ 하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놓는다.
호호 불어가며 얼른 다시 죽을 뜨는 만택.
만택: 맛있다.
희철: 니 엄니 아시면 좋아라하겠다. 이젠 망신도 국제적으로 당한다꼬.
만택: (아주 태연자약하게) 와? 어제 무신 일 있었나?
희철: 됐다마. 죽이나 쳐무라. 맨날 지가 불리하면 기억 몬 한다카고……. 나중 보면 다 기억하드만…….
계속 중얼중얼.
아무 대꾸 없이 죽만 떠먹는 만택.
햇살이 비춰드는 방안에 두 사람의 숟가락 소리만 딸각거린다.
씬 82. 노천 카페/낮.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아래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카페.
마샤가 굳은 표정으로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마샤.
웨이트리스가 빈 잔에 물을 따르려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씬 83. 전차 안/오전.
덜컹이는 전차 안, 요금을 받는 차장이 지나면 만택과 라라의 모습이 보인다.
라라는 손등으로 비춰드는 햇살을 가리고 있다.
만택: 거래 말 돌릴 필요 없십니더. 지가 어디 이런 일 한두 번 겪겠십니꺼?
라라: 정말로 몸이 아파서 못 나온답니다.
만택: 아플만도 하지요. 하루는 경찰한테 쫓기고, 하루는 남의 잔칫날에 초치고……. 결혼할 맘이 나겠능교. 차라리 잘 됐십니더. 아무도 없는 한국까정 내 하나 믿고 올라카는 사람인데, 거짓말하고 데려갈 순 없는 거 아인교? 라라씨도 지 땜에 거짓말 하실 필요 없십니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라라.
만택의 구두코가 헤어져 입을 벌리고 있다.
들고 있던 손등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보는 라라.
햇살에 눈이 부셔 온다.
씬 84. 전차 선로/오전.
선로 가운데로 길게 늘어선 전주.
굽이진 선로 끝으로 전차가 멀어지고 있다.
만택: (O. S) 근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능교?
씬 85. 호텔 행사장/낮.
희철이 새로운 여자와 선을 보고 있는 자리.
갑자기 문이 열리며 사장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온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마샤, 만택이 사 준 원피스를 입고 있다.
사장: 박희철이! 홍만택이 어디 간 거야?
희철: 가가 내 마누란교! 와 내한테 와 씩씩거리요! 내는 내 마누라 구하러 온 사람입니더. 사장님이 붙여준 여자가 더 잘 알겠지요.
사장: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이 년이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씬 86. 한국인 식당/낮.
개량 한복을 입은 금발의 아가씨가 테이블 위로 설렁탕과 비빔밥을 내려놓는다.
파와 뻘건 다데기를 듬뿍 쳐서 밥공기를 통째로 털어놓는 만택.
몇 끼를 굶은 사람 마냥 허겁지겁 먹어댄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다 라라와 눈이 마주치자, ‘쩝쩝’대던 소리가 기어든다.
라라: (웃으며) 괜찮습니다. 편하게 드십시오.
만택, 오물거리던 입을 조금씩 크고 빠르게 움직인다.
만택: (밥을 먹다 생각난 듯) 한국서 젤로 비싼 작물이 뭔지 아능교?
라라: 뭔데요?
만택: 금추.
라라: 네?
만택: (고추를 집어 들며) 고추가 아이고요. (젓가락으로 김치를 가리키며) 젤로 비싼 반찬이 금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젤로 비싼 작물은 금추.
얘기해놓고 혼자서 킥킥대며 웃는 만택.
라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거리며) 개량종입니까?
만택: 네? 아입니더. 기냥……. 실없이 해 본 소립니더.
싱겁다는 듯 웃어넘기는 라라, 깍두기를 집어 먹는다.
만택: 젓가락질 잘 하시네요. 맵지 않십니꺼?
라라: (서툰 경상도 억양으로) 맛있습니더.
만택: (웃음) 따라 해보이소. 맛있대이.
라라: 맛있대이.
만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엔 둘이 동시에.
라라, 만택: 맛있대이.
재밌다 는 듯 웃는 두 사람.
만택: 처음이네요. 남한테 뭘 가르치긴.
라라: 앞으론 많이 가르치셔야죠.
만택: ?
라라: 한국에 같이 가실 분 말입니다. 말부터 해서 예절, 풍습……. 다 가르치셔야죠.
만택: 라라씨 같은 사람이면 좋겠네요.
라라: !
만택: 말을 지보다 잘 하잖아요.
씬 87. 타슈켄트 시장/오전.
