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4.성탄 대축일 전야미사, 금요일>
<마태1,1-25>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25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드러내는 표징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한 죽음.
또 하나는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는 겸손으로 오신 성탄 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세상에 나신 성탄,
이것은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십자가 상에서는 온전히 당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성탄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온전히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시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 가장 나약한 사랑받아야할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부모는 언제 자녀들이 사랑할까요?
나이들어 자녀들의 보호를 받을 때 사랑 받지만,
어린 아이일 때 사랑을 아이로부터 부모들은 받습니다.
부모가 최고인 것입니다.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나를 사랑해주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때 사실은 자녀가 부모보다 온전히 올인하는 순간이라고 하지요.
마찬가지고,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상.
마찬가지로,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모습이지만, “목마르다”라고 하시지요?
우리의 사랑을 역시 갈구하시지요.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우리의 삶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인데,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의 메세지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하고 사랑받는지?
또 그러한 삶을 내가 살고자 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코로나19로 인해 그 어려운 시기이지요.
이 어려움을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보면 인류 역사상 그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운석이 떨어지던지, 천재지변이 있어서 먹이사슬의 최상의 존재가 멸망을 했지요.
공룡같은 존재지요.
그런데 그러한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지요.
온도1도만 올라가도 거의 잠길 나라들이 있고,
기후변화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가 “큰일났다!” 할 정도로,
“탄소제로의 정책을 펴야된다!” 라고 온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 변하지 않지요.
우리가 변한다는 것은 어떤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아! 살려면 변해야겠다!”라고 회개할 때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 스스로 “변해야겠다!” 라고 하더라도 금방 변하지 않지요.
변할 수 있는 키는 생명욕구에 있는 것이지요.
“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변하면 큰일난다. 그런 것 하지마!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우리도 모르게 우리 뇌에 그것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살기위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살던대로 사는 것’이지요.
내 의식은 10%이고, 내 심장을 뛰게하고 피를 돌게하고 숨을 쉬게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내 무의식은 90%인데 동의하지 않는 것이지요.
“내가 삶을 변화시키겠다!” 라고 해도 그것은 의식일 뿐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당에 이렇게 앉아 있지만, 성당으로 걸어올 때 의식하면 걸어오지 않지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오다보니까 성당이지요.
그만큼 우리의 행동의 90%는 무의식이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대부분은 생명유지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그런데 자연의 원리를 보면,
자기자신과 자아를 동일시 합니다.
자신의 생명유지위해서 자연은 몸부림 칩니다.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내가 나를 볼 때 나만 있다면 그 미물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삶은 내가 나만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움직인 결과, 이 지구의 질서를 망가트리고,
마치 아무리 먹어도 배가고픈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내 생명유지만 하면 되는데,
거기에 애욕과 지배욕과 명예욕을 채우려 물질로 향한 결과,
이 지구는 되돌리기 힘든 상태까지 온 것이지요.
오늘 이 밤에 탄생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사랑을 달라고! 그리고 사랑을 주라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생명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것만을 유지할 때 우리가 잘 살 수 있음을 가난하게 오신 아기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지요.
성탄 이밤에,
우리가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러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아기 예수로 오시고 십자가상에서 처절하게 외치셨던 “목마르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라는 외침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분이,
이제 어린 아이로 다시 시작하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의 구유안에서 다시 탄생하셔서, 우리도 이제 “목마르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예수님으로 다시 탄생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이밤.
세례 때 그동안의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거듭났듯이, 이 밤에 우리 역시 성모님께 봉헌되어 성모님의 자녀로, 새로운 그리스도가 되어 거듭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방법은?
성모성심에 순간순간 내 몸을 봉헌합니다.
올라오는 모든 분심들 기다렸다는 듯이 봉헌하면 정화됩니다.
<Matthew1,1-25>
1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2 Abraham became the father of Isaac, Isaac the father of Jacob, Jacob the father of Judah and his brothers.
