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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20)
[나는 대의(大義)가 뭔지 모른다.]
민심, 천심 그리고 운.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던 세 가지. 그 중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 고르라면 누가 되었건 운이라 말할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하더라도 운이 없다면 그 일은 실패로 끝나기 십상이다. 혹자는 그것을 가리켜 시운(時運)이라고도 한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
정신없이 몸을 날리고 있는 주홍이 그랬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여겼다. 북경 외곽에 십만 정병이 주둔해 있었고, 오군도독부 산하 이만 병사가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걸림돌로 생각했던 하후장설마저 부재중이었으니 하늘은 자신을 선택했다고 확신했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장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 확신은 변하지 않았다.
병부상서 이충원을 비롯해 거사를 도모했던 모든 이들이 연회장으로 속속들이 도착했고, 남은 사람은 황제를 비롯한 몇몇뿐.
황제가 연회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거사를 시작할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황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하여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중신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점심나절이 되어서는 자신들만 남아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홍은 곁에 있던 이충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평소보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배신, 이충원뿐만 아니라 같이하기로 했던 모든 이들이 배신을 한 것이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이충원을 비롯한 다른 동조자들은 그 자리에서 자결을 했고, 연회장으로 동창무인들이 들이닥쳤다. 얼마나 많은 무인들을 도륙했는지 모른다. 천괄을 비롯한 사신위가 없었더라면 북경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가시지요,”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괄이 말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연중 안개에 덮여 있다고 하여 무령산(霧靈山)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허! 하후장설에게 허를 찔렸군.”
북경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린 주홍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사신위를 볼 면목이 없었다.
거사 실패의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배신의 시작은 영환공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하후장설의 명령을 받고 이편에 가담한 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망연한 눈으로 주홍을 보던 갈영상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는 말보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묻고 싶었다. 십만 정병이 주둔해 있는 곳과 정 반대쪽으로 도망을 쳐 왔다. 설령 돌아간다 해도 그들은 이미 동창무인들에게 제압되어 있을 것이다.
“광양신장과 백양신장은 남경으로 가게. 그리고 두 사람은 나와 같이 북방으로가 보세.”
주홍은 빠르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걱정되는 건 자신이 아닌 남경에 남아 있는 하연이었다. 반역자의 딸, 하연이 안고 살아야 할 멍에다. 강한 무공이 있어 쉽사리 잡히진 않겠지만 그 아이 또한 도망자로 전락할 것이다.
“북으로 가면....”
이번에도 묻는 사람은 갈영상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네. 운이 좋다면 하연이 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주홍이 북방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수신가(水神家)라 불렸다는 가문. 그곳을 도망쳐 나온 하연이 어미를 만났고, 그녀는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서두르기로 하세. 하연일 만나면 무조건 중원을 떠나게. 그리고 나중에라도 하늘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돌아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주군.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
주홍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천괄은 일순 얼굴을 굳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갈영상을 비롯한 나머지 삼인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엄청난 기운. 동창무인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가공할 힘이 다가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희들은?”
현 상황도 잊은 듯 천괄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십 년 세월이 흘렀다지만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모든 기반을 빼앗기고 도망쳐야했던 그 세월을.
그자들이었다. 본인들을 용황사천가의 가주라 하였던 자들. 변황사신이라 불렸던 자신들을 백 초 만에 쓰러뜨렸던 그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십 년 만인가? 살아 있으니까 다시 만나는군.”
천괄을 쳐다보며 공손대환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변황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손을 섞었던 자들. 하후장설에게서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대들이 구축했던 세력은 잘 쓰고 있다네. 그때보다는 세 배 이상 커졌을 거야. 아마 중원을 삼키는 데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걸세.”
“하후장설이 시켜서 왔는가?”
공손대환을 가만히 주시하던 주홍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후장설은 혼자가 아니었다. 천괄 일행이 세웠던 변황 무림을 장악한 자이거나 아니면 그들의 하수인임에 분명했다.
“군사의 부탁으로 왔을 뿐이외다. 그런데 왕야는 보내 주라고 하더군요. 아직은 살아 있어야 한다면서.”
비릿한 조소와 함께 공손대환은 길을 텄다.
“군사(軍師)라..... 동창제독을 거느릴 세력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가?”
“그곳은 이천 년 전부터 무극계(無極界)라 불렀습니다. 명나라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지요.”
“대단하군. 한 세력을 이천 년 동안 유지할 수 있다니. 보내 준다고 했으니 가겠네. 하지만 중원은 만만한 곳이 아닐세. 자네들이 이천 년 동안 침묵하고 있을 때 중원은 전쟁을 벌였네. 많은 민족들이 이곳을 다스렸고 그때마다 조금씩 성장해 왔다네. 중원의 주인이 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걸세. 한갓 무림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니까.”
