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3월 20일 서울에 재집결한 일본군 총 병력은 소규모 부대 병력을 포함하여 53,000명으로 주력 부대의 손실률은 44.7%였다.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2차 진주성 공격전까지
일본에서 출병한 일본군 총 병력은 201,470명으로 개전시 158,700명이었고 이후 1년간 42,700명이 추가로 증원되었다.
이 가운데 75,613명을 잃어서 손실률이 37% 였다.
잔존 병력은 125,857명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 발발 1년 후 9개군의 병력은 아래와 같다.
1군 고니시 유키나가 : 평양 방면 18,700 -> 6,600 ( 손실율 64.5% ) 2군 가토 기요마사 : 함경도 방면 22,000 -> 13,136 ( 손실율 40.3% ) 3군 구로다 나가마사 : 황해도 방면 11,000 -> 7,321 ( 손실율 33.4% ) 4군 모리 요시나리 : 강원도 방면 14,000 -> 6,000 ( 손실율 55% ) 5군 후쿠시마 마사노리 : 충청도 방면 25,000 -> 15,500 ( 손실율 42% ) 6군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 전라도 방면 15,700 -> 9,552 ( 손실율 39.1% ) 7군 모리 테루모토 : 경상도 방면 30,000 -> 17,000 ( 손실율 44% ) 8군 우키다 히데이(지휘부) : 서울 경비 10,000 -> 5,352 ( 손실율 46.5 % ) 9군 하시바 히데가스 : 후방 치안 11,500 -> 5,000 ( 손실율 57% )
한양에 재집결된 병력이 이후 향로를 고심하고 있을때 용산에 조선군 결사대가 침투하여 2개월치 군량을 모조리 불태웠다.
3월 3일 우키다 히데이에는 일본 나고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서신을 띄웠다.
"서을의 군량은 죽을 먹으면 4월 11일까지 지탱할수 있다. 부산에서의 군량 수송은 10일이 더 걸리며 육로와 수로 모두 어렵다. 현재 서울로 전 병력이 집결 중이기 때문에 수만영 정도의 조선 명군의 공격은 방어가 가능하다."
그러나 3월 10일 한양에 도착한 히데요시의 명령서는 이미 한양 철수를 허가 하고 있었다. 이후 명나라와의 협상을 통해서 한양의 일본군은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
첫댓글 조명연합군 주력을 평양에서 정면으로 탱킹한 고니시야 처절하기 짝이 없지만(전근대 군조직에서 저정도 손실률에 조직이 와해되지 않은게 신기한 지경.....)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에서 개고생 한것 치곤 오히려 손실률이 적은 편이군요.
강원도는 별다른 교전이 없었음에도 반넘게 줄어들었고.... 역시 비전투 손실이 심한것 같습니다.
@明智光秀 저 숫자 다 맞는데요. 잘못 생각하신 게 아닌지?
@明智光秀 표의 병력 수는 개전 1년 뒤에 남은 병력이고, 뒤에 표시된 손실율은 개전 시 병력 기준으로 개전 1년 뒤 병력을 뺀 것을 비율로 나타낸 것이지요.
@제국의명장 제가 거꾸로 봤군요. 죽은 사람 숫자로 봐서리. ^^
게임같으면 고니시는 미드오픈하고 서렌칠 상황.
근현대전에서 저정도 병력손실이면 가장 낮은 손실률인 3군의 경우도 해당부대 전멸로 판단할 정도죠. 정상적인 전투력이 안나옵니다.
용산의 일본군 군량미를 불태운 주체가 어딘가요? 충청도 수군인가요?
어느 곳에서는 明將 사대수가 이끄는 명군이 용산의 식량창고를 불태웠다고 하던데요..
정확히 누가 불태웠나요?
좋은 자료 감사요. 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