3 Judah became the father of Perez and Zerah, whose mother was Tamar. Perez became the father of Hezron, Hezron the father of Ram
4 Ram the father of Amminadab. Amminadab became the father of Nahshon, Nahshon the father of Salmon,
5 Salmon the father of Boaz, whose mother was Rahab. Boaz became the father of Obed, whose mother was Ruth. Obed became the father of Jesse,
6 Jesse the father of David the king. David became the father of Solomon, whose mother had been the wife of Uriah.
7 Solomon became the father of Rehoboam, Rehoboam the father of Abijah, Abijah the father of Asaph.
8 Asaph became the father of Jehoshaphat, Jehoshaphat the father of Joram, Joram the father of Uzziah.
9 Uzziah became the father of Jotham, Jotham the father of Ahaz, Ahaz the father of Hezekiah.
10 Hezekiah became the father of Manasseh, Manasseh the father of Amos, Amos the father of Josiah.
11 Josiah became the father of Jechoniah and his brothers at the time of the Babylonian exile.
12 After the Babylonian exile, Jechoniah became the father of Shealtiel, Shealtiel the father of Zerubbabel,
13 Zerubbabel the father of Abiud. Abiud became the father of Eliakim, Eliakim the father of Azor,
14 Azor the father of Zadok. Zadok became the father of Achim, Achim the father of Eliud,
15 Eliud the father of Eleazar. Eleazar became the father of Matthan, Matthan the father of Jacob,
16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her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the Messiah.
17 Thus the total number of generations from Abraham to David is fourteen generations; from David to the Babylonian exile, fourteen generations; from the Babylonian exile to the Messiah, fourteen generations
18 Now this is how the birth of Jesus Christ came about. When his mother Mary was betrothed to Joseph, but before they lived together, she was found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19 Joseph her husband, since he was a righteous man, yet unwilling to expose her to shame, decided to divorce her quietly.
20 Such was his intention when, behold,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21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22 All this took place to fulfill what the Lord had said through the prophet:
23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24 When Joseph awoke,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his wife into his home.
25 He had no relations with her until she bore a son, and he named him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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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창조적 환경과 창재의
상관관계
역사에 남은 위대한 업적들은 대체로 특정한 한 시기,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 문학, 19세기 중 후반기의 파리 건축과 무대 예술, 20세기 초 미국의 실용적 창조물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르네상스의 중심 피렌체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무대에서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거장들이 탄생했다. 물론 재능도 타고났지만 그들이 세기적 거장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피렌체의 사회문화적 분위기 덕분이라는 것이 후세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창재는 만들어지는데, 지금의 우리에겐 창조적 자극으로 넘쳐 나는 환경 조성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가 창조적 학습 분위기로 넘쳐 나게 해야 한다. 지금 골방에서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이건 창조가 아니라 뇌를 죽이는 길이다. 빌 게이츠가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창재는 혼자 되는 게 결코 아니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45-247)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창재가 된다
성공은 습관이다. 한번 성공해 본 사람은 그 성공의 이미지가 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나는 칼럼을 쓰면서 진행이 잘 안 되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결국 써내고 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탈고 후의 후련함과 커피 한 잔 느긋하게 마시면서 참 잘 썼다고 흐믓해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원하는 대로 된다는 확신을 갖고 성취 후의 모습을 그리면서 빌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빌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기억하자. 측두엽의 편집 기능을! 우리가 간절히 기원하면 기억도 원하는 방향으로 편집된다. 목표는 물론 내 능력에 맞게 적정 수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뇌는 약간 부담되는 목표를 좋아한다. 그 과정은 힘들지만 성공 후의 쾌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기분을 잘 기억해 두었다 다음 기회에 또 체험하려는 것이 뇌의 본성이다. 힘들어도 이를 돌파하려는 뇌의 본성은 우리의 의지보다 더 강할 수 있다. 성공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믿어야 한다. 천재나 수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창재는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지 될 수 있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48-250)
성패는
과학적 훈련 방법에 달렸다
우리 뇌는 감각계와 운동계가 따로 있다. 이 둘이 연계되어야 비로소 예술적 작품이 나온다.