용황사천가 가주들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일일이 그들을 뜯어보던 주홍은 걸음을 옮겼다.
“갑자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에 하는군, 당신은.”
의연하게 걸어가는 주홍의 등을 쳐다보며 공손대환은 슬쩍 살기를 흘렸다. 그를 살려주고자 하는 하후장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황제보다 더 위험한 자가 주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살기를 풀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 단지 이용물에 불과한 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그냥 두어도 저절로 쓰러질 자임에 분명했다. 슬쩍 미소를 지은 공손대환은 천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제 우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군. 주홍은 살려주고 그대들은 없애야 한다고 했거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공손대환. 이십 년 전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네놈들을 꺾기 위해 이름까지 버렸단 말이다.”
진득한 살기를 뿌리던 천괄은 공손대환을 향해 돌진하며 소리를 질렀다.
[형님! 주공께서 몸을 피할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하오.]
흑풍박(黑風搏)의 기운을 끌어올려 온몸이 검게 변한 천괄의 귓가에 다급한 갈영상의 전음이 들려왔다.
[알고 있네, 동생.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라 침착해야 할 때라는 걸.]
천필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공손대환을 없애는 것보다 주공이 몸을 피할 시간을 벌어주는 게 먼저고 주하연을 구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주공, 어서 가십시오! 군주님은 반드시 구하겠습니다.]
공손대환을 향해 돌진하며 천괄은 전음을 보냈다.
“고맙네. 반드시 돌아오겠네. 반드시!”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쥔 주홍은 전면에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적들 앞에선 당당하게 걸었지만 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굴욕감에 죽고만 싶었다.
하지만 가야 한다. 죽음에서 살아 나온 하연이를 봐서라도 반드시 가야만 한다. 이를 악문 주홍의 신형이 운무 속으로 사라지고, 무령산 한 골짜기에서는 여덟 명 고수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패한 거사의 여파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 시작은 북경이었다.
북경 도심을 가로지르며 남색 옷의 동창무인들이 휘젓고 다녔고, 남경왕 주홍과 조그마한 친분을 쌓았던 자들은 속속들이 끌려나왔다. 북경 외곽 성벽에 그들의 목이 하나 둘씩 내걸리기 시작하면서 잔인한 겨울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옥새가 찍힌 어명이 동창으로부터 하달되었다.
“제군들! 금일 어명이 내렸다! 목적지는 남경이다!”
칠백 동창무인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자는 오영천이었다.
오영천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병부상서를 설득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훈을 세웠던 자신이다. 그런데 남경작전의 부책임자로까지 지명된 것이다.
작전을 마무리하고 공훈을 따질 때 가장 상위에 쓰일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문득 꿈에도 그리던 오군도독부가 성큼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뭇한 얼굴로 부하들을 쳐다보던 오영천은 내공을 가득 실어 소리를 질렀다.
“출발한다!”
“존명!”
칠백 명의 동창무인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남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창무인들이 남경으로 떠나는 그 시각.
북경에서 수백 리 떨어진 숭산에서도 길을 나서는 자가 있었다.
그들은 동창제독 하후장설 부자였다.
“정치란 피를 봐야 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은 피를 봐야 할 때다. 숨을 쉴 수 없도록 강한 공포를 심어 줘야 할 때란 말이다.”
나직했지만 확고한 어조로 하후장설은 말했다. 아들인 하후야, 황실을 장악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제대로 키우질 못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성장해 준 아들이 고맙고 대견했다.
“살려 주는 건 어느 선까지 해야 합니까?”
“그 아이만 살려 두면 된다. 죽지 않을 정도만.”
“알겠습니다, 아버님!”
하후야는 싱긋 웃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사지가 잘리고 몸이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더하여, 노리개로 써도 괜찮다는 허락인 셈이다.
“그럼 북경에서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하후야는, 단마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무림이여, 천붕회는 내가 없애 주겠다. 판은 이 하후장설이 짜 줄 테니까 너희들은 피 터지게 싸워 주기만 하면 된다. 내 명령을 거절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이번에 확실하게 인식시켜주마.”
북황련과 남천벌 건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며 하후장설은 중얼거렸다. 무림와의 지위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지천악이나 남효운은 비무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눈치를 보며 적당이 비무를 치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어느 날부터 떠돌던 귀광두에 관한 소문이다. 자신 또한 귀광두가 남경왕 주홍의 사위라는 사실을 퍼뜨리고자 했다. 하지만 귀광두에 관한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지면서 천붕회 비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귀광두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면 세 곳의 세력은 싸워 보지도 않고 비무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내가 다시 올 때는 소림이 사라질 것이다. 본보기로 말이다.”
