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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70
5월24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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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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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7Z0YNPgv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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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을 신자들의 도움이신 분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역대 교황님들 가운데 재임 기간 동안 참으로 혹독한 고통을 겪었던 분이 있었으니, 251대 교황이셨던 비오 7세(1742~1823년, 교황 재위: 1800~1823년)입니다. 침략과 정복의 시절,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나폴레옹에 맞서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1808년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며, 나폴레옹은 교황령이 프랑스에 병합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침략자들을 파문했습니다.
그 결과 초유의 대 사건이 발생하지요.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1809년 체포되어 사보나에 있는 감옥에 구금됩니다. 그는 약 5년간 교황이라는 신분을 지닌 분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초와 굴욕을 다 겼었습니다.
길고도 긴 암흑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늘 성모님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옥중에서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 어려운 시절, 성모님께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마침내 1814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는 길고 긴 암흑의 세월을 마무리짓고 바티칸으로 귀환합니다. 그는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 성모님께서 큰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은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를 비롯한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은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첫번째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성모님을 바라볼 때 마다 출중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을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어머니, 자신이 펼치는 모든 사업에 늘 함께 하시며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 협조자로서의 어머니가 성모님이심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만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신자들의 도움이신 분이라고 부르십시오. 성모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모든 것은 다 그분이 하셨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은 모두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직 부족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돈보스코는 직접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만들어 전파했습니다. 간단한 기도이지만 합당한 조건을 갖추고 매일 이 기도를 드릴 때 받는 은총은 엄청납니다.
“오 마리아, 굳센 동정녀시여! 당신은 교회의 빛나는 큰 성채이시며 승리하는 군대처럼 위엄을 갖추신, 그리스도인의 든든한 도움이십니다! 오직 당신만이 세상의 모든 거짓을 쳐 이기셨나이다. 원수에게서 저희를 지켜주시어 번민, 싸움, 궁핍을 이기게 하시고 임종 때 저희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성모님 사랑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베르나르도 성인 역시 성모님께서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언제나 지니고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극히 자비로운 동정녀에게 도움을 간청한 그 누구도 거절당했다는 말을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위험과 곤란, 의혹에 빠질 때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시여,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께 의지하여 저희는 결코 쓰러지지 않으오리다. 당신의 인도로 저희는 인생길에서 지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은혜로 천국에 도달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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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HethGhPk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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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아버지만으로 안 되는가?>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e)라 불리는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하와는 아담을 통해 창조하게 될 ‘모든 살아 있는 것’(교회)의 어머니가 될 것을 예언하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모님을 요한(교회의 모델)의 어머니라 하시며 그의 집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심을 믿으려 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아버지가 되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가끔은 ‘아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요한 13,33 참조), 그리고 부활하셔서 고기 잡는 제자들을 보시고(요한 21,5) 아버지가 자녀를 부르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분명 교회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탄생시키실 때 탄생한 교회(요한)에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셨기 때문에 당신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이기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여인이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왜 교회가 자녀로서 아버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어머니가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어떤 역할을 할까요? 아버지는 더 넓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자존감을 불어넣는 대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녀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자라면 사회생활이 어렵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사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고 계심을 믿지 못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살게 될 저세상에서 우리에게 은총을 보내주고 계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다른 세상에서 오는 아버지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번역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에게 아버지는 너무 먼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여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주시려는 온전한 자존감을 획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살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그 자존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히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가 아니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온전히 번역해 줄 어머니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 내용은 피노키오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데이빗’은 사람이 아닌 로봇입니다. ‘하비’ 박사는 죽은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은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아픈 아이를 냉동상태로 보관하고 있는 한 가정에 입양시킵니다. ‘모니카’는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동화를 읽어줍니다. 데이빗은 그 동화를 듣고는 자신도 ‘푸른 요정’을 만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병원에서 냉동상태로 있던 모니카의 아들 ‘마틴’이 치료되어 돌아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데이빗이 마틴처럼 자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눈치채고 데이빗을 산에 버립니다. 회사로 돌려주었다가는 데이빗이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왜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푸른 요정을 만나 꼭 인간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모니카는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진짜 아들은 마틴을 위해 데이빗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빗은 인간 사회를 방황하지만,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합니다. 로봇은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공지능 로봇을 파괴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간신히 ‘조’라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의 도움으로 자신을 만든 아버지 하비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하비 박사는 데이빗을 친절히 맞아주지만, 그는 자신과 똑같은 로봇이 이미 수십 개, 수백 개 만들어지고 있고 여자아이도 만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 하비 박사를 통해서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하여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푸른 요정을 만납니다. 비록 동상이기는 했지만, 그 요정에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2천 년이 지납니다. 지구는 멸망하여 더는 인간이 살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은 데이빗의 기억을 통해 그가 인간이 되고 싶었던 로봇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의 기억 속에 모니카의 자녀가 되어 하루를 즐기는 기억을 심어줍니다. 데이빗은 그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듭니다.