그렇다고 무조건 연습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고도의 기술 향상은 의욕, 집중, 훈련의 세 요소가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 이를 잘하기 위해서는 즐거운 기분으로 해야 하고, 부모의 적극성과 돈, 시간이라는 자산이 필요하며, 잘 기획된 과학적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뇌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자. 일단 새로운 학습을 함으로써 뉴런의 수상 돌기가 가지를 뻗쳐 새로운 시냅스, 신경회로를 튼튼히 해야 한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51-252)
같은 시간에 두 배 효과 거두기
피아노 연습부터 해 보자. 악보를 본다. 시각야가 자극을 받아 정보를 전두엽의 운동야(運動野)로 보낸다. 이때 시각야와 운동야가 수상 돌기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연결이 없거나 엉성하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기술은 그보다 더 많이 늘어나는 것이다. 천재는 연습이요, 훈련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새로운 것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뇌 회로가 생성되고, 계속 연습하면 회로가 강고해진다. 이 과정이 곧 천재의 길이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해야 효율이 높다. 특히 아침 시간이 효율적이다. 하루4-5시간 연습하고 공부하되 그 후 낮잠을 자야 기억이 정리되면서 머릿속에 정착된다. 압력과 저장이 잘되어야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할 수 있고, 뇌가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영향을 받아 쾌적한 상태가 된다. 그러면 연습을 계속할 수 있으며, 생각과 정신, 머리가 긍정적으로 된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향상된다. 당장은 좀 힘들어도 기술이 향상되고 성공에 대한 이미지가 확연하게 떠오르면서 인내력도 생긴다.
공부의 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천부적 자질을 타고나도 연습과 훈련에서 승부가 갈리듯 공부의 성패도 결국은 양이 결정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 공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창의력이 형편없는 박사가 하도 많아서 하는 말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52-254)
연습할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전두엽의 창의력이 활발하려면 뇌의 다른 부위도 물론 활발해야 한다. 풍부한 정보, 지식, 경험, 예민한 감수성은 물론이고 전두엽에 필요한 기억 정보를 측두엽이 즉시 끄집어내 보내야 한다. 고로 창조는 기억이고, 기억은 암기다. 기억은 지능과도 관계없고 특별히 기억의 재주가 따로 있다는 뇌과학적 보고도 아직 없다. 확실한 것은 기억의 깊이와 수명은 암기를 위한 연습량과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걷는 것과 같다. 높이뛰기나 멀리뛰기 등은 천부적 소질이/ 있어야 한다. 연습한다고 아무나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걷는 거야 누가 못해! 그냥 꾸준히 걷기만 하면 결국 목적지에 닿는다. 한 걸음씩 걷도 또 걷듯이 반복해서 기억하자.
창재도 연습이고, 반복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54-255)
기억에는 이성과 감성이 동시에 필요하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세 부위
기억은 이성적 기능을 하는 신피질(전두엽+측두엽) 외에도 감성적 기능을 하는 편도체의 해마가 함께 작용하여 일어난다.
편도체에서 감정을 느끼면 신피질의 전두엽에서 관련 정보를 처리한다. 이것이 해마에 단기 기억으로 저장되었다가 다시 신피질의 측두엽에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다음의 사례를 보면 어떤 과정을 거쳐 기억이 저장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례1] 딸기밭을 찾았다.
“와, 좋다!”(느낌/편도체)->’좋은 곳이니 기억해 두자’(판단/전두엽)->’딸기밭은 좋은 곳’(단기 기억/해마)->’다음에 또 놀러 가자’(장기 기억/측두엽)
[사례2] 사자를 만났다
“앗, 무섭다!”(느낌/편도체)->’위험한 것이니 기억해 두자’(판단/던두엽)->’사자는 무서운 것’(단기 기억/해마)->’다음에는 피하자’(장기 기억/측두엽)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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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363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대하셨나요?
예수님은 안식일을 존중하시지만, 동시에 가장 높은 주권과 자유를 행사하며 안식일을 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2173]
안식일(Sabbath,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바트’에서 유래)
‘안식일’은 창조의 일곱째 날과 이집트에서 탈출을 기념하는 유다인들의 휴일을 말합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에 끝납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안식일의 휴식을 수호하기 위해 그것에 관한 수많은 규정들을 정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고 안식일 계명을 자비롭게 해석할 것을 홀로 요구하시자, 당대의 유다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이므로 “안식일의 주인”(마르2,28)이라고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그분은 단지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대하(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90)/
는 그분의 태도는 율법을 거스르는 죄에 해당한다고 여길 것인지 자신들의 의견을 정해야 했습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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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3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 받으시는 일화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 날의 거룩함을 어기신 적이 없다(마르1,21; 요한9,16 참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권위 있게 올바른 해석을 내려 주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마르2,27).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이, “안식일에 악한 일이 아니라 착한 일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마태12,5; 요한7,23 참조) 단언하시면서, 안식일의 장당성을 확립시켜 주신다. 안식일은 주님 자비의 날이며, 하느님 영광의 날이다(마르3,4 참조).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2,28)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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