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작사가이자 문학가 토우 박건호 고택 무엇이 문제인가
삼새
“모닥불 피워 놓고....” 노래와 가수는 알아도 작사가를 몰랐던 고향 사람들, 누구나 거의 다 관심 밖이었다. 하기야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도 무관심 했을 것이다.
“고향 가면 고향 없다!” 사제리 봉현마을 사라진 고택, 사제울 빵집, 방앗간, 2018년 현재에는 사제1리 사제리 수용소 뒤쪽으로 중앙선 철도가 신설되어 거의 완성단계에 놓여 있다.
더 더욱 고향향수에 성공해야겠다는 작사가 토우 박건호. 서울 생활 이후 사라진 고택에 관하여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대단한 반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진정 문화융성의 도시로 탈바꿈을 한다면 시에서 적극 지원하길 기원해본다.
2018년 새해를 맞이하여 소인배의 고향인 사제리 삼성동에 갔다. 사제리 하면 친척에 사돈에 동창까지 걸린 동네다.
누구는 알고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어떤 사유로 6촌간 친척이 고택을 인수하게 된다. 물론, 동창도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사제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절이 있는 배부른 산으로 소풍을 간적이 있다. 보물찾기, 장기자랑, 정상에 올라 문막과 원주시 그리고 낭떨어지기 벼랑바위 위에 서서 바라본 사제리 마을과 삼성동 마을 이때 동창이 살고 있는 고택에 들어 가본 적이 있다.
대청마루와 봉당. 방 그리고 새로 복원된 솟을대문 행랑체가 있었다. 대문 앞 우측인가 살구나무에 작은 연못이 자리를 잡고.......
어느 날, 원주시에서 박건호 고택을 유형지정문화재로 정하여 관리를 한다. 그런데 복원 및 집수리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기왓장을 올리기 전에 많은 복토를 깔아놓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 무게에 감당하기 어려운 대들보는 어느 날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갈라져 무너져 내리는 증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장마에 비도 새고 친척인 건물소유자는 시와 갈등이 진행 되었다.
재복원이냐 문화재 지정 해제냐 갈등 속에서 결국 친척 소유자의 문화재 지정 해제로 결정이 난다. 어쩔 수 없이 이후, 고택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목조형 고택의 수리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지붕의 무게다. 지붕의 무게를 받들고 있는 각종 도리와 대들보, 기둥의 규모에 따라 목조주택의 생명은 좌우된다.
어린 시절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 집수리 과정들을 많이 보아왔다. 지붕의 수리와 복원과정은 다음과 같다. 서까래 위에 산자 엮기나 개판을 설치 후 부연 개판과 중도리 개판 사이 물매 선을 고려하여 쭉대기도 올려놓는다. 그리고 난 다음 진흙을 올려 깐다. 때론 근래에 와서 그 위에 부드럽고 날렵한 지붕의 물매선을 잡기 위해 그 위해 이중 덧서까래를 걸고 방수합판을 설치하여 기와를 올리는데 덧방 씌우기 설치로 하중이 증가된다.
고향집도 초가이었던 것을 가을이 되면 용마루 이엉과 추녀 이엉들을 만들기 위해 볏 집을 구하느라 난리를 친 적이 있다. 그래서 이엉을 걷어버리고 1980년에 들어와 덧서까래를 걸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렸다. 대들보가 잘 견디어 낼까! 노심초사 하였는데 40년이 넘어도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
그때 부모님과 이엉을 엮고 새끼줄도 꼬고 굼뱅이도 잡아 고아 먹던 시절이 생생하다.
결론적으로 지붕에 들어가는 재료량의 총 무게를 치밀하게 계산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붕의 무게에 대들보나 처마도리 중도리 종도리 대들보 창방과 평방 기둥 역순으로 걸리는 무리한 무게의 힘은 건물을 쓰러지게 하는 요소다. 물론, 기초석과 기둥의 규모도 좌우한다.
기둥의 규모와 추녀도리 중도리 종도리 대들보의 규모에 따라 지붕 수리를 잘해야 오래간다. 부연이나 추녀가 긴만큼 아름답고 빼어나나 지렛대 힘의 원리에 의해 기둥으로 가하는 힘은 배가 된다는 점 고려해봐야 한다.
목조고택이 사라지던 날
삼새
무당벌레 같은 굴삭기가
붐 대에 바가지를 달고서
언덕길을 걸어 올라온다.
쿵쿵쿵
삐그덕 삐그덕
탈탈탈 탈탈탈 탈!
