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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17~30절/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나도 일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 못이 있는데 이곳은 은혜, 혹은 친절이라는 의미의 못입니다. 이곳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은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을 초래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에 대한 가장 놀라운 증거를 주십니다. 이것이 5장의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려고 쓰여진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심오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논증들인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 이 말씀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소홀하게 다루어지기 쉬운 본문이 바로 이런 본문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을 더욱 열어주사 이 말씀을 통해서 깊은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묻고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시라면, 왜 아버지께서 직접 오시지 않고 아들이 오셔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1.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셨다는 것이 논란이 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17)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더욱 격노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것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임을 의미하셨기 때문입니다(18).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인지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 전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유대 전통에서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르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르게 이해하였듯이,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동격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는 표현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시고 제칠 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사 쉬셨습니다(창 2:3). 이 구절대로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이 구절을 부인하시는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제 칠일에 쉬셨지만, 그것은 창조의 행위로부터 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통치하시고 섭리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채우시는 일을 쉬신 것은 아닙니다.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이신론(deism)이라는 신학적 이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의 법칙을 주신 후에 피조세계를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하고 쉬셨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들이 간과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였습니다. 비가 오고 해를 비추며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 이 모든 일들을 그들은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냥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로부터 하나님은 쉬셨지만, 계속해서 피조된 세계를 돌보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새도, 백합화도 돌보십니다.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병들어 고생한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어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구원과 온갖 선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는 말씀의 요지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을 돌보시는데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십니다.유대인들의 이해를 위에서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 이 구절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구절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가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시키는 일만 할 수 있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의 결함이나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독립적으로 행동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과 자신이 의지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다고 선언하겠습니까? 천사라도 이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와 의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동일하셨습니다. 그의 의지를 꺾으셔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절대적으로 의지에 있어서 하나로 존재하신 것이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인성을 강조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행하신다는 것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그것을 보셨고 아셨고 이해하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여기에 덧붙여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20).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친밀함이 숨김이 없는 증거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목적과 계획과 방법을 아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더 큰 일이라고 한 것은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일을 가리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고서는 여러분은 누구에게도 여러분 자신의 것을 다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가족만큼 이런 친밀함을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고 하십니다. 근거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더 분명한 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니 나도 그 일을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본대로 예수님도 동일한 일, 사람 살리는 일을 하시는데 왜 책잡느냐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에 있는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고치고 살리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 주권과 의지는 절대적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것입니다.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심판을 다 맡기셨는데(22절) 이는 모든 사람들로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다(23절). 지금 예수님을 판단하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만인을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27절) 비록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인간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셨고,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모든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심판자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26~27절을 주목해 본다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시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권을 맡기신 것은 ‘인자됨을 인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인간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하심으로써 구원의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인자됨을 인하여 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자됨을 인하여 마지막 날에 심판의 모든 권세를 가지심은 너무나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예수님 앞에 꿇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들에게 모든 심판권을 맡기셨다는 것을 그 아들을 공경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아들을 공경치 않는 것은 곧 아버지를 공경치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24절에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계속해서 예수님은 강조하고 계십니다. 24절에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와 아버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거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아들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들 목자이신 아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것은 결코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믿는 자가 현재 누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는 것은 미래의 보장을 가리킵니다. 지금 영생을 누리는 자는 결코 미래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대속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이미 옮긴바 되었기 때문입니다.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 특이합니다. 죽은 자는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음성은 죽은 자의 죽음을 꿰뚫고 들려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죽은 자에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죽은 자에게 음성을 듣게 하사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 거듭나고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렇게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자기가 원하는 자로 듣게 하시고 그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28절과 29절에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미래의 어느 때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게 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무덤 속에 자는 자들이, 그리고 죽은 모든 자들이 그 음성 앞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어남은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선을 행하고 악을 행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우리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선을 행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이기에 참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음을 더욱 강조한 표현입니다.2.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신성, 하나님 되심을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와 아들이 그토록 하나이시라면, 왜 아버지께서 직접 오심으로써 분명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실 일이지, 아들을 보내심으로 사람들을 더욱 혼동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구약의 말씀으로 가보면 신명기 18장 15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묘사하였을까요?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말은 모세의 중보적 역할을 비유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처음에 율법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보고 떨면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9절에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올라가서 그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모세 밖에는 하나님을 뵙고 살아난 자가 없다는 것을 백성들은 보고 알았습니다(신 5:22~27). 그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말은 백성들이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앞서 던진 질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인간을 죽이고 심판하실 의사가 없으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오신다면, 인간은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고 마치 종의 형체로 오게 하신 것은 인간을 죽이고 심판하실 의사가 없으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증거대로 심판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구원하려고 찾아오신다면 하나님은 그 심판의 권세와 영광과 무한 위엄하심을 다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시고 오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분을 뵈옵는 순간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놓치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보다는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종처럼 오셨습니다. 한 노동자처럼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고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만한 권세와 능력을 보이라’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면 예수님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심판하러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3. 잠잠하신 그리스도(사 53:7)그런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표적을 보이라고 합니다. 진짜 표적을 보이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잠잠하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모든 심판권을 행사하지 않으시고 모욕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셨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실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심판의 권세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분은 잠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 하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시끄럽게 떠벌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라는 증명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예수님께서 잠잠하게 당신의 일을 이루신 것을 보며 그 길을 따라가는 삶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한 주간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시고 잠잠하셨던 예수님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피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다 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를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증명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하고 귀한 교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요, 부르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