고개를 돌려 소림사를 쳐다보던 하후장설의 신형이 꺼지듯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하후장설이 머물렀던 건물에서 백야거란 현판이 내려지고 일단의 무리가 그곳을 나섰다. 지금껏 하후장설의 수발을 들었던 하인들이었다.
하후장설이 기거하고 있던 건물을 지켜보는 눈동자가 많았던지 백야거가 비워졌다는 소문은 빠르게 각처로 돌았다.
“총사, 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주인 떠난 백야거에 시선을 주며 위지천악은 물었다. 알면서도 공연히 묻는 말이다. 흐지부지되어 버린 천붕회에 대한 불만을 말없이 떠난 걸로 표현했다.
일종의 경고이리라. 하지만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세력에 속해 있는 자가 아니었다면 좀 더 신중했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역시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 결국 그 또한 권력을 쥔 자가 아니었다.
“하후장설에게 북황련이 이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제갈승후는 슬쩍 웃었다. 귀광두가 봉선군주 주하연의 정혼자라는 사실을 퍼뜨린 사람은 그였다. 하후장설의 술수에 휘말리지 않고 천붕회를 빠른 시간에 끝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소문을 냈다. 그런데 소문의 여파는 상당했다.
누구 한 명 귀광두를 향해 손을 내뻗는 자가 없었다. 결국 세 문파는 패배를 자인하는 꼴이 되어 버렸고 천붕회는 별 다른 노력도 없이 승자가 될 수 있었다.
“혈사지옥인(血邪地獄人)의 준비는?”
고개를 끄덕인 위지천악은 짤막하게 물었다.
“네! 머리도 잘랐고 가사장삼도 준비를 했습니다. 떠나기만 하면 됩니다.”
“좋다. 잘 알아서 하겠지만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심려 놓으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한 제갈승후는 이내 몸을 돌렸다.
“불공이나 드리고 떠나야겠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귀광두(龜狂頭)라....... 별호는 정말 멋지게 잘 지었어.”
하후장설처럼 위지천악 역시 소림 건물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강호를 장악하는데 무엇보다 걸림돌이 되었던 곳, 천붕회의 주축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천붕회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비록 귀광두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 또한 소림의 속가제자.
그는 분명 소림 사람이고, 폭풍 속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피하거나 도망칠 수가 없는 곳이 바로 천붕오천멸살계인 것이다.
위지천악이 소림을 쳐다보고 있는 그 시각.
소림의 속가제자란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백산은 설련이 광풍무라 칭했던 무공 집필에 여념이 없었다.
“우와! 이건 내가 생각해도 기적이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글이 나올 수가 있는 거지?”
열심히 붓을 놀리던 백산은 느닷없이 감탄한 얼굴로 탁자 위를 보았다. 처음 붓을 잡았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자신이 쓴 글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 양, 확인하듯 다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허! 내가 드디어 노망이 났나 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고. 설련 넌 내가 이렇게 많은 글을 썼다는 사실이 믿어져?”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번에는 설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믿지요. 지금껏 보고 있었는데. 이제 글 쓰는 연습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설련은 환하게 웃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백산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여전히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악필이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진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너.....!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 자꾸만 보조개가 팬다.”
“네, 기분 좋은 일이 아주 많아요.”
백산의 물음에 또다시 웃었다. 그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더 이상 강호 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는 은거해서 심검을 얻게 해 주겠다고 했다.
굳이 심검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울 뿐이었다.
“저기.... 한 가지만 물어도 돼요?”
“내가 그랬지. 어디에 내놔도 빠지는 얼굴 아니니까 당당하게 말하라고.”
“다른 게 아니고.... 저도 심검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말을 꺼내던 설련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심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였던 약속을 상기시키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심검? 그걸 얻어서 뭐 하려고? 공연히 무공 익힌다며 심력 낭비하지 말고 음식이나 열심히 배워. 언제까지 만두만 만들고 있을 거야?”
“네?”
설련은 놀란 알골로 백산을 보았다. 또다시 종잡을 수 없는 얼굴. 무슨 마음으로 한 말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자신을 생각하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인지. 그렇다고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못하기에 더욱 답답했다.
“뭘 놀란 눈으로 쳐다봐? 만두 말고 다른 걸 먹고 싶다는데.”
“정말로 제가 해 주는 음식을 먹고 싶으세요? 저 놀리시면....”
이번엔 울 듯한 얼굴로 백산을 살폈다. 그를 위해 만두 빚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그는 만두 말고 다른 음식을 원한다. 그 음식을 배우기 위해선 많은 날들이 필요하리라.
“내가 왜 널 놀리나. 설련만 괜찮다면.....”
