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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Ephesu)-셀축(SELCUK)
Ephesus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사료는
기원전 13세기경 Hittite(힛타이트, 성경에 햇족)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이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Lydia)왕국의 크로수스(Croesus)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 에 처음으로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Delos)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뭄(Pergamum)에서 이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트스 황제)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스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7-8세기 들어와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으로 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잦은 지진과 이 지역을 흐르는 멘델레스 강의 범람으로 지각 변동에 의해
오늘날 바다는 이곳에서 5Km떨어진 쿠샤다스 지역까지 밀려나가 오늘날은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작은 음악당 오데온(Odeon)
오데온은 소극장이란 뜻으로 소규모의 공연이 이루어졌던 장소이다.
연극이나 행사가 열렸으며 약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AD 150년 경에 이 도시의 귀족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피아나(Flavia Papiana)에 의해 세워졌다는 명문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AD 2세기에 극장형으로 세워진 원로원이며, 문화의 장소이기도 했고, 연극 상연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에페스에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페스인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들은 대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서기 150년 경에 지어졌다는 이소극장은 또한 음악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천5백 명을 수용하였으며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 전용이었다.
부채꼴 모양으로 오케스트라석과 관중석이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작은 음악공연장이다.
에베소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지만 자치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도시였으며,
에베소 자치 원로회가 에베소의 정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 원로회가 모였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는데, 약 1,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곳에는 빗물이 빠져 나가는 배수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리우스(Varius) 목욕장
AD 1세기의 것, 냉실, 탈의실, 미온실, 온실, 사우나실 등이 있었다.
입장하며 바로 눈에 띄는 것은 바리우스(Varius)의 욕장이다.
바리우스(Varius)의 욕장은 2세기경에 지어진 곳인데,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커다란 세개의 아치가 눈에 띈다.
열탕(caldarium), 온탕(tepidarium), 냉탕(frigidarium)이 있다는데 아마도 세 아치가 각각의 탕으로 향하는 입구였을 것이다.
에베소에는 2 개의 아고라가 있었다.
이 오데온 건너편은 “작은 아고라(State Agora)”라고 불리는 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이 작은 아고라는 에베소 도시에서 운영하였던 시장이었는데,
여러 개의 작은 터널 같은 것은 아고라 안에 있었던 상점들이다.
이곳은 물건을 사고팔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 환담을 나누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도시에서 주관하는 모임이나 행사를 치렀던 곳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AD 4세기에는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작은 아고라(State Agora)와 오데온(Odeon) 사이에 3 개의 복도와 지붕이 있는 160m 길이의 바실리카가 있었는데,
이곳은 상업적인 용도로 사채업자들과 은행가들이 돈을 교환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지금 이곳의 마당에는 많은 토관들을 쌓아 두었는데
당시에 땅속으로 설치하여 사용되었던 수도관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들이다.
이곳이 BC 280년경에 건설된 곳이니까, 지금부터 약 2,300년 전에 흙을 구워서 만들어진 수도관인 것이다.
담수관(Freshwater pipes)
에베소 시청 (프리타네이온,Prytaneion)
작은 음악당 옆에는 에베소 시청(프리타네이온)이 있다.
프리타네이온은 도시의 행정기관, 즉 시청이 있는 곳으로 회의가 열리고 손님을 접견하던 장소이다.
도미티아누스 광장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기원전 3세기경에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시청 옆에 아르테미스 여신상(이곳에서 발굴된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셀추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이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에베소의 번영을 상징하는 성화가 365일 내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시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집이 있었다.
시청사 AD 3세기에 완공되었다.
바실리카 대성전
오데온의 좌석에 앉으면 무대 뒷 편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서 있는 곳이 바실리카이다.
지금은 그 기둥의 온전한 모습을 알 수 없고, 기단과 기둥의 일부 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곳은 화폐를 교환하는 곳으로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AD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165m에 이른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그 기둥의 머리는 황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바실리카(Basilica)와 광장(Agora)
바실리카는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회장소, 때로는 궁정 등에도 사용된 직사각형 평면의 공공건축을 말한다.
오데온 앞에는 바실리카의 기둥들이 길게 열을 지어 있다.
바실리카 앞에는 광장, 즉 아고라가 있다.
대리석 길에 있었던 ‘아고라’가 상업광장(Commercial Agora)이라면 이곳의 아고라는 국가아고라(state agora)다.
정치적, 종교적인 회합이 열렸던 장소다.
AD 1세기에 건립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AD 379-395) 시기에 마지막으로 개축되었다.