왜 아버지만으로 안 될까요? 아버지는 다른 엄마를 통해 얼마든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혼인한 어머니를 통해서입니다. 아버지에게 가야 아버지가 사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그런 존재임을 증명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그런 특별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나를 낳아준 어머니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갈 수 없고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가 사는 세상으로 갈 수 없습니다. 데이빗이 아버지 하비 박사를 만났지만, 여전히 자신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데이빗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특별하기는 하지만 온전히 인간이 되었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온전히 인간이 되었다고 느끼지 못하면 인간 세상 안에서는 살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남자가 이혼하면서 두 자녀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법정 공방을 하면서 결국 그 두 자녀를 키우게 되었고 이혼한 아내는 재혼하였습니다. 그러나 혼자 두 아이를 키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법정 공방을 하면서까지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지만 결국 아이를 보육원과 비슷한 시설에 맡기고 가끔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는 다시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고 결국은 남편도 아이들을 위해 그들을 새로운 가정을 꾸린 어머니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어머니 없는 자녀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을 번역해주는 통역자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해독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낳아주신 아버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그분의 특별한 존재임을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모 어머니를 버린다면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흐려지게 됩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양식과 용서까지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와 같은 것까지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자녀도 어머니 없이는 아버지 사랑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특별한 자녀임을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모든 것을 내어 맡기시어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는 우리 교회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 무엇이든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모님 덕분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칠성사를 하나도 잃지 않고 교회에서 베풀어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자녀임을 믿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세상에 살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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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링컨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서 기분 좋게 마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대령이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대령은 위스키 병을 가방에서 꺼내 들고 “각하, 한 잔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손을 내저으면서 “나는 술을 못 하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후 대령은 담배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대령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령!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부탁을 했소. 술과 담배를 일생 동안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지. 나는 어머니가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하려고 일생 술 담배를 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네.
목숨처럼 이 서약을 지키겠다고 말했지. 당신이 나라면 술 담배를 할 수 있겠소?”
그러자 대령이 말했습니다.
“저라도 술 담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게 그런 어머니가 있었다면 나도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가르침을 줍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 이전에 생명을 줍니다. 그 생명을 준 것이 고마워서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는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 마리아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유언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가르침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아드님으로부터 귀한 포도주를 얻어내십니다. 이 포도주가 어머니가 가진 전부이고 우리는 그 포도주를 마셔 감사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성모님을 향한 ‘교회의 어머니’란 칭호는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이를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성령강림 다음 날을 기념일로 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강림 때 교회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 때 성모님의 중재로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모 마리아가 우리의 어머니이심을 믿고 어머니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녀의 신심을 키워야합니다. 교회의 어머니가 되려면 머리도 낳고 몸도 낳아야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과 같이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교회의 몸은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낳으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신비가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드립니다.
어머니라면 분명 아버지가 전제되어야합니다. 여자 혼자 자녀를 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신랑은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셔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신랑의 자격은 마치 남편이 밖에 나가 돈을 벌어주는 것처럼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신부의 자격은 신랑에게 감사하여 자신도 피를 흘려 자녀를 출산하고 교육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은총이 충만하셨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하느님이 신랑으로서 성모 마리아께 당신 은총을 충만히 주신 것입니다. 이에 성모 마리아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여 하느님 아드님을 낳으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머리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이제 교회의 몸도 낳으셔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좀 복잡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성모 마리아의 신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 나이 서른 살까지는 성모 마리아의 아드님이셨는데 이제 아드님이 성모 마리아의 신랑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뀌는 순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세례 때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성령을 받으십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신랑이 되고 아드님은 신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이후부터 예수님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인’이라 부르십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청하는 성모님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로서 신랑에게 은총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는데 그 때란 바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교회를 위해 피를 흘리시는 때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남편의 피인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예수님이 신랑이 되시고 성모님이 신부가 되며 탄생하는 교회인 요한이 자녀가 되는 장면입니다.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이제 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인간을 당신의 몸이요 신부로 보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 즉 7성사로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아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 그분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번역은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일 수가 없습니다. 직역하면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입니다.
