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피싱은 타인이 우리를 속이는 유혹적 기만행위 입니다. 그런데 자기 기만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자기 파괴적인 기만 행위입니다.
자기 기만은 왜 일어날까요?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제 3부 제4장)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우호적인 판단이 내려질 그러한 사정들로 부터 의식적으로 우리의 시각을 전환하여 벗어나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에서는 자기자신의 신체를 수술할 때 손의 떨림이 없는 외과 의사를 대담한 의사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행동의 흉함을 스스로 보는 것을 감춰주는 신비스런 자기 기만의 가면을 벗는데 주저 함이 없는 사람도 그만큼 대담한 사람이다.”
아담 스미스는 또 같은 책에서 자기기만의 폐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의 치명적 약점인 이러한 자기기만은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무질서가운데 그 절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럿거스대학교 인류학과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교수는 자기기만이 발생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안에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이 있다면, 의식적인 마음이 모르도록 현실을 애써 담아 두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진실된 정보는 무의식 마음에 저장되고 거짓이 의식적인 마음에 저장된다. 같은 사건을 접해도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보를 선택해 기억한다.”
아무튼 자기기만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자기애(에고) 때문에 애써 자신(의 결점)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에 일어 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자기기만의 후유증은 인식의 사각지대를 형성하여 우리가 상황 판단을 할 때 현실감을 잃도록 만드는데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운전자가 차선을 바꿀 때 백 미러에 잡히지 않는 사각 지대의 위험성은 운전자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려 의식적노력으로 확인 하지 않으면 사고의 위험이 상존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기만의 피해도 각 개체와 집단이 의식적인 노력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기 기만은 그 피해가 오직 개인에게 국한되지만 공인 즉 사회적 지도자의 자기기만과 정치 결사체인 정당의 자기 기만은 그 피해의 범위가 그지도자와 정당을 믿고 따르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기하급수적으로 확산전파 되기 때문에 사회적 위험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문제는 일소에 붙이고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국민 눈높이”와 “집단 지성”에 관한 자기기만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정 시대에 위험 인물을 전시민의 비밀투표로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Ostrakismos)가 있었습니다.
도편추방제와 관련하여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아테네 최고의 정직한 사람”이라 불렀던 당시 정치지도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에 관한 일화를 재조명 해 봅니다.
아리스티데스는 기원전 482년에 도편추방 당한 인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도편추방 투표가 진행되고 있을 때 아테네 시민인 한 문맹인이 아리스티데스에게 다가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채 그에게 도움을 청한 대화가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보세요, 내 도편(도자기조각)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적어 주시겠소?” 아리스티데스가 답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오만, 그 사람에게 뭐가 불만인가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입니까?”
“글쎄, 아니오. 아예 모르는 사람이오.” 그 문맹인이 말했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이 온통 “정의로운 아리스티데스”라고 칭송하는걸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나서 말이오.” 그 말을 들은 아리스티데스는 자신의 이름을 도편(도자기조각)에 적었고, 그 남자는 그것을 항아리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국민이 지도자와 그 가족에게 내리는 평가는 다분이 주관적이며 포괄적인 인식의 영역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험한 인물을 솎아 내어 추방하는 투표에서 비록 정직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짜증나게 하는 지도자”가 뽑혔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눈높이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심리하는 실정법조문의 법률적인 기준보다 활씬 더 현실적입니다.
공인으로서 자신과 가족의 사생활을 포함하며 높은 수준의 처신과 품격을 지킬 수 있는 단호한 지성과 의지가 없으면 그런 사람은 차라리 공직을 담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권좌에 있는 지도자나 앞으로 권좌에 오르려고 도전하는 잠룡들과 그 가족들은 국민 눈높이에 대해서 예민한 성찰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직후보자 또는 그 가족으로서 누리는 특권보다 감수해야 할 의무와 희생 그리고 불편을 감당할 태세가 되여 있다면 그런 공직후보자는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보통사람의 의식수준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일을 이현령 비현령의 법조문에 입각하여 당국이 면죄부를 발행하더라도 국민의 인식체계에 남아 있는 잔상효과까지 지울 수 없다는 점을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공직자와 그 가족의 일탈행위에 대해 보속(補贖)이 없는 요식적 면죄부 발행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은 “집단 사고”를 “집단지성”으로 왜곡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하고 국민여론을 오도 하고 있습니다.
집단지성(Group Genius)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여러 사람이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면 탁월한 한 사람이 내린 그것보다 못하지 않은 결정을 내릴 뿐더러, 대체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정치학 입문(Politics)”에서 통찰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집단지성(Group Genius)의 발휘조건은 “강점이 다른 여러사람이 한곳에 모여야 하고”, 그런 다음 “그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번 더불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을 선출할 때 초반에 선두를 달리던 정봉주후보를 탈락시키고 이언주후보를 최고 위원에 최종적으로 선출한 경우를 두고 더불어 민주당 사람들은 “집단지성”의 귀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집단 지성의 요건은 형식적으로 충족하고 있습니다만 정봉주 후보가 최고위원 선출에서 탈락한 사건의 경위는 순수한 “집단지성(Group Genius)”의 발로가 아니고 집단사고(Group Think)에서 파생된 이심전심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주장은 아래에 전개한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제니스(Irving Lester Janis,1918-1990)가 통찰한 집단 사고의(groupthink) 여덟 가지징후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누구도 우리를 반박할 수 없다는 환상: 극단적인 위험을 감수하게 만드는 지나친 낙관주의.
