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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18) [천붕오천멸살지계는 시작되고.....] 가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을까. 제법 싸아한 바람이 누런 잎사귀 몇 잎 남지 않은 수목을 헐벗게 만들었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어둠과 함게 거세지더니 어느덧 폭우로 돌변했다. 어둠 그리고 비.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좋은 환경이 없다. 칠흑 같은 어둠을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잇게 도와주고, 쏟아지는 빗소리는 기척마저 숨겨 준다. 병부상서 이충원의 저택 내실에 들어와 있는 이들이 그랬다. “그대가 내 집에 웬일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이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초로의 노인처럼 보이는 이자가 명 제국의 병권을 쥐고 있는 병부상서 이충원이었다. 태연스레 물었지만 이충원의 내심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자의 신분 때문이었다. 동창 첩형의 한 명인 금라도(金羅刀) 오영천(吳英川)이었던 것이다. “병부상서 이충원은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으시오!” “무슨 말이냐. 황제 폐하의 어명을 왜 내가.... 허억!” 고함을 내지르던 이충원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내공이 끌어올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산공독!” 경악한 얼굴로 이충원은 부르짖었다. 산공독(散功毒). 일반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독(毒)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결코 마셔서는 안 되는 독이 산공독이다. 몇 시진에 불과하지만 내공을 흩트리는 작용을 하는 독이 바로 산공독이기 때문이다. “힘쓰지 마시오. 지금 이 건물에 있는 모든 무인들은 산공독에 중독되어 있소이다. 동창 첩자들만 빼고 말이오.” 오영천은 빙그레 웃었다. 하우장설이 동창을 장악하면서 가장 먼저 추진했던 일은 북경에 거주하는 각 관리의 집에 첩자를 심는 것이었다. 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주방에서 일하는 자들까지 동창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충원의 집에 거주하는 백여 명의 식솔 중 적어도 열 명 이상은 동창에서 파견한 첩자였다. “가만 있자..... 자식 다섯에 손자가 스물. 아들 넷은 관직에 있고, 하나 있는 딸도 지방 관리의 부인이었구먼.....” 오영천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충원의 얼굴은 참혹하게 변했다. 놈들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거사 일까지 파악한 상황에서 하루 전날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하늘이여....’ 스르르 무릎을 꿇는 이충원의 귓전으로 오영천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대감이 반역도당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눈감아 줄 수도 있소이다. 그와 함께 역모를 획책했다는 사실만 자백하면 말이오.” “나더러 주군을 배신하란 말인가?” “배신이 아니외다. 자식과 손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굳이 말씀 안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영환공이나 한림학사 또는 오군도독부의 좌우도독 중 한 사람만 발설해도 되니까요. 저는 다만 대감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은 겁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오영천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환하게 웃던 손자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감.” 오영천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이미 예견했던 일이다. 가족이 있고 딸린 식솔이 있는 자는 절대 거절하지 못한다.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원래 계획대로 연회석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만찬을 질기시고요. 그리고 이건 내공을 완전하게 없애는 독단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룬가?” 오영천이 던진 독단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충원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감은 자연사로 처리될 겁니다. 남경왕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죄송합니다, 주공! 천심은 우리에게 있지 않나 봅니다.” 남경왕이 있는 장군부를 향해 고개를 숙인 이충원은 미련 없이 독단을 삼켰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남경왕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열 살도 안 된 손자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늘을 원망하며 운명에 순응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충원은 망연한 눈으로 창밖을 주시했다. “비원! 병부상서 이충원에 대한 건은 마무리되었다고 보고해라!” “존명!” 오영천의 명령을 받은 동창무인 한 명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 폭우가 몰아치던 그날 밤, 북경 도심 여섯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림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무인들은 장경각(藏經閣)이라고 대답하고 단 한 번이라도 그곳에 들어가 보기를 꿈꾼다. 장경각은 소림 무공의 보고이기 때문이었다. 창건 이래 소림에서 창안된 모든 무공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은 그야말로 기연의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모르는 사항이 있었다. 