“괜찮다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숨이 막혀 왔다. 꽉 틀어쥔 주먹은 땀으로 흥건했다. 혹여 듣지 못할까봐 내공까지 끌어올려 집중했다.
그러나.
“아니다, 관두자,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그러니까 자꾸만 볼우물 만들지 말란 말이야.”
하고 백산은 나직하니 한숨을 쉬고 말았다. 미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한두 살 차이도 아니고 무려 예순 살.
죽은 다음에 태어난 여자를 두고 흑심을 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백산이 기가 막힌다 한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설련만 할까.
백산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엉뚱한 소리만 흘러나오자 설련은 맥이 풀려 버렸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백산의 속내를 약간씩은 엿볼 수 있게는 되었다. 방금 그는 분명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고 자신과 관련된 말이 분명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닫아 버렸다.
“저 씻고 올게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재빨리 옷가지를 챙겨 든 설련은 못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보!”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서러워서가 아니다.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고 지켜보기 힘들었다. 말없이 지켜보는 게 도와주는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석문을 열고 못에 다다른 설련은 팽개치듯 옷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혹여 백산에게 들킬세라 소리 죽여 울었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고 나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설련은 엷게 웃었다. 문득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그와 함께 침상에 들어 잠을 자고 일어난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발전이 아닌가. 그도 변하고 있는데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었으면 안 되는데.”
조금 전 우는 소리를 들었을까 내심 걱정하며 백산이 있는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헉!”
이편을 쳐다보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설련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백산이 바로 뒤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저기.... 내 나이가 여든이란 거 알지?”
나지막하니 들려오는 백산의 말에 설련은 숨을 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진 거 하나 없는 거지고. 글은 천자문밖에 못 배웠고 잘하는 거라곤 사람 죽이는 것밖에 없어. 장가를 가서 부인은 셋이나 있었고 딸도 하나 있었어. 그녀들이 죽은 지 오십 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잊지 못하는 팔불출이고. 그리고.......”
“좋아요!”
“뭐라고?”
“좋다고요. 그런 백랑을 좋아해요. 오십 년 지났어도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는 그런 백랑이 좋아요. 아직도 그분들을 생가하며 눈물 흘리는 백랑이 저는 좋아요, 천자문밖에 모르고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백랑이 좋다구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 둔 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말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부끄럽지도, 창피하지도 않았다. 알몸이란 사실도 잊고 설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못을 나온 그녀는 백산의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팔십 살 먹은 노인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만두밖에 먹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제 손에 굳은살 박인 걸 안타까워하고, 제 볼에 패는 보조개를 좋아해 주는 백랑을.... 전 사랑해요, 사랑하다고요.”
백산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고함을 질렀다. 사랑한다는 말, 내심으로는 수천 번도 더 외쳤을 것이다.
그가 웃을 때는 같이 웃으며 내심 중얼댔고, 그가 인상을 찌푸릴 때는 덩달아 인상을 쓰며 내심 중얼댔다. 그가 화를 낼 때는 화를 풀어 주고 싶어 내심 중얼댔다. 그가 슬퍼할 때는 같이 슬퍼해 주려고 내심 중얼댔다.
사랑한다고.....
그런데 드디어 그에게 고백하고 말았다.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큰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알몸의 설련과 옷을 입은 백산, 두 사람은 뚫어져라 서로를 마주보았다. 설련의 뜨거운 숨결에 전염이라도 된 듯 백산의 눈에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내가 육십 년이나 빨리 죽을 수도 있는걸?”
“그럼 내 생명을 나눠 드릴게요.”
백산을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던 설련은 그의 얼굴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예뻐!”
파르라니 떨리는 속눈썹을 보며 백산은 홀린 듯 말했다. 반쯤 벌어진 입술은 앵두처럼 붉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으음!”
나직한 신음을 지르며 설련을 백산의 목을 감싸 안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입 안으로 파고드는 뜨거운 혀를 힘껏 빨아 당겼다.
그와의 입맞춤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며칠 전 술에 취해 그에게 입술을 허락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는 과거의 사랑과 입맞춤을 하는 게 아니라 눈앞의 설련을 원하는 것이다. 문득 몸이 화륵 달아올라 설련은 저도 모르게 백산의 옷을 벗겨 내렸다.
찢듯이 백산의 옷을 벗겨 낸 설련은 이내 나직한 신음을 지르며 그의 알몸을 쓸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며 백산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못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의 눈을 뜨겁게 응시하다 집어삼킬 듯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굳은살 박인 설련의 손은 백산의 전신 구석구석을 쓸었고, 그에 회답하듯 백산의 입술은 그녀의 온몸을 누볐다.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풍이 동굴 속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의 입에선 앓는 듯 환희에 겨운 심음이 흘러나왔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는 두 사람의 몸부림은 시간을 잊고 장소를 잊었다. 탐닉하듯 서로에게 몰두하던 두 사람은 자지러지듯 신음을 토해냈다.
