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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왜곡은 AD 1123년 고려 인종 때 고려국 주변 정세는 북쪽의 우리 종족인 발해국을 멸망시킨 거란국과 서남쪽 바다 건너 중국 송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정리하여 쓰다 보니 김부식 등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삼국사기 역사책에 최초의 우리나라인 한국(桓國 BC 7199-BC 3898)의 3301년과 대를 이어 승계한 배달국(倍達國 BC3898-BC 2333)의 1565년의 역사 그리고 단군조선(檀君朝鮮 BC2333-BC 295)의 2096년간의 역사기록을 무시한 채 올리지 않았다.
또한 BC 37년에 고구려를 세울 때 졸본 영토와 많은 군수물자 식량을 제공하여 태황후가 된 고구려 주몽왕의 황후 소서노(小西奴)는 한백 족장의 딸 주몽왕의 조강지처인 애소야(愛小野)와 헤어질 때 증표인 칼 조각을 가진 유리 왕자를 데리고 고구려로 돌아오자, 고구려 주몽왕의 입지를 생각하여 졸본국 시절 우태에서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 한반도 대방고지(지금의 황해도 연백 땅)에 와서 마한왕의 양해를 얻어(많은 금은보화를 주고) 예성강 이남 웅진(지금의 공주) 이북땅을 할애 받아 BC 18년에 지금의 충남 아산시 인주에서 천안 입장을 지나 경기 안성, 무아산(貿兒山) 밑으로 가서 궁궐을 짓고 백제를 세웠다.
BC 18년에서 BC 8년까지 10년간 소서노여왕은 아들 비류(沸流), 온조(溫祚)를 데리고 영토를 넓히고 지내다가 사망할 시 비류와 온조가 각각 나라를 세우기를 유언하여 두 형제는 서울 아리수를 건너 한양 북악 무아산에 올라 주변을 살펴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으로 온조는 하남 위례성으로 터를 잡아 비류백제 온조백제를 세워 비류는 미추홀이 척박하여 다시 처음 백제를 세운 아산시 인주를 거쳐 천안 입장에 도읍하여 다시 웅진(공주)로 옮겨 영토를 넓히기를 왜국 혹은 온조백제와 연합하여 중국 요동 황하강, 북경 근처까지 일본의 사마대(대마도), 탐라도(제주도)까지 바다 연안 영토를 가진 국가라 해서 백제라 했다.
왕족과 왕자들이 다스리는 식민 통치 지역이라 하여 담로(淡路)제국을 건설하다가 잦은 영토 확장 전쟁에 원한을 가진 고구려가 비류백제 온조백제 형제국이 담로국인 왜국을 끌어들여 신라와 고구려를 괴롭히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서기 396년 신라의 간청에 의하여 온조백제 하남 위례성을 쳐서 항복을 받고 부녀자 노예 2천명과 마곡(麻穀)수천섬을 조공 받아 신속시키고 다시 비류백제를 치자 비류백제 응신(応信)왕은 웅진성을 탈출하여 부산에서 수천 명의 장병을 이끌고 대마도를 건너 다시 북해도를 건너가 무정부 상태로 있던 일본 최초 천황으로 사마대 왜국을 세웠으니 때가 서기 397년이고 신무천황(神武天皇)이 되었다.
비류백제는 413년간 크나큰 대국을 유지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BC 18년에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가서 땅이 척박하고 살기 어려워 백성과 신하들이 온조백제의 하남 위례성으로 떠나 비관 자살하고 비류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린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간의 민족 사학자들은 우리의 고대사와 중국의 고대사 삼국지, 사기, 당사, 수사 등에서 비류백제는 413년간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 등지에 많은 식민지인 담로국을 통치하였고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 상태인 왜국의 천황시대를 397년 세웠다는 것인데 우리는 소서노 여왕 백제편과 비류왕의 비류백제편을 우리 역사속에서 빼어버린 역사왜곡을 스스로 만든 꼴이 되었다. 우리들 임무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우리 역사 왜곡
(1) 일제가 단군왕검을 신화로 만든 것은 고려 고종 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를 왜곡시켜 일연은 승려 입장에서 불교 교리대로 종교적 입지로서 단군조선 건국을 승화 시킨 것을 단군조선 이전부터 배달국시대 만주 중국 지역 부락민 중 곰 부족은 의리와 인정사정을 차렸고 호랑이 범 부족은 호전적이고 이웃을 시기 질투하여 자주 침범하고 경계하여 단군조선 건국신화에 두 부족을 곰과 호랑이에 비교하여 기록을 남긴 것을 마치 신화로 창건된 나라인양 단군조선 시조 단군왕검이 실존 인물인데 신화로 왜곡시켰음은 일연의 종교적인 기록 과실도 있다고 보여 진다.