이 상황에서 성모님이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를 탄생시키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여인’일 뿐입니다.
요한은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십니다. 교회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는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당신 태중에 모신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고 순종해야 할 분을 모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기 때문에 그분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녀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남편이 주는 것을 자녀에게 주고 자녀가 주는 것을 남편에게 전해줍니다. 이것이 사제직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과 교회 사이에서 이 역할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카나에서 포도주를 받으려면 성모님께 순종해야 했듯이 지금도 성모님께 순종해야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은총의 중개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은총의 중개자가 곧 어머니입니다.
이에 아기가 젖을 어머니에게서 찾듯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총을 성모 마리아를 통해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모신 교회의 특권이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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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9,25-34: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공경하는 날이다. 마리아께서는 성령강림 때에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으며, 늘 교회와 함께하셨다.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며 2018년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로운 자녀들을 잉태하는 신비를 담고 있다. 우선은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렇게 아들의 영은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아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지며, 그 아들의 영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라고 하시며 우리를 마리아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표상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계속 낳아주고 있다. 교회는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습을 완전히 구현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 교회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시고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셨던 마리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목마르다.”(28절)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목말라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믿음 대신에 쓸개즙을 탄 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드린다. 목말라하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신 포도주를 드리고 있지나 않은지? “다 이루어졌다.”(30절)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십자가의 신비가 모두 이루어졌고, 고개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심으로써 사흗날에 다시 일어날 당신의 육신에 평화로운 잠이라는 휴식을 주셨다. 착한 목자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34절) 인간이 죽으면 피는 엉기고 흘러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의 몸에서는 피와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는 죽었지만 생명의 원천을 쏟아부어 줄 수 있는, 그 육신 안에 있는 위대한 생명의 힘을 알도록 일어난 일이었다. 첫째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와가 그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둘째 아담이 십자가에서 잠드셨을 때, 그 옆구리에서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였다. 교회는 새 아담의 신부이다. 우리가 모두 마리아를 닮아 참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며 이끌어주시는 신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신비를 사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나 신랑과 일치하려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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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주교회의 사무국장)]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날인 오늘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당신 어머니를 내어 주시어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어머니시자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시고(루카 2,19 참조), 주님의 마지막 십자가 길까지 함께 걸으셨으며, 위층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사도 1,14 참조). 그렇게 성모님께서는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스도 제자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시고 모든 덕행의 거울이 되셨습니다.”(『성무일도』 독서 기도, 성 바오로 6세의 훈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시며, 서로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화해와 용서로, 증오와 분열을 넘어 사랑과 일치로 초대하십니다.