“하아!”
위에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던 설련은 깊은 신음을 뱉어내며 백산의 가슴으로 무너지듯 몸을 기댔다.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 버린 듯 옴짝달싹할 힘조차 없었다.
“고마워요.”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나 같은 노인을 허락해 줬는데.”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주며 백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는 장가를 갔던 경험자였지만 몸은 아직 숫총각이었던 탓에 실수를 했던 거였다.
“훗! 팔십 먹은 총각의 정절을 깨트렸으니 그럼 전 요부가 되는 건가요?”
“맞아 넌 요부야, 사랑스런 요부. 참! 어디서 살고 싶어?”
“백랑 고향!”
“고향? 원래 태어난 곳은 산동성의 칠성리란 작은 마을이고, 나중에 정착해 살았던 곳은 광서성의 뇌산인데, 둘 중 어디?”
“음! 백랑은 돈이 없는 거지라 했으니까 추운 곳에 살면 안 되잖아요. 따뜻한 곳으로 가야지. 남쪽이 좋겠어요.”
“그럴까? 그럼 일단 북방으로 가서 녀석들을 찾은 다음 그곳으로 가면 되겠다.”
“그런데....”
“또 망설인다. 예쁘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다른 게 아니고 하연이 말예요.”
결국 꺼내고 말았다. 백산이 남경와의 사위라는 소문 때문에 천붕회가 승리했음에도 묻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피했다. 속 좁은 질투심이었는지는 몰라도 백산이 하연을 떠올리는 게 싫었던 까닭이다.
“소문일 뿐이야. 그때는 절을 할 수박에 없는 상황이었어.”
백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주하연의 술수 대문에 절을 하긴 했지만 남경을 떠나면서 모두 잊힌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일이 소문으로 와전되어 퍼졌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덕분에 천붕회가 이겼으니까 됐지, 뭐. 우리 그만 나갈까?”
“네? 네....!”
백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설련은 화들짝 얼굴을 붉혔다. 여전히 두 사람은 한 몸으로 있었던 것이다.
“저기....... 고개 좀!”
“새삼스럽게.... 아예 눈을 감지, 뭐.”
“뜨면 안 돼요.”
백산의 눈치를 살피던 설련은 재빨리 일어나 못 위로 나갔다. 그와 관계를 갖고 사랑한다고 말해 버렸지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됐어요. 저 돌아 서 있을게요.”
순식간에 옷을 걸친 설련은 몸을 돌리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봐. 몸이 영 거시기하네.”
“훗! 거짓말. 나이 먹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나 많이.....”
“내가 뭘?”
짓궂은 얼굴로 백산은 설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몰라요. 공연히 사람 무안 주고 그래요. 빨리 옷이나 입어요.”
“알았습니다, 공주님. 맞다, 하연이도 공주가 될 거라 했는데.”
떠날 때 주홍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 말이다. 그는 성공에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일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백산의 말에 설련은 화들짝 몸을 돌렸다.
“무슨 일? 아, 주홍이란 그 사람 황제가 되고 싶은 모양이더라고.”
“설마......! 그 말 정말이에요?
얼굴이 해쓱해진 설련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친왕의 신분인 그가 황제 자리를 원한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자세히, 백랑이 알고 있는 것을 자세히 말해 보세요.”
“자세히 말하고 할 것도 없어. 떠나기 전에 맥궁을 주면서 그러더라고, 일을 시작할 거리고. 실패할 것 같진 않던데, 뭐.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세상에......!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이 일을 어쩌면.......”
급기야 설련은 울먹였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백랑, 같이 가요.”
울먹이던 얼굴도 잠시, 이내 정신을 추스른 설련은 백산의 손을 덮치듯 잡았다.
“옷은 입고 가야지. 무작정 잡아끌면 어떠하냐.”
설련의 표정으로 보건대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한 백산은 빠르게 옷을 걸쳤다.
잠시 후.
장경각을 나선 두 사람은 경공을 펼쳐 전전에 도착했다.
“광치 오라버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설련은 큰소리로 광치를 불렀다.
“잘한다. 귀광두란 별호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니. 대장 너 별호 바뀌었다. 역적의 사위로!”
백산을 힐끔 쳐다보며 광치는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럴 순 없어요! 이럴 순 없단 말이에요,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행복하게 살 때도 됐잖아요! 백랑을 그만 괴롭힐 때도 됐잖아요!”
광치의 말에 설련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제야 간신히 그를 얻었다. 그도 과거를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눈물을 흘리던 설련은 백산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다시 소리쳤다.