각종 좌판과 인파로 북적대는 시장.
그 한 구석에 만택과 라라가 나란히 앉아서, 함께 포도를 먹고 있다.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만택의 한쪽 발은 신발이 벗겨진 채로, 다른 쪽 발 위에 얹어져 있다.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이 떨어진 만택의 구두를 수선하고 있다.
CUT TO.
라라가 속옷 상 앞에서 멈춰서더니, 브라를 만져보고 가슴에 대보기도 한다.
라라의 대담한 모습에 당황하는 만택,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찾는 시늉을 하며, 옷을 펼쳐 사람들의 시선을 가린다.
순간, 가리고 있는 만택의 손을 ‘확’ 제끼는 또 다른 손.
희철이다.
서너 걸음 떨어져서는 새로운 파트너와 통역이 서 있다.
희철: 홍만택이! 라라씨 속옷 사줄라꼬? 이젠 선도 안 보기로 했는갑제?
만택: 아가씨가 아프다꼬 몬 나왔다. 호텔서 뭐 하겠노?
희철: 아프다꼬? (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사장이 아를 빼돌맀다꼬 난리던데요.
라라: (희철의 시선을 외면하며) 들어가야겠습니다. 만택씨.
희철의 통역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앞장 서 걸어가는 라라.
만택: (희철을 흘기며) 뭘 빼돌맀다카노! 니나 잘 해 봐라.
희철: (만택을 붙잡으며 속삭이듯) 전에 아랑 누가 낫노?
만택: 잔 머리 좀 고만 굴리라. 장고 끝에 악수 두는 법이대이.
빠른 걸음으로 라라의 뒤를 따르는 만택.
희철: (혼잣말) 그래가 누가 낫단 소리고? (갑자기 멀어지는 만택 쪽을 돌아보며) 수상테이, 홍만택이…….
씬 88. 정보회사 사무실/낮.
사장과 직원들이 앉아 있고, 맞은편에 고려인 여자들과 그 가족들이 앉아 있다.
회원1: (러시아어) 시내에서 식당 한다더니 길거리 포장마차잖아요. 집은 아파트라더니 빛도 안 드는 지하방이고…….
회원2: 저는 남들 매달 집으로 100달러씩 보내주는 거 200달러씩 보내준다고 했어요. 근데 단 10달러도 보낸 적이 없어요.
사장: (러시아어) 저희도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일일이 확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집이 있다면 있는 줄 알고, 가게가 있다면 그런 줄 알지, 가서 일일이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회원1: 아니 그런 무책임한 얘기가 어딨어요? 그럼 아무 확인절차도 없이 우릴 그 먼 나라까지 보냈단 말예요.
회원2: 저희들은 속은 게 분한 거예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평생 같이 살 수 있겠어요?
무거운 대화가 오가는 도중에 문이 살며시 열리며, 라라가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라라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사장이 그녀를 향해 물 컵을 던진다.
미처 피하지 못한 라라의 한 쪽 이마를 맞고, 벽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물 컵.
시선만 떨군 채 미동도 않고 서 있는 라라, 이마 위로 피 줄기가 흘러내린다.
씬 89. 호텔방/밤.
뜨거운 김이 모락거리는 사발면을 개봉하는 희철.
만택은 자신의 구두를 보며 괜히 실실거리고 웃고 있다.
희철: 쥐약을 쳐 묵었나? 와 헤헤거리고 지랄이고…….
웃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드는 만택.
희철: (라면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집에서는 그래 먹기 싫던데……. 니 엄닌 외국도 안 와 본 양반이 우째 이런 생각을 다 했노.
만택: 꼭 해 봐야 아는 기가. 니는 결혼도 살아보고 할 기가!
희철: 니 가끔 보면 서른여덟이 아이라, 쉰여덟 같은 소릴 지껄인데이. 살아보고 하는 게 뭐가 나쁘노! (갑자기 작아지는 소리로) 그게 아이면 같이 자 보기라도 해야제.
만택: 그래가 알로날 찬 기가? 와 같이 안 잔데드나?
희철: (젓가락을 팽개치며) 아이, 씨이! 와 또 그 가시나 얘기고! 영옥이랑 알로나 얘긴 하지 말라캤지!
다시 젓가락을 들어 고개를 쳐 박고 라면만 열심히 먹는 희철.
만택: (중얼거리듯이) 지도 찔리는 게 있는갑네.
희철: 찔리긴 뭐가 찔리노!
갑작스런 희철의 언성에 기가 죽은 만택, 사발을 들어 국물을 들이마신다.
