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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순록의 긴 만남 이야기
며칠 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한 로마 가톨릭 교구 주교가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말했다가 부모들에게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해외 토픽에 전해졌다. 참으로 그 신부는 아이들을 사랑하지도 사랑할 상상력도 빈곤한 모양이다. 성탄 절기에 아이들의 아름다운 선물의 꿈과 소망을 일거에 내다 버린 꼴이다. 인간은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이다. 우주와 자연현상을 과학적 사실과 이론으로만 설명하고 기술한다면, 무슨 재미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름다운 시도, 음악과 예술도, 여유로움과 해학도 없는 세상은 삭막한 사막과 같을 것이다.
초1 외손녀가 올해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받기 원하는 선물은 ‘발목 줄넘기’로 매우 소박한 품목이다. 금복주 병에 나올 법한 풍채 좋은 산타 할아버지의 이름은 나라마다 다양하게 불리 운다. 영국에서는 ‘아버지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 네덜란드에서는 ‘Sinterklass’, 일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는 ‘de Kersman’ 혹은 ‘Pere Noel’이라 한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이미지가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로 이어졌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지만 놀라운 전개였다. 그중에서 백미는 산타와 루돌프 순록과의 조우 이야기이다. 이 내러티브를 ‘오늘의 역사’(History Today, Alexander Lee)에서 찾아 급히 번역해보았다.
산타클로스 이야기는 4세기 지금 터키 땅인 미라(Myra)의 주교인 성 니콜라스(St Nicholas)에서 시작된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으나, 성인 전(傳)에 의하면 아이들을 사랑했고 매우 마음씨가 좋았다고 한다. 대수도원장 미카엘(Michael)은 그가 아주 불운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그 불운한 사람은 세 딸의 지참금으로 준비한 돈을 몽땅 잃어버려서 딸들이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려면 몸을 팔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성 니콜라스는 공개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어서 몰래 선행을 베풀기로 했다. 늦은 밤 그의 집에 올라가서 창문으로 금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던져준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금덩어리를 발견한 아버지는 바로 첫째 딸 남편을 구해주었다. 그다음 날 밤에 성 니콜라스는 같은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셋째 날 밤, 그 남자는 자지 않고 깨어서 누가 도와주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 밤 그는 성 니콜라스를 잡고 그 발아래 꿇어앉아 구원자에게 감사를 드렸다. 이에 성 니콜라스는 그 남자를 일으켜 세운 뒤 그가 받은 축복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로 후일의 성 니콜라스 축일(12.6)에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12세기 프랑스 수녀들은 가난한 아이들 집 앞에 과일, 견과류 등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같은 날 성 니콜라스는 선물을 가져오는 마술사 역할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어 사용지역에서는 ‘Sinterklass’ 가 밤에 가난한 사람 집에 숨어 들어가 그들의 신발에 동전 몇 닢과 조그만 선물을 넣어주었다고 한다.
분명 성 니콜라스 모습은 주교로서, 길고 밝은색의 성직의 겉옷과 수염을 기른 것으로 그려졌다. 또한, 그는 하늘을 나는 신비한 기교를 가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투명함을 유지했다. 때때로 성 니콜라스는 특정 동물들과도 친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그가 타고 다니는 말을 위해 건초를 남겨두기도 했고, 독일 일부 지역에서 그는 아직 말을 타고 다녔고, 동부 프랑스에서 그는 선물 바스켓을 나귀에 싣고 다녔으며, 이탈리아에서는 가끔 쾌활한 당나귀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성 니콜라스와 순록의 관계는 생뚱맞은 조합이다. 최근 빙하기 이후 순록의 서식지가 한때 유럽 쪽으로 내려왔다 하더라도, 이는 북스칸디나비아와 우랄산맥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이 서식지의 유럽 이동의 증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짧은 언급 외에는 1553년 이전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가 프로이센(Prussia)의 앨버트 1세에게 10마리의 순록을 선물로 보낸 것과 2세기 소아시아의 주교 성 니콜라스와의 관계 설정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개혁 시기
종교개혁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개자라는 마르틴 루터의 주장으로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의 성인 숭배를 배격했다. 예외적으로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을 기독교 미목의 모범으로 세우는 것은 기꺼이 인정되더라도, 그들은 어느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과의 중재자가 됨을 거부했으며, 성인을 존경하는 것도 우상숭배의 형태로 여겼다. 신성 대신에 인간적 관점에서의 예배나 의식은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위축시켰다.