기연의 장소로까지 불리는 장경각에는 무공기서보다는 불경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끄응! 빌어먹을! 글씨 쓰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실내 한편에서 나직한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무공을 적어 주겠노라고 자신 있게 장경각으로 들어온 백산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무공 지식을 글로 옮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부족한 듯싶어 보충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적고 있던 무공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낙서로 변해 버린다. 더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 글을 쓰고 있지만 글씨체는 악필, 바닥에 뒹구는 수북한 종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린 것들이었다. “이 인간은 밥 가지러 가서 죽었나.” 낮게 중얼거리며 백산은 계단 쪽을 흘끔거렸다. 장중의 죽음 이후 비무는 삼 일째 중단 상태였고, 그동안 백산은 이곳에서 줄곧 무공을 적고 있었다. “요정! 이제 오면.... 설련?” 안으로 들어서는 무광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던 백산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커다란 소반을 들고 요정을 뒤따르는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설련이었다. “끄응! 저도 반갑게 맞아 주시면 안 됩니까?” 주변에 널린 구겨진 종이들을 보며 요정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백산이 이곳에 들어온 지 삼 일이 지났지만 단 한 권의 비급도 써내지 못했다. 이건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건 저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종이만 낭비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그저 실처럼 뽑아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알아먹을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추어 정리하려다 보니 지금처럼 되어 버린 듯했다. 백산 곁에 앉아 이리저리 조언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의 신경만 거슬리게 할 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데려온 사람이 설련이었다. 그녀를 장경각으로 데려오기 전, 백산이 처한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밥이라도 먹고 가지?” “사숙님, 설 소저가 가져온 건 만둡니다. 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만두요.” 요정은 볼멘소리를 했다. 경내에서 고기 냄새를 풍기는 것만으로도 불경이거늘, 그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라니. “아셨어요?” 면사를 떼어 낸 설련은 요정을 보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요정대사에게서 백산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준비한 건 음식이었다. 음식을 가져와야 할 곳이 소림사라는 생각도 잠시, 두 개의 찬합을 준비하여 아래쪽에는 만두를 가득 담았다. “끄응! 설 소저도 사숙님을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위에 소채를 얹는다고 냄새가 어딜 가겠습니까.” 요정은 웃고 말았다. 백산을 생각해서 하는 일이었기에 뭐라 할 말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정규교육을 받은 그녀가 아닌가. 하지만 요정은 더욱 더욱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내공으로 찬합을 감쌌는데 제대로 안 됐나 보네요.” “맞네, 뭐. 그리고 고기만두를 한 번도 안 먹어본 중이 냄새는 또 어떻게 알아? 혹시 곡차처럼 몰래 숨겨 두고 먹는 것 아냐?” “아미타불! 방금 했던 말 정정하겠습니다. 두 분은 닮았습니다. 아주 딱이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요정은 이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백산에게 가지고 하자 아무 생각 없이 고기만두를 담는 설련의 모습에서 그녀가 백산을 생각하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백산에게 좋은 인연이 이어진 것 같아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장경각이 이런 곳일 줄은 몰랐어요. 얼마나 넓죠?” 요정이 나가자 설련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와 보는 장경각은 경이로웠다. 이층 건물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엔 진(陣)이 설치되어 있었다. 진을 통과해 들어오자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층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서가가 지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둠 때문인지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장경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족히 수만 권은 되지 싶을 책들이 서가에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음! 저 끝까지는 이십 장, 횡으로는 십 장. 대부분 석판이나 목판으로 된 불경이고, 무공비급은 불경들 속에 숨겨져 있나 봐. 이건 내 생각인데, 소림사 중들도 얼마나 많은 무공비급이 숨겨져 있는지 모를 거야.” “그럼 도둑이 든다 해도 아무것도 집어 갈 게 없겠군요? 하기야 들어올 도둑도 없겠지만.” 설련은 싱긋 웃었다. 소림사의 장경각을 기연의 장소라 부른다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장경각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기연이 없으면 소림 무공 한 자락도 얻지 못한다. 대충 들고 나간다 해도 십중팔구는 불경일 것이다. 고서점에서나 필요한 것들. “참! 