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에서 술레이만의 황후에 이른 휘렘 술탄. 통칭 록셀란(Roxolana)>
술레이만은 록셀란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힙비(Muhibbi)-사랑에 빠진 자-라는 무척이나 손발 오그라드는 필명으로 록셀란에게 바치는 시를 여러편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술레이만의 장자 무스타파는 별 일이 없으면 술레이만의 뒤를 이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스만 왕실의 전통에 따라 이란에 대한 원정 등 여러 군사적인 업무를 담당했지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술레이만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문제를 빼고 본다면, 무스타파가 너무 인기가 좋았다는 점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셀림 1세가 예니체리에 대한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서 바예지드 2세를 폐위시켰듯이 술레이만은 무스타파가 예니체리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이용해서 권좌를 뺏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던 거지요. 뭐, 납득가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래도 더 재미있는 쪽-그러니까, 여자가 끼어든 이야기-에 관심을 더 주게 마련이었죠.
무스타파는 휘렘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첩의 자식이었지요. 사람들은 휘렘이 자신의 친아들을 권좌에 올리기 위해 자신의 딸과 결혼한 재상 루스템 파샤와 협력, 그리고 술탄이 자신에게 푹 빠져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결국 무스타파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제 남은 아들은 휘렘의 아들들인 셀림과 바예지드였고, 당연히 둘 중 하나가 오스만의 칼을 차게 될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수의에 쌓여 땅에 묻히겠구요. 둘의 암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둘 사이의 긴장감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바예지드가 더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여요. 셀림에 비해 이스탄불에서 더 가까운 곳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558년 휘렘이 사망한 이후 둘은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합니다.
바예지드는 셀림을 견제하기 위해 셀림이 다스리는 마니사 지역의 무역로를 훼방놓기 시작하지요. 이 꼴을 보다 못한 술레이만은 그런 식으로 막나가면 오스만 계승법을 거스르고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인 오스만샤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고 협박하기에 이르죠. 결국 그는 두 왕자들의 임지를 바꿔버립니다. 셀림은 코냐로, 바예지드는 코냐보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아마시아로 옮기도록 하죠.
바예지드는 멍청한 짓을 저지릅니다. 이런 결정에 불만이 많았던건지 원래 임지에서 아마시아로 옮겨가는 데 늦장을 부린 거죠. 이 걸로도 충분히 술탄을 화나게 만들기에 충분한데 한 술 더 떠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술탄이 허락은 했지만 지급은 해주지 않자 '세계의 술탄이란 작자가 이렇게
약을 팔면거짓말을 하면 도대체 앞으로 누가 술탄 말을 듣겠습니까?' 라고 툴툴 거리죠. 그리고 아마시아까지 이동하는 동안 병력까지 증강합니다.
이에 비해 셀림은 철저히 말 잘듣고 착한 아들 이미지를 굳힙니다. 아버지 명령에 군말없이 새 봉지인 코냐로 옮기고, 바예지드의 각종 조롱과 비웃음에도 묵묵히 참고 넘겼죠. 말 안 듣는 바예지드로 인한 내전이 우려되는 이즈미르의 함선들의 대포도 셀림에게 보내주는 동시에 아나톨리아의 장관에게 셀림의 군대와 합류할 것을 명했습니다. 셀림 스스로도 카라만의 총독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죠. 사실상 두 아들은 내전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셀림의 등 뒤에는 술레이만 대제가 있었다는 거죠. 결과야 거의 뻔했습니다. 오스만의 최고종교지도자인 무프티가 '반란을 일으키는 아들(바예지드)를 죽이는 것은 합법이다' 라는 파트와(Fatwa)를 발표하고, 내전이 다시 한번 시작되었습니다.
1559년 5월 두 왕자는 코냐 근처에서 맞붙고 이틀 간의 전투 후 바예지드는 패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바예지드는 죽자 사자 튀어 결국 샤 타흐마스프가 다스리는 사파비 페르시아로 망명을 하는 데 성공하죠.
술레이만과 셀림으로써는 비상사태에 걸렸습니다. 일전에 바예지드의 동생 젬 때문에 다름 아닌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국가들에게 연공을 제공해야 했던 신세처럼 이번에도 오스만의 최대 적수인 페르시아에게 오스만 왕가의 일원이 넘어간 거니까요.
샤 타흐마스프는 의심이 많은 군주였습니다. 어린 시절 즉위해서 이리 저리 끌려다닌 경험이 있던 지라 자신의 권좌를 노리는 모든 시도에 대해 불안감을 품고 있었죠. 처음에는 바예지드를 환영했지만 점차 그를 의심하게 되었고 1561년 바예지드를 송환하는 조건으로 술탄 스스로가 90만 두카트, 셀림이 30만 두카트를 지불하겠다고 제의하자 결국 다음 해 7월 바예지드를 오스만 사절단에게 넘겨 주고, 그는 그 자리에서 네 명의 아들과 함께 처형됩니다. 바예지드의 아직 어린 막내 아들은 부르사에서 살해당했구요.
이렇게 마지막 남은 셀림이 셀림 2세가 되어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주정뱅이' 셀림 2세(1566~1574)>
셀림 2세가 1574년 사망할 당시 왕위를 물려받을 정도의 나이가 되는 아들은 무라드밖에 없었고, 아무 사건도 없이 조용히 무라드 3세로 즉위했죠. 무라드 3세가 사망할 때에도 가장 나이가 많은(나머지는 다 어렸기에) 메흐메드가 메흐메드 3세로 즉위했습니다.
아, 그럼 어린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1574년 셀림의 관이 궁정에서 나와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 영묘로 이동할 때, 이스탄불 시민들은 셀림을 따르는 다섯 개의 관을 더 볼 수 있었습니다.
1595년 메흐메드가 즉위할 때에, 당시 역사가인 페체비는 '19명의 어린 왕자들이 어머니의 무릎을 떠나 신에게로 갔다' 라고 기록했었죠. 또다른 동시대 역사가인 셀라니키는 '가장 높은 곳의 신은 옥좌 주위의 천사들에게 이스탄불 주민들의 울음 소리를 듣게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더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되겠죠?
보시다시피 이렇게 형제를 죽이는 전통은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꼭 내전으로 발발한다는 게 문제였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들이 총독으로 파견되서 일을 하면서 힘을 키우고, 그러다보면 권좌를 노리게 되고 결국 내전이 되니, 모두 궁정에 처박아 두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해서 오스만 왕실 후기의 전통인 '카페스(새장) 감금'이 시작되었습니다.
ps : 분량조절실패 ㅜㅜㅜㅜ
첫댓글 잘 봤어요
ALL or NON
참... 이슬람권에서는 대대로 계승분쟁이 극심한거 같아요. 계승분쟁이 저렇게 극단적이지만 않았어도 사회의 안정성이 크게 높아지고, 사회가 보다 고도화 될 수 있었지 않은가 싶은데... 참 안타까운 부분인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