이러한 생각의 틀이 성 니콜라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는 루터교회의 예배의식 일정에 포함이 되어야 할 정도로 충분한 덕목을 갖추었으나, 그의 축제는 전통적으로 흥청거리는 잔치였으므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따라서 이 축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금지될 수 있었으나, 영민한 루터는 선물을 주는 행위가 축제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라는 사실을 인지하여, 이를 없애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루터는 이 축제관습을 성탄일로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관심을 집중시켰다. 즉 예수가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원적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람들에게 축제를 본래의 모습으로 즐기는 것을 반드시 금하도록 하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 선물은 성 니콜라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후광을 입은 ‘아기-예수’(Christkind or Christkindl, Christ-child)로 부터 온다는 것을 인식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교회 지역에서도 약간 변형된 형태였지만, 성 니콜라스의 유산은 살아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통치시대에의 영국에서도 산타클로스(Father Christmas)의 이미지는 제대로 남아 있었다. 성 니콜라스를 분명 모델로 하였으나,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정신을 구현하였다. 산타는 풍채 좋은, 털옷을 입고, 수염과 뾰족한 사제 같은 모자를 쓴, 모습으로 그려졌다. 벨기에와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de Kerstman’ 이나 ‘Pere Noel’이 비슷한 역할을 했으나, 이때에도 순록은 등장하지 않았다.
신대륙으로의 이민 시기
오랫동안 성 니콜라스와 산타클로스(Father Christmas)는 각국의 전통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남아 있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인이 인접해 있는 알자스와 네덜란드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들 두 인물이 축제 기념에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신앙고백의 차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 대서양 다른 쪽으로의 인구이동은 두 인물을 화해하게 했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급격한 이민 유입증가를 경험했다. 이주민의 대부분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출신으로 개신교나 비국교 신도였다. 1780년까지 뉴욕 인구의 1/4이 북해 연안 저지대(Low Countries)로부터 왔고, 뉴저지, 델라웨어, 펜실바니아에는 대규모의 독일어 사용 소수민족이 유입되었다. 1790년 이후 이민 유입은 나폴레옹 전쟁에 의한 유럽의 붕괴로 소수였으나, 1830년대까지 이민 인구는 증가 되기 시작했다. 그 후 20년에 걸쳐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이민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다. 상당수의 경건한 비국교도들이 이국적인 축제를 경원시했으나, 유독 뉴욕의 네덜란드인들은 엄청난 축제 분위기에 도취 되어 음주와 성적 방종을 일삼게 되었다.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간에 선물을 나누는 관습은 유지되었으나, 누가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것인지, 그리고 언제 오는지에 대한 분명한 상징과 표징이 없었다.
미국의 초기 용광로 융합(Melting Pot) 시절에 크리스마스 전통은 어쩔 수 없이 혼돈되고 혼란스러웠다. 각기의 관행과 특성이 점차 일치되어가고 오랫동안 분리되었던 생각들이 재결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가시적인 현상은 아니더라도 특정 지역의 과도한 행위를 제어하려는 노력에 힘입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네덜란드의 ‘Sinterklass’는 영어로 번역되어 ‘Santa Claus’가 되었다. 이 명칭은 1773년 12월 26일 ‘뉴욕 신문’(New York Gazette)에 처음으로 기사화되었다. 수십 년 후에 ‘Santa Claus’는 영어의 ‘크리스마스 정신’(Spirit of Christmas)과 일치되었고, 네덜란드공동체의 소란한 축제는 없어지게 되었다. 때때로 선물 전달의 주인공이 혼동되어 유럽인들이 사용했던 옛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공의 이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로 가까워졌다.
