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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因님 무식한 역사문외한이 한번 나열해 볼랍니다.
자 그럼 논리적으로 접근해 볼까요
1. 토기 및 기와장 - 이형구
본디 풍납동은 물이 벌람하는 지역으로 토질이 좋아 토기나 기와를 만드는 장소로 적합함
조선시대 기록에도 토기나 기와를 굽던 곳이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함
얼마 전까지 벽돌공장등이 있었으며, 지금도 레미콘공장이 있음
이형구는 이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보임
(지리적, 군사적인 것은 모르고 오직 땅 만보고 다니는 사람)
이사람 기득권에 들고 싶어 환장한 것 같아요
풍납동에 오면 얼굴도 못 들고 몰래몰래 다녀요
핑계는 대지요, 주민들이 해꼬지할까봐 무섭다고...
왜 주민들이 해꼬지라도 한답니까? 풍납동 주민들 대한민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후회됩니까? 후회되면 이제라도 진실 밝혀야지요(초기에 기와장, 대부토기 등으로 욹어먹었지요)
아직도 더파봐야 한다고 그말만 떠들고 다닙니다.
소뼈다귀 말뼈다귀가 발굴되니 당시에는 신성 시 했기에 제사지낼 때 썼던 것이라 제사장이 있던 자리래나 뭐래나, 내가보기엔 가축 공동 도살장으로 밖에는 안보이더만, 갖다 붙이는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검단산이나 하남시 춘궁동에 가면 확인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곳 땅 쳐다보면서 다니세요
당당하면 얼굴 당당히 들고 다니고 찬반토론 때 초청하면 열심히 와서 자기 의견 주장하면 됩니다.
왜 찬반 토론 참석 안 할까요?
왜 문화재청만 기웃기웃 거릴까요?
무슨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봐서...
(이 작자는 나이가 많아서 그랬나 볼품이 없어서 그랬나 서울시의 도움을 못 받았나 봅니다. 서울쪽 대학으로 못 왔네요,
서울시에서 혹시 자문역 자리 하나 부여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서울시의 유네스코 등재 땜에..)
2. 경당연립부지 발굴 - 권오영
우선 먼저 큰 그림을 그리지요(끼워맞추기식 발굴, 아니면 말고)
왕궁터라면 갖추어야 할 전제조건
- 왕궁이니 우선 왕이 거처하던 건물이 있어야 하고
-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였으니 왕궁 안에 큰 사찰이 있어야하고
- 궁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왕이 쓰던 물건이나 왕관 등이 나오면 좋겠죠, 토기 등) 기타 등 등
발굴 과정 들어가 볼까요
처음에 경당공원을 발굴하면서 나무쪼가리 발견하고 목탑터라면서 대형 사찰이 있었던 곳 이라면서 이보다 먼저 발굴된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사찰터와 비슷하게
발굴모양 땅에 그려놓고 사진찍어 광분하면서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홍보하지요
(권오영은 자신의 존재를 알릴 기회로 국민들의 호응이 필요했던 건 아닌지, 많은 학자들이 기득권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하나?
그래서 결국은 소원성취 했네요 한신대에서 서울대 국사학과로 영전, 혹시 서울시와 꿍짝꿍짝 한 건 아니지요? 유네스코 땜에....)
그런 얼마 후 갑자기 사찰터가 연못터로 바뀜
이번에는 같은 장소를 사찰터가 아닌 왕이 거처하던 건물 앞에 있던 왕이 거닐던 연못으로.. 번복
그러다가 약 3개월정도 후 또다시 말바꾸기 시도(일반인들은 벌써 목탑터로 인식하고 있지요, 인간의 망각을 활용)
목탑터도, 연못터도 아닌 조그만 목조우물로 결론...
(사죄도 사과도 없는 가히 학자로서의 자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학자적 양심도 없는 ㅉㅉㅉ)
또한 발굴한 것중에 대부라고 쓰여진 토기인데
발굴 당시 누가 쇠꼬챙이로 긁어 쓴 듯한 조악한 토기 쪼가리
문화재청에 땅속에 1500년 묻혀있던 글씨치고는 너무 깨끗하니 언제 쓴 글인지 방사성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측정해보자고 하니 문화재청 답변이 한신대박물관에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해준다고 꼬랑지 내리고....