에페소는 이즈미르(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울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강을 타고온 토사가 항구를 매워서
지금은 항구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바다는 에페소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의해 해방되었다.
대왕이 죽은후, 에페소는 대왕 휘하의 장군 리시마코스(Lysimachos BC 361 ~ BC281)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리시마코스가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로마의 소아시아 서부지역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오늘날 발굴되는 에페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BC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어키자, 로마의 실라(Sylla)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BC27∼ AD14년)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광장(Domitian square)
헤라클레스문 바깥쪽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Emperor Domitianus, AD 81-96)를
봉헌한 신전(Domitian temple)과 폴리오샘(Fountain of Pollio)
그리고 멤미우스 기념비(Memmius monument)의 유적이 있다.
이 일대를 도미티아누스 광장(Domitian square)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황제를 봉헌한 신전을 세우는 것이 대단한 영광으로 그 도시의 격을 높여주는 의미가 있었다.
2층으로 구성된 기둥의 위쪽에는 기둥에 정교한 조각상이 남아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던 황제로 측근에게 시해된 후 원로원에서 기록 말살형이 내려지자
에페수스에서는 격이 낮아질까봐 이 신전을 그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우스황제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이 광장에는 기념비가 하나 있다.
이 기념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BC 27∼AD 14)의 치세에 멤미우스(Memmius)에 의해 세워졌다.
멤미우스는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었던 술라(Sulla)의 손자다.
이곳에는 에페수스에서 가장 큰 샘인 폴리오샘(Fountain of Pollio)의 아치가 남아 있다.
이 샘은 섹스틸루스 폴리우스(Sextilius Pollius)의 이름으로 아틸리우스(Atilius)에 의해 세워졌다.
폴리오 기념관 (Pollio Mounment) 과 폴리오 샘(Fountain of Pollio)
큰 아치에 폴리오(Pollio)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폴리오샘이라 불리운다.
에페스의 부자인 가이우스 섹스틸리우스 폴리오라는 사람이
건축한 이 샘은 42km 쿠샤다스, 15km 참륵마을, 20km 케이스터 강 이 세군데서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 와 점터를 구워 만든 토관을 통해 도시에 물을 공급하였고,
바로 옆이 병원터인 이유는 치료시 물이 필요했고 치료 후 샘물에 목욕을 하면 치유가 됬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런 폴리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양자기 바로 옆에 6.4m 높이의 받침돌 위에 8×6.5m 석관이 있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크레테스 거리
에페소의 가장 근간이 되는 명동거리 크레테스 거리입니다.
이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도시가 형성이 되었고,
헬수스 도서관을 지나 원형대극장,아르카디안 거리로까지 이어져 항구로 가게 됩니다
트라얀 분수 (Trajan fountain)
트라얀 분수에서 발굴된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크레테스 길 북쪽 끝에 위치한 이 분수는 AD 102년~114년에 로마의 트라얀 황제를 위하여 세워졌다.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샘으로 중앙 받침대 위에 서 있던 12m 높이의 황제 동상 발목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됐다.
물은 수로를 통해 귀족계층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됐다고 한다.
지금은 받침대와 동상의 오른 발만이 남아 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석조물(나이키의 어원이 된..)
니케(Nike)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으로 로마신화의 빅토리아에 해당하며, 영어로는 나이키라고 읽는다.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질투 또는 경쟁심을 뜻하는 젤로스와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 폭력을 뜻하는 비아의 남매이다.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아테나와 관계가 깊고 모습도 비슷하지만,
단독으로 그려질 때는 날개가 달려 있고 종려나무(실제로는 대추야자) 잎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파르테논신전에서는 아테나가 팔에 니케를 올려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에서
제우스 편에 선 탓에 종종 제우스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폴리오 기념관 (Pollio Mounment)
에베소의 아스클레피온(Asclepion)병원터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최초 종합병원의 터다.
뱀의 기둥 : 뱀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온'의 상징으로 부활을 뜻한다.
뱀의 허물 벗는 모습을 죽음에서 다시 소생하는것으로 여겼기 때문.
세계 최초로 정신 요법을 중심으로 한 치료 방법을 써서, 현대적 의미로 일반 치료는 물론
명상 요법, 음악 요법, 목욕 요법, 심리 요법, 운동 요법, 일광욕, 맨발 걷기 요법 등으로 치료하였다.
아스클레피우스(Asclepion)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의술(醫術)의 신(神)이다.
라틴어로는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라고 한다.
