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모교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리워 찾아간 모교인데도 선뜻 교문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해 9월 당의 품에 안긴 나는 서둘러 나의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을
찾았다.
화강석교문위에 활달한 필체의 「김일성종합대학」현판이 용남산 아침햇발을
배경으로 눈앞에 확 안겨 왔다. 그처럼 그립던 모교,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 대학인가! 이 교문을 들어서서 4년동안 매일 마주한 교문, 이
교문을 나서서 40년만에 다시 마주 서니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교문안에서 정다운 본교사가 예나 다름없이 어서 오라고 손저어 불러주는듯
했다.
그러나 나는 얼른 교문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학생때에는 수강준비를 못했건
지각을 했건 스스럼없이 들어서던 교문이 오늘은 더욱 숭엄해 보여 나를 멈춰서게 하였다. 이 교문을 나선 후 당과 조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교문을 떳떳이 들어설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40년전 교문을 나설 때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의 본분을 다하겠노라 다졌던
맹세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뗐다. 정다운 용남산마루로 향했다. 감옥생활 근 20년세월 꿈결에도 뵙고 싶었던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우러르니 격정이
북받쳐 올랐다.
우리 수령님과 우리 장군님의 대학인 나의 모교는 그 험악한 남쪽땅에서 내
마음의 길잡이었다. 철창속의 모진 고통을 이겨내며 걸어온 나의 힘, 나의 존엄이었다.
나는 오늘도 김일성종합대학출신으로서의 긍지와 영예, 자존심을 안고 이 붓을
든다.
모교의 존엄지켜
혁명적 신념은 혁명의 영도자에 대한 신뢰와 숭배에서
이루어진다.
그 신뢰, 그 숭배는 수령의 위대성, 수령의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위인에게 매혹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을 김일성종합대학시절에 체험했고 남조선의 감옥에서 굳히었다.
내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된 것은
1981년 2월15일 새벽이었다.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한 지역에서 적무장경찰들에 포위된 그날밤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에 이상한 예감이 들어 밖을 내다보니 골짜기아래로 생눈을 헤치며 검은 그림자들이 이리떼마냥 몰려
오고 있었다.
『적들의 포위에 들었구나!』
급히 비밀문건들을 처리하고 탈출하려고 문을 열자 벌써 시커먼 총구들이
조여오고 있었다.
순간 살아서 잡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본능처럼 자결수단을 사용했다.
2~3초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죽어지지 않았다. 나의 최후의 무기는 성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다시 칼을 꺼내
내목의 동맥부분을 연거퍼 두번 힘을 주어 베였다. 뜨거운 것이 확 뿌려지는 순간 경찰놈들이 나를 덮쳤다.
의식은 몽롱했어도 변절자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 불붙듯 했고 적들에게 사로잡힌
치욕이 뇌리를 두드렸다.
심한 출혈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적들은 가혹한 심문을
들이댔다.
『어느 학교 나왔어?』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쳐들며 대답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다.』
『뭐 김일성종합대학?!』
『직업은?』
『대학교수다!』
놈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애당초 나는 나의 모교와 나의 사상에 대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시절에나 졸업후에나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이라는 자존심을 안고 살았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그것은 나의 존엄이고 명예이며
행복이다.
세상에는 이름있는 대학들이 많지만 김일성종합대학처럼 절세의 위인들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명문대학은 없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인이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세워주시고 키워주셨으며
21세기의 태양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빛내어주시는 태양의 존함을 모신 김일성종합대학! 나는 바로 이 대학에서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을 배우며 자랐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그 긍지와 자부심, 그것은 곧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으신
권위이고 위대성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답게 놈들앞에서 더욱 도고하게 행동하자.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가혹한 심문은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되었다.
철창속에서 의식을 차린 후 문득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오늘이 바로 2월16일이 아닌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탄생일이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대학시절에 어버이수령님께
충성다할데 대하여 절절히 말씀하시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영상이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께 축원의 인사를 삼가
올렸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 아침 집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초상화에 인사를 드리겠지. 직장마다에서는 예술소조공연과 체육오락경기가 한창이겠지. 대학시절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던 대성산유원지
도로건설장이며 경애하는 장군님을 뵈옵던 대학 본교사 앞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모교앞에 부끄럼없이 살리라 다시금 마음다지었다.