아이는 어머니와 같은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아이와 같은 우리도 신앙을 지키려면 우리를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분께 전구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튼튼한 보루가 있는 성안에 있는 것과 같이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늘 주님께 이끄시는 교회의 어머니의 기도와 전구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아름다운 오월 성모 성월에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 기도는 자녀들이 바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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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1)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신앙인들을(교회를) 지켜 달라고 어머니께 맡기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는 말씀은,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라고 당신의 신앙인들에게(교회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들은 성모 마리아와 교회를 어머니와 자녀로 맺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면서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부 종파에서 우리 교회의 마리아 공경을 시비 거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이(예수님의 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시비 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와 신앙인들을 어머니와 자녀로 맺어 주신 것은, 신앙인들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8)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맺어 주신 일은 바로 그 약속을 지키신 일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결코 고아 같은 처지로 떨어지는 일은 겪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현존과 사랑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어머니께 당신의 교회를 맡기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감각과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들 쪽에서 생각하면, ‘어머니의 사랑’도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인간들의 처지를 생각하셔서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의 현존과 사랑에 어머니의 사랑을 더 주셨습니다. 글자 그대로 ‘흘러넘칠 정도로’ 크고 많고 충만한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이 이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필요한 만큼만 주고, 그 이상은 안 주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 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3)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와 신앙인들의 어머니로서, 또 교회와 신앙인들의 보호자로서 교회의 중심에 계셨고, 신앙인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사도 1,14) <‘보호자’ 라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ㄱ)라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다. 우리에게 성령 외에 다른 보호자가 왜 필요한가?” 이 물음의 답은 이미 앞에서 했던 말과 같습니다. “성령의 보호로는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각과 인식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 성령의 보호뿐만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에도 인간들을 맡기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보호만으로도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지만, 그 보호에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가 더해져서 더욱더 안전하게, 또 평화를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4) 시메온 예언자는 성모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34-35)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예언한 말이고, 또 그 수난 때문에 성모 마리아께서 겪으실 고통을 예언한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강하게 말렸습니다.(마태 16,22) 그러나 성모 마리아께서는 묵묵히 예수님의 뒤를 따르셨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셨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마지막까지 지키신 것과 똑같이 우리 곁에서 끝까지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5) 단순하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런 상황에서 아들의 수난과 죽음의 원인이 된 ‘인류의 죄’를 미워하고, 죄인들도 미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어머니의 당연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죄인들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또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성모 발현 때의 메시지들에 근거를 둔 말입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 때의 메시지들은 전부 다 죄인들의 회개를 호소하는 메시지이고, 모든 사람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 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을 나타내는 메시지입니다. 그 ‘애타는 심정’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기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께, 또 어머니 마리아께 효도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최고의 효도이고, 반대로, 마음대로 막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최악의 불효입니다. 나의 회개와 구원을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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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처음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얼 하십니까?’ 그러자 아주 힘든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면 모릅니까? 이렇게 구덩이를 파고 있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얼 하십니까?’ 그러자 땀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예, 큰 집의 기초를 파고 있답니다.’ 땀은 흘리지만 표정은 밝아보였습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얼 하십니까?’ 그러자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 예, 이곳에 성모님을 기억하는 성당을 만들고 있답니다.’ 똑 같이 땅을 파는 노동을 하고 있지만 생각에 따라서 단순히 돈벌이가 되기도 하고, 하느님의 창조에 협력하는 보람 있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지만 부활하여 참 하느님이 되셨다고 믿었습니다. 교회의 믿음은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신심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원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은 죄의 결과인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신심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3가지 교리를 신앙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 성모님은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도 중요하지만 성모님의 삶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있었습니다. 기도로서 사도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에서 길을 찾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찾기 전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모님은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제도와 전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사랑하는 제자를 부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의 어머니인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이 이제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따뜻한 모성으로 우리들의 청을 예수님께 전구해 주십니다.
“주님을 낳으신 행복한 동정녀, 복되신 교회의 어머니,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는 그날까지 나그네 길을 걷는 교회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보살피시어 하늘의 고향으로 들어가도록 자비로이 지켜 주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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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두 여인 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만남이지요. 태어날 아기들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나옵니다. 지금은 나의 처지가 비천하지만, 언젠가 귀한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비록 내가 슬픔에 젖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으로 넘치리라는 희망이지요.
마리아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비천한 사람은 낮은 신분, 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없기에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재산이나 명예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주님 앞에서 자신은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을 택하신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치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생활을 늘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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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결합된 성모님의 인생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십자가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시는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아들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 깊이 숙고하시고 되새기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인생은 복음서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고 증언합니다.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 겪게 되는 인간성 자체의 고통도 포함합니다.