(2) 1910년 8월 29일부터 일제 식민통치시절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를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단기 4243-4255년(서기1910-1922)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조선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하여 16년에 걸쳐 단기 4271년(서기1938)에 조선사(朝鮮史) 35권을 완성하였는데 그 내용에 우리역사는 겨우 2300년에 불과한 삼국시대부터 시작한 것으로 조작하고 일본 역사는 비류백제 마지막 왕 응신왕이 397년에 신무천황으로 일본국을 건국한 것으로 써야 하는데 2600년이 넘는 것으로 엿가락처럼 늘려 놓은 왜곡된 역사가 오늘날 일본의 역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우리 역사를 왜곡시켜 식민 통치의 정당화를 위한 왜곡된 역사책을 우리 국민에게 강요하고 가르쳐 왔다.
(3) 단기 4278년(서기 1945) 광복과 더불어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 민족 사학자들은 6·25를 전후하여 북에 납치되고 일제의 식민 사학자 이미니시다쯔(今西龍)밑에서 공부하여 식민사학자가 된 이병도, 신석호 등은 남아 이병도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고 일제가 조작한 조선사에 의거하여 국사대관(國史大觀)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신석호는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어 제자들을 길렀다. 따라서 강단 사학자는 대부분 그들의 제자들로서 일제가 만든 조선사는 실증적이며 다른 사료(史料)는 믿을 수 없고, 실증되지 못한 것이라며 부정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강단 사학자들이 쓴 책 중에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상고사(上古史)를 말살한 부분에 대하여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4) 8·15 광복, 6·25 사변, 4·19 학생혁명, 5·16 군사혁명, 12·12 군사 쿠테타, 등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우리 역사를 되찾아서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치지 못했다. 사실 일본은 397년 비류백제의 웅신왕의 망명정부 신무천황의 사마대 일본과 660년 온조백제가 나당연합국에게 망하고 왜국으로 건너간 백제 후손들이 다시 670년 7월 1일에 세운 오늘의 일본이란 국명의 나라가 들어섰고 2002년 8월 13일에 일본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일본천황이 “실은 짐도 귀국의 고대 백제국의 후손”이라고 선언했다.
중국의 우리 역사 왜곡
중국은 현재 998만㎢ 넓이와 인구13억(실은 15억), 51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인데 중국 영토 중 양자강 이남 땅을 제외한 모든 영토가 고대 우리나라 한국·배달국·단군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영토인데 40년 전 공산주의지만 정경분리 정책, 시장경제 정책을 써야만 체제유지와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현실주의자 등소평(登少平)의 흑묘백묘론(黑描白描論)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공산주의이든 민주주의이든 시장 경제로 나아가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70년대 경제 개발 시절에 벌인 국민운동인 잘 살기 운동「새마을운동」을 배워가서 오늘날 세계경제의 3대축을 형성하고 있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한국의 발전과 통일을 두려워하고 있다. 앞으로 10~20년 내 한국의 경제가 세계 7대국이 되면서 남북통일이 북괴의 체제붕괴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고 나면, 1712년 조선왕조 숙종대왕과 청국의 강회제 간 중국 조선간 국경은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설정 때에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 즉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송화강의 상류 토문강’으로 양국의 국경으로 정한, 지금의 간도 지방인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 3성인데 8·15 이후 조선족 자치령으로 하였던 땅을 통일된 한국에서 반환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고, 2002-2004년간에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역사학자들을 그간에 수천억원 경비를 조달하여 왜곡된 우리나라의 고대역사 고구려 발해 역사를 (BC 37 - AD 698)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 하여 간도(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 3성) 지방의 영토와 역사를 중국 고대 변방지방의 중국역사의 일부라 발표했다.
2004년도에는 북한 정부를 물자 식량 체제 지원하는 사정으로 거절 못하게 하여 고구려의 옛 수도 만주집안 땅에 서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포함한 성터 왕릉 고분벽화 등 역사 유적지와 북한의 평양 부근 강서 고분 및 벽화 등을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고 평양까지 중국의 옛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기 668년 9월 21일 당시 중국의 당나라가 한반도의 신라국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식민 통치기관인 안동 도호부를 평양에 둔 것을 근거로 영토주장하고 있으나 신라 문무대왕에게 8년 동안 백제 고구려 옛 영토를 놓고 전쟁을 나당간에 치러서 676년에 패전한 중국 당나라는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서 쫓겨져 만주지방으로 안동 도호부가 옮겨 간 역사적 사실은 왜 눈을 가리는지 말하지 않는가?