내가 서울에 있는 치안본부대공분실로 압송된 것은 1주일후였다. 용산구
남영동에 있는 5층의 음침한 대공분실건물은 살인마의 소굴이다. 애국자들이 갇히면 여기서 1~2년간 가혹한 고문과 심문끝에 죽거나 병신이 된채로
검찰에 송치된다. 나는 여기서 1년간 짓밟히고 얻어맞고 온갖 악형을 다 당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오랜 심문기간을 거친 것은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내가 투옥된 후 박종철학생을 고문학살했던 악질경무관놈이 내앞에
나타났다.
『여보. 손선생, 왜 그리 고집이 센가? 우리 서로
협조하자는건데.』
『그래 뭘 협조하란 말이요?』
『너무 콧대를 높이지 마시오. 우리와 협조하면 팔자를 고칠 수
있을텐데.』
『난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이요. 나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너는 아무도 몰래 죽을 수도 있어.』
『똑똑히 알아두라. 내 정신은 네놈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다!』
『지독한 자식. 데려가!』
벌떡 일어서는 그놈의 눈길은 살기가 번뜩였다.
놈들은 나를 고문실로 끌고가 전기고문의자에 비끄러맸다. 온몸에 전류가
찌륵찌륵 흐를 때마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장기와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는듯 했다. 나는 기절해서 쓰러졌다.
다음날 또 주전자로 고추가루물을 내 입과 코에 부어넣었다. 나는 수년동안
그렇게 악몽같은 고통을 당했다. 내가 조국에 와서 치료받은 여러가지 병들은 그때에 생긴 것이다. 놈들에게는 변절한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모진 고문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내가
조국통일사업에 나선 것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죽어서 영웅이 되고 살아서 출세를 하자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나를 키워주고
공부시켜 주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인간으로서의 의리와 도리를 다하자고 나선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무척 배우고 싶었다. 내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군, 예로부터
서해와 기름진 평야를 끼고 있어 살기 좋은 변산반도라 하였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나는 여기서 제땅 한뙈기 없는 농부의 2남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너무 생활이 어려워 제 나이에 장가도 못가고 살다가 41살에야 의지가지할데 없는 16살의 어머니와 가정을 이루었고 환갑을
지나 나를 보았다니 정말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님들은 나를 공부시켜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월사금을 적게 내는
간이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마저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기둥처럼 믿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나는 백두산에서 축지법을 쓰시며 왜놈군대를 족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같은 가난한 집 아이들도 다 공부시켜 주신다는 말을 듣고 이북을 열렬히 동경했다. 김일성장군님의 세상에서 학교에 가는 꿈도 꾸었다. 15살에
고학이라도 하려고 집을 나선 나는 남의 집 꼴머슴살이, 이발소의 직공살이를 하면서 공부했고 이북에 갈 생각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희한한 소식에 접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평양에 종합대학을
세우시고 노동자, 농민의 자식들도 다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이었다. 나도 김일성장군님의 대학에서 공부해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일성장군님은 내 마음속의 구세주이시었고 김일성종합대학은 나의 최대의 희망이었다.
나는 6.25전쟁시기 바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을
만났다.
서울이 해방되어 2일만에 의용군에 탄원한 나는 그날 저녁 서울시 공관에서
열린 인민군대환영집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었다는 인민군군인이 연단에 나서서 연설하는 것이 아닌가.
『아, 김일성종합대학 학생, 참 멋있구나!』
나는 그에게서 선망의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는 유창하면서도 감명깊게 연설을
아주 잘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종합대학을 세워주시고 학생들의 생활을 일일이 보살펴 주신 이야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 탄광의 탄부라는
이야기, 자기 대학에는 서울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월북한 선생님들과 남반부출신 학생들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 그의 연설은 나를 황홀경에로
끌어갔다.
『김일성종합대학, 나도 거기에 가서 공부할 수 없을까…』
정말 부러웠다.
나는 전쟁기간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출신군인들을 많이 만났었다. 그들은 싸움도
잘했고 생활에서도 남달리 우수했다. 나의 첫 부분대장도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했는데 전투임무수행에서 언제나 모범이었고 품성도 훌륭했다.
그는 나의 거울이었다.
바로 그렇게 그리며 희망하던 김일성종합대학에 내가 다니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한창인 때에도, 정전후에도 의용군으로 들어온 남조선출신 청년들을 대학과 외국유학에 보내어 나라의 간부로
키우도록 해주시었던 것이다.