경당연립에서 발굴되었다던 시유도기(큰 항아리로 물고기로 젓갈을 담았던 흔적이 있다고 하면서 당시의 음식문화를 알 수 있다고 운운하면서...)
이 항아리는 백제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고 동진시대(4-5세기)에 동진에서 수입된 것이므로 동진과의 교류를 했던 것이라면서 중국의 학자를 불러들여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왕성이라고 주장, 시유도기가 경당공원부지에서 발견되면 백제의 왕성인가?
동진과의 교류로 유입된 것이라고 보고 풍납동은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 곳에서 무역이 이루어진 장소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겠지만...(물건을 보관하던 장소로서의 역할)
경당연립부지가 풍납토성의 가장 중심적인 곳이 위치해 있기에 왕궁터라는 근거가 퇴색하기 시작함
3. 미래마을 부지 - 신희권
처음에 미래마을 부지를 한국의 폼페이라고 메스컴에 대대적으로 홍보
(나도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폼페이유적을 생각하고 엄청난 유물이 쏟아질 것으로 기대하였던 적이 있었음... 이때까지는 순진했었던 듯... 신희권의 말에 속다니, 궁금하면 옛날 기사 찾아보시면 되고..)
발굴 과정을 볼까요
제가 미래마을 발굴과정을 거의 매주 사진 촬영을 하고 기록에 남겨놓았고 그들의 발굴행태를 끝까지 아파트 거실에서 지켜본 사람인데 모를 리가 없지요...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속의 신희권, 역시 언론 플레이의 달인 수준(나라 돈이 좋긴 좋지요)
미래마을부지 발굴이 끝난 현재 상황, 공원으로 바뀌었지요
발굴 내용을 보면 폼페이가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요,, ㅋㅋ 웃음 밖에 안나옴
대형건물터라고 하면서 물건을 보관하던 장소 였다나 어쨌다나, 그리고 움집터(여기는 사람이 살던 곳이니 백제왕이 살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아궁이에서 목탄가루 발견
그리고 가장 웃기는 것으로 자갈이 군데군데 깔려있는 동서도로와 남북도로라고 하는 교차 도로 발굴(해석은 더 가관입니다. 왕이 거닐 던 도로, 왕도라나 어쨋다나... 내가보기에는 물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물길로 밖에 안보이는데, 지금도 어느 곳이나 강가로 흐르는 물길에는 흙은 없고 자갈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국의 폼페이 미래마을 부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자, 발굴이 끝났으니 조작을 해야하지요
공원 조성을 하면서 왜곡이 시작되지요
대형 건물터에 초석을 수 십개 박아놓습니다.(왕궁터에는 왕궁건물지 초석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발굴되지 않았으니 인위적으로라도 현재 박아놓고 모르는 사람들에서 홍보를 해야 하지요(왕궁터에는 왕궁건물터라는 증거가 되는 초석이 나와야 비로서 왕궁이 되니까)
초석을 왜 갖다 박아놓았냐고 문화재청, 송파구청에 문의하니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다. 서로 핑퐁치기 그럼, 누가...
그리고 미래마을 서쪽 끝에 높게 쏟아있는 인위적인 풍납토성 모양...
왜 있지도 않았던 토성을 왜 거기에다 만드냐고 하니 풍납토성 모양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알량함. 걸어서 150미터만 가면 토성이 있는데, 참 웃깁니다.
역사왜곡의 현장 아닙니까?
(이분 역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로 영전, 혹시 서울시와 관계된 것 아니지요? 유네스코 땜에)
4. 풍납토성의 축조 시기의 진실
우리는 백제의 형성시기를 기원전 18년 정도로 봅니다.
그래야 한성백제 500년, 공주와 부여시대 200년의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풍납토성을 절개하고 발굴에 들어갑니다.