호메로스에서는 인간이며 의사라고 되어 있으나 훗날의 전설에서는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케이론 밑에서 자라면서 의술을 배워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제우스는 인간이 그를 통하여 불사(不死)의 능력을 얻을까 두려워하여 번개를 쳐 그를 죽였다.
그러나 아폴론의 요청으로 제우스는 그를 별로 바꾸어 오피우커스(Ophiuchus:뱀주인자리)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뱀은 약초를 발견하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믿어졌고,
아스클레피오스와 관계 깊은 신성한 동물로 보아 뱀을 위하여 수탉이 제물로 바쳐졌다.
병원의 표식-양을 몰고가는 신(아스클레피온,Asclepion)의 표식
크레테스 도로 (Curetes Street)
그리스 신화에서 소개되는 크레테스(Curetes)는 반신반인(semi-deities, 반은 신이고 반은 사람)이었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의 쌍동이 아이(Artemis & Apollo)를 임신한 "레토(Leto)"가 아이를 낳을 때,
크레테스(Curetes)가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의 질투로부터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가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소란을 피워 헤라가
그들을 보지 못하도록 혼돈시킴으로 그들을 도왔던 신이다.
그러나 에베소에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의 업무를 맡아 보는 승려(사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사제들(Curetes)은 아르테미스 신전에서만 일을 하였지만,
로마 시대에는 에베소의 시청(The Prytaneion)에서도 일을 하였다.
원래 The Prytaneion은 헤스티아(Hestia)여신의 신전이었던 곳이다.
리고 그들(Curetes)은 매 해 새로 뽑혔다.
크레테스 도로(Curetes street)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하얀대리석이 깔린 도로는
나중에 헤라크레스의 문에서 부터 시작하여 셀수스 도서관이 있는 곳까지 확장되었다.
도로의 양쪽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화랑이 있었고 화랑 뒤쪽으로는 가게들과 개인 주택들이 있었다.
또한 기둥의 앞쪽에는 에베소의 영웅이나 유공자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동상들의 받침대에는 동상의 인물에 관하여 설명하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크레테스 도로옆 상점 앞에 깔려있는 모자이크 길
하드리아누스 신전
건물은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 손실되었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입구에 있는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신등
여러 신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데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지중해 동부 지방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 중의 한곳인 에페소는 고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일컬어질 만큼 규모 및 화려함을 자랑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번째로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A.D 138년에
지어진 이 신전은 에페소스시민들에 의해 지어져 로마의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AD 117~138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의 오현제 중 하나로 추앙 받는 현황이였다.
선황의 조카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선황이었던 트라야누스 황제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한 황제였다.
속주들의 안보와 육성에 힘썼으며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정,관료,군사 제도 등
제국의 기초가 되는 제도들을 다듬고 혁신했으며 학문과 예술 등의 학술적인 면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또한 선황처럼 양자를 들여 자신의 양자이자 후에 황제가 되는 안토니누스피우스황제에 의해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 신전은 에페소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이다.
최근에 복원된 이 신전은 신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돌 담 위에
신과 여신들의부조가 가득하며
4명의 로마 황제 Diocletianus, Maximianus, Galerius, Chlorus의 상이 꼼꼼이 들어차 있다.
또한 신전 전면의 4개의 기둥 중 2개의 기둥을 잇는 아치는 에페수스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 아치위에 새겨진 인물의 모습은
첫번째 문의 아치위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 테티스가
두번째 문의 아치위엔 마찬가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고
행운의 여신 티케의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예식장 건물의 형태가 이 하드리아누스 건물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Scholastica Bath)
3층으로 되어 있었던 이 건물은 1 세기에 지어져서
4세기까지 계속되는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졌고 그때마다 다시 수리되어 오면서그 형태가 조금씩 바뀌었다.
스콜라스티카는 젊은 나이에 귀족이었던 남편이 죽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진으로 파괴된 공중목욕탕을 재건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남성들의 취향에 맞게 냉온탕과 탈의실을 갖추고 모임장소도 만들었으며,
목욕탕에서 사용된 물을 이용해 그 아래에
유료 수세식 공중화장실을 만들어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목욕탕 옆 자신의 저택에서 셀수스 도서관까지
지하 비밀통로를 만들어 저녁이면 남성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에 그녀가 만든 비밀통로는 도서관 바로 앞에 있던 사창가로 가는 통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도서관과 목욕탕 시설과 사창가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공중 화장실 (Latrines)
하드리안 신전의 왼쪽에 있는 공중 화장실은 가운데 사각형의 풀장이 있고,
그 둘레에 대리석 변기와 작은 수로(물고랑)가 있다.
