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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98년 4월 10일 수요마음공부방
정전 제2 교의편 제 2장 사은 제1절 천지은 1
강연자 : 이제선 교우
지난주까지 일원상에 대해서 공부했다. 일원상은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본성(本性)이다. 우주만유의 본원은 우주만유의 근원이면서 실재이다. 우주만유는 천지만물(陽界) 허공법계(陰界)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사은(四恩)인데, 즉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이다. 원불교의 신앙은 우주만유를 믿는 것이다. 우주만유의 신앙은 원불교 신앙의 핵심이다.
천지 : 응용무념(應用無念)의 道(天地 8道) → 천지 8道가 운행하면서 나타나는 것(5德)
부모 : 무자력자(無資力者) 보호의 道 → 生, 育, 敎
동포 : 자리이타(自利利他)의 道 → 상생상화(相生相和), 상부상조(相扶相助)
법률 : 불의(不義)를 제거하고 정의(正義)를 세우는 道
사람들은 사은(四恩)을 따로 생각한다. 어떤 것도 사은이 분리된 것이 없다. 내가 머리를 자른 것만 봐도 사은이 똘똘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 엮어져서 된 것이다. 나도, 이발사도 전부 부모님이 계셔서 태어났고, 천지가 있어서 숨을 쉬고 있으며, 동포가 있으므로 이발사는 이발도구를 사용할 수 있고 이발교육을 받아서 사람들 머리를 잘라 줄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은 사은(四恩) 즉 처처불상(處處佛像)이다. 곳곳이 다 위력이 있는 존재이다. 독사에게 물렸어도, 밥을 먹고 체했어도 그것은 은혜이다. 사은에서 덕(德)은 은혜(恩惠)이다.
은혜는 절대적 은혜와 상대적 은혜가 있다.
* 상대적 은혜(相對的 恩惠) : 조건적, 인간적, 유한적, 부분적
* 절대적 은혜(絶對的 恩惠) : 전체적, 무한적, 무조건적
보통 사람들은 절대적 은혜는 감사하지 않는다. 절대적 은혜는 평등적이고 계속적이다. 사람들은 나만 받은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다. 그러나 절대적 은혜는 생존의 문제이다. 공기는 누구에게나 준다. 공기가 없어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고 공기를 마신다. 그래서 대은(大恩)은 무은(無恩)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쩌다 집에 와서 용돈을 주는 삼촌은 최고이고 용돈을 안주고 잔소리만 하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엄마는 미워한다. 중생들도 이와 똑같다. 한량없이 주는 은혜를 모른다. 너무나 큰 은혜이기 때문에 은혜인지 모른다. 하늘의 은혜, 땅의 은혜, 공기의 은혜, 풍운우로(風雲雨露)의 은혜, 불생불멸(不生不滅) 道의 은혜를 모른다. 이것은 나만 특별하게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은혜라고 생각 안한다. 하지만 천지의 은혜는 생존의 근원이다. 모든 은혜의 바탕이 된다. 대종사님은 먼저 천지의 이법(理法)을 깨달으셨다. 과거 성자는 인륜(人倫)을 내 놓으셨지만 대종사님은 천륜(天倫)을 내 놓으셨다. 대종사님은 어려서부터 천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셨다. 원불교의 의두문목에 보면 과학적인 의문들이 많이 있다. 원불교는 과학과 종교 부분에 많이 접근해 있다.
* 원불교 신앙의 특징
1. 원불교 신앙은 부분 신앙이 아니고 전체 신앙이다.
처처(處處)가 전체이고, 우주만유의 본원이 전체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여기에서 빠진 것이 없다. 다른 종교는 부분 신앙이 많다. 하느님만, 어떤 대상만, ~만...... 그러나 원불교는 전체 신앙이고 어떤 대상도 법신불 사은의 본원이 아님이 없다. 우주 만유가 어떤 것도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상생의 관계, 은혜의 관계이다. 대종사님도 노력해서 깨침을 얻으셨지만 사은님의 덕으로 깨침을 얻었다고 하셨다. 원불교 신앙에서 복을 구하는 대상은 사은을 제외하고는 구할 대상이 없다.
2. 원불교 신앙은 미신이 아니고 사실이다.
모두가 죄인이 아니고 부처님이다. 그래서 대종경에 나온 것처럼 불공을 불상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며느리에게도 하는 것이다. 즉 불상은 진리의 표상이고 며느리는 사실의 표상이다. 우리는 진리 신앙과 사실 신앙을 같이 한다. 우주 만유와 우주 만유의 본원을 같이 신앙하는 것이다. 우주 만유의 본원이 大이고 우주 만유가 小이다. 大와 小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과거 종교에서는 大와 小를 구분을 해서 신앙을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신앙의 대상을 의인화, 부분화, 상징화, 신비화, 장엄화해야 편하기 때문이다.
3. 원불교 신앙은 형식 신앙이 아니라 진리 신앙이다.