연인원 1백만명이 동원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매스컴에 홍보하지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고 볼 때 일일 3천명 수준이고 동절기, 우기를 빼면 일일 동원인력이 대략 잡아서 5천명 정도는 필요하겠군요 엄청난 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뒤에서 언급하지요)
발굴하면서 매스컴에 발표하기를 풍납토성의 최초 축조시기는 기원 후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라고 기사화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발굴 발표한 자들을 질책하기도 하더군요
일본의 임나일본부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책잡히는 것으로 백제의 역사가 기원 후 300백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되기 때문이라나...(이렇기 때문에 백제 왕궁터를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300년 동안의 왕성은?
성 없이 살았거나 남의 땅 전세살이 했거나, 미래마을 부지에서 언급했듯이 왕이 움집에 살았거나, 분명 온조왕이 나라를 건국하고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이 기원전 18년이라면 300년 동안의 왕성은 어디였냐고 반문하니 답변이 가관입니다.
옛날의 역사는 소급해서 다룰 수 밖에 없다나... 궁색하기도 이렇게 궁색할 수가...
축조 방법도 흙을 곱게 채에 쓸어 흙을 판에 담아 쌓은 판축기법을 이용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더니 발굴하면서 나뭇가지, 나뭇잎 등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풍납토성은 인위적으로 쌓았다기 보다는 한강물의 찾은 범람으로 자연스럽게 퇴적이 되어 퇴적층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오히려 타당성이 있을 수도 있으며 가끔 인위적으로 보수하거나, 부분 축성을 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5. 남성, 북성에 대하여 언급해 볼까요
처음에 몽촌토성을 왕성이라고 발굴하였으나, 나올 만한 것이 없으니 왕궁터를 풍납토성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각각의 발굴에서 뾰족한 결과물이 도출되지 않으니 풍납토성은 미발굴지역(2권역 주축)을 더 발굴해봐야 알 수 있다고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합니다. 현재 발굴이 완료한 지역(미래마을부지, 경당연립부지)은 발굴자들이 풍납토성의 핵심지역이라고 한 곳으로 더 이상 파봐야 나올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사서의 기록이라면서 남성과 북성을 운운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왕이 남성(몽촌토성)과 북성(풍납토성)을 오가면서 정사를 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현재는 열심히 다시 몽촌토성을 발굴합니다.
신라시대 유물도 나오고 백제 유물도 나오고 어쩌고 하다가 최근에는 풍납토성과 이어지는 큰 폭의 도로를 발견했다나요
이렇게 다시 엮어가기 시작합니다.
소설같지도 않은 소설
왜 하남 춘궁동 지역에서는 신라유물이 나왔다고 다 덮어버리고 몽촌토성은 발굴하고...
그 도로가 신라시대 도로인지, 고려시대 도로인지, 조선시대 도로인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학자들이 주장하면 또 그대로 믿다가 아니면 말고인가요
마지막으로 갑자기 등장한 남성, 북성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요
동시대의 신라나, 고구려의 왕성은 몇 백만평으로 형성되었고, 백제가 문물을 전달했다는 왜국(쪽발이)도 왕궁만 80만평이라고 하던데 명색이 일본을 아우르는 대백제가 왕궁도 아닌 왕성의 규모가 남성, 북성을 합쳐도 50만평이 안되다니
백제는 소꿉장난을 했나?(아! 쪽팔리네)
그나마 조선시대의 왕성 4대문안에 있던 경복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처럼
남궁(몽촌토성)과 북궁(풍납토성)이라면 그나마 어여삐 봐 줄 수 있겠지만....
풍납토성 축조 인력을 언급할 때 축조인력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안에 살았어야 할 텐데
그당시에 왕궁터 빼고 백성들이 토성 안에서 얼마나 많이 거주했을까요
현재처럼 아파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듬성듬성 움집 아니면 초가집 등이 대다수 였을텐데...