산타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09년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의 ‘뉴욕의 네덜란드 자손의 역사’(Knickerbocker’s History of New York)라는 저서로부터였다. 산타는 풍자적으로 표현되어 뚱뚱한 네덜란드인, 과시하는 모습, 낮고 넓게 테두리 한 모자, 커다란 플라망 바지, 긴 파이프, 마차 가득 선물을 싣고 하늘을 가로질러 다니는 모습이 그러했다. 그러나 순록이 등장한 것은 1821년 ‘어린이들의 친구 : 뉴욕에서 5-12세 아이들이 어린이에게 보내준 새해 선물’(The Children’s Friend : A New Year’s Present to the Little from Five to Twelve)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작은 신기한 책에는 운명적인 시가 나온다.
‘옛 산타클로스는 기쁨으로 충만했고
그의 순록은 차가운 밤을 달린다.
굴뚝 꼭대기로, 눈밭에 발자국을 내며
너에게 올해의 선물을 가져다준다.’
이 무명의 저자가 순록을 소개한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가능성은 기후 상황을 따른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이다. 크리스마스에 항상 눈은 내리지만 그 당시 기준 10년 전에는 기록상 가장 추운 겨울 날씨였다. 1811년 12월 24일이었다. 노아 웹스터의 보고에 의하면 뉴헤이븐에는 한 자 이상의 눈이 내렸고, 여름이 없었던 1816년에는 6월에도 눈이 내렸다고 한다. 특히 1820~1821년의 겨울은 혹독했다. 뉴욕에서 허드슨강이 얼어붙었고, 도시는 폭설로 덮였다. 대부분 교통수단은 마비되었다. 지역 역사가인 제임스 매콜리(James Macauley)는 그 후에 ‘썰매가 매우 좋았다’라고 회고했다. 뉴욕에서 썰매를 끌 순록이 사용된 기록이 없었지만, 산타에 관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눈이 오는 지역에서 썰매를 끌기에는 순록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알래스카가 이에 맞는 지역일 수 있다. 그 당시 이 지역은 미국영토가 아니었으나, 원주민들이 순록을 이용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것이 산타의 썰매에 순록을 이어주는 작은 실마리였다.
루돌프의 등장
순록 등장의 수가 증가했다. 1823년 12월 23일 ‘성 니콜라우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 혹은 ‘크리스마스이브’(The Night Before Christmas)라고 알려진 시가 ‘뉴욕 파수꾼’(New York Sentinel)에 게재되었다. 이 시는 클레멘트 찰스 무어(Clement Charles Moore)의 작품으로 뚱뚱한 성 니콜라우스가 8마리의 순록을 타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풍경을 그렸다. 그 후 두 마리 순록이 추가되었다. 프랑크 바움(L. Frank Baum)의 이야기 ‘산타클로스의 삶과 모험‘(The Life and Adventures of Santa Claus, 1902)에서 산타는 다섯 쌍의 순록을 동료로 썼다고 했다.
이즈음 산타는 다시 유럽으로 재수출되어, 그곳에서 이미지가 점차 하나로 만들어졌다. 산타는 순록을 데리고 다녔으나, 루돌프가 그 그룹에 합류한 이후에 그랬다. 1939년 몽고메리 백화점에서 로버트 메이(Robert L. May)에게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이들이 백화점 지점으로 찾아올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 메이의 이야기에 의하면 루돌프는 붉게 빛나는 코 때문에 다른 순록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해 안개가 너무 자욱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산타는 어둠에서 반짝이는 루돌프의 코가 불현듯 생각나 그에게 나머지 아홉 마리의 길을 밝히라고 지시했다. 이 이야기는 처음에는 지역에서 경품행사로 의도된 것이었지만, 너무 유명해져서 1948년 만화에, 1949년 노래로, 그리고 끝없는 영화와 책으로 만들어져왔다.
그때 이후, 산타의 순록의 이미지는 헤아릴 수 없이 재창조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다시 이름 짓고, 온갖 방법으로 부풀리고 축소하고 변형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순록 없이는 산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만일 여러분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조용히 들어보면, 지붕 위에서 그들의 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은혜로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권사님 감사합니다. 기쁜 성탄과 함께 강건하심과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