이른 아침부터
배부른 산이 울리도록
탱크전차 소리인양
점점 크게 들려오는 궤도소리!
귓가에 다가온 왕벌소리처럼
엔진 위에 달린 머플러에서는
와왕 왕왕왕
독소방귀를 토해낸다.
6, 25 전쟁시
폭탄에 행랑채 부서지듯
기왓장들은
마당에 곤두박질쳐
사정없이 깨지며
비운의 비명을 지르고
대들보 서까래 부서지는 소리는
놀부네 집 돼지 목 따는 비명 소리다.
고택은
고택은
장마에 의해
모래들판에서 쥐죽은 듯
토우가 사라지는 것처럼
삽시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임들의 곁에서
싹쓸이 사라져갔다.
2003년 전 후 고택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회상하면서
만인이 1950, 6. 25에 고택이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6. 25때 행랑채만 소실되고 본채는 살아있었다.
소인배가 고등학교 시절 이후 2003년 전까지만 해도 사제리를 오가면서 그 집을 바라보았다. 고택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라진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 타향살이에 소인배도 모르게 고택이 사라진 것이다. 대단히 안타까웠다.
특히 2007년 12월 9일 토우 박건호 작사가이지 시인님의 사망 이전 생존 시 사라진 고택이라서 서울과 고향을 오가는 본인으로서는 병고에 대단히 충격이었을 것이다. 고향 가면 고향이 없다. 실감난다.
우리 집은 아버님이 목수라서 1972년 전후 사제 초등학교 4, 5학년 시절 하삼 터 6촌간 친척집 행랑채를 해체하여 개울 건너 또 건너서 지게로 운반해 돌달고 놀이 지경다지기 하면서 손수 가족으로 힘을 모아 나무 기둥에 흙벽 집을 지으셨다. 현재까지 잘 보존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앞으로 꿈은 달고 놀이 재현이다.
달고야 달고야 돌달고야 어데 갔다 왔노. 땅 다지면서 놀아보세.
남에 일에 콩 내 놓아라 밤 내 놓아라 할 것은 아니지만 같은 고향마을에 기거하면서 그래도 한 구절을 남겨본다.
봉현 마을 기와집 하면 사제리 마을에서 모르면 다 간첩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겪이지만 진정으로 문화의 도시라면 작사가이자 문학가 토우 박건호 선생님을 선양한다면 참회하는 마음으로 복원사업에 힘을 써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생존해 있는 친척들 및 유족과의 갈등을 하루 빨리 해소하고 고택이 잘 복원 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고택 생가, 기념관과 문학의 올레 길들은 원래 제 위치에 조성되어야 한다. 춘천 소설가 김유정 생가도 봉평 이효석 생가도 박경리 소설가 생가도 살던 생가 터는 아니지만 그 곁에 제대로 복원 보존하여 추모하고 문학의 장을 열고 있다.
특히, 사제리 일대가 유년시절 문학의 꿈의 장이고 영원의 디딤돌이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2018년 신년 초부터 두서없이 열을 올려본다. 역사의 진실은 언제인가 드러난다. 오히려 숨기려 하면 역사 앞에 죄를 짓는 행위다. 그렇다고 논쟁은 시간소모전에 불과하다. 지금부터라도 아픔의 상처와 치유 그리고 문화융성의 선양사업이 최선이 아닐까 결론을 내려 본다.
못난 소인배로서 아무 말 없이 살아가는 친척분의 이야기를 늦게나마 대신하며 2018년 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만수무강을 기원해봅니다.
2018년, 1월, 1일 사제리 친척집에서
소나무 왼쪽이 만종 방향이고 가운데 산과 우측으로 있는 산이 배 부른 산 저기 저 그 기슭 아래 파란색 그곳이 고택지, 우측 기슭으로 등골 계곡을 끼고 좀 더 오르면 절이 등장한다. 우측 솔가지 끝에 걸린 봉우리가 봉화산 이 넘에 원주시청이 놓여 배부른 산과 정 반대로 위치하고 있다. 고가 순환도로가 존재하는 삼성동 마을 개천을 따라 가로 질러 차들은 문막과 팔포 문예와 충주방향 매지리를 오가고 있다.
좌측 방향 고개 넘어 팔포 문예는 한약방이 있어서 사제리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용하였다. 장마철이면 다리가 떠내려가 고택이 있는 봉현에서 수영을 해서 약을 사와야만 했다.
첫댓글 사라져가는 옛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
늘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