인간은 생존의 욕구,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소유하고 집착하는 인간의 의지적 욕구가 좌절되는 것을 가장 큰 고통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아에 몰두하고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는 교만이야말로 우리 스스로의 고통의 원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인간이 겪는 이 고통의 의미를 가장 깊이 깨달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모순처럼 다가온 수많은 순간들을 인간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시는 용기를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둠 속 신앙의 길’을 걸으셨기에, 십자가의 어두움을 넘어 부활의 빛을 만나실 수 있었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맡기신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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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드님을 두고 성모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드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담아 그 곁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행동에서 예수님을 향한 성모님의 믿음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수가 되신 마당에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 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로마 군사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위협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영어로 ‘이해하다’(understand)는 말은, ‘밑에’(under)라는 말과 ‘서 있다’(stand)가 합쳐진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 밑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밑에 묵묵히 서 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선악과 나무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온 인류의 죽음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골고타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십자가 곁에 끝까지 서 계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나아가 새 인류의 어머니, 새로운 하와가 되셨습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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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제 우리는 성령강림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치고, 다시 연중시기를 맞이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8년2월 11일 루르드 성모 발현 축일(160주년)에 성령강림 대축일 다음날인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교회의 창립일인 성령강림대축일 다음날 거행되는 이 기념일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새롭게 탄생된 첫 교회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보호의 원천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와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명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이를 교황청 경신성사성 장관 로베르 사라 추기경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교령”을 반포하면서,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시고 교회의 자애로우신 어머니가 되셨다.”고 선언하십니다.곧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는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 되심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참으로,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는 당신 아들이 남기신 사랑의 유언을 받아들이셨으며, 모든 이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들딸로, 사랑하는 제자로 각각 맞아들이셨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맡기신 영이 있는 교회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셨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안에서, 모든 제자들을 당신이 사랑하시는 어머니를 향한 자녀로 선택하셨고,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맡겨 그들이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하셨다.”
실제로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 이후 탄생한 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셨습니다. 다락방에서 사도들과 기도하시고, 오실 성령을 기다리며 이미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사도 1,14―2,4 참조)
프란체스코 교종께서는 바로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의 호칭은 이미 교부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였고, 성 레오 대교종은 “교회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오로 6세 교종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을 반포(1964년)하시면서, 성모님께 이 호칭을 부여하셨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들었던 <창세기>의 하와 이야기이고, 또 하나의 독서는 <사도행전 1,12-14절>인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창세기> 독서는 “하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창세 3,20)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독서는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음”(행전 1,14)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아들을 맡기신 오늘 <복음>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들의 죽음과 함께 서 계시는 성모님에게서는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고, 그지없이 비통하고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의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예수님의 공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그토록,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요 패배로 보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속에서도 승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꿋꿋이 서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화해를 이루시며,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받으시며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시며, 아버지의 뜻의 완성에 협조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성모님을 만납니다.
우리도 언제나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불신과 불목을 떨치고 신뢰로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일, 그만큼 위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의탁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곧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신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복된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되신 일이 벌어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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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을 받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믿고 응답하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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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 걱정>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사람들에게 모심을 받으러 오심 아니고 사람들을 모시다 가시는 주님! 어머니가 자식 사형현장에 있었다니 얼마나 비통했을지 상상해봅시다. 예수님은 운명하시면서 어머님 걱정 요한에게 맡기시며 괴로워했겠죠. 다 큰 외아들 하늘 보내고 무덤도 없이 마리아는 요한이 보살폈겠죠.
이젠 하늘나라 영원영광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우리 걱정 하십니다. 음모 사기 거짓선전에 예수님을 처형까지 몰고 간 정치권력들 휴~
참! 지금 세계 각국들 한국 북한도 권력 쥐느라 별짓 다하는 것들 보세요. 재력으로 여왕 되고 권력으로 백성들 노예로 보면 지옥영벌 당연지사! 가톨릭 신앙으로 인생 다지시려는 분들 참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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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주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머님의 보호와 돌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거행되는 거룩한 미사 때 교회가 바치는 감사송은 '교회의 모상이시며 어머니 마리아'를 위한 감사송인데, 그 감사송은 이렇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동정의 몸에 잉태되시고,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교회의 시작을 도우셨나이다.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곁에서 아드님의 유언에 따라, 모든 사람을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들은 천상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났나이다. 또한 사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당신의 간구를 제자들의 기도에 결합시켜, 기도하는 교회의 본보기가 되셨나이다. 마침내 하늘에 올라 영광을 받으셨으며,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는 그날까지, 나그넷길을 걷는 교회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보살피시어, 천상 고향으로 들어가도록 자비로이 지켜 주시나이다."