내 정신 좀 봐. 식사하세요.” 의자를 당겨 탁자 앞으로 다가온 설련은 보자기를 풀어 찬합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실내에 향긋한 냄새가 진동했다. “같이 먹자.” 입맛을 다시며 백산은 만두를 집어 들었다. “전 먹었어요. 어멋!” 뱃속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설련은 얼굴을 붉혔다. 요 며칠 식욕이 떨어지는 바람에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백산을 보자마자 식욕이 당기며 뱃속이 요동을 쳐댔다. “배가 불러도 같이 먹어주는 게 예의야. 잔말 말고 먹어.” “알았어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녀는 젓가락을 쥐었다. “그런데 저건 다 뭐예요?” 한쪽에 수북한 종이를 보며 짐짓 의문스런 얼굴로 물었다. 백산이 써둔 것임을 왜 모르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색해서 해 본 말이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끄집어내는 중인데 그것도 쉽질 않아. 심득(心得)이라고 어려운 글로 적는 녀석들의 욕을 많이 했는데 이해가 가더라고.” “그러니까, 이것저것 뒤섞여서 정리가 안 된단 말이죠?” “맞아. 백보신권에 대해 기술하려면 용왕유권이 떠오르고, 아라한신권에 대해 적으려고 하면 관음청강수와 무상각이 떠올라. 그러다 보면 무공도 뭐도 아닌 낙서가 되어 버리고.” “백랑은 너무 아는 게 많아서 그래요..” “그건 맞는 것 같아. 용왕유권 한 가지만 적으라면 금방 하겠는데.... 그렇게 적으면 의미가 없잖아.” “맞아요. 이미 전해 주었는데 같은 글을 또 적을 필요는 없지요. 그냥 지금처럼 하시면 돼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종이들을 가리키며 실련은 말했다. 어쩌면 백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 그가 낙서라고 말했던 것들이리라.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흘러나온 것들에는 그동안 백산이 익혔던 무공을 비롯하여, 백산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내용들이 적혀 있을 것이다. 요정대사가 원하는 것도 다르지 않을 터이고. 백산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럼 알아먹질 못하잖아. 글씨체도 엉망이고 내가 써 놓고도 글씬지 낙선지 모르겠는데.” “그걸 왜 백랑이 신경을 써요. 나중에 백랑이 기술한 무공기서를 보고 익힐 사라들이 신경을 써야지. 그리고 기연이라는 건 쉽게 오면 재미없잖아요.” “기연? 그러니까 설련의 말은 내가 쓴 낙서들이 기연이 된다는 거야?” “당연히 기연이죠. 천 년 역사를 가진 소림이지만 백랑 머릿속에 있는 무공보다 강한 무공은 없잖아요. 백랑이 기술한 무공기서를 보다가 운이 좋은 사람은 지금보다 더 발전된 용왕유권을 발견할 테고, 또 어떤 사람은 관음청강수를 발견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도(刀)를 익힌 사람은 광풍도법을 발견하게 될 테고.” “그런가? 그럼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 이 말이지? 지금처럼?” “그럼요. 굳이 정리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 주시면 돼요. 백랑이 적는 비급 이름은 제가 정해 두었어요.” “이름? 그러니까 광풍도법 이런 것?” “네.” “뭐라 지었는데?” 흥미로운 얼굴로 백산은 물었다. “광풍무(狂風舞)요.” 흩어져 있는 종잇장을 차곡차곡 끌어 모으며 설련은 싱긋 웃었다. 바닥에 아무렇게 나뒹구는 수많은 종잇장은 백산의 삶이다. 무공에 관한 내용만 있을 터이지만 그곳에 그의 인생이 들어 있다. 무공 구결 속에 숨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곳엔 가족과 형제를 잃어야 했던 과거가, 복수귀가 되어 천하를 도륙했던 처절한 기억이 들어 있을 것이다. “참! 다시 비무를 시작한대요. 이번엔 무당파의 무검이 출정하기로 했나 봐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하나 남김없이 정성스레 정리한 설련은 그 중 한 장을 읽다가 슬쩍 웃었다. 정말 손으로 썼나 싶을 정도로 필체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백산은 설련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사뭇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 듯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아먹기 힘들지?” “이 정도면 넘쳐요. 전 오히려 좋은 걸요. 정성을 다해 읽는 사람은 뭔가 얻을 테고, 겉만 보고 내팽개친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 아니에요?” 말을 해 놓고 보니 참으로 그럴싸했다. 백산이 써 놓은 글은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무공비급이라 부를 수가 없다. 형식을 좋아하고 허영에 찬 사람들은 글씨체만 보고도 내팽개칠 것이다. 더구나 안쪽의 내용조차 무공과는 거리가 있는 듯해 보이니. 백산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정성을 다해 광풍무를 읽는 사람에게만 기연을 가져다주는 비급으로 바뀔 것이다.7 “꿈보다 해몽이 좋다.” 하지만 백산은 용기백배하여 다시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럴싸한 무론을 적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있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적을 참이었다. 백산이 작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설련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글을 쓰고 있는 그에게 방해가 될까 한껏 몸을 사리며. 백산이 앉아 있는 탁자를 떠나 네 개의 서가로 사방을 막은 조그마한 공간에 들어선 설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로 눈앞에 침상이 있었다. 식사는 물론이고 잠까지 장경각에서 자고 있는 듯했다. 침상을 정리하던 설련은 문득 얼굴을 붉혔다. 그와 알몸으로 얽혀 밤을 지새웠던 며칠 전이 떠올랐다. 관계까지는 갖지 않았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백산과의 거리가 한층 좁혀진 날이 그 밤이었다. 