그러나 사서에는 남성과 북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지요
마지막으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언급하기를 고구려가 백제 왕성을 공격할 때 밤과 낮의 바람의 방향이 다른 것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화공을 하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풍납토성은 불바다가 되어 건물들은 거의 전소되었다고 봐야할 텐데 발굴하면서 미래마을 움집 아궁이에서 발견된 것 외에는 불에 탄 흔적을 발견한 곳이 없으니 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매스컴은 항상 진실만 보도한다던데 특히 공영방송에서 보도했으니...
초기 발굴하면서 거짓으로 점철되었기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거짓이 거짓을 낳고 계속적으로 하다 보니 이제는 헤어나지 못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양심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풍납토성에서만 1997년부터 2011년까지 15년간 17군데를 발굴하면서 44억 이상의 예산을 소진했습니다. 그러나 왕궁터가 될 만한 그 어떤 증거는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산이 피 같은 국민들의 세금입니다. 그 돈이 모두 누구의 입으로 들어갔을까요? 무지 궁금합니다.)
2001년인가 경당연립부지 구덩이 매몰 건으로 주택조합장이 발굴구덩이를 덮어버렸다고 경찰에 가서 조사를 받고 풍납동 주민들은 그 때부터 문화재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로 낙인찍혔습니다.(주홍글씨를 달고 다니지요, '문화재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 이라고)
조합장의 행동은 구덩이 깊이가 2미터가 더 되었는데 발굴 후 보호펜스도 되어있지 않아서 어린아이들이 그 공터에 들어가 놀다가 구덩이에 빠져 다치지나 않을까 해서 흙을 덮은 것으로 경찰서에서도 정상참작이 되었던 것인데 문화재청을 포함한 발굴단에서는 자기들이 해야할 기본적인 조치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풍납동 주민에게 멍에를 씌운 것입니다.
풍납동 주민들이 지역이기주의, 재산 때문에 그랬다는 님의 언급은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풍납동 주민들이 문화재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풍납동에도 교수, 판사, 학자, 대기업 사장 기타 이름만 대도 알만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살고 있어요
일부 노인분들 입장에서는 집단 행동을 했을 수는 있어도 그 또한 이용하고 역이용한 것은 문화재청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매스컴을 이용한 풍납동 주민들 죽이기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정책이 바른 길로 갔다면 주민들이 이렇게 까지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문화재 정책과 문화재를 발굴하면서 사리사욕을 갖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반성이 필요한 겁니다.
위에서 발굴 과정에서의 학자들의 양심은 아직도 온데 간데 없습니다.
위 내용들은 내가 직접 발굴과정을 지켜보고 그들이 개최하는 세미나 참석하고, 발표내용을 보고 또한 해당 기관에 민원제기 및 답변을 통해 얻은 내용과 매스컴에 발표했던 내용들을 토대로 언급한 것이고 과정 전체를 지켜봤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무식합니다.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몸으로 부딪치면서 터득한 것입니다. 대학 교제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 현재의 진실...
처음에 미래마을부지 발굴을 위해 매스컴에 한국의 폼페이라고 하면서 대대적으로 홍보할 때는 많은 기대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한국의 폼페이가 맞나요?
아! 마지막
참고적으로 예전에 국립문화재연구소 담당자 왈 자기는 개인적으로는 99% 풍납토성이 백제왕궁터가 맞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개인적으로 99% 일까 궁금했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나 문화재청의 답변은 아직 백제왕궁터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했는데 혼자 99% 운운하기에 왜 100%가 아닐까 생각해 보니 1%는 만약에 아니라고 밝혀질 경우를 대비한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보았으며 학자들의 트레드마크 것을 알게 되었네요
그 담당자는 다름아닌 권오영이 한테 사사받은 제자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래나 나도 99% 백제왕성, 왕궁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짓지요
1%의 여운 좋군요
이 곳을 이용하시는 진정한 역사를 위해 고생하시는 일부(아니 대부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역사학자, 학도 회원분들께 역사를 모르는 무식한 문외한이 들 쑤셔놓은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널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늦게 덧글 다는 점 일단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나하나 뜯어보죠.