나는 1957년 9월 인민군대에서 제대되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때 얼마나 기뻤던지. 첫 등교를 하던 날 나는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교복을 입고 앞가슴에 종합대학휘장을 달았다. 대학모표가
빛나는 모자를 쓰고 기숙사호실 거울앞에서 앞으로 옆으로 몸을 돌려가며 보았다. 어젯날 설움많던 부안산골 꼴머슴이었던 내가 오늘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 되다니. 고향사람들앞에 나가서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의 학습과 생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보살펴 주시었다.
의용군출신이라고 장학금과 교복은 물론 교과서와 학습장, 펜촉에 이르기까지 무상으로 배려해 주시고 방학때면 송도원이며 경치좋은 곳에 야영도
보내주시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나에게 사상정신적 품격을 심어주었고 심오한 지식을 안겨주었다.
나는 대학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었다. 1958년 4월5일
수령님께서 대성산유원지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우리를 찾으시어 흙묻은 손도 뜨겁게 잡아주시며 고무해 주시었다.
수령님께서는 5.1절을 앞둔 4월30일 아침 대성산유원지 도로개통식에 몸소
나오시었다. 그이께서는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우리들에게 답례를 보내시며 일을 많이 했다고 거듭 치하해 주시었다. 대학생들이 땀흘려 건설해 놓은 이
길로 어떻게 차를 타고 가겠는가고 하시며 우리들과 함께 걸으시었다. 소문봉에 오르는 산기슭 굽인돌이에 이르시어서는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시었다. 그때 저마다 그이의 곁에 가까이 서려고 모여들었다. 나는 깃발을 든채 앞줄에 섰다. 우리 집에서는 그날의 경사를 보도한 「노동신문」과
기념사진을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나는 그 영광의 신문과 벽에 모신 기념사진을 보면서 지금도 그날의 감격에 잠기군 한다.
행운에 행운이 겹쳤다.
1960년 9월 어느날 나는 뜻밖에도 대학 본교사앞에서 학생들과 담화하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을 직접 뵈왔다.
빛나는 안광, 환한 미소, 소탈하신 말씀… 그이께 나는 완전히 매혹되었다.
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는 대학안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해인가 그이께서 모스크바종합대학을 돌아보실 때 그 나라 안내일꾼이 자기
나라의 이 종합대학에 다니시기를 청드리었는데 그이께서는 우리 나라에는 훌륭한 김일성종합대학이 있다고,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단호하게 언명하셨다는 이야기, 「신라에 의한 3국통일론」의 부당성을 까밝히시고 김유신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여 주신 이야기,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해명을 주신 이야기…
참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은 인류의 태양이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존함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성스러운 대학이다. 세계역사에 처음인 주체교육의 최고전당이고 참다운 혁명대학이며 이 세상 으뜸의 대학이 바로
김일성종합대학이다.
이 대학에서 내가 공부했다.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영광, 이
존엄을 고문이 아무리 가혹하고 죽음이 아무리 위협한다고 하여도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는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학졸업생, 이 영예, 이 존엄을 지키면
내가 살고 이것을 못지키면 영영 죽는다.
감옥과 나의 생활원리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수령을 순결한 마음으로 우러르며 수령의 위업을 받들어
순간의 동요도 없이 실천하는데 있다. 실천이 없는 신념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서울구치소에 미결수로 들어가 재판을 기다리며 그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민에게 서대문형무소로 알려진 감옥, 여기서 불요불굴의 항일혁명투사 김형권선생님과 권영벽, 이제순동지들이 높이 부른 신념의 목소리가 계속
울리는듯 했다. 최백근, 조용수동지들과 김종태, 최영도, 이문규동지들의 모습도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들의 넋이 어린 감방의 벽이며 바닥이며를
쓸어보았다.
대학시절 항일혁명투사들과의 상봉모임을 가졌던 일이
생각났다.
내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1961년 4월 어느날 우리는 장길부여사가
마동희동지를 회상하여 한 말을 녹음으로 들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이날 학생들과의 담화에서 항일혁명투사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혁명노선과 명령지시를 어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무조건 끝까지 관철하였다고 하시면서 마동희, 최희숙, 권영벽동지들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열사들이
생명의 마지막순간에 외친 『김일성장군 만세!』,『조선혁명 만세!』의 힘찬 목소리는 영원한 삶의 메아리라고 하시었다. 그때 장군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내가 서울구치소에서 되새기게 될 줄을 어이 알았으랴.