교당도 크게 장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의인화를 하면 겁나게 좋아한다. 그래서 종교에서도 신앙의 대상을 의인화 즉 인격화했다. 또한 大와 小를 구분해야 사람들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고 대중들에게 잘 파고들었다. 과거 종교에서 大小를 구분하고 의인화, 부분화, 상징화, 신비화, 장엄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지가 어두웠기 때문에 방편(方便)으로써 사용했던 것이다. 대종사님은 앞으로는 시대가 진급기가 되고 밝게 빛나는 개벽 세상이 되므로 과거처럼 의인화, 부분화, 상징화, 신비화, 장엄화는 미래에는 아니라고 하셨다. 종교를 혁신하신 것이다. 과거에는 수직적이었다. 天은 위고 地는 아래고, 남자는 위고 여자는 아래고, 士는 위고 農工商은 아래고, 立法은 위고 治法은 아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차별 시대가 아니고 평등시대가 되었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사은이 평등으로 하나이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개벽시대에 맞게 수직과 수평을 아울렀다.
천지의 특징은 천지는 사은의 가장 바탕이다.
天 |
父母, 同胞 |
地 |
인간적으로 가장 느끼기 쉬운 것은 부모은이다. 과거에는 천지를 무정물로 바라봤다. 그래서 도전, 극복, 탐험의 대상이었다. 대종사님은 ‘천지에 식(識)이 있다. 천지는 내 생존의 근원이고 나에게 죄복을 줄 수 있는 권능이 있으면서 부처님의 위력이 있는 대상이다. 불공을 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하셨다. 원불교인이 평소에 조석으로 심고를 올리고 기도를 드릴 때 생활의 기본은 감사생활이다. 많은 피해를 주는 태풍도 감사하다. 태풍이 없으면 지구가 전부 죽는다. 산소는 아마존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많이 만들어진다. 태풍이 있어야 물이 썩지 않는다.
원불교는 신앙성이 약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원불교 교리의 총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전체 신앙보다 부분 신앙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분 신앙도 전체 신앙에 포함되어 있다. 욕심이나 삿된 것이 많으면 감사생활이 잘 안 된다. 마음이 차분해지거나 욕심이 없어야 참회가 되고 감사가 잘 된다. 마음에 욕심이 있거나 들떠 있으면 감사생활이 잘 안 된다. 신앙을 잘 하려고 해도 수행의 마음이 바탕이 안 되면 감사생활이 안 된다. 일원상 수행에서도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라는 말이 나온다. 신앙과 수행이 같이 돌아가야지 따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 하나하나 전부 위력이 있다. 함부로 할 대상이 없다. 천지, 엄마, 노동자, 금수초목, 법 등 전부 위력이 있다. 거기에 맞는 사사불공(事事佛供)을 해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은혜, 위력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내가 농부여서 거기에 맞는 사사불공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 은혜와 위력이 나오게 된다. 천지는 우리에게 응용무념(應用無念)으로 주지만 우리는 사(私)가 껴서 계산적으로 준다. 만약 천지의 도를 체받아서 똑같이 실행하면 천지와 합일(合一)되는 위력이 있다. 이것을 잘 하신 분이 부처님, 대종사님이다. 실시품 47장에서 팔산님이 ‘대종사님은 오직 공(公)뿐이시다.’라고 하셨다. 일원상은 지공무사(至公無私)이다. 천지도 지공무사이다. 대종사님은 마음에 私가 없이 오직 公뿐이셨다. 그래서 천지와 하나가 되셨고 천지같이 지공무사로 사셨고 천지의 위력을 얻으셔서 천지와 합일하셨다.
1. 천지 피은의 강령
우리가 천지에서 입은 은혜를 가장 쉽게 알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천지가 없어도 이 존재를 보전하여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볼 것이니, 그런다면 아무리 천치(天痴)요 하우자(下愚者)라도 천지 없어서는 살지 못할 것을 다 인증할 것이다.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계가 있다면 그 같이 큰 은혜가 또 어디 있으리요.
대범, 천지에는 도(道)와 덕(德)이 있으니, 우주의 대기(大機)가 자동적으로 운행하는 것은 천지의 도요, 그 도가 행함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는 천지의 덕이라, 천지의 도는 지극히 밝은 것이며, 지극히 정성한 것이며, 지극히 공정한 것이며, 순리 자연한 것이며, 광대 무량한 것이며, 영원 불멸한 것이며, 길흉이 없는 것이며, 응용에 무념(無念)한 것이니, 만물은 이 대도가 유행되어 대덕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 생명을 지속하며 그 형각(形殼)을 보존하나니라.
천지의 道 : 大자리 , 천지의 德 : 小자리
德은 道에서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道는 생각하지 않고 德만 생각한다. 천지에는 8가지 道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응용무념의 道이다. 그래서 응용무념으로 지극히 밝고, 응용무념으로 지극히 정성하고, 응용무념으로 지극히 공정하며, 응용무념으로 지극히 순리 자연한 것이다. 천지의 도를 체받아서 응용무념으로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 은혜이다. 이법을 따르는 것, 이법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우주를 지리산에 비유하면 지구는 머리카락 한 가닥에 해당될 정도로 우주는 광대무량하다.