1. 이경구 씨가 풍납동 주민들에게 왜 위협을 받는다고는 생각해보셨는지요? 원래 풍납토성 자리가 아파트 건축될 뻔했는데 백제 유적인거 밝혀서 가까스로 보존시킨게 누군지는 아시는지요? 백제 유물 나와서 개발 제한되니까 이형구 죽어라라고 발악하던 동네가 어디더라요? '갖다 붙이는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본인께서는 왜 '가축 공동 도살장'으로 보시는지 근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주장을 하실 때는 근거를 갖추시고 비판을 하셔야죠? (덧글로 이어 말하겠습니다.)
우리조상이 그 조그만한 풍납동 강가에 왕궁을 지었다 .
미치지 않고서야 매년 물날리 나는곳에다,,,,,,
참 기가 차네요,
이야기 할 가치가 없는분 이네요.
@토란 우리조상들 풍납동에 왕궁지어서
훌륭한 조상들 두셨네요.
일본보다도 왕궁이 적고 고구려보다도 적고
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풍납도에 왕궁을 세웁니까.
제발 억지좀 부리지 마세요.....
검단산, 춘궁동 이야기하셨는데 고대의 '제사'는 애초에 토테미즘, 샤머니즘 적인 경향이 있는거 부정할 수 없는거 본인도 인정하시죠? 고고학이라는 분야가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해서 이게 제단 터가 되는 경우도 있고 나중에 또 바뀔 수도 있는데 왜 혼자 분기탱천하시는지 ㅎㅎ 말씀하시는 찬반토론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풍납토성 더 발굴하자고 하면 풍납동 주민들 들고 일어나는데 어찌 가겠습니까? 안그래요?
2. '끼워맞추식 발굴'이라는 점에서 웃고 갑니다. 애초에 그딴 식으로 발굴했으면 대한민국 고고학 죄다 사기꾼 집단으로 몰아붙히는거 밖에 더 됩니까? '원천봉쇄의 오류'를 저지르고 계신데 일단 학자들이 근거없이 말한다는 것 같다는 그 음모론적 시각부터 벗어나시고 이야기를 시작하셔야죠. 본인께서 말씀하시는 '왕궁터의 전제조건'이라는 것도 끼워맞추식 같은데요. 애초에 왕관의 경우는 분묘와 같은 무덤에서 출토되는건데 그게 왜 왕궁터에서 출토되야하는지 ... 왕궁 내에 꼭 사찰이 있어야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겁니까? 신라 월성이나 고구려 안학궁 내에 불교 사찰이 있었는지요? ㅎㅎ
풍납동 바람이 얼마나 세게불고 매년 장마때 물날리 나고 하는 그곳에
왕궁을 짖는다?
누가 끼워맞추는지 모르겠네요?
물날리 나고 바로 그날 적군 쳐들어와 망합니다.
@토란 고대 한성 백제 시기 풍납토성 쪽은 물가가 아닌데요 =_= 왜 현대의 기준으로 풍납토성은 물가에 있으니 왕성에 맞지 않는다고 끼워맞추시는지? 조상님들 바보로 만들면 좋습니까?
@和因 말하는 꼴이 참 어이 없네요
그럼 한강 줄기가 변햇단 말입니까?
@이조참판 초면에 '말하는 꼴' 운운하시는건 뭐하자는 태도인지 ㅎㅎ ... 3 ~ 4세기나 5세기 당시 지형에 대해서 뭘 알고 말씀하시는건지 .. 시간이 지날 수록 해안선, 하안선이 변하는건 상식인데 말입니다. 역사가 '시간'의 학문이라는건 간과하시는겁니까?
님 주장에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비판하는 내용으로 보아 현 몽촌.풍납토성이 백제 한성이 아니라는 주장인 것 같은데, 그점에 나도 동의합니다.
나는 서울이 백제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역사지리에 무식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오운의 <동사찬요>의 삼한 비정에 자극을 받아 1614 년 <동국지리지>를 저술한 한백겸의 남자남북자북설은 인정하나 그 경계를 당시의 한양을 흐르는 한수로 본 것은 한국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봅니다. 신채호도 한백겸의 설을 <후한서/동이열전>을 충족시키기에는 족하나 너무 맹장적이고 무단적이라고 했듯이 고대 사서 기록을 세밀히 고증하지 않고 섣부르게 내린 한심한 비정이라 단언합니다.