마리아를 교회와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신앙의 모범이신 어머니의 뒤를 잘 따라가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성령강림대축일로 교회는 4.3 부활성야부터 시작된 긴 부활시기를 마치고, 오늘부터는 예수님 공생활의 신비를 묵상하는 '연중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두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는 땀을 흘리셨듯이, 우리도 어머니의 전구와 보호 아래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번 한 주간은 '교육주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육의 본질인 '복음으로' 향해 있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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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머니>
요한 19,25-34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숨을 거두시다, 군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당신 계심에
나 있을 진데
이렇게
나 있음에도
어쩌다 가끔
당신을 느끼고는
그러려니 하다가도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죄송하면서도
이내 괜찮아지는
까닭은
당신은
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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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꼼꼼한 직장 상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보고서를 들고 가면 그 꼼꼼함은 절정에 다다릅니다. 한참을 보고서에 집중하던 상사는 잠시 뒤 지적에 들어갑니다. 문제는 보고서의 내용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의 오탈자를 기가 막히게 찾아서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탈자가 세 개나 있어. 정신 차려야지.”
이 상사 밑에 있는 직원들은 아마도 보고서의 내용보다 오탈자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때 보고서의 내용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오탈자 교정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다른 상사 밑의 직원들은 어떨까요? 그 직원들은 보고서의 내용, 참신한 아이디어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탈자가 있는 것은 ‘그럴 수 있지 뭐.’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그룹 중에 어느 그룹이 더 높은 성장을 보일까요? 당연히 오탈자보다 내용에 신경 쓰는 그룹일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율법과 이 율법의 준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정말로 억울한 일입니다. 그런데 죽음 직전까지도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어떻게든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것은 복수의 차원에서 그들이 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이라는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 직전에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고는 어머니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맡기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순간입니다. 단순히 홀로 되신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머니와 함께하면서 위로를 받으며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미움, 복수, 욕심…. 어쩌면 모두가 순간의 만족만을 줄 뿐이었습니다. 미워하는 것도, 복수하는 것도, 내 욕심을 키워나가는 것도….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쫓아서 가야 함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어머니 성모님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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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의 구분>
텔레비전에 한 정치인이 나와서 말을 합니다. 이 정치인을 본 누군가가 “나는 저 사람이 미워 죽겠어.”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방송을 통해 본 모습만으로 “밉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미움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잘 아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까운 사이입니다. 배우자, 가족, 친구….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가까운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가까운 형제자매가 미워하는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사람을 향한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어야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기에 또 사랑의 대상도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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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의 고통을 거울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시자 요한의 어머니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세례로 다시 태어난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어머니를 얻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관계가 물질적, 가시적 차원에서만 형성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어머니 말아를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여 영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박병규)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가 1,38).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 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했고(루가2,7). 또한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 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하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가 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라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 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겠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없이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어머니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도 신앙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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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하와가 죄지어 잃은 모든 것, 성모는 성자로 회복하시고
고통에 우는 이 천국들도록, 당신은 하늘문 여시었도다.
성모는 어좌로 나아가는 문, 눈부신 하늘의 문이시로다
속량된 백성아 찬양들하라, 동정녀 낳으신 영원한 생명”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오늘 아침 성모 축일 찬미가가 참 깊고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어제의 감격感激을 잊지 못합니다. 저를 어버이처럼 여기는 44년전(1977년) 당시 13세 신림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이, 지금은 57세로 노년老年을 향해가고 있는 남녀 제자들 7명이 저를 찾아 와 하루를 참 즐겁게 지낸 날입니다.
지금 저는 73세 노년이지만 당시는 29세 열정과 순수한 사랑의 29세 청년교사였습니다. 싸온 도시락도 한 집안 식구처럼 함께 먹은 후 집무실에서 ‘스승의 노래’에 이어 몇 동요도 열정과 순수의 마음을 다해 열창熱唱을 해줬습니다. 새벽에 전해 받은 동영상을 열어보니 더욱 감동입니다.