“백랑 어젯밤에 분명히 약속했어요. 북방의 일 끝내면 설련과 같이 은거하겠다고. 제가 요리를 배울게요. 만두 말고 이 세상 요리 전부 배울게요. 그러니 저랑 떠나요. 지금 당장 저 먼 북방으로......!”
백산의 품에 기대어 애원하듯 말하던 설련은 그 자리에 풀썩 내려앉았다.
“얘가? 설련! 설련!”
정신을 놓아버린 설련의 모습에 백산은 그녀를 흔들어 대며 소리쳤다.
“휴우! 일단 안에다 눕히도록 하자, 대장. 그리고 우린 따로 얘기 좀 하자.”
안타까운 얼굴로 설련을 보던 광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련의 행동으로 보건대 원하는 바를 성취했음에 분명했다. 그런데 백산이 역적의 사위로 낙인 찍혀 버린 것이다.
“유몽, 설련이 좀 돌봐 주고 있어라.”
이층 침상에 설련을 눕힌 백산은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소문으로 돌았던 말이 아닌가.그런데 느닷없이 역적의 사위가 되었다니.
“소림사에 손님이 와 있는 것 같더라. 아마 그들이 북경 소식을 가져온 것 같다.”
“손님? 니미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야....”
나직하니 투덜대던 백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앞서가던 광치가 몸을 돌려 엄한 눈초리로 쏘아댔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만 명심해라. 난 대장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말리지 않겠다. 아니, 따르겠다. 하지만 훗날 후회할 선택은 절대 하지 말길 바란다.”
“내 인생에서 선택의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 보자.”
모두들 떠나간 텅 빈 비무대를 보며 백산을 툴툴거렸다. 태어나서부터 소령의 몸에 빙의하여 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택 같은 건 해 보지 않았다. 그저 닥친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발악을 했던 기억밖에 없다.
소림 산문을 넘어 빠르게 이동한 두 사람은 방장실에 도착했다. 천붕회에 참석했던 모든 무인들이 있음에도 방장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넌?”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간 백산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눈에 익은 얼굴. 석숭의 손녀인 석소희와 금령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과거의 인연으로 석가장에서 천붕회의 자금을 지원해 주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녀의 출현은 뜻밖이었다.
[사숙!]
“마침 잘 왔다. 그러잖아도 부르러 보낼 참이었다.”
요정의 전음과 남궁미령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잔뜩 굳어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무슨 일입니까? 왜 다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역적의 사위는 또 무슨 말입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백산은 말을 쏟아 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말을 받은 사람은 냉랭한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던 석소희였다.
“모르니까 묻는 거다. 죽어 가는 상판은 집어치우고 설명을 해봐라.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왜 날 죄인처럼 쳐다보는지, 너는 왜 만날 때마디 상전처럼 구는지 내가 알아먹을 수 있도록 말을 해 보란 말이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아니 멍청하기 이를 데 없어요. 애초에 봉선군주를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어요. 아니, 설사 구해 주었다 하더라도 수신사위에게 봉선군주를 넘기고 떠났어야 했다고요.”
“그러니까 네 말은 양민인 내가 남경왕에게 절을 한 행동이 잘못되었고, 어린애 목숨을 그해 주고 밥 한 끼 얻어먹은 게 잘못되었다, 이 말이냐?”
“맞아요. 잘못 되도 크게 잘못 됐어요. 당신은 남경왕에게 절을 하지도 말았어야 했고, 연회에도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한 자리 얻어 보겠다고 기웃거리지 말았어야 했단 말이에요.”
“쿡! 기가 막힐 노릇이군. 천외천이라 불리는 천붕회가 한갓 소문 때문에 멸문당할 위기에 처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먼. 참, 듣자니 넌 머리가 좋다고 하던데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황당한 얼굴로 백산은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단순히 절 한번 한 걸 두고 사위라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이 된다, 귀광두. 원래 정치란 그런 거다. 소문을 만들어서 정적을 없애는 게 정치다. 진실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고.”
백산의 말을 받은 사람은 호연작이었다. 개방으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귀광두가 남경왕의 사위라는 건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다. 벌써 신방을 차렸다는 말까지 떠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가.... 그럼 나 하날 없애자고 소문을 흘린 건 아닐 테고, 천붕회가 목적이란 말인데. 이런 경우는 대게 속해 있던 단체를 공석 탈퇴하고 집으로 돌아가던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요? 아니,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잘못 봤나?”
일향을 둘러보던 백산의 시선이 석소희의 얼굴에서 멈췄다.
“두 가지를 해 줘야겠어요. 첫째는 남경으로 가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주홍의 목을 잘라 오는 겁니다. 아니, 당장 주홍을 잡으러 북으로 떠나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하게 됩니다. 천붕회 고수들과 같이.”
