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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19)
다음날.
먼저 일어난 백산은 아직 잠들어 있는 설련을 남겨 두고 장경각을 나섰다. 천붕회의 무인들을 보는 게 께름칙하긴 했지만 나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마뜩치 않아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천붕회 건물로 향했다.
며칠 전 겪었던 장중의 죽음 때문인지 천붕회 건물 이층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무당파 장문인인 현진자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오히려 비무 당사자인 무검이 그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일행을 잠시 둘러보던 백산은 한쪽 허공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벌써 만두 속을 전부 만든 것도 아닐 테고, 살수 네가 여긴 웬일이냐?”
남궁미령이 앉아 있는 허공에 유몽이 와 있었던 것이었다.
“철류에 피를 먹이는 바람에 더 이상 만두 속을 만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공은 벌써 사 일간이나 옷을 갈아입지 않았단 말입니다.”
허공에서 고개만 불쑥 내민 유몽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흥!”
한쪽 구석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개방 방주인 호연작이었다. 백산을 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적의가 가득했다.
“주공! 저 거지 친구에게 빚졌습니까?”
“빚은 무슨.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주는 것 없이 미운 놈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가 봐.”
“그건 맞습니다. 주공은 너무 잘생겼습니다. 그것뿐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무공까지 강하지 않습니까. 남들이 질투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건방진 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외인이 들어와서 설치느냐. 당장 꺼지지 못할까!”
유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연작은 고함을 질렀다. 백산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뭔가 꼬투리가 잡히길 기다렸던 그에게 유몽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그는 천붕회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사람.
“주공! 보십시오. 주공이 절 무시하니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까지 저더러 놈이라 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허공중에 머리맨 내놓은 상태로 유몽은 투덜거렸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감히 종놈 주제에.”
급기야 호연작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개방의 방주인 자신에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이라 하였다. 문득 살심이 맹렬하게 솟구쳐 올랐다.
“아미타불! 그만 하십시오, 방주. 저분은.....”
결국 보다 못한 무광대사가 나섰다. 후개를 잃은 그의 심정을 알기에 지금껏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유몽의 진짜 신분을 밝히려고 했다.
“그만 두시오, 방장.”
실내에 있던 모든 이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소림 속가제자의 종을 자처하고 있는 유몽이 무광대사를 향해 반 공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유 시주!”
“괜찮소. 주공은 뺨을 맞아도 참았는데 이 정도야 우습지요. 하지만 이 말은 반드시 해야겠습니다.”
손을 들어 무광대사를 말린 유몽은 월영은둔술을 풀고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호연작을 보며 낮게 말했다.
“잘 들어라, 호연작. 나를 모욕하는 건 용서를 해 준다. 하지만, 내가 주공으로 모시는 이분만큼은 절대 무시하지 마라, 욕도 하지 말고 몸에 손끝도 대지 마라. 주공을 향해 눈을 부라리지도 마라. 만일 그런 광경에 내 눈에 띄게 되면..... 주공이 뭐라 하든지 널 죽이겠다. 이건 이 살황(殺皇)의 맹세다.”
“헉!”
호연작은 나직한 비명을 뱉어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내의 모든 이들은 놀란 눈으로 유몽을 보았다. 심지어 유몽의 무공 정도를 알고 있었던 남궁미령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그가 사황과 비슷한 반열에 올랐다고 하였던 살황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그런 자가 귀광두의 부하로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고 이해가가지 않았다.
천하의 살황이 뭐가 아쉬워 귀광두의 부하가 되었는지. 설령 약점을 잡혔다 하더라도 그는 살수의 제왕.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망연한 얼굴로 쳐다보는 일행의 귓전에 귀광두와 살황이 주종관계임을 확인시켜주는 소성이 들려왔다.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만두 속이나 만들어, 임마. 공연히 목에 힘주고 난리야. 그리고 광치나 이쪽으로 보내!”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광치 동생보다는 제가 더 낫지 않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정체가 드러난 살수를 어디에 써먹냐? 그냥 허공에 처박혀 살아. 그리고 광치가 필요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해.”
“끄응! 알았습니다. 전 가서 주공 옷이나 다리렵니다.”
낮게 신음을 뱉어낸 유몽은 월영은둔술을 펼쳐 허공으로 숨어들었다.
“방주님이 이해하시오, 내가 주인이긴 하지만 저놈의 성질까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무검 너 이리와 봐.”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백산은 무검을 불렀다.