이제부터 나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말씀대로 항일혁명열사들처럼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다졌다. 법정투쟁은 흔히 형을 줄이기 위한 싸움이라지만 나는 법정을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방침을 선전하는 무대로 만들기로
하였다.
나는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때 나는 나를 「간첩」이다 뭐다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검사놈에게 나는 간첩이 아니다, 나는 김일성주석님의 조국통일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다. 김일성주석님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3대원칙은 가장 정당한 통일원칙이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 원칙대로 통일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간첩으로 말하면 미국을 위해
동족을 탄압하고 있는 너희들이야말로 공개적인 간첩이고 용서못할 매국역적이다 라고 논박했다.
이날 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죽는다는 생각보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앞에 그리고 나의 모교선생님들과 동창생들, 가족들앞에 내가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자부가 앞섰다. 다만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하늘같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더 보답하지 못하게 된 것이 죄스러웠다.
나의 상소로 4개월후에 고등법원에서 2심재판이 있었다.
순례누님과 조카딸 정임이가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재판정에서 30여년만에 나를
본 그들은 이 사형수가 자기들의 혈육이요, 어젯날의 불쌍한 소년이었다고 생각하며 가슴 쓰리었던지 자꾸만 눈물을 쏟았다.
이날 놈들은 나에게 무기형을 선고했다.
『피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재판장이 물었다.
『오늘의 재판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내가 북에서 살았고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이기 때문에 죄가 크다고 하는데 그것은 결코 죄로 될 수 없다. 이미 너희들과 첫 대결때에도 밝힌바이지만 다시한번 똑똑히 말해
둔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김일성주의자이다.』
뜻밖의 나의 공개적이고 당당한 이 선포에 재판관들은
전율했다.
『발언 중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하는가.』
『자기의 신념을 고백할 자유도 없단 말인가. 나의 말을
들으라.』
나는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눈길을 온몸에 받으며 계속 열변을
토하였다.
『내가 김일성주의자로 된 것은 첫째로 김일성주석님은 일제의 노예로 되었던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신 절세의 애국자이시고 김정일장군님은 주석님의 위업의 계승자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들의 뜻으로 살기 위해 김일성주의자가
되었다.
둘째로는 남쪽에도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영도하시는 인민의 세상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며 셋째로는 김일성종합대학시절과 졸업이후 그분들의 사상과 정치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했기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왜 죄로 되는가. 나에게
무죄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나는 이 항변을 재판후 「상고이유서」로 써서 나의 입장을 다시금 공개하였다.
글자수로 2만자, 원고지로 100매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상고는 3심에서 기각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언제 끝날지 모를 옥살이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김일성주의자로 지켜본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들은 언제 어디서나 수령님의 의도와 당의 요구대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무기수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던중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는 60여명의 장기수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20년, 30년동안이나
혁명적 절개를 지켜가는 동지들이 있었는데 「총각할아버지」들도 있었다.
나도 저 장기수들처럼 20년, 30년을 살아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선뜩해졌다. 내가 동요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마음을 굳혔다가 도중에 흔들리는 사람도 있다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김일성주의자에게 있어서 감옥은 갇혀 사는 곳이 아니라 활동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곳이 15척담장으로 둘러친 감옥이요, 0.75평의 좁디좁은 공간이지만 사상만은 가둘 수 없지 않는가.
나는 매일밤 하루옥살이를 총화했다.
그때마다 종합대학시절에 당생활총화를 하면서 서로 잘못을 비판해 주던 동무들이
그리웠다. 그때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조직에서 토의하고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지금은 의논할 대상도 없고 나를 비판해 줄 사람도
없다.
어느날 무기수 신동지와 같은 호동에 있게 되었다. 그는 내가 하루옥중생활을
자체총화한다는 말을 듣더니 자기도 그렇게 하지만 자신이 자신을 다 볼 수 없어 걱정이라며 웃었다.