석소희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주홍의 사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귀광두가 주홍의 목을 자르기 위해 떠난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면 천붕회는 천금 같은 시간을 얻게 된다.
“사위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 여자와 아비를 죽여야 한다니. 참 더러운 짓이구나.”
“봉선군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어요. 당신이 살고 천붕회가 사는 건 그 길밖에 없어요.”
“싸워 볼 생각 같은 건 아예 없는 모양이군.”
“싸울 수가 없는 적이에요. 북황련이라 남천벌 정도면 어떻게 해 볼 터이지만 상대는 황실이에요. 황실에 대항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석소희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오만 동창인과 이만 금의위, 그리고 수백만의 군사를 거느린 곳이 황실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는 것보다 더 힘든 상대가 바로 황실인 것이다.
“싸움도 안 된다.... 그럼 도망치는 건 어떤가?”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천붕회 전원이 집을 버리고 도망을 치란 말이더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석소희와 백산의 말을 듣고 있던 호연작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겠군. 주홍 때문에 짐 싸 들고 갈 수는 없겠지. 설사 도망을 친다 해도 갈 곳도 없을 테고. 그럼 이렇게 해. 소림사에서 날 파문시켜. 그리고 내가 남경으로 달려가면 너희들이 날 잡으러 오는 거야. 아니다, 더 극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연일 구해 나올 때 길을 막아. 그런 다음 날 죽이면......”
[사숙!]
질겁한 얼굴로 요인은 백산을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궁미령을 비롯해 누가랄 것 없이 놀란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내가 편하고자 저지른 살인은 없었다. 살기 우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놈들을 죽였다. 적이라고 확신한 놈들만 없앴단 말이다. 석소희, 네 말에 대해선 좀 더 생각해 보겠다. 하지만 결정은 내가 한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될 수밖에 없어요. 주홍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해도 수천 명과 바꿀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대의(大義)냐? 그런 게 대의라면 개밥으로나 써라!”
일행을 보며 낮게 소리친 백산은 비릿하게 웃으며 방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방장!”
죽일 듯이 백산의 등을 노려보던 호연작은 그가 시야에서 사리지자 무광대사를 향해 소리쳤다.
“아미타불! 소생 또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결정할 사항도 아닙니다.”
무광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백산이 주홍을 잡으러 떠났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말을 할 수가 없다. 백산의 마음은 주홍이 아닌 남경에 가 있을 테니까.
“귀광두 때문에 우리 모두가 역적으로 몰릴 겁니다. 우리 개방은 역적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팽가도 마찬가집니다. 당장 주홍을 쫓을 추격대를 결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미 북황련이란 남천벌에서는 추격대가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팽월 또한 강경한 얼굴로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소생은 이만.”
무광을 비롯한 요인과 요정대사까지 빠져나가자 실내에는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행의 침묵을 깬 것은 석소희였다.
“귀광두가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남궁무가 느리게 입을 뗐다.
“귀광두가 남경으로 갔을 때를 말합니다. 만일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우린 소림을 제외시켜야 합니다. 설사 소림에서 귀광두를 파문시킨다 해도, 그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황실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이번에도 역시 묻는 사람은 남궁무였다. 하후장설이 작정을 하고 나섰는데 피한다고 피해질는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물론 완전하게 의심을 떨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차후의 일은 그때 생각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럼 하후장설이 소림을 원하면 어떻게 할 테냐.’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남궁미령은 내심 부르짖었다. 천붕회의 마지막이 그렇게 장식될 것만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적은 희생으로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전 귀광두가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 믿습니다. 그가 정상적이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방장실 밖을 바라보며 석소희는 천천히 말했다.
그 시각.
방장실을 나온 백산은 요몽이 만들었던 동굴로 들어와 있었다. 돌아오지 않기로 했던 곳, 애명환과 함께 묻기로 했던 이곳을 다시 찾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주홍의 목을 잘라서 그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외칠까? 하연이 목을 들고 남경왕의 사위가 아니라고 외칠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 좀 해 줘. 그때는 전부 가르쳐 줬잖아! 머리 나쁜 내가 혼란스러워 할 때마다 전부 일러 줬잖아!”
가운데 있는 석상 앞에 무릎을 꿇은 백산은 절규하듯 외쳤다.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그들에게 뭔가 해 주고 싶었다. 천붕회를 최고 세력으로 만들어 준 다음 강호를 떠나려고 했다. 그랬었는데 오히려 그들을 역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차라리 독령곡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아니 지저사령계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결을 성공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때 죽었더라면.