“무슨 할 말이라도.....”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게 아니다. 간밤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굳이 이기겠다고 애쓰지 마라.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리고.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충고 감사합니다.”
슬쩍 미소를 머금은 무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는 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일행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무검은 백산이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훌쩍 뛰어 넘어 비무장으로 향했다.
“왜 말을 안 했느냐?”
무검을 쳐다보는 백산의 등에 대고 남궁미령은 말했다. 살황.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넘어갈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자를 부하로 거느리고 있다니. 수그러들었던 녀석에 대한 의구심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안 물어 보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나서서 떠벌릴 일도 아니고. 더구나 유몽의 입장에서 보면 저 같은 놈의 부하로 있다는 건 자랑할 일이 아니잖아요.”
“자신을 잘 아는군. 맞다. 어떤 야료를 부려 살황을 부하로 거느렸는지 모르지만 너에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호연작은 말했다. 왜 그런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하나가 눈에 거슬리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면이 마땅치 않았다.
“그건 방주 말이 맞소. 나도 처음엔 싫다고 했소이다. 북황련에 복수해 주는 것도 싫고, 다라 다니는 것도 귀찮다고 했단 말이오. 그런데도 녀석이 매달립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데리고 다니는 거요. 그리고 나와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유몽이 판단하는 거요.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거니와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거요.”
“건방진 놈! 소림의 위세가 대단하기는 하구나. 날 두고 당신 운운하는 걸 보니.”
“맞소, 호 방주. 소림의 위세는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오. 만일 말이오, 내가 소림의 속가제자란 명목으로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당신은.... 유몽이 아니라 내 손에 죽었을 거요. 소림사 때문에 당신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되오.”
무심한 눈으로 호연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림사 때문이 아니다. 과거, 버리기로 했던 과거 때문에 참고 있을 뿐이다. 묵인혈마 시절 개방이 같이 했기에, 소운의 사문이 개방이었기에 참고 있다.
“방장, 내가 이런 모욕을 받고도 참아야 하오? 소림의 위세가 정녕 이렇게 대단했단 말이오? 저놈은 도대체 누굽니까! 왜 소림사는 저놈을 상전처럼 모시냔 말입니다!”
말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었던 걸까. 호연작은 무광대사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일순 실내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광대사를 향했다. 진작부터 궁금해 했던 일이다.
귀광두를 사제로 소개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니, 소림사에 귀광두 같은 무인이 있을 리가 없다. 벌써 삼십 년째 만남을 가져왔던 자신들이 아닌가.
“아미타불!”
그러나 무광의 입에서는 나직한 불호 외에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무광사형을 핍박하지 마시오. 난 하나만 마치면 영원히 소림을 떠날 거요. 당신들을 승자로 만들어 주는 일만 마치면 말이오. 당신들이 지키길 원하는 천붕회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기간을 늘이고 싶소. 내 솔직한 심정이오. 그 외에 사심은 없소이다.”
일행을 둘러보며 말을 남긴 백산은 천붕회 건물을 빠져나왔다.
“젠장! 나이를 처먹질 말든지, 아니면 진작 뒈져 버리든지 할 일이지. 금방 후회할 거면서.”
호연작을 향해 퍼부은 일이 못내 걸렸다. 공연히 천붕회 건물에 들어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안보면, 얼굴을 보지 않으면 그와 다툴 일도 없었을 것인데.
나직한 한숨을 쉬며 전전을 향해 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비무장을 지나고 있었다. 비무대 위에 무검과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싸우고 있었으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룡왕의 사위라는데 정말일까?”
“강한 무공에 저 정도 얼굴이면, 나라도 사위로 삼겠구먼. 이미 남경왕 전하께 인사까지 올렸다고 하던데.”
처음엔 자신을 놓고 하는 말인 줄 알지 못한 채 귓등으로 흘러 넘겼다. 그런데 이편을 힐끔거리는 무인들의 시선이 느껴지면서 그제야 조금 전 들었던 말이 확연히 떠올랐다.
우뚝 걸음을 멈춘 백산은 소리가 들려왔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확인하듯 물었다.
“무슨 말이냐?”
“아, 아니외다. 그냥 우리끼리 한 말입니다.”
백산의 물음에 깜짝 놀란 무인들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미친놈들.”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무인들을 보며 백산은 싱겁게 웃었다.
“잘 살고 있는지.....”
문득 주하연이 생각났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아이. 천영을 비롯한 그녀들을 잊은 것처럼. 주하연 또한 기억 속에 묻기로 했다.