만택: (트림까지 해가며) 역시 라면은 군대랑 외국서 먹는 게 최고다.
희철: 면사무소가 군대가!
씬 90. 이리나의 집 앞/오전.
다음날 타슈켄트의 어느 아파트촌 앞.
페인트가 벗겨지고 벽이 갈라진, 보기에도 매우 오래되고 허름한 아파트다.
동네 꼬마들이 낡은 축구공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 다니고 있다.
그들을 가르고 벤츠 한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와 멈춰 선다.
꽃바구니와 선물꾸러미를 든 두식이 통역과 함께 차에서 내린다.
두식을 기다리던 이리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는다.
이리나에게 꽃바구니를 안기며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두식.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어머니가 다가와 가벼운 포옹을 한다.
씬 91. 호텔 행사장 안/오전.
평소처럼 만택과 희철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사장과 라라, 그리고 희철의 통역이 차례로 들어온다.
라라의 한 쪽 이마에는 피 멍이 가시지 않은 상처가 나 있다.
만택의 자리가 아닌 희철의 테이블로 가 앉는 라라.
영문을 모르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 만택과 희철.
사장: 그 동안 서로 지겨웠지? 새 파트너와 새로운 맘으로 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서, 오늘부로 교체한 거야.
희철: 지는 싫은 데요. 와 하필 이 여잔교? 딴 사람을 붙여주던지, 원래대로 해 주이소.
사장: 이건 내 권한이야. 시간 없어. 있는 기회나 잘 잡아.
그리고 만택인 따라 나와.
어제부터 마샤가 기다린다.
라라를 바라보는 만택, 라라는 만택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말없이 앉아 있다.
희철이 만택의 무거운 얼굴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사장: 뭐 하고 있어! 얼른 나오지 않고.
만택: 라라씨, 이마가 와 그란교?
대답 없는 라라.
계속 라라만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만택.
만택: 지는 여기서 관두겠십니더.
사장: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만택: (사장 앞으로 다가가서) 이건 지 권한입니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는 만택.
모두들 당황스런 얼굴로 잠시 말을 잃는다.
사장: (라라를 노려보며) 이대로 끝나면 나도 너한테 줄 게 없어!
괴로운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마는 라라.
희철은 모든 상황이 황당하기만 하다.
씬 92. 호텔 방/낮.
만택이 방에서 짐을 싸고 있고, 밖에선 문을 두드리는 희철의 목소리가 들린다.
희철: (O. S) 만택아! 이라지 말고 문 좀 열어 보래이. 라라씨가 할 말이 있댄다. 만택아! 홍만택이!
말없이 계속 짐만 챙겨 넣는 만택.
씬 93. 노천 카페/낮.
희철: 와 아직도 훈계할 게 남았능교?
라라: 도와주십시오.
희철: 지 같은 게 도울 일도 있능교?
라라: 만택씨랑 어울리는 사람으로 제가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부탁입니다. 만택씨만 다시…….
희철: 글마 일이라면 지가 돕고 싶어도 도울 일이 업실 거 같네요. 가 맨날 팔푼이 마냥 웃고 댕여도, 아이다 싶으면 입 다물고 뭉쓰는 압니더. 어릴 때부터 지가 꼬붕처럼 달고 댕이던 아지만, 지가 뭐 시킨 적 업십니더.
라라: 쉽게 결정하시고 온 게 아니잖습니까! 아직 시간도 있습니다.
희철: 가도 여 올 땐 남들하고 똑같은 생각이었을 깁니다. 착하고, 보기 안 흉하고, 내 좋단 여자라면 된다. 근데 말입니더, 지금 쟈가 저러는 거 보면 뭐에 단단히 홀린 거 아인가 싶습니더.
라라: 홀리다니요?
희철: 여까정 와서 홀릴 게 뭐 있겠십니꺼?
라라: ?
희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 나간다.
희철: (혼잣말로) 바보가 아이면 알아 듣겄제.
씬 94. 호텔 로비/낮.
호텔 로비로 들어서던 희철, 1층 정보회사 사무실 앞에 경찰들의 모습이 보인다.
서류 파일들을 들고 나오는 경찰과 직원들을 세워놓고 뭔가 조사 중인 경찰.
그리고 전날 사무실로 찾아왔던 고려인 여자들이 서 있다.
씬 95. 호텔 정보회사 사무실/밤.
무거운 분위기 속에 회사 직원들과 라라를 포함한 통역들이 앉아 있다.