“숲속의 합창소리에 이끌려서요.--- ㅎㅎㅎ”
집무실 앞을 소리없이 지나던 자매님에게 후에 조용히 사유를 물어보니 울려퍼지는 ‘스승의 은혜’ 노래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찾았다는 것이며, 또 노래도 불러주고 떠났습니다. 언제 들어도 정다운 노래, ‘스승의 은혜’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라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승 대신 ‘주님’을 넣어도 ‘어머니’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스승의 은혜를 들을 때, 부를 때 마다 생각나는, 눈물짓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바, 세월 흘러 나이들어갈수록 생각나는 성모 마리아같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불렀던 ‘어머니’ 호칭인데 이젠 가장 많이 생각나는 어머니입니다. 지금은 매일 미사봉헌하기에 가장 많이 부르는 호칭이 미사경문에 나오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시절 하교下校하여 집에 돌아오면 우선 찾는 어머니였습니다. 간혹 어머니 안 계실 때의 그 허전했던 분위기의 기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예전 형님댁에서 머물며 공부할 때 형님도 퇴근하면 “수철아, 형수 어디 갔니?”물으며 우선 찾는 사람이 형수였습니다. 집안의 ‘해’라하여 ‘안해-아내’, 혹은 ‘집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집안의 중심과 같은 어머니나 아내가 없는 집안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할까요. 그리하여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자매도 누구의 소중한 어머니이자 아내일 거라 생각하면 저절로 귀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우리 자모慈母이신 가톨릭 교회에 마리아 성모님이 계시지 않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할까요! 완전히 빈집같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어머니가 안 계셔도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가 영원히 함께 계시니 얼마나 고맙고 반갑고 기쁜일인지 모릅니다. 참 고맙게도 5월은 어머니달, 성모성월聖母聖月이요 미사중 가장 많이 부르는 성가가 성모님 노래인데 코로나로 인해 노래 못한 지가 2년째입니다.
“한생을 주님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뒤 따라 가시며, 지극한 고통중에 기도드렸네.
주님의 뜻을 위해 슬픔도 삼키신,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
가톨릭 성가 248장 가사와 곡도 생각납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8년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성모님 기념일로 제정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어머니’란 호칭은 교부시대부터 쓰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새삼 가톨릭 신자들의 깊고 고요한 심성心性도 끊임없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과 하나된 모성애母性愛의 표현이란 생각도 듭니다. 비단 여성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지녀야하고 부단히 함양涵養해야할 성모님의 모성애입니다.
예수님은 새 아담이요, 마리아 성모님은 새 하와라합니다. 보십시오! 오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부부는 얼마나 무지의 철부지들인지요.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도 모르고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를 말끔히 극복한 새 아담인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이시고 새 하와인 우리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이 영적 이등변 삼각형을 연상케 합니다. 이등변 삼각형의 윗 꼭지점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고 아래쪽 오른 편 꼭지점에는 마리아 성모님과 몇 여인들, 그리고 왼쪽 꼭지점에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애제자 요한이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 애제자 요한이 상징하는 바 우리 가톨릭 신자들 모두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마리아님의 자녀들임을 천명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애제자 요한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바로 마리아님이 교회의 어머니이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심을 천명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임과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녀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날로 닮아가야할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의 깊고도 깊은 모성애의 사랑입니다. 아마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에 가장 근접해 있는 분이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일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Ecclesia Mater> 교령이 반포된 다음해 오늘 기념일에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재미있는 강론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는 여성적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교회가 이런 정체성을 상실하면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이 되고 맙니다. 남성적인 교회가 될 때 슬프게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출산도 할 수 없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여성없이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의 태도는 마리아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에 끊임없이 미사예물과 봉헌금을 바치는 마리아 성모님을 닮은 자매들이, 이어 즐거이 주방 봉사를 하는 자매들이, 때되면 기쁜 마음으로 아름답게 제단을 꽃꽂이로 장식하는 자매들이, 수도원 반려견들을 극진히 돌보는 자매들이 생각납니다. 집무실을 찾는 남성 형제들은 거의 대부분 빈손이지만 여성 자매들이 빈손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을 닮은 이런 자매들의 모성애에 도저히 비교할바 못되는 부성애입니다. 철부지같은 거친 남성뿐들이었다면 교회는, 수도원은 벌써 문닫았을 것입니다.
성모성월 5월 어머니달에 맞이하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어머니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 참 고맙고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교회의 자모慈母이신 마리아 성모님의 모성애母性愛를 날로 닮아가게 합니다.
“주님을 낳으신 동정녀, 복되신 교회의 어머니,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길러 주시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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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 어머니께 제자를, 그리고 제자에게 당신 어머니를 내어 주십니다.