“잘 살겠지. 강한 애니까..... 시원하다.”
이내 기억을 털어낸 백산은 온몸을 시원하게 적시는 빗물을 만끽하며 다시 전전을 향해 걸었다.
“내 말이 맞지? 적룡왕 사위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반말을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비무는 끝났다고 봐야겠네, 뭐.”
“그렇겠지. 소림의 속가제자란 신분만 해도 엄청난데 남경왕 주홍의 사위면 말할 필요가 없지. 더구나 봉선군주를 공격했던 자들은 북황련, 남천벌, 마교가 전부 연루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맞아. 이번 비무는 천붕회의 승리로 결정 난 것 같아.”
멀어지는 백산을 보며 무인들은 수군거렸다. 어디로부터 흘러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귀광두가 남경왕 주홍의 사위라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만 당사자인 백산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무인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촉촉하게 적셔 오는 비를 맞으며 백산은 전전 안으로 들어섰다,
“나 왔다!”
소리를 지르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백산은 일순 걸음을 멈추었다.
창밖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한 인물 때문이었다. 단지 등밖에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거대했다. 마치 어둡고 광활한 고원을 보고 있는 듯했다.
“쳇! 웬 놈의 강자기 이렇게 많은지. 밥 퍼먹고 무공만 익혔나.”
슬쩍 미소를 머금은 백산은 사내에게서 느꼈던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 내려는 듯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오십 년 만의 느낌이다. 철혈전신 철목승을 만났을 때 그랬고, 천장지옥마 갈태독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투기(鬪氣). 자신도 모르게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속 밑바닥에서 스멀거리며 솟아올랐다.
‘빌어먹을..... 신가의 후예였군.’
느닷없이 천비비에서 격렬한 느낌이 전해졌다. 손목과 발목에 차고 있는 천비들은 본능적으로 신가(神家)와 천가(天家)의 후예를 감지해 낸다.
처음엔 그 기운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친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강력한 적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심장의 떨림으로 시작한 그 기운은 온몸의 털을 빳빳이 세울 정도로 강렬하다. 지금 상황이 그랬다.
“후읍!”
깊게 숨을 들이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싸우고 싶다는 투기와 기이한 기운이 합쳐지면서 저도 모르게 살기를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와 술 한잔할 텐가? 난 뇌우(雷雨)네.”
백산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돌린 사내는 놀란 듯 백산을 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뇌우(雷雨). 스스로 마신가(魔神家)의 가주라고 했고 지저만상신공을 익혔다고 했던 인물. 마교의 암중 지배자인 그가 전전(錢錢)에 나타난 것이다.
“참! 난 마교에 있네.”
“니미럴, 강호 무림은 완전히 개박살 나겠구먼.”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백산은 뇌우 앞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낙양에서 만났던 선무룡 순우창천이란 녀석과 그 수하들 또한 처음 대하는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뇌우라 소개한 자는 그들보다 한 단계 위였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그대 같은 고수가 있는데 강호 무림이 박살이야 나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댄 잘 생겼어.”
뇌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났다. 세심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미끈하게 생긴 얼굴과 상스런 욕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는 사람이 귀광두였다.
“이봐! 난 남자에겐 취미 없으니까 그런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그나저나 어둠 속에 처박혀 살 일이지 왜 밖으로 나온 건가?”
“글쎄, 어둠이 지겨워졌는지도 모르지. 아니, 지겨웠을 거야. 아니면 따스한 햇살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한잔할 텐가?”
백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뇌우는 방금 비웠던 술잔은 내밀었다.
“자넨 머리가 좋군. 같은 말을 두 가지로 나눠서 하는 걸 보면. 이거 술 마시면 안 되는데. 또다시 발가벗고 잠을 자게 될 텐데.”
뇌우를 빤히 쳐다보던 백산은 그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 들며 투덜거렸다.
“생긴 건 술 좀 할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건가?”
“맞아. 자네가 잘못 봤어. 나는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할뿐더러, 강호를 지킬 생각은 더더욱 없어. 이번 일을 끝으로 영원히 숨어 버릴 거야. 자네가 나왔다는 어둠 속으로 말이야.”
“쿡! 재미있는 친구군. 하지만 은거도 세상이 허락해야 할 수 있다네.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웃을 때 뇌우의 습관인 듯, 그의 얼굴 근육이 묘한 떨림을 보였다.
“니미럴! 이거 마시면 안 되는데.”
찰랑이는 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산은 찌푸린 얼굴로 술을 털어 넣었다.