2. 집단적합리화: 집단 구성원들은 경고를 불신하고 자신들이 세운 가설을 재고하지 않는다.
3. 고유의 도덕성에 관한 믿음: 집단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대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믿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결정에 따르는 윤리적 혹은 도의적 결과를 무시한다.
4. 외집단에 대한 정형화된 관념: ‘적’에 대해서 부정적인 관념을 갖고 있으면 갈등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게 된다.
5. 반대자들에 대한 직접적 압박: 집단 구성원들은 집단의 입장에 반하는 주장을 펼쳐서는 안된다는 압박을 받는다.
6. 자기검열: 집단이 합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항에 대한 의심과 일탈이 있어도 절대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7. 만장 일치에 대한 환상: 다수의 견해와 판단을 만장일치라고 여긴다.
8. 집단의 보호자라는 환상: 집단 구성원들은 집단의 결속, 집단의 견해 (그리고, 또는) 집단의 결정에 상충하거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정보로부터 집단과 집단의 리더를 보호한다.
위 여덟가지 징후는 내집단의 결속을 위해서 대체로 집단적 순응과 잡단적 동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회의적인 내집단 구성원은 집단의 결속과 정체성을 저해하지 않기 위해 대체로 침묵을 지키게 됩니다. 집단결속의 분위기 때문에 침묵은 곧 만장일치로 둔갑하여 집단 광기와 집단 착각에 흡수 되여 집단의 정체성은 더욱 한쪽으로 치우쳐서 강고하게 되는 연쇄적인 과정을 밟게 됩니다.
위 어빙제니스의 집단 사고(groupthink)의 징후 5항, 7항 그리고 8항에 비추어 정봉주 후보가 탈락하고 이언주 후보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경우를 집단사고의 귀결로 필자는 조심스럽게 판단합니다.
이빙제니스(Irving Janis)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피처 지역의 사례에 착안하여 잡단사고 이론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어빙제니스의 잡단 사고 연구의 동기가 된 미국 오클라호마 주 피처 지역의 사례의 자처지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50년, 작은 광산촌 주민들에게 지역의 한 광산 기술자가 경고를 했다. 사고 때문에 사실상 마을 지반이 잠식되었고, 마을이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꺼질지 모르니 산속으로 대피하라고 말이다. 다음날 라이온스 클럽 모임에서 마을 지도자들은 이경고를 농담거리로 삼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낙하산을 짊어지고 당도하자 그들은 웃고 또 웃었다. 그들의 경쾌한 태도에 함축된 “여기선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메시지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서글프게 반박되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몇몇과 그 가족들이 함몰된 지반에 빠져 죽었으니 말이다.
지난번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대표의 독보적인 카리스마가 입증되었습니다. 당내에서 출세하기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이대표에게 순종하고, 지지하고, 협조를 잘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전당대회 투표결과 입증되었습니다.
블레이즈 파스칼(Blaize Pascal)은 “양심에 따라 악을 행할 때만큼 완전하고 기쁘게 악을 행할 때 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파스칼의 통찰에 가장 적합 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집단사고가 일으키는 광기에 이성을 잃은 양심이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완전하고 기쁘게 행하는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이 세상은 무질서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게 뻔합니다. 집단지성과 집단사고의 예민한 차이를 분별하고 집단속에서 비록 소수의견이지만 개체의 목소리를 보호하고 경청 한다면 결국 집단 지성이 대세를 이루어 집단사고의 비극적 발아를 어느정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애매하고 불분명 하듯이 집단지성과 집단사고 내지 집단 광기 간의 차이와 경계선도 선명하지 않고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튼 집단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조직내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주장과 권리도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직내 다양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룰 때 건전한 집단지성의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자기기만과 집단 착각에 빠진 여야 정치지도자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합니다.
긴 글의 결론으로 노자의 도덕경을 재조명 해 봅니다.
노자 도덕경 3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식이 많지만 자기를 아는 이는 깨달은 사람이다.
이글을 쓰는데 아래책을 참고하고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입문(스와슨과 코빈 지음 김영균 옮김,서광사)
◎도덕 감정론(애덤스미스 지음,김광수 옮김,한길사)
◎집단착각(Collective Illusions, 토드로즈 지음 노정태 옮김, 21세기 북스)
◎세종의 적솔력(박현모 지음,흐름 출판)
◎사랑받기보다 차라리 두려운 존재가 되라(이남훈 지음,더스퀘어)
◎자기기만, 은혜의 옷을 입다 (그렉 엘쇼프지음, 오현미 옮김,복 있는 사람)
“끝”