한백겸의 주장을 정론이라 여기며 떠받들었던 유형원,신경준,안정복,정약용,한진서 등의 韓 강역 비정도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한은 한백겸의 주장처럼 조선과 남자남북자북했지만 그 경계인 패.대.한수는 한반도가 아니라 조선 왕검성,낙랑군 그리고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지금의 대릉하 서쪽 상류 지역에서도 약간 더 서쪽인 지금의 란하 하류 삼각주인 열양이며 원래의 요동반도에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백제.신라 3 국의 접경지나 진과 통일신라의 접경지 또 고려의 중심지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잘못 비정된 한.마한.백제를 증명한다고 현 서울의 어줍잖은 출토물들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한심한 것입니다.
왕이 거처하던 건물의 경우 풍납토성 발굴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고고학이라는 분야가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하는데 학설의 수정은 계속해서 변천하는겁니다. 절대불멸의 존재가 아니라구요. 이게 왜 학자의 양심 문제로 들어가서 허수아비 치기로 변모하는지는 진짜 미스테리합니다 ㅎㅎ 1500년전 묻혀있던 글씨가 온전하면 왜 의심스러운지 부터 일단 설명 좀 부탁드리고요. 경당지구에 대한거는 말로 설명하기 길어지니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로 본 한성백제 , 문동석, 인문논총, Vol.20 No.- [2010], 서울여자대학교, 2010>의 논문을 참조해주십쇼.
아마 왕궁 짖다가 ,
물난리 나서 망하고 적군 쳐들어와 망하고.......
3. 한국의 폼페이 부분은 제가 과문하니 넘어가고 도로의 경우는 왕도 해석은 차차하더라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해석인데요? 경주 월성에도 도로 유적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물의 흔적이라고 덮어두고 말하실 분이네요. 월성 도로 유적이라고 나온 것도 말씀하신 것처럼 '자갈이 군데군데 깔려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일단 물의 흔적이라고 왜,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지 근거 부탁드립니다. 인위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해당 논문이나 관련 신문기사라도 혹시 있으면 알려주세요. 밑도 끝도 없이 음모론 펼치는 것 처럼 말씀하시니 원 신용이 가야말이죠 ... =_=;;
초딩이 생각해도 왕궁아니다.
@토란 제대로 된 반박 하나 못하시는 모습이 더더욱 '초딩'스럽네요. 뭔가 주장을 하실 때는 좀 '품격있는' 말로 해주십쇼 ^^
초석은 시간이 오래되어 물로 변해갓을것이고
그 초석은 달고달아서 돌맹이로 변햇다는 님의 주장 같소이다,,
4. 풍납토성이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 초기기사의 의문점을 풀어줄 중요한 사료가 될 터인데 백제 왕궁터를 다른 곳에서 찾는다는 소리로 논지가 전개되는지 =_=;; 풍납토성의 발굴로 학계가 삼국사기 초기 기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로 돌어섰다는 것은 알고 말씀하시는거죠? 일단 논지 자체에서 뒷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그게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대사의 경우 구체적으로 소급해 말하는게 어렵다는건 본인께서도 잘 아실텐데요? 왕궁이 어디었다고 콕 찝어서 나오지도 않는데 어림짐작으로 때려맞춘답니까?
풍납동 직접 가서 보세요.
그조만한 동네가 왕궁이라.....
@토란 면적이 적다고 왕궁이 안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답니까?
5.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에 대한 내용은 최근에 대두된게 아니라 93년도부터 김윤우의 논문에도 보이듯 줄기차게 주장되던 학설인데요. 무슨 풍납토성을 발굴했다가 왕궁터 안나와서 새롭게 대두된 학설처럼 말씀하시는지 ... 고대국가가 왕성을 하나에 둔 것이 아니라 양성 체제로 둔 예는 고구려도 있는데 그것도 학자들의 협잡이라 폄하하실런지요? 발굴 자체에 불만을 가진건 풍납동 주민들 뿐이었지 그게 무슨 국민적인 사기극으로 포장해서 선전선동 하시려고 합니까? 풍납동 주민들에게 사죄해야한다는 점에서 또 웃고 갑니다.