“캬아! 젠장. 자네 말이 맞아. 세상은 마음대로 되는 게 없지. 하지만 이번엔 반드시 성공할 거야.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없애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저 불알을 흔들며 도망가는 거라고. 심검을 성취한 놈이 도망친다는 데 누가 잡겠어. 객잔에 들러 밥도 먹지 않을 거야. 두어 달 정도 먹을 육포를 준비해서 그걸로 끼니를 때우며 도망칠 거라고. 전 내공을 동원해 경공을 펼치며 말이야.”
“그런가? 그럼 나로선 다행이고. 그대를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뇌우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귀광두에 대한 판단을 정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사람은 결코 약자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심검을 성취한 자가 하는 말이 아닌가.
“언젠가 자네도 알게 될 거야. 사람을 많이 쳐 죽인 놈은 결코 행복한 삶을 얻지 못한다는 걸 말이야.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그래서 도망가려는 거고. 한 잔 받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백산은 술을 따랐다.
“그 말 명심하도록 하지. 많이 배웠네.”
백산이 따라 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은 뇌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피가 뜨거워서 그런지 도망치고 싶지는 않네. 이천 년을 숨어 살았더니, 몸에서 곰팡이가 낀 것 같아서 말이네. 하여간 즐거운 만남이었네.”
역시 좀 전과 같은 기이한 얼굴 떨림을 남기고 뇌우는 전전을 나갔다.
“시팔! 다 죽었구먼.”
“대장 네 말이 맞다. 어디서 저런 놈들이 기어 나왔는지,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편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광치가 백산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강자를 무수히 겪었고, 또 싸움을 해 보았지만 뇌우란 자는 네 번째로 맞닥뜨린 강자였다.
삼십 년 전에 나타났던 독천쌍마가 첫 번째였고, 그 다음은 백산, 그리고 선무룡과 같이 있던 자들, 그리고 마지막이 뇌우라는 자였다.
“광치 너 무공 하나 배워 볼래?”
뇌우의 뒷모습을 응시한 채 백산은 물었다.
“무공? 무슨 무공인지 일단 들어보고.”
“천장지옥마공(千丈地獄魔功).”
“허억!”
천장지옥마공이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장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회하듯 월영은둔술로 천장을 오락가락하고 있던 유몽이었다.
“부공! 혹시 광치 동생과 절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지금껏 주공을 뒷바라지한 사람은 바로 저란 말입니다. 유몽, 아니 살수 말입니다.”
화들짝 모습을 드러낸 유몽은 거품을 물며 소리를 질렀다.
천장지옥마공. 천붕십일마가 나타나기 전에는 마도 서열 이 위에 올랐던 무공이다. 천장지옥마 갈태독은 천장지옥마공을 완성함으로써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빛이 바래긴 했지만 천장지옥마공은 여전히 엄청난 무공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둘이 같이 익히든지. 나야 강한 부하 두 놈이 생긴ㄴ 건데 반대할 리가 없잖아.”
“끄응! 누가 천장지옥마공을 익히겠다고 했습니까. 그에 준하는 무공 쪼가리 하나 던져 달라는 거지요.”
유몽은 낮게 신음을 뱉어냈다. 천장지옥마공이 엄청난 무공이진 하지만 검을 다루는 자신에게는 쓸모가 없다. 혹시 그럴싸한 검법 하나를 얻어낼까 싶어 말을 꺼냈을 뿐인데.
“기다려 봐라. 너에게도 엄청난 무공하나 전수해 줄 테니까. 삼매진화란 무공인데 앞으로 다림질할 때 화로가 필요 없게 해 주마.”
“주공, 그건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화덕 없이 내공으로 다리미를 뜨겁게 해서 옷을 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유몽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삼매진화, 그걸 무공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내공으로 물체를 뜨겁게 하는 방법으로 강기 정도를 성취한 무인이면 누구나 쓸 줄 아는 무공이다. 요컨대 멀리 떨어진 소리를 듣는 천리지청술처럼 공력이 높아지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그런 무공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전수해 주겠다니.
“그럼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임마! 다리미질은 이미 심검의 경지에 올랐는데, 더 배울 게 없잖아.”
“좋은 머리 뒀다가 어디에 쓸 겁니까. 그러지 말고 머리통 좀 구려 보십시오. 정 뭐하면 제가 기름칠 한번 해드리겠습니다. 얼굴만 우수 어쩌고 하지 말고 대갈통도..... 제길!”