이 화장실은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고 화장실의 바닥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고
수로를 통하여 깨끗한 물이 항상 흐르도록 설치하여 놓았다.
공중 화장실은 공중목욕탕인 스콜라스티카 목욕탕보다 낮은 지대에 만들었는데
공중목욕탕에서 쓰고 난 더운 물과 찬물이 공중 화장실로 흐르게 하여 수세식으로 뒤처리를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도시의 공중화장실에는 25명, 50명, 100명 이상이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구석구석에는 오물로 넘쳐나서 골치꺼리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성서 시대 특히 출애굽 시대에는 용변을 보는 일에 관하여 율법으로 제정하기도 하였다.
(신명기 23:12 ~14)
"진 바깥, 한 곳에 대소변을 보는 곳을 정하고,
진 바깥으로 나갈 때, 삽 하나를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땅에 구멍을 파낸 뒤 변을 보고 덮으시오.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진을 두루 다니시며 지키시고 여러분이 적을 이길 수 있게 도와 주실 것이오.
그러므로 진을 거룩하게 하시오.
여호와께서는 부정한 것을 보지 않으시므로 여러분이 거룩해야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오. "
그런가하면 예루살렘의 다윗 성을 발굴하던 과정에서도
BC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만든 변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테라스의 집들(언덕 위의 주택:Hillside houses)
셀수스 도서관에서 크레테스 거리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에는 상류층들이 살던 테라스가 있는 주택들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주택 앞에 있는 허물어진 거리의 바닥에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남아 있다
2세기 초부터 4세기까지 절정을 누렸던 이 집들은 도시의 부유층이나 귀족혈통의 성직자들이 살던 1층 건물이었으며
정원과 넓은 방, 응접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 있고 벽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셀수스 도서관(Celsus)
세계 고대3대 도서관에 해당되는 셀수스 도서관.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도움으로 최근에 재건되었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플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셀수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으며 벽에는 화려한 문양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리저리 연결된 도서관의 지하가 홍등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있다.
세계 3대 고대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페르가문 도서관 및 셀수스 도서관이다.
쥴리우스 셀수스는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아고라 터(Low Agora)
원형 경기장과 셀수스 도서관 사이에는 넓은 아고라가 자리하고 있다.
아고라는 지금의 시장과 같은 모습으로 무역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상품들을 팔기도 한 대형 시장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큰 아고라(상업아고라,commercial agora)
이 시장 터(상업 아고라)는 가로와 세로 110 m인 커다란 아고라로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이었다.
이 아고라에서는 주로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에서 온 향료들과 약용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다고 하는데,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크레오파트라 여왕이 이곳을 자주 다녀갔다고 한다.
이 아고라로 통하는 길은 에베소 항구로 이어지는 항구대로로 연결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바라본 브로델(Brothel)
당시에 매춘업은 일반적인 직업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하며 항구와 가까운 곳에는 항상 매춘업소가 있어
오랜 기간을 바다에서 보낸 뱃사람이나 상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사가들은 당시 에베소의 도시 규모에 비하여 유곽 건물이 아주 작은 것에 오히려 놀라워했다고 한다.
고대의 매춘업소로 추정되는 유곽이 쿠레테스 거리와 대리석이 깔린 거리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다.
이 건물은 다수의 작은 방들이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써 4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이다.
매춘부들이 일을 하던 유곽에는 창문이 없다.
방은 벽감(벽에 우묵하게 파놓은 부분) 위에 촛불을 두어 실내를 밝혔으며,
이 건물 바닥에 사계절을 표현하는 모자이크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살롱은 비너스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유곽(창녀촌)표시의 조각
돌에 새겨진 발은 당시 어른 발의 평균 크기라고 하는데, 그때는 발의 크기로 기준을 삼았다.
그리고 발모양이 그려져 있는 발가락의 방향은 유곽이 있는 방향을 표시한 것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그려 놓은 것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라는 뜻이며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이곳으로 오라는 뜻이다.
아주 그럴 듯한 다른 설명에 의하면,
여자의 형상 아래 있는 사각형은 장부 표시로서 외상도 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신용이 좋은 사람은 현찰이 없어도 받아 주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무슨 글자가 있었는지 희미하여 잘 알아 볼 수 없지만,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그곳에 쓰인 말은 “돈을 가지고 오면 사랑해 준다.”라고 하며
왼쪽 상단에 있는 하트 모양은 오시는 분에게 마음을 다하여 잘 모시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리석길(Marble street)
에페수스 대극장 앞에서 항구길의 직각 방향으로
켈수스 도서관 앞까지 뻗어있는 길로 에페수스의 주도로이다.