난 역사학자 그 무엇도 아닌데 풍납동은 아닙니다. 상식에 근거해서......
'풍납동에도 교수, 판사, 학자, 대기업 사장 기타 이름만 대도 알만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살고 있다'고 운운하셨는데, 그 분들은 뭐했길래 아파트 건축 못했다고 멀쩡한 이형구 씨 매도한답니까? 풍납동 주민 죽이기가 아니라 멀쩡한 학자 죽이기임을 세상 천지가 다 아는데 ㅎㅎ 제가 보기에는 풍납동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일부러 풍납토성 발굴 자체에 부정적인 기색을 보인 풍납동 주민들이 더더욱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데 제가 이상한겁니까?
풍납동이 왕궁이면 가짜가 아닌 진짜 증거를 보여주세요?
세미나 참여, 발표내용 숙지, 민원제기 및 답변을 들으셨으면 뭐합니까? 애초에 '풍납토성을 백제 왕성이라 날조하는 나쁜 놈들!'이라는 시각 자체를 가지고 모든 것을 거기에 투영시켜 바라보시는데요. 지금의 상황까지 온 것에 대해서 이형구 씨를 비롯한 학계의 학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는지는 무척 의문이 듭니다. 풍납동 주민들의 행동 역시 문제가 없지는 않았을텐데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 학설이라는게 절대불멸의 존재가 아니기에 1%의 가능성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걸 무슨 책임회피의 논지로 흘러가는지 ...
뻥이 아닌 진짜 왕궁 증거.
끝으로 본인께서 역사에 무지하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 매우 가시돋은 말이라 생각됩니다만 - 특정 프레임에 경도된 시각부터 수정하시는게 옳으리라 판단됩니다. 대뜸 학자들 가지고 양심적이니 비양심적이니 하는 것 자체도 솔직히 웃기고, 실제로 보신게 있으시다면 반대로 학자들은 무엇을 말했는가 좀 더 자세히 알고오심이 옳을 것 같네요. 주장부터 평행선을 달리면서 학자들의 치부 자체만 집중하시니 논지가 정연할 턱이 있습니까(...)
토론 글을 올려주시는 점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역사문 카페 수칙상 원래 긴 댓글이 3줄이 넘어가는 경우는 가급적 글로 올리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의 경우 나중에 검색해서 읽기에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풍납동은 지리학적으로 1달을 못버티고 적에게 망하는 곳입니다.
서울시가 왕궁터면 외국 관광객도 많이 오고 여러가지 경제적으로 많은 해택이 있겠죠.
서울에 엄청 도움이 될겁니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되어야 합니다.
다른시에 빼앗기더라도 .
@토란 쭉 제 덧글에 올려주신 글을 보았는데 결론은 '풍납토성은 왕궁이 아니다'로 귀결시켜서만 말씀하시네요. 구구절절 제가 말씀드려봤자 죄다 부정형으로 본인 결론만 고집하실 것 같아 마지막의 '그러나 역사는 진실되어야 합니다. 다른시에 빼앗기더라도'라는 말씀에만 몇 자 적고 갑니다. 풍납토성 깔아뭉게고 무조건 왕성이 아니라는 결론에 끼워맞추는게 진실된 역사를 찾는 태도는 아닐텐데요. 작위적으로 풍납토성을 왜 그리 왕성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지 참 의문스러워집니다 ㅎㅎ 개발이 그리 중요한건지 원 ...
@신농 차후부터 숙지하여 글 형식으로 올리겠습니다. 수칙을 제대로 확인치 못한 점 죄송합니다.
@和因 가짜가 아닌 진짜 증거를 보여주세요?
왜 님은 풍납동이 진짜라고 우깁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진실로 물증을 절터 주춧돌을 보여주세요?
다른 왕궁터에서 나온것처럼 큰돌 몰레 시골서 가져오시지 마시고.
