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호
이제 정준호는 배우가 아니다. 정준호는 그가 설립한 영화사 겸 매니지먼트 회사인 주머니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으로서, 영화 제작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주연한 [동해물과 백두산이](2003년)의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영화 제작자로서의 수업을 시작했지만, 첫 수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정준호는 그 이후에도 공동제작으로 몇 편의 영화에 더 참여하면서 착실하게 제작수업을 했다. 그리고 올 하반기, 주머니 엔터테인먼트의 첫 작품이 촬영될 예정이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고, 지금 때가 무르익었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나 최민식 주연의 [파이란]처럼, 삶의 상처와 아픔이 배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현재 시나리오 검토 중이며 올 연말쯤이면 공식적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어쩌면 [투사부일체]는 그의 배우 인생 최정점에서 흘러나온 영화일지도 모른다. [투사부일체]는 [두사부일체]를 제작한 제니스 엔터테인먼트의 작품이지만, 자막 크레딧에는 공동제작으로 주머니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부터 3년동안 그는 착실하게 내실을 기하며 제작자로서의 수업을 해온 것이다.
배우 정준호는 늦은 나이에 연기에 입문했다. 1970년 충남 예산 출생인 그는, 20대 중반 무렵에 대학로 연극계로 들어가 신입부원이 그러는 것처럼 포스터 들고 풀칠을 시작하면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1995년 MBC 공채 탈렌트에 합격했으니까 본격적으로 연예활동을 시작한지 이제 10년이 지났다.
오늘의 정준호를 만들어준 작품은 [왕초](1999년)다. 그 전에 주연을 맡은 작품들이 시청률 저하로 조기 종영되면서 의기소침해진 그는, 무전여행을 떠났다. 팔도를 유람한 뒤 돌아와서 캐스팅 된 작품이 [왕초]다. 역시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들이 품어내는 깊은 맛이 있는 법이다. [왕초]의 이정재 역으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그는, 재난영화 [싸이렌](2000년)으로 첫 스크린 신고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따. 영화 역시 첫 작품부터 대박이 난 것은 아니다. [싸이렌]은 같은 시기에 개봉한 [리베라메]에도 뒤지면서 처참한 흥행 실패를 했었다.
[아나키스트]를 거쳐 정준호를 스크린의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은 [두사부일체](2001년)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된다는 조직 보스 김상중의 명령으로 조폭의 중간 보스이면서 다시 고등학교를 다니는 계두식 역을 맡아 많은 웃음을 주었다. 정준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역설적인 것이다. 그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남성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배우 중의 한 명이다. 근엄함이라든가 권위를 내세울 것 같은 양반 이미지의 귀공자가 전혀 엉뚱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른바 상황의 언밸런스에서 발생시키는 웃음은 예상외의 폭발력을 몰고 온다.
[두사부일체]의 엄청난 흥행으로 정준호는 단숨에 인기 스타가 되었고 그 이후 [가문의 영광](2002년)으로 확실하게 굳히기에 들어간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2002년) 같은 멜로 영화도 찍어 보고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2002년)처럼 진지한 영화도 찍어보지만, 정준호를 정준호 답게 만드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코미디였다. 그러나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2002년 이후 [하얀 방][동해물과 백두산이][나두야 간다][천년호][역전의 명수]의 연이은 흥행 실패를 겪은 뒤 지난해 [공공의 적2]를 찍으면서 부활한다. 코미디 연기가 아닌 작품으로 유일하게 흥행 성공한 작품이 [공공의 적2]다.
그러나 정준호가 맡은 코미디 캐릭터들은 일관되게 소심한 옆 집 남자 캐릭터를 이어가고 있다. 근업하고 권위적인 남성상이 아니라, 소심한 남자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억압적인 상황에 처하면서 웃음을 발생시킨다. [가문의 영광]의 박대서 역할이 대표적이고 [나두야 간다]에서 조폭의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삼류 소설가 역할도 그랬다.
지금 정준호에게서는 배우보다는 사업가의 이미지가 더 많이 풍겨 나온다. 그 자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 해결을 하려는 성격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성격이 그를 연기자보다는 비즈니스맨의 이미지로 만들어 놓았다. 실제로 그는 현재 호텔 사업에 투자해서 하와이의 한 호텔을 경영하고 있고, 또 자신이 설립한 주머니 엔터테인먼트를 LG애드의 지주회사 지투알의 계열사로 편입시키면서 코스닥 우회상장에 성공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의 코스닥 상장 벽이 높아서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줄줄이 코스닥 상장에 실패하자, 정준호는 우회상장 전략을 택한 것이고 이후에 수많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정준호처럼 우회 전략의 길을 택해 코스닥 진입에 성공한 것도 정준호의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안목을 돋보이는 사례다.
[비지니스는 감각과 타이밍이다. 지금 많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우회 상장 전략을 택하고 있지만 시기적으로 예전만큼 큰 이익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 우회상장으로 주식시장에 진입한 그의 회사는 큰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남다른 비즈니스맨으로서의 감각이 그를 훌륭한 영화제작자로 키울 것이지만,
[배우로서 내가 언제까지나 조명을 받을 수는 없다. 그 시기가 다가오면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나서 후배들이 열심히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아주 강한 사람이다. 배우로서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개인적인 야망도 크게 갖고 있다]
정준호의 자신감 뒤에는 독서가 있다. 그는 1천권 정도의 책을 갖고 있는데,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독서를 한다. 자신이 알고 싶은 분야에 대해서 먼저 책으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그 정보를 자기화해서 저장한다. 이런 지식욕이 바탕이 된 그의 자신감은 자신의 매레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했다. 올 상반기 정준호는 한 편의 영화를 더 촬영한 뒤 6월에는 독일로 가서 월드컵을 직접 관람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하반기부터 그는, 배우보다는 영화제작자로 본격적인 사업을 실시한다.
[스크린 속에서 내가 보여준 것은 인간 정준호의 1/100도 안된다. 나는 스스로 내가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잡초처럼 살아왔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다. 나는 나의 앞날을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철저하게 준비를 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배우 정준호가 단지 영화제작자 정준호로만 변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든다. 그만큼 정준호에게서는 야심이 넘쳐났다. 최근 [투사부일체] 개봉을 앞두고 지상파 TV의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서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는 그에게서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배어나온다.
[투사부일체] 기자시사회에서도 그는 세련된 성공한 남자의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일부러 구김이 잡힌 베이지색 상의 쟈켓에, 자연스럽게 웨이브지면서 흘러내리는 머리를 하고 무대에 선 그는, 예의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리고 분명히 영화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투사부일체]는 올 설날 연휴 영화전쟁에서 승리자의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