직원1: 사장님께서 직접 영사관 쪽으로 알아보곤 계신데, 시간이 좀 걸리겠답니다. 어쨌든 경찰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진 행사가 금지된 상태고요.
라라: 사장님은 지금 어디계십니까?
직원2: 저희도 통화만 가능한데요.
라라: 받아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중요한 물건인데…….
직원1: 연락되면 전해드릴게요. 뭔데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라라.
씬 96. 호텔 방/저녁.
아무도 없는 방안에 전화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린다.
씬 97. 호텔 근처 공중전화 박스/저녁.
라라가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고 있다.
신호는 계속 가지만 받지를 않는다.
라라의 등 뒤 너머로 호텔이 보인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호텔을 바라보던 라라, 힘없이 부스를 나온다.
씬 98. 노천주점/저녁.
중앙으로 전차가 지나는 도로변 노천주점.
거리의 악사가 테이블을 돌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쪽 테이블에 만택, 희철, 두식이 앉아 있다.
두식: 좆 되 부렀다이!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다냐 참말로!
희철: (깜짝 놀라 두식의 말을 자르며 만택을 한번 보고) 헹님이사 별 일 있겠능교? 이리난가, 저리난가 고 여자 부모까정 다 만났다면서요.
두식: 소문 듣고 딴 소리 허면 어쩐다냐? 그러고 동상덜은 짐 싸란 소리 아녀?
희철: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카더만, 완전히 이빨까정 뿌러져분거지요.
두식: 알로난가 허는 그 여자 괘안터만……. 대학도 나오고야, 그 아부지도 교수람서? 아깝다.
마치 모든 걸 알기라도 하듯, 거리의 악사가 다가와 슬픈 세레나데를 연주한다.
희철: 우짜겠능교, 엎질러진 물인데.
두식: 그냥, 물 엎지른 거랑은 다르제. 큰 맘 먹고 여까정 온 건디…….
희철: 지가 몹쓸 짓을 해 가, 벌을 받는 거지요. 이제껏 내 땜에 운 아는 그 가시나 하나 밖에 없는데…….
두식: 다시 찾아 가믄 안 되것나?
희철: 무신 낯으로요……. 간다꼬 되겠능교?
두식: 가서 빌어 불어? 안 되믄 무릎이라도 꿇고…….
희철: 그래가 되까요?
만택: 아이몬 니 인연이 아이다.
두식이 테이블에 돈을 얹어주자, 챙겨서 다른 테이블로 떠나는 악사.
희철: (잠시 고민하더니 만택을 보며) 같이 가자.
만택: 미칬나! 내가 와 가노!
희철: 같이 가자.
만택: 싫다.
씬 99. 거리/아침.
차량들이 멈춰선 사거리.
경찰차를 앞세운 검은 세단 행렬이 지나간다.
뒤이어 경광 봉을 든 경찰들이 바삐 움직이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량들.
씬 100. 은행/낮.
오가는 사람들 틈새로 창구안의 알로나 모습이 보인다.
일 하느라 정신이 없다.
희철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황하는 알로나.
희철의 뒤로 만택이 머쓱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대기석으로 가 앉는다.
통역도 없이 혼자 찾아간 희철이 콩글리쉬로 애원한다.
I am sorry, I love you…….
그러자 이번엔 알로나가 영어로 희철의 부탁을 거절한다.
아주 유창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희철, 난감해진다.
급기야 만택의 말대로 무릎을 꿇는 희철.
만택도 희철의 적극적인 모습에 놀란 기색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몸집 좋은 경비원이 다가와 희철을 끌어낸다.
희철이 안간힘을 쓰며 버텨보지만 역부족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바라만 보는 만택.
힘이 달리는 희철, 경비원의 팔을 물어뜯는다.
고통스런 얼굴의 경비원.
곤봉으로 내리치며 희철을 떼어낸다.
그 모습에 놀라 달려드는 만택.
알로나도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만택이 곤봉을 뺏어들려는 순간, 경비원이 의도치 않게 휘두른 팔꿈치가 만택의 얼굴을 강타한다.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만택.
씬 101. 공원/저녁.
공원 한쪽에 세워진 동상 앞 계단.
희철이 물에 적신 손수건을 짜내며, 만택에게 다가와 앉는다.
두 사내의 눈가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어올랐다.
희철: (손수건을 건네며) 많이 아프나?
아무 대답이 없이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가에 갖다 대는 만택.
희철: 미안테이.
만택: 뭐가?
희철: 우즈벡……. 여도 내가 오자 캤고……. 오늘도 내가 같이 가자칸 거 아이가!