『그럼 우리끼리 서로 봐 줍시다.』
나는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개 당세포가 되자면 3명이상이 되어야겠지만 우리 둘이서 당조를 무으면
어떨가요?』
『나도 그 생각을 하던중입니다. 언제까지 같이 있겠는지 모르겠지만 한달에
한번씩 생활을 돌이켜봅시다. 우리 언제나 수령님의 교시대로 활동합시다. 둘중에 누구 하나가 살아서 나가면 당중앙에
보고합시다.』
우리는 서로 손을 굳게 잡았다. 후에 우리는 전주교도소에서 김동지를 더
망라해서 당세포조직을 내왔다. 김동지는 우리 세포비서로 되었다.
감옥에서 할 일은 많았다.
김일성주의자는 어디서나 수령의 사상을 선전해야 한다.
나는 우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대성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부터 하였다.
이 시기 감옥에는 통일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들은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고 대학교원이었다는 것을 알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혁명역사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물어왔다. 어깨가
무거웠다.
나는 대학에서 배운 것을 되새기며 아는껏 해설해 주었다. 공화국의 통일정책도
알려 주고 「항일빨치산참가자들의 회상기」와 「인민들속에서」,「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등의 도서내용도 이야기해주었고 반미자주의식을 심어주는데도 힘을
넣었다.
김일성주의자는 투쟁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전향반대투쟁과 처우개선을 위한 투쟁도 계속 벌였다. 이 투쟁은
장기수들의 신념과 생명을 지키는 문제이고 수인들을 묶어세우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1990년 1월1일부터 보름간 진행된 처우개선을 위한 단식투쟁에
이어 동지들의 병치료를 요구하는 투쟁도 벌였다.
우리는 변함없이 정신적 승자로 싸웠다. 비록 감방속에 갇혔지만 도고한 기상과
낭만으로 당당하고 떳떳이 살았다. 그러나 그리움에 젖어 눈물을 짓기도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김일성주의자는 언제나 수령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잠을 깨고 저녁마다 잠들 때에는 수령님과 장군님의 안녕을
기원했다. 식사하기전에도 먼저 그분들을 마음속에 그리였다. 전향강요의 모진 고문을 당할 때는 더욱 그렇게 했다. 그러면 마음의 편안을 느끼며
외롭지도 않고 무서운것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김일성종합대학출신의 생활방식이요, 김일성주의자의 드틸
수 없는 생활원칙이라고 생각했다.
90년대를 맞는 첫해 4월15일이었다. 오늘이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일이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 올랐다.
내가 체포된지 10년이 된다. 그동안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축원의
인사를 올릴 수 없은 것이 죄스럽기만 하였다.
물론 우리는 해마다 4월의 명절과 2월의 명절, 9월9일, 10월10일을
기념하였다. 이날에 통방으로 서로 축하했고 감방밖에서 만나면 수갑을 찬 손을 들어보이며 『축하!』하고 소리내어 인사했다. 허나 그것으로 어찌
수령님과 장군님께로 달려가는 마음을 대신할 수 있으랴!
그해 4월15일 아침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신동지와 함께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축전을 올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간수들의 눈을 피해 가며 문장을 다듬고 다듬어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안녕을 축원하였다.
마침 이 거사를 도와줄 수 있는 믿음직한 동지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축전원문을 넘겨주고 나니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우리는 말없이 철창밖을 내다보았다. 나의 마음은 푸른 하늘높이 떠가는
흰구름에 실려 저 멀리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용남산기슭을 찾아가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 경애하는 장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손성모는 끝까지 변심없이 싸워가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마음의 진정을 말씀올렸다.
광풍이 휘몰아칠수록
신념을 지키는 것은 마음의 기둥을 억세게 세우는데 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마음의 기둥만 든든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지구촌을 휩쓴 제국주의광풍은 감옥안에도 불어닥쳤다.
감방의 한쪽 벽에 달아맨 고성기에서는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이
망했다고 소란스럽게 고아댔다. 공화국의 운명도 경각에 이르렀다고 감히 불어댔다. 그래서 믿을데가 없으니 전향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무슨 청천벽력인가.
1994년 7월8일 우리의 마음의 기둥이시었던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
뜻밖의 비보가 전해졌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는가, 지구가 깨어져 나갔는가, 고문과 심문, 감옥생활이 아무리 참기 어렵다 해도 이날처럼
고통스러움을 뼈아프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주먹으로 감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감옥전체가 곡성으로 가득 찼다.