동북공정을 주장 할 2004년 당시 우리 국회에서 동북공정을 문제 삼아 외교 통산부 장관(2004년 당시 반기문 현 유엔사무총장)에게 부천출신 국회의원 김문수(현 경기도지사)가 중국의 동북 공정 역사 왜곡한 현지 만주집안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발해 유적지인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등을 답사하고 국회 외교문제 질의에서 중국의 우리 고구려 발해 역사 왜곡을 지적하고 중국 정부에 항의 서한을 정식 제의하여 「동북공정」문제는 잠잠해졌는데, 고대 우리 조선 영토가 전 중국 영토 만주, 동러시아 동구 바이칼호 티베트까지 미치니 중국정부는 다시 「서남공정(西南工程)」까지 왜곡시켜 발표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우리 영토 점령
(1) 1909년 9월 4일 당시 일본의 총리 대신 이등박문, 청국의 북양 대신 이홍장 간에 우리의 간도 땅(동북 3성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을 일제 병참선 대륙 침략 전초기지인 안봉선(지금의단동-심양간) 철도 부설권 조건으로 체결한 「만주협약」에서 일본의 만주의회정부를 세우고 그 영토를 우리나라 조선 조정이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긴 후라 일방적으로 떼어주었다. 1964년 6월 일본 정부는 중국과의 대만 앞바다 상 남사군도(南沙群島)’ 영토 분쟁이 발생하자 「만주협약」 무효를 선언하였으니 일본국 스스로가 떼어준 조선 영토를 우리나라 영토 간도 수복을 증명해 준 셈이 된다.
(2) 조선조 세종대왕(1416년)때 조선 해안선을 침입 노략질이 심하던 왜구의 본거지를 소탕하고자 이종무 장군 등과 군사 2만7천여명이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 막부 정부와 대마도주 소사다모리(宗貞盛)을 신복 항복시켰다. 그리하여 신복 된 대마도에는 세곡선을 보내어 척박한 대마도 주민을 먹여 살렸고 우리 정부의 감세관, 감독관이 파견되어 도주 종정성이 신하로 복속된 땅이다.
중국과 일본의 우리 영토 자기네 영토 주장
(1)「이어도」중국 영토 주장
2007, 2008년도에 중국과 일본이 중국 대만 부근 앞 바다에 있는 ‘남사군도’ 영토 분쟁 하고 있다는 언론 방송이 계속 보도되더니, 느닷없이 중국은 우리 정부를 얕잡아 보고 제주도 서쪽 350km 지점에 있는 「이어도」를 옛날부터 전설의 산호초 섬으로 알려진 곳에 우리나라 기상청에서 전방 기상관측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중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트집을 잡아 중국 영토라 주장하다가 우리 정부의 강한 항의에 주춤하고 있다.
(2) 「독도」일본 영토 주장과 일본 교과서 왜곡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지금까지 심심하면 1904년 러·일 전쟁 시 일본이 해군기지로 잠깐 점령했던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술 더 떠 2009년 4월 9일 8·15 이후 계속 주장하던 일제가 조선 식민통치가 정당하고 우리의 고대 가야국이 일본 식민 영토라고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올려 주장하고 있다.
독도의 우리 영토 역사적 사실은 신라 지증왕 때인 서기 512년 강릉 군주 이사부(異士夫)장군에 명하여 우리 영토를 정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거주하고 있고 법흥왕 때 대마도, 제주도를 우리 영토라 하였고 조선왕조 세종대왕 때도 우리 영토로 일본의 막부정부와 대마도주 신복도 받았다. 가야 6국은 신라 법흥왕 때 신라와 합쳐졌는데 언제 일본 영토가 되겠는가.(526년)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36년간 일제는 일본 헌병 경찰로 하여금 조선 역사책 30여만권을 조선·만주·일본·중국·러시아 지역까지 갖은 수단으로 수거하여 불태우면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만행을 저지른 파렴치한들이다.
간도 되찾기 운동
간도협약은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되었다. 일본이 만주철도 부설권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연해주의 간도에 대한 청나라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간도는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일부 시민단체 등에서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만 100년이 됐는데 이때까지 영유권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간도가 완전히 중국 땅이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9년 9월 4일 중국 베이징에서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으로 청은 조선과 오랜 분쟁지역이었던 간도 영유권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고, 일본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 등을 얻어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을사조약(늑약)이 무효인 만큼 이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체결한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무효라는 것은 2005년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현 유엔 사무총장)이 국회에서 밝혔듯이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100년 시효설(時效說)은 국제법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 당국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국제법상이나 판례에도 찾아볼 수 없고 영국이 포클랜드를 지배한지 150년이 지나서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사례도 있다는 것이 언론에서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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