눈앞으로 날아오는 백산의 발을 본 유몽은 월영은둔술을 펼치며 몸을 날렸다.
“어쭈! 피해?”
“대장! 무공 가르쳐 준다고 했으면 빨리 토해 내야 할 것 아냐. 제발 장난은 나 없을 때 좀 쳐라.”
광치의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산은 유몽이 머무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다가 이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장! 붓과 벼루 먹, 그리고 최고급 화선지까지 대령했습니다. 대장은 그곳에서 입만 나불대면 됩니다. 여기에 적는 건 이 걸레가 다 하겠습니다.”
이층에 올라가자마자 백산은 걸레의 우렁찬 외침 소리를 들어야 했다.
“좋다, 까짓 것! 바로 시작하자.”
빙긋 미소를 지은 백산은 머릿속에 들어 있던 갈태독의 천장지옥마공을 천천히 구술했다. 할아버지로 불렀던 갈태독으로부터 오구 사부에게로 전해졌던 무공이다. 맞는지 틀린지도 모른 채 구결을 구슬하기 반 시진, 천장지옥마공에 대해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자 구술을 끝냈다.
“유몽! 옷하고 밥 챙겨 놔. 이따 저녁 때 설련이 가지러 올 거야.”
밖에서 드려오는 함성 소리에 흘끔 비무장으로 눈을 돌리며 백산은 말했다. 무검이 승리했는지 중인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근데 상대가 누구래?”
“마봉(魔鳳) 엽단령(葉丹鈴)!”
“마봉? 설련이 화봉인 것처럼 그런 건가?”
조금 전 뇌우의 얼굴을 떠올린 백산은 유몽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허공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수 넌 말이다, 내 매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하고 있다. 무공이라는 거 별것 아니다. 상대에게 공격을 허용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끊임없이 피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의 허점을 공격하면.....”
“그렇습니다, 주공. 저도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해 정확한 판단은 보류하고 있습니다만, 들리는 소문으로 판단하건데 화봉인 주모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 정도라고 합니다. 마도에 사람이 없어 마봉(魔鳳)이란 호칭을 거저주웠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무공 정도는 신진십룡 수준입니다.”
“살수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마봉의 생김새가 아니잖아. 자꾸만 매를 벌면 너만 아프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면서도 그러는구나.”
“저도 주모에 비해 실력이나 얼굴이 보잘것없는 마봉이 나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며칠만 기다리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래? 뇌우란 녀석은 무슨 꿍꿍이를 꾸밀 정도로 보이진 않던데.”
조금 전에 만났던 뇌우의 얼굴을 떠올린 백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유형의 인물은 대개가 음모를 꾸밀 줄 모른다. 무소처럼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류인 것이다.
“원래 꿍꿍이는 아랫것들이 꾸미는 겁니다. 저처럼 다리미질을 열심히 하다 보면 갑자기 심상이 떠오르곤 하거든요.”
“그래, 그럼 가서 다림질 좀 하고 와라.”
“주공 지금은 심상이 메말라서 다림질을 해 봐야 떠오르질 않습니다!”
“서련 옷까지 다려 봐. 그럼 심상이 떠오를지 모르니까.”
결국 입이 한 자나 튀어나온 유몽은 다림질을 하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뭐 나온 것 없어?”
유몽에게서는 더 이상 나올 게 없다고 판단한 백산은 광치를 보며 물었다.
“남경왕이 드디어 시작을 한 것 같아. 십만 정병을 북경 외각에 주둔시켰다는 말도 들리고. 하후장설은 그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쳤다는 소문도 들리고. 아직은 종잡을 수 없는 것들뿐이야.”
광치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북경에 관한 소식은 갖가지 억측이 난무하고 있어 사실 유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서도 백산을 두고 남경왕의 사위란 소문이 돌고 있지만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소문으로 공연한 심력을 낭비할까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아마 성공할 거다.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치곤 나쁜 사람은 없거든.”
백산은 싱긋 웃었다. 주홍과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났다. 혹시 일이 잘못되면 주하연을 구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는 없을 거라 믿었다. 주홍은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 하지만......”
광치는 이내 말끝을 흐렸다. 천심과 운명을 말하고 싶었다. 본인이 원한다 하더라도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민심, 천심, 그리고 운. 이 세 가지를 얻어야만 주홍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 꺼라. 우린 천붕회를 우승시키는 것만 생각하는 거다. 잊어버린 사람을 굳이 끄집어낼 필요는 없는 거야.”
북쪽 하늘을 쳐다보며 백산은 중얼거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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