이는 젊은 제자에게 노모의 돌봄과 보호를 요청하는 인간적 부탁을 넘어, 마리아께 인류를 , 인류에게 마리아를 선물로 주시는 신비로운 증여의 순간입니다. 십자가 아래 선 사랑하는 제자 안에 우리 모두가 들어 있기에, 어머니께 우리를 부탁하고 또 우리에게 마리아를 "네 어머니시다." 하고 내어 주시는 겁니다.
제1독서는 인류의 첫 불순종과 그에 다른 결과를 다룹니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사람과 그 아내의 불순종은 뱀의 간교한 유혹에서 시작되었지요. 하느님께서는 먼저 뱀을 벌하시면서 여인의 후손과의 적대적 관계성을 예고하십니다.
불순종한 하와와는 달리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한 마리아는 악을 상징하는 뱀의 머리를 짓밟아 부수는 인류의 강인한 어머니요 보호자십니다. 그 과정에서 입는 발꿈치의 상처는 아드님의 고통, 인류의 고통을 품느라 칼로 꿰찔리고 헤집어진 그분의 피흘리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감한 여인이신 마리아는 그 상처와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인류를 떠나지 않고 보호와 돌봄과 전구를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
하와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이 의미는 마리아에게서 완성됩니다. 죽음의 악취가 가득한 세상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오게 하신 마리아의 용기와 순종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한 원조의 첫 범죄의 참담한 결과를 전복시키고 상쇄하고 회복한 것입니다.
"군사 하나가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아담의 옆구리 갈빗대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창세 2,22 참조)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합니다. 물은 성령과 세례 성사를, 피는 영원한 생명과 성체 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 하와인 교회는 마리아를 자신의 원형과 본보기로 공경하고 사랑합니다.
성모성월 안에서,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고 처음 맞는 날에 교회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기억하고 기뻐함은 참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어둠의 세력이 우리를 무너뜨리려 집요하게 유혹하고 공격을 해와도 우리에게는 당신 자식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악의 머리를 짓밞아 줄 든든한 어머니가 계시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버겁고 힘겨운 광야살이에서 늘 절룩거리고 비틀대면서도 기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품 안에서 사랑 받는 아기가 되어 마냥 행복하게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근심 걱정 두려움 모두를 어머니께서 맡겨 드리고 그저 편안하고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만큼은 그래도 된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바다에서 마음껏 노니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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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통의 가치, 사무엘이 죄에 대해 말하다. 그의 고통의 의미
마지막 판관이며 사울에게 기름을 발라 왕을 선임하고, 그의 후계자인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성별한 예언자인 사무엘은 판관기에서 우리에게 고통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 준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여섯 시기를 주기로 하여 살았다.
(1) 고통의 시기에서 빠져나와
(2) 회개의 시기로 들어서고
(3) 축복의 시기를 거쳐
(4) 호화로운 삶으로 들어가
(5) 오만한 생활로 돌입하여
(6) 마침내 재앙의 삶에 빠져들었다.
고통은 회개를 일으키고, 하느님을 향한 거룩함에로 이끄는 회개는 모든 삶과 기쁨과 선의 원천입니다. 이 원리는 임의적이지 않기에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인생의 거룩함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고통의 가치」: ‘고통의 실재’-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두 가지 본질적인 요점은 죄와 구원이며 질병과 치유입니다. 고통은 우리 죄에 대한 치유책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질병이 자리하고 있는 곳을 찾아내어 죄가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밝혀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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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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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LYX1DzU_9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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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십자가에서
어머니와
예수님을
만난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는
십자가와
함께 하신다.
십자가를
만난다.
어머니와
십자가는
분리될 수
없는 간절한
사랑이다.
십자가는
간절한
기도이다.
어머니와
십자가는
하나이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살게 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다시 맺어지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이다.
십자가의
성가정이다.
성가정은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살게한다.
십자가가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는
서로의
구원이다.
어머니는
십자가를 통해
새롭게 된다.
십자가는
어머니의
은총이다.
공동체는
십자가로
이루어진다.
공동체의 삶은
십자가의
연속이다.
십자가는
인격적
만남으로
서로를
자라게 한다.
공동체가
살길은
어머니이신
마리아처럼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이며
십자가의
계획이다.
십자가가
은총이다.
십자가의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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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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