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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Baroque)라는 말이 있다. 예술의 역사, 특히 음악사에 있어 17세기 안팎을 가리킨다. 그 어원이 재미있다. 왜곡된 삼단논법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된다는 설도 있고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가 그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대체로 후자를 가리키는데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이 단어에 대한 인상과 달리 그 무렵에는 당대의 주류 질서나 일반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과장된, 위악적인' 것을 뜻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중적인 레퍼터리로 통하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어 보자. 기타 줄을 입으로 물어뜯는 요즘의 문화적 풍경으로 보면 자칫 '단아하고 미려한 선율'로 들리겠지만, 당대의 정서로 돌아가면 비발디는 매우 이질적이고 위악적인, 마치 거침없는 폭포수와 같은 충격의 선율이다. 특히 '여름'의 3악장 '폭풍우'에 이르면 그 위악적인 상상력과 야심찬 스케일로 인하여 듣는 이의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한다. 극한을 향하여 질주하는 현악 합주 사이로 마치 물살을 역류하는 연어의 몸짓처럼 순식간에 비상하는 독주 바이얼린의 작렬하는 현은, 그 당대의 주류 정서로 보건대 '괴상하고 위악적인' 음악이었을 것이다. 이를 그 당대의 지배적인 입장에서 경멸하기 위하여 '일그러진 진주', 곧 바로크라고 불렀던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그 '일그러진 진주'가 곧 근대의 예광탄이었다. 비발디와 바흐를 앞뒤로 하는 바로크 음악은 저 르네상스(이탈리아)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산업혁명(영국), 철학혁명(프랑스), 종교혁명(북유럽) 등과 공진화한 것이며, 궁극에 있어 시민혁명(프랑스)으로 이어지는 유럽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예술적으로 일찍 예감하고 좀더 촉진시킨, 대항해의 정서적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를 당대의 주류 정서는 '바로크'라고 경멸했다.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러한 문화적 충격으로 인하여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견고한 지배구조의 반석 위에서 보자면 이 바로크 음악은 그 단단한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듯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면죄부를 팔면서 유지해온 자신들의 천년 왕국이 '이질적이고 위악적인' 예술가들의 야심찬 상상력에 의하여 흔들리고 있음을 그들은 느꼈을 터, 이를 '바로크'라고 조롱했던 것이다. 네 편의 칼럼에서 비발디를 조롱한 주류를 떠올리다 나는 그와 비슷한 양상을 지난 며칠 동안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김형기 사회부장의 '밥값 좀 내시오'와 같은 신문 김대중 이사기자의 '대통령과 응원단장', 그리고 <중앙일보> 권영빈 편집인의 '굿바이 레닌, 굿바이 386'과 같은 신문 이상일 정치부 차장의 '깍두기 머리의 정치학' 등 네 편의 칼럼이 그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게재된 네 편의 칼럼을 읽으면서 나는 단단한 반석 위에서 버티고 있던 그들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문화적 지진 상태에 직면하여 갖가지 경멸과 조롱의 언어로 간신히 버티고 있음을 뚜렷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염려한다. '한 때 빨갱이 노래로 몰렸던 노래를 청와대서 부르게 된 것에 감격하는 사람들'을 염려하고 '시중에서는 지도자의 '수준'을 염려하는 소리가 너무 많이 들린다'며 걱정한다. '과거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못 듣던 소리'라고도 한다.(김대중) 그런데 가만 보면 경멸과 야유가 칼럼들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다. 아직도 이 '신주류의 정체성 또는 행동양식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감'이 있다고 쓰면서 이를테면 '살벌하고 적대적인 말투'가 문제인데 '돌아서서는 상스럽다, 천박하다고 경멸'하고 있으니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주류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충고한다.(김형기) 시중에 화제가 된 노대통령의 머리 스타일을 언급하면서 '깍두기는 원래 김치 축에도 끼지 못했고 양반 밥상엔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비유하는가 하면, '노 대통령의 말이 갈수록 강해지고 거칠어지는 양상'이라서 '깍두기'의 '조폭문화가 발호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기도 한다.(이상일) 이러한 조롱과 야유 속에서도 나름대로 근심을 동반한 지적도 없지 않은데 '청와대 만찬장에서 울려 퍼진 님을 위한 행진곡 이벤트는 그들의 의식이 아직도 24년 전 광주민주화운동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낀다는 언급이 그것이다. '나라 미래를 책임질 자리에 오른 이들이 아직도 과거 회귀적이고 비주류적 발상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권영빈) 약간의 편차가 있기는 해도 4편의 칼럼이 오늘의 상황에 대하여, 특히 새로운 문화적 지형과 정서적 흐름에 대하여 매우 불편해하고 있음은 확연하다. 수십 년 동안 이 나라의 정서를 지배해온 입장에서 보면 청와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머리카락을 '도전적'으로 짧게 치는 이른바 '신주류'가 거북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칼럼들이 지적한 몇가지 부분은 '전술적으로' 검토할 만한 여지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정파적 입장을 떠나서 보건대 이와 같은 불편한 심기는, '바로크'가 그랬던 것처럼, 지난 시대의 주류적인 정서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역설일 뿐이다.