이 길은 대리석을 가공한 사각형의 포석으로 포장한 길이기 때문에 대리석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대극장 앞을 지나 이 길을 따라 계속 앞쪽으로 직진하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신전이 나온다.
이길의 한쪽에는 높이 8m의 기둥들이 도열하고 있고 그 뒤에는 시장광장,
즉 상업아고라(commercial agora)가 있다.
이 도로의 한쪽에는 유곽(Brothel)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항구 대로(Harbor Street),아르카디네(Arkadiane)
“아르카디네(Arkadiane) 대로”라고 불리기도 하는 항구대로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그 길이 549 m고, 넓이는 11m 정도였다.
그리고 길 양쪽으로 조각상 등으로 장식된 원주(둥근 기둥)가 늘어서 있는 회랑이 있었고 밤에는 횃불로 길을 밝혔다.
이 도로는 4세기 말에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토사가 점점 높게 쌓이자 이 지역의 지반을 높여서 만들었던 길이다.
고대에는 에베소로 들어오는 많은 배들이 정박하였던 항구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던 곳이었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바닷물이 빠져 나가고 풀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흙속에 묻혀있던 에베소의 유적들은 1895년부터 발굴 작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발굴되어진 에베소의 유적들은 사실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계속하여 발굴되어 지고 있다.
항구대로 부근에 성모 마리아가 에베소에 있었을 때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곳에
그녀를 기념하여세워진 “성모 마리아 교회”, “7인의 잠든 동굴”, 크레테스 길 뒤 언덕에 있었던 주택가, 등
수많은 보물과 같은 유적들을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져보고,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가 걸었던
그 길, 그리고 뜨거운 햇빛이 반사되는 대리석 길 위를 걸어가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손을 잡고 그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에베소이다.
아고라(시장)의 거리
시장구역인 아고라(Agora)는 사방 100m 넓이의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아고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라는 두 개의 문이 있다.
국제적인 상업 도시인 에페수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상점들은 주랑을 따라 있고, 상점들의 뒤쪽에는 둥근 원통형의 지붕으로 된 창고가 있다.
또 해시계와 물시계가 아고라 중앙에 놓여 있다.
반원형 대극장 (Great Theatre,야외극장)
대 극장의 무대 바닥에서 관중석 맨 꼭대기까지 높이가 60m인
이 대극장의 관중석은 3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약 2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커다란 야외극장입니다.
음향 장치없이도 말을 하면 관객석의 뒷자리까지 들리도록 말을 할 수 있었다.
마치 확성기를 사용하여 말하는 듯하는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인구를 추정할 때, 사용되는 척도가 대극장의 수용인원수이다.
예를 들면 대극장의 수용인원이 25,000명이라면,
그 도시에 살고 있었던 인구는 대략적으로 그 인원수에 10배를 곱한 250,000명이 거주 하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의 인구는 약 250,000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곳 대 극장은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 극장의 오케스트라는 반원보다 조금 더 큰 그레코로만(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뒤로 무대 건물이 있었다. 헬라 시대 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나
로마의 네로 황제 때(AD 54-68) 변형되어, 확대되었으며(230 m×30 m),
이곳에서 음악회나 연극보다는 투사들의 전투경기, 전차경기들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2만 5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이 야외 원형 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기 1-2세기경의 유적이다.
로마식 극장으로 재건된 것은 클라우디우스(34-41 AD) 시대를 첫 시작으로 하였고 이후 극장의 ,
3층이 네로 황제(54-68 AD)와 셉티무스 세베루스(193-211 AD) 시대에 지어졌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이 곳의 실내 정면은 각종 부조와 원주, 창으로 장식되어 있고 최상위 단인 3층 윗부분에는 다양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설교를 했던 반원형 대극장
에페수스는 사도 바울이 서기 53년부터 2년간 '신은 하나뿐이다'며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 곳으로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편지 '에베소서(書)'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기독교가 심한 박해 아래 있을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맹수들의 밥으로 잔인하게 죽였던 곳이었으며,
에베소의 시민들이 그 장면을 즐기던 장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곳을 발굴하면서 검투사들의 소품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인들이
원형 경기장의 좌석들을 다 뽑아버리고 그곳의 석재들을 가져다가 기독교 건축물을 세우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에베소 옆에 있었던 셀축의 사도요한 교회 건축에 많은 부분이 사용되었다
첫댓글 여행의 멋진 추억들이 가물가물해지는 차에 복습하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