“천영, 남경으로 가면 난 다시 살귀(殺鬼)가 되어야 하오. 또다시 수천 명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오. 하지만 그 아이를 포기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오. 내 손으로 구했던 그 아이를 포기하면 말이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말을 해주시오. 웃지만 말고 말을 해 달란 말이오!”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석상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흐느끼는 애명환 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급기여 백산은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부탁이에요. 저 좀 들여보내 주세요. 제발.......!”
요인대사 앞에 무릎을 꿇은 설련은 애걸했다. 깨어나자마자 백방으로 백산을 찾아다닌 끝에 결국 그가 들어간 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저곳에 들어가면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게.......”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그저 백랑을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러니 들여보내 주십시오.”
“아미타불!”
나직하니 불호를 읊은 요인은 자리를 비켰다. 하루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애원하는 그녀를 더 이상 막아설 길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설련은 고개를 숙이고는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런!”
하지만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마자 요인대사의 말을 들을 걸 하며 금세 후회했다.
온통 그의 과거로 채워진 동굴은 자신에게 허락된 세계가 아니었다. 오십 년 전, 뇌룡현을 떠났다는 모든 이들이 동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들만의 세상을 일군 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백산을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설면은 황망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나직한 백산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때도 난 선택을 해야 했다. 먼저 소령이 납치를 당했고, 천영과 추렴은 납치범들의 서찰을 받고 떠났다. 대동에는 소운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소령을 납치한 자들을 찾기 위해 대동을 헤매고 다니다가 나중에서야 객잔으로 돌아왔던 거야.”
그리고 한 장의 서찰이 다시 도착했다. 두 부인과 자식을 살리고 싶다면 산동성으로 오라고 하였다.
“그녀는 객잔 주인에게 요리를 배워서 진수성찬을 준비했다. 그리고 일 나갔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듯 웃으며 나를 맞더구나.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음식 솜씨가 굉장하다는 둥, 그런 쓸데없는 소리만 하며 밥을 먹었다, 서로를 향해 웃으며. 다음날은 하루 종일 소운을 업고 눈 속을 거닐었어. 그때도 소운과 난 웃었다. 시간이 멈추길 바라면서 깔깔 웃었다. 우리 둘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엔 없었거든. 울면, 누군가 한 사람이 울어버리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때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죽으러 가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잡지 않았다. 있어 달라는 한마디 말만 했어도 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소운과의 마지막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영도, 추렴도, 소운도 소령도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소운과 청영을 보고 말았다.”
얼굴은 천영을 닮았고, 성격은 소운 같았던 아이. 두 사람의 특징을 고스란히 타고난 소녀가 주하연이었다. 떠나자 떠나자 하면서도 그 아이 곁에 머물렀던 건 천영과 소운의 체취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랬군요. 하연인 천영이라는 분뿐만 아니라 소운이란 분도 닮았군요.”
눈물을 흘리며 설련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하연이가 나이를 먹으면 저런 얼굴이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닮은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 석상을 보던 설련은 눈물을 훔치며 나지막이 물었다.
“어디서 기다리면 되는지 말해 주세요.”
“너도 소운처럼 바보로구나.”
“아니에요. 언니는..... 언니라 불러도 되죠? 소운 언닌 현명했어요. 사랑은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설련은 배시시 웃었다. 안쪽에 있는 모든 석상들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지금과 전혀 다른 백산의 모습이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광동성 향항(香港)에서 기다려라. 우선은 동사군도로 가 보자.”
오십 년 전, 혈광마겁 때 석두와 여풍기가 도망쳤던 곳이 동사군도다. 여풍기의 무덤이 그곳이 있다고 했다.
“사숙!”
설련과 같이 밖으로 나오자 요인이 잔뜩 굳은 얼굴로 불렀다.
“요인, 날 파문시켜! 그리고 내가 소림사를 떠나는 순간부터 추격해! 하연일 구해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고. 팔 하나로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들고 하후장설에게 가서 오십 년 정도 봉문하겠다고 해.”
“사숙!”
이번에 백산을 부른 사람은 요정대사였다. 백산이 남경을 선택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주하연의 행복은 백산이 가장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림은 걱정 마시고 사숙이 원하는 걸 하십시오. 누가 뭐래도 소림은 천하제일입니다. 내시 놈이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소림이 제자를 버린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사숙을 두 번 버릴 수는 없습니다.’
소림사를 빠르게 내려가는 백산을 보며 요정은 내심 중얼거렸다. 오십 년 전, 소림에서는 백산에게 패한 치욕을 감추기 위해 그를 존장으로 대우했을 뿐 진정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마불사조(魔佛師祖)의 진전을 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이다.
태생이 비천했고 소림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다 귀마겁이 일어나고서야 그를 소림의 존장으로 인정했다. 모든 것을 잃고 만신창이가 되어 일어서지도 못했던 그를.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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