대충 침상 정리를 마친 그녀는 한편에 자리하고 앉아백산이 기술했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무공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무공보다는 백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과, 혹시 잘못 쓰인 글이 있다면 정정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꼼꼼하게 읽어 나갔다. 하지만 백산이 쓴 글을 읽어나가는 설련은 꿈에도 알지 못한 게 있었다. 정성을 다해 백산의 글을 읽는 최초의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사실을. 더구나 순서를 맞추기 위해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야 한 탓에 시간조차 잊고 글에 몰두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곁에서 들려온 백산의 말소리 때문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자는 줄 알았다.” “아! 끝났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설련은 정리해 둔 글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멀었지, 뭐. 주먹만한 머리통 속에 뭐가 그리 많이 들었는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와. 참! 설련 너 씻어야지.” “물이 있어요?” 설련은 놀란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장경각은 한번 들어오면 외부에서 해진시켜 주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물이라니. “여긴 원래 지하 동굴을 고쳐서 만든 곳이라고 하더라.” 장경각에 들어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처음 장경각은 지하에만 존재했다고 했다. 불경이 늘어나면서 세워진 건물이 장경각이라 부르는 이층 건물인 것이다. “정말요?” “내 눈으로 봤으니까 맞지, 뭐. 가자.” 설련의 손을 덥석 쥔 백산은 서가를 가로질러 안쪽으로 향했다. “여기 서가들로 만상무유진(萬狀無有陣) 구축했대. 지금은 해진 된 상태라 서가들이 눈에 보이지만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랬군요.” 설련은 새삼스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장치가 되어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서가로 구축된 진이 설치되어 있을 줄이야. 더구나 서가에 꼽혀 있는 것들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대부분이 석판과 목판이었다. “습기도 진(陣)으로 없애고 있었군요.” 갑자기 전면으로부터 따스한 기운이 감지되자 설련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것도 난 몰라. 다만 이곳 석실을 열면 따스한 물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지하 끝에 도달한 백산은 전면 벽면에 손을 붙이고 천천히 오른쪽으로 당겼다. “세상에......” 미약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리자 설련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백산의 말처럼 정말 못이 있었다. 반장 폭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못에서 수증기가 뭉클거리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 가운데 박힌 야명주가 희미한 빛을 사방에 뿌렸다. “옛날엔 지하 장경각에도 기거하는 스님들이 있었나 봐.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을 목판이나 석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던 스님들이래.” “다행이네요. 씻을 곳이 있어서.” 환하게 미소를 지은 설련은 잰걸음으로 다가와 못에 손을 담갔다. “따뜻하고 좋아요. 백랑도 와서 씻으세요, 피곤할 텐데.” “그럴까?” 그녀 곁으로 다가간 백산은 손에 잔뜩 묻은 먹물을 씻어 냈다. 조심스럽게 작업한다고 했지만 손과 얼굴, 그리고 옷은 온통 검은 먹물 투성이었다. “참! 아까 비무를 속개한다고 했었지?” 얼굴을 씻던 백산이 이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피이! 그때는 듣는 척도 안 하더니.” “무검이 나간다호 했잖아. 그 아이 정도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지, 뭐.” “무검이 그렇게 강해요?” “아니, 강하다기보다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어서. 질 것 같으면 패배를 시인할 친구거든. 졌다는 데 덤비진 않을 것 아냐.” “훗! 엉뚱하기는. 다 씻었으면 가요.” “그러자. 나도 좀 쉬어야겠다. 잠 한숨 못 잤더니 머리가 몽롱하다.”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두 사람은 침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다?” 어색한 얼굴로 설련을 쳐다보며 백산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눕기에는 충분히 넓은 침상이었지만 같이 자자는 말을 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산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덮치지만 않으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인 설련은 먼저 침상에 올라 자리를 잡고 누웠다. “피곤해서 힘들겠다.” 그녀 곁으로 눕자마자 백산은 곯아떨어졌다. “영원히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흐트러진 백산의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주며 설련은 중얼거렸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와 같이 잠을 자고, 선물을 받고, 백랑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도 만족해요. 당신을 만나게 해 준 하늘이 고맙고요.” 백산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염없이 백산을 쳐다보던 설련도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즐독입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드립니다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 ㄳ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