2. 천지 피은의 조목
(1) 하늘의 공기가 있으므로 우리가 호흡을 통하고 살게 됨이요,
(2) 땅의 바탕이 있으므로 우리가 형체를 의지하고 살게 됨이요,
(3) 일월의 밝음이 있으므로 우리가 삼라 만상을 분별하여 알게 됨이요,
(4) 풍·운·우·로(風雲雨露)의 혜택이 있으므로 만물이 장양(長養)되어 그 산물로써 우리가 살게 됨이요,
(5) 천지는 생멸이 없으므로 만물이 그 도를 따라 무한한 수(壽)를 얻게 됨이니라.
5德은 천지 8道를 행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5가지 은혜를 말한다.
道 德
하늘의 공기가 있으므로 우리가 호흡을 통하고 살게 됨이요
땅의 바탕이 있으므로 우리가 형체를 의지하고 살게 됨이요
일월의 밝음이 있으므로 우리가 삼라만상을 분별하여 알게 됨이요
풍운우로의 혜택이 있으므로 만물이 자양되어 그 산물로써 우리가 살게 됨이요
천지는 생멸이 없으므로 만물이 그 도를 따라 무한한 수(壽)를 얻게 됨이니라.
3. 천지 보은의 강령
사람이 천지의 은혜를 갚기로 하면 먼저 마땅히 그 道를 체받아서 실행할 것이니라.
道를 체받아라는 것은 천지 8道를 체받아라는 것이고 체받아서 천지 보은의 조목을 실행하라는 말이다. 道의 핵심은 응용무념이다. 우리는 천지로부터 대시주(大施主)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응용무념으로 무념보시(無念布施)하라는 말이다. 천지 보은의 강령은 먼저 천지 피은의 道를 체받는 것이다. 천지 피은의 핵심은 우리가 은혜를 느끼고 알아서 실행하는 것이고 실행의 마음은 무념으로 베푸는 것이다.
내가 모자에다가 본인들의 귀중한 물건이나 돈을 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마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가 천지 피은의 도를 체받아서 보은하려면 실제로 해봐야한다. 원불교는 다른 종교보다 보은을 안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제대로 신앙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고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 배은에 보면 ‘천지에 대한 피은, 보은, 배은을 알지 못하는 것과 설사 안다 할지라도 보은의 실행이 없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신앙문의 핵심은 인과(因果)이다. 내가 보은을 하면 보은의 결과가 오게 되어 있다. 보은은 안하면서 복을 구하는 것은 인과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과에 바탕한 공정하고 정당한 대가를 바래야한다. 인(因)을 잘 해놓으면 과(果)는 좋게 마련이다. 앞에서 말한 道가 因이고 德은 果이다.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천지같이 무념보시가 안 된다. 일원상 진리에 보면 ‘나’라는 것은 없다. 나는 없으면서 있기 때문에 무념보시를 할 수 있다. ‘나’라는 없으면서 있는 것이 한량없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욕심만 가득차서 은혜를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만 하고 나만 더 특별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허덕거리고 가난하고 요구만 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징징대기만 한다. 이것이 범부들의 세계이다. 부분적으로 진·강급, 원망, 손해, 억울함도 있지만 크게 놓고 보면 천지의 한량없는 은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감사해야하고 역량이 부족해서 보은하지 못하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은의 공물(公物)로서 나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원불교인의 제대로 된 신앙이다. 그리고 만나는 대상이 전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 미물 곤충, 물, 공기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대중목욕탕에서 물을 함부로 쓴다. ‘나’와 공(公)을 분리시켜서 보기 때문이다. 인과로 보면 나중에 물 귀한 곳에 태어난다. 원불교 일원상 신앙은 ‘나’와 공(公)이 둘이 아니다. 이것이 지공무사(至公無私)이다. 내가 비워질 때 비운만큼 보이게 된다. 은혜도 보이고 세상도 보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보이게 된다. 나를 비우면 내가 커진다. 그리고 내가 은혜로워진다.
* 질문 : 천지 8道에서 정성(精誠)에 대한 의미
* 답변 :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을 한 것이다. 정성(精誠)에서 성(誠)은 간단(間斷)이 없는 것이다. 사이와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태양이 피곤하다고 오늘은 늦게 뜨겠다고 한 적이 있냐? 그런 적이 없다. 태양은 간단이 없다. 이것을 정성스럽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우리도 이처럼 정성스러운 道를 배워야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정성스러움이 끊어질 때 쾌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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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조교우님 감사합니다^^
우와~감사합니다^^
우와......역시 성조교우님....대단!
감사합니다^-^
고마운 마음 가득이네!~~!~~
잘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