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주류의 불편한 심기 말하자면 조선일보 김형기 사회부장의 이른바 '교양론'이 특히 그렇다. 그는 세련되고 설득력있는 주류의 언어로 '말투'를 고치고 '품위와 책임감을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이를 한마디로 '교양'(敎養)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이야말로 내가 보기에는 일체의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지와 편견의 소산이다. 도대체 '주류의 언어'란 무엇이며 대저 '교양'이란 무엇인가. 세련된 옷차림에 얌전한 말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김형기 사회부장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정도의 현상적인 요구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도 있거니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이라면 일부러 꾸미고 치장할 이유가 전혀 없는 형식적 차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서 '교양'이라는 말만큼 오용되는 경우도 드물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로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쓴 <교양>이라는 책이 널리 읽히는 우스꽝스런 현실이 이른바 우리의 '교양' 수준이다. 꼭 외면할 까닭은 없지만 그래도 유럽근대문명 중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현대의 다양한 대중문화에 대하여 편견과 오해로 얼룩진 슈바니츠의 책이 '교양'이란 이름으로 필독이 되는 어이없는 현실. 여기에 더하여 김형기 사회부장이 뜻하는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주류 언어'를 교양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따위 교양은 결코 익히고 싶지 않다. 진정한 교양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통하여 당대의 절실한 과제를 성찰하고 그것의 진정한 극복을 위하여 인류사의 지식과 문화를 재해석하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현실 속으로 영육을 실천하는 행위다. 한 발은 이상을 향하되 다른 발은 현실을 굳건히 딛고 있는 상태가 교양의 좌표다. 교양이란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가 아니며 세련됨과 투박함의 문제는 더욱 아니다. 견고하고 복잡한 사회 양상에서 무엇이 퇴행적이며 또한 무엇이 미래적인가를 성찰하고, 이를 위하여 인류의 다양한 지식과 문화를 배우고 또한 익히는 것이 교양이며, 궁극에 있어 다양한 형태의 '실천'으로 교양은 완성된다. 이러한 진술이 이른바 일부 '386 정치인'의 말투와 행동양식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점검하고 비판할 대목이 많다. 하지만 결코 그 판단의 기준이 '세련된 주류 언어'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늘의 싱싱하고 역동적인 정서로 보건대 너무 낡고 퇴행적이다. 비발디든, 모차르트든, 베토벤이든 누구도 당대에는 '교양인'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경기도 어딘가로 여름 야외 축제를 구경간 일이 있는데 그놈의 '개회식' 시간이 다 지났는데도 수많은 관객들이 땡볕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려야만 했다. 오후 2시의 태양은 온 몸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었다. 바디 페인팅을 한 출연자들의 몸은 녹아내릴 듯이 보였다. 이윽고 시커먼 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교양인'들이 나타났다. 운전수가 문을 열어주고 수행비서가 받쳐든 양산 아래로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하는 검은 양복의 유지들, 지역의원들, 기관장들. 그 순간에도 자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지 뻣뻣하게 고개를 들어도 될지를 감각적으로 판단해내는 그 '세련된' 처세의 손놀림과 눈동자들. 검은 양복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개회사에 치사를 읊어대는 이른바 '세련된 주류 언어'의 교양인들을 보면서 나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날 문화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그 '교양인'들이었다. 낡고 닳은 언어와 퇴행적인 감수성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작렬하는 태양과 상상력에 가득찬 관객들의 비판적인 시선을 피해가며 겨우 격려사의 끝줄까지 읽던 그 '주류언어'의 교양인들. 세상에 그런 비현실적인 퍼포먼스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낡고 닳은 '세련된' 주류 언어 따위 가볍게 물리쳐도 좋을 일이다. 비발디든, 모차르트든, 베토벤이든 당대에는 누구도 '교양인'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새벽의 비좁은 산책로. 저 앞에서 귀족들이 걸어온다. 그러나 헝클어진 머리에 남루한 옷차림의 베토벤은 성큼성큼 걸어가지 않았던가. 중세의 낡고 닳은 '교양인'들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간 베토벤에 대하여 누가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한단 말인가. 들어라. 쉴러를 통하여 베토벤은 노래한다.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손을 마주잡자, 세상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세계의 만민이여, 성좌의 저편에 신을 찾아라, 별들이 지는 곳에 신이 계신다.' | ||||||||||||
2004/06/08 오전 8: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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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려 놓으신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