우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단식을 했다. 민족의 어버이를 잃고 어찌 목구멍에
음식이 넘어갈 수 있으랴. 9일간 추도단식을 했다. 나는 감옥생활기간 어버이수령님을 꿈에 자주 뵈왔는데 그중 한번은 이때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본교사앞에서 수령님을 뵙고 그이께로 막 달려 가면서 수령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거짓말이었구나 하고 너무 기뻐 소리내어 엉엉 울다가 깨어났다.
꿈이었다. 그래서 또 울었다.
이 비통한 시기에 적들은 우리를 전향시켜 보려고 별의별 악착한 짓을 다했다.
민족의 어버이를 잃고 슬피 우는 옥중의 상제들에게 전향하라니 천하에 둘도 없는 인간쓰레기,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었다.
우리는 사생결단으로 놈들과 맞서 싸웠다. 우리에겐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시어
어버이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안고 천백배의 용기를 가다듬었다.
이에 당황한 놈들은 감옥에 비상을 걸었다. 그해 12월에는 나를 다른
교도소로 옮겨 놓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들은 오직 수령님께서 가리키시는
한길로만 가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지금이야말로 그 길에서 더욱 견결해야 할 때이다.
적들의 살벌한 경계속에서도 우리는 김일성주의자로서의 정신수양을 한시도
중단하지 않았다.
특히 명절때이면 특별학습을 했다. 학습은 주로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고
대학교원을 했던 내가 선생격으로 집행하였다. 학습내용은 수령님과 장군님의 노작이었다. 책이 없으므로 기억을 더듬어 내가 강의를 했고 학습자료를
입수하면 돌려가며 보고 1주일에 한번씩 그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혁명소설 「꽃파는 처녀」와 「봄우뢰」도 보고 감상토론도
하였다.
이런 책들은 놈들의 감시를 피해 그 표지를 감옥에 들어오는 합법도서의 표지로
바꾼 것이었다.
한번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상을 형상한 도서를 보다가 그만 놈들에게 들켜서
교무과에 끌려 갔다.
『왜 붉은 서적을 봐?』
『그래, 봤으면 어떻단 말인가?』
놈들과는 맞받아 나가야 한다. 피하거나 변명하면 더욱
횡포해진다.
『이건 빨갱이책이란 말이야.』
『뭐, 빨갱이? 나는 김일성주의자이다. 김일성주의자가 이런 책 안보고 뭘
본단말인가. 나는 그 책을 열번, 스무번이고 봐야겠다. 책을 다시 돌려달라.』
나는 들이대였다. 그리고 한마디 더 쏘아붙이었다.
『당신은 간수질해도 못되게 놀지 말라. 앞으로 계산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후에도 계속 학습하였다.
정말 학습은 장기수들의 첫째가는 임무였고 투쟁이었고
당생활이었다.
우리는 명절때마다 수령님과 장군님을 그리는 모임도
가졌다.
위대한 수령님의 서거 1돌때였다.
내가 있는 감방에서 김동지, 신동지들과 함께 어버이수령님의 태양상사진을
모시고 추모모임을 가졌다. 사진은 남조선잡지 「말」표지에 모신 사진에 이미 감추어 두었던 색종이와 문양지로 테두리를 정중히 장식한
것이었다.
모두가 수령님의 영상앞에 경의를 표시한 후 내가 「어버이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했다.
배식구앞에서 「건국대학교사건」으로 감옥에 들어온 학생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밖을 감시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석방된 후 어느해 봄날이었다. 뜻밖에도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보내준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경상북도 어느 시에 사는 대학생이었다. 학생운동으로 잡혔다가 출옥한 친구에게서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이
장기수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귀고 싶다면서 편지와 함께 잡지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을 연줄로 하여 나와 서로 만나고 진심을 나눈 사람들 속에는 목사,
신부, 수녀, 주교도 있고 교수, 작가, 대학생도 있었다. 노동자, 가정주부, 나어린 소녀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벗이
되었다.
이렇게 석방된 후에도 우리의 투쟁과 생활은 계속되었다.
나를 「오빠」라며 내가 조국에 돌아올 때 바래주며 눈물을 짓던
여대학생들.