만택: 참가비 야긴 와 안 하노?
희철: (뜨끔) 참……. 가……. 비라니?
만택: 참가비가 2백인데 4백이라꼬 속인 거 말이다.
희철: 알고 있었나?
만택: 걱정마라. 안 받겠단 소린 아이니까.
희철: (기어드는 소리로) 갚는다. 이자 쳐서…….
만택: 농고 댕일 때 삥뜯다 중학생 아덜한테 쥐어터지던 거 기억나나?
희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그 야긴 와 하노! 쪽팔리게.
마지막 남은 한 가치를 꺼내 물고, 담뱃갑을 구겨 쥐는 희철.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뱉어내자, 만택이 뺏어들어 깊게 들이 마신다.
희철: 안 피던 담밴 와 태우노?
만택: 이거라도 태우면 속이 덜 탈까 싶다.
잠시 침묵.
희철: 이래 가면 속 편하겠나? 후회 않겠나 말이다. (쥐고 있던 담뱃갑을 내던지며) 내 보기에 한국 간다꼬 낫는 병 아이다.
만택: (몇 모금 남지 않은 담배를 다시 희철에게 건네며) 누가 그냥 이래 간다 카드나.
씬 102. 거리/밤.
가로등이 희미한 거리.
T자형의 전신주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전차 선로가 나 있다.
그 길 한 켠에 라라가 혼자 서 있다.
멀리 선로의 끝에서 굽이져 들어오는 전차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DISSOLVE.
라라가 서 있던 자리는 비어있고, 전차가 푸른빛의 스파크를 일으키며 멀어져 간다.
전차가 사라지는 방향에서 선로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만택의 모습이 보인다.
한참을 거리 두고 뒤따라오는 희철.
씬 103. 호텔방/아침.
‘때르릉’
하며 울리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
한참 버티던 희철이 뒤척거리던 끝에 짜증스런 얼굴로 깬다.
만택의 침대를 바라보면 이미 비어 있는 침대.
희철: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구내 식당요? 와요?
씬 104. 호텔 식당/아침.
희철, 두식, 상진이 편한 차림으로 앉아 있고, 회사 직원들도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그들 앞으로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사내와 현지 경찰들이 서 있다.
사내1: 한 사람이 비는데, 누가 없는 거죠?
희철: 홍만택이요.
사내1: 어디 가신 거죠?
희철: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아, 신경 안 써도 되요. 금방 올깁니더. 얼렁 용건이나 말 하이소.
사내2: 저희는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나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OO사의 행사가 이곳 우즈베키스탄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간주되어, 모든 행사가 금지됨과 동시에 모든 관계자들은 48시간 이내에 출국하라는 현지 법원의 명령서가 나왔습니다.
술렁이는 사람들.
사내2: 따라서 이 시간 이후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저희 영사관 직원들의 보호를 받게 되며, 호텔 외부 출입이 일체 금지됩니다.
씬 105. 브로드웨이 거리/낮.
독립기념일 행사로 무척이나 번잡한 거리.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의 행렬, 무용단의 공연들이 이어지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만택.
거기가 거기 같아 보인다.
자꾸 왔던 길을 되돌아오는 만택.
고려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열심히 손짓을 해가며 묻기도 해본다.
씬 106. 호텔 방/낮.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희철.
곁에는 알로나가 돌려주고 간 곰 인형이 앉아 있다.
고개를 돌려 인형의 얼굴을 주먹으로 툭툭 쳐보는 희철.
이내 인형을 팽개치더니, 침대로 얼굴을 파묻고 눕는다.
씬 107. 브로드웨이 거리/낮.
전통 의상으로 역사 속 인물들을 재현한 가장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행렬을 따르고 있다.
앉아서 우즈벡 전통 밀빵(리보슈카)를 씹고 있는 만택.
때가 꼬질꼬질한 여자 애가 다가와 만택의 팔을 붙잡고 구걸을 한다.
주머니에서 구겨진 우즈벡 화폐(숨) 몇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는 만택.
멀어지는 여자 애의 뒷모습을 지친 표정으로 바라보던 만택.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밀려드는 인파를 거슬러 달리기 시작한다.
어깨에 책 꾸러미를 맨 채 걸어가는 여자를 가로막는 만택.
만택이 데이트를 나왔을 때, 라라와 얘기를 나누던 경실이다.
경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만택: 라라, 김라라.
CUT TO.
만택이 여자와 건너편 거리로 걸어간다.
오가는 군중들 틈에서, 낡은 책들을 팔고 있는 라라의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