이 누구처럼 .......
@토란 몰래 시골에서 가져왔다는 증거는? ㅎㅎ 죄다 음모론적인 말 밖에 못하십니까? 역으로 물어보죠.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를 단순하게 제단하면서 아니라고만 생각하는 태도가 우리 고대사를 매장하는 위험한 발상인거 본인은 모르시는지?
음....오랜만에 들와 봤는데...이런 글이라니...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이 아니지요...뭐 위례성 1KM라고 쓴 표지석이 발굴된 바 없으니까요. 하지만 단언컨데 가장 유력한 백제왕성터로 추정되는 후보이지요. 저는 뭐 사실 위례성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만...제가 궁금한건 왜 이리 기를 쓰고 풍납성은 백제왕성이 아니다란 명제에 집착하시는 분들이 많은지? 그게 궁금할 뿐입니다.별 논리도 없고 발굴에 애쓴 학자들을 매도 해가면서 까지? 왜?
딱 보이지 않습니까, 풍납토성으로 인해 개발 제한 걸려서 무조건 왕성이 아니라는 결론에만 집착하는 모습인걸요 =_=;;
님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사람들이 무보수로 자원봉사라도 했나요?
문화재청 예산받아서 그들은 받을 것 다 받고 챙길 것 다 챙겼는데...
한사람은 서울대 국사학과 영전, 한사람은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영전
또 한가지 들은 얘기 해볼까요
실제 고생하는 사람들이란 바로 험한 산속에서 천막 쳐놓고 발굴하는 사람들...(이정도는 되어야 조금 고생한다고 하겠지요)
풍납토성, 몽촌토성 발굴팀은 영어마을 내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올림픽공원 한성백제박물관 사무실에서 편안하게 근무...
교통도 편하고 온갖 시설 다 갖춰져있고 아쉬울게 없는데
풍문으로 들리는 얘기로는 이곳을 맏으면 완전 보직이라고 하더만..
무슨 개고생입니까
딱 보니 사이비네 맨날 개발 어쩌고 저쩌고 증거르 보여주세요,
역사 왜곡 하지마시고 ....
맨날 파도 없잖아요.머라도 보여주고 왕궁터라고 우기게요.
사이비 운운 이전에 발굴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는 팩트부터 인식해주세요 ㅎㅎ 그래서 왕궁터라고 아무리 증거 보여주면 뭐한답니까? 본인부터 귀를 막으시고 풍납토성이 왕궁터가 아닌다란 프레임을 고수하시는데요.
그리고 남의 주장을 반박하시려면 사이비라는 둥 인신공격말고 논리를 갖추고 '주장'을 하셔야죠. 자기 하고싶은 얘기만 한다고 풍납토성이 왕궁터가 아니라는 주장이 통하는거 아닙니다 ㅎㅎ
@和因 님의 댓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서 글을 올렸으니 참고바랍니다.
역사학 전공이 아니라서 여기에서 논리적으로 말할수는 없지만 이것을 학술대회라고 개최하는것을 보니 이사람들이 역사왜곡을 하고있는게 확실해보이네요
좀 안타까운 글이네요. 주민이시고 비전공자시니 이렇게 볼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풍납토성이 왕성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어찌보면 차후의 문제이고. 이정도로 상등품의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나오고 3중환호, 주거지, 제사터 등, 관련시설이나 이전 시기 유구들이 높은 밀집도로 확인되는 상황에서는 대한민국 어디라도 발굴조사를 안하고 넘어갈수는 없습니다. 왕성이 아니니 밀어버려도 상관없다? 라는 논리는 있을수 없는거죠.
옛날종합운동장 올림픽 아파트 지을때 거기 엄청 유물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냥 무시하고 지었다고.
동대문 운동장도 머가 나왔는데 거기서 어떻게 하고 그냥 준공 했다고....
풍납동 왕구이면 확실하다고 생각 되는곳 10곳 매입해서 (옆동네 시가로 매입해서) 모든분들이 인정할수
증거를 보여주시면 국민 혈세도 절약하고 좋겠네요.
계속 우기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