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하루가 멀다 하게 고무하는 편지를 보내주고 북으로
떠나올 때에는 나에게 남편까지 데리고 와서 그리운 품으로 가는데 어찌 그옷을 그냥 입고 가겠느냐며 와이샤쓰, 넥타이에 새 양복을 지어주고 환히
웃던 가정부인.
그들은 모두 나와 뜻을 함께 나눈 동지가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으며 그들과 주고 받은 편지만도 500통이 넘는다. 나는 지금도 그 편지들을 간수하고 있다.
우리의 활동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자리를 잡은 후
더욱 활발해졌다.
나는 신동지와 함께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구청관하의 여러 일터에
나가 일했다. 수령의 전사, 당원으로서 수십년간 물지 못한 당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끝나면 통일을 위한 각종 행사들에 참가해 종일 뛰어다녔다.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서 독사마냥 꿈틀거리고 감시와 미행, 협박과 회유, 비열한 모략과 노골적인 납치음모가 위협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물러설
수 없었다.
우리의 활동에서 일관된 것은 어버이수령님의 업적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위인상을
널리 알려주는 것이었다.
특히 역사적인 평양상봉과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사회각계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인 나에게 김정일국방위원장님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주체사상강의를 해달라는 청탁이 거듭 제기되어 그에 응할 시간을 짜기에
바빴다. 이때처럼 김일성종합대학출신으로써 당과 조국앞에 지닌 자기의 위치와 책임감을 깊이 느껴본 적은 없었다.
현실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에게 남조선이라는 땅을 큰 교실로 삼고
백두산3대장군의 위대성과 주체사상의 진리성을 강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동지들과 함께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조직하는 집회에 참가해 연설도 했고 서울과 경기도, 남강원도, 경상남도의 대학들에도 가서 강의를 하였다.
경상남도 울산에 갔을 때였다.
대학생들과 학생운동권출신들 수십명이 나에게 주체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
6.15공동선언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시절에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뵙던 감격과 그분들께서 후대교육사업과 관련하여 주신
강령적 가르치심 등에 대해 강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그에 응하였다.
청강자들은 숨소리를 죽여가며 열심히 듣고 받아쓰고 녹음하고 박수갈채까지
보냈다. 그들은 나의 강의에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화답하였다. 그들이 노트를 돌려 가면서 저마끔 무엇인가 쓰더니 헤어질 때 그것을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숙소에 와서 펼쳐보니 자신들의 소감을 적은 것이었다.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온 손선생님이 부럽습니다. 북에서 살았다는 얘기만으로도
가슴벅차고 설레는 만남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역사를 학습하고 있습니다. 독립투사들의 피로 되찾은 내 나라, 이 조국을 우리 대에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웃음속에서 이북을 알게 됐고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을
뵈온 것 같습니다. 그분을 따라 그 정신을 이어 투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가슴 벅차집니다.』
나는 그들의 진정을 읽으면서 생각하였다.
광풍이 몰아쳐도 태양은 빛나고 태양이 비치어 햇빛을 따르는 해바라기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햇발을 안고 남조선땅에 주체의 씨앗을 심고 가꾸었다. 대학가와 공단,
어촌과 농촌을 찾아 투쟁의 걸음과 걸음을 잇고 이었다.
* * *
나는 얼마전 모교가 보고 싶어 다시 김일성종합대학을
찾아갔다.
교문안으로 들어가는 대학생들과 함께 나도 학생이 된 마음으로
걸었다.
용남산언덕에 오르니 40여년전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피어올랐다. 우리
수령님께서 오르셨고 우리 장군님께서 「조선아 너를 빛내리」맹세를 다지신 성스러운 곳이다.
저기 보이는 저 키높은 전나무와 소나무가 우리 수령님께서 대학을 찾아주실 때
멀리서부터 푸르름을 설레이며 맞이하던 그 나무들이 아닐까. 저기 정원의자가 우리 장군님께서 앉으시어 학생들과 담화하시던 그 의자가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의 긍지와 존엄을 안고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그리며 투쟁한 것, 여기에 살아 승리할 수 있은 비결이 있었고 어머니당의 품에 돌아올 수 있은 힘의 원천이 있었다고…
불타는 용남산의 해돋이를 우러러 언제나 존엄높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의
본분을 다하리라!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2&wr_id=60779&sca=&sfl=wr_subject&stx=%BC%D5%BC%BA%B8%F0&sop=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